"모든 것을 이기는 완전복음, 예수는 그리스도"
(마 12:28-37)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28~37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준비할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배울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또한 바쁜 세상에서 쉼을 얻고 재충전할 시간이 절실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제쳐두고 지금 우리는 예배를 드린다. 왜냐면 복음을 듣는 예배의 자리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 왜 인생에서 복음을 듣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가
→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영원한 후회를 하지 않는 삶
세상 따라가기도 바쁘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왜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할 만큼 복음이 중요한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신앙생활 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산다. 오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하는 생각과 앞으로 어떤 직장을 선택 할 것인가 하는 생각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이번에 어떤 핸드폰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 생각과 이번에 어떤 집을 살 것인가 하는 고민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말하지 않아도 긴 시간의 삶을 결정하는 선택이 훨씬 중요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복음에 담긴 구원의 축복이 무엇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다 버리고라도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가장 긴 시간, 영원한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해선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전세를 얻어 사기 당한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런데 예배를 통해서 복음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영원한 후회를 한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인생을 살다보면,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후회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데 그 후회의 무게가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무거워진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후회가 커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영원한 후회를 하지 않는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
→ 인생의 가장 위대한 가치, 복음의 일을 하고 복음의 작품을 남기는 것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붙잡고 살아야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게 무엇인가? 위대한 화가 빈 센트 반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정신 질환에 시달렸고, 10년 이상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마흔도 못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작가 헤밍웨이는 4번의 결혼과 문란한 생활을 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헤밍웨이 생전, 직계 자손 다섯 명이 자살했다. 그런 운명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남긴 작품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작품이 지금까지도 이 시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았고, 돈을 얼마나 모았으며 인격이 어떠했고 하는 이런 것은 죽으면 다 사라진다. 오직 그 사람이 생전에 한 일, 남긴 것만 세상은 기억한다. 그 사람이 남긴 책 한 권, 그림 한 장이 후대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왜냐면 세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사를 하고 대대적으로 방을 정리했다. 정리의 핵심은 잘 버리는 것이다. 오랜만에 이사도 하고 해서 결단하고 버릴 게 무엇인지 정리하다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방에서 나온 종이의 대부분은 교회와 관련된 것이었다. 20여 년간의 교회생활에서 나온 무수한 자료들, 성도들의 이름이 적힌 자료들이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니 내 삶이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정리가 되었다. 내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복음을 만나고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내 방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시작했는데 마무리 지은 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인생의 후회가 많겠는가? 내가 인생을 가장 냉철하게 진단한 지점이 이 지점이었다. 아무리 재밌게 행복하게 자랑하며 살았어도 인정받으며 살았어도 그 사람이 한 일만 인생에 남는다.
예수님도 우리가 한 일만 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12:33 인생의 어떤 작품을 남기느냐로 삶을 진단하고 평가받는 것이다. 이것이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만 그 사람의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수많은 변명을 하지만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세상은 위대한 일을 남긴 사람들을 기억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일 때문에 불행해졌다. 세상은 그 사람이 한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억하지만, 그 사람 개인이 불행하다면 후회 수준이 아니라 허망한 수준인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허망한 열매가 아니다.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30 복음의 일을 하고 복음의 작품을 남긴 자는 이 땅에서도 백배의 열매를 얻고 내세에도 영원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위대한 가치는 복음의 일을 남기고 복음의 작품을 남기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어떤 복음의 작품을 남길 것인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살면 후회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의 즐거움이나 자기 자랑이나 비교의식, 시기, 질투에 얼마나 많은 인생을 투자하면서 사는가? 창 3장 이후로 인간은 영이 죽고 육신적 존재가 되었다. 영원한 존재인 인간이 육신 세계 속에서 유한한 존재가 된 것이다. 한 때 쓰이고 없어지는 소모품 같이 되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위대한 일을 해도 자신을 쥐어짜서 다 소모시키는 소모품 같은 인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작품을 남기는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삶이 좋아야 올바른 열매도 있다. 복음 안에 후회 없는 완전한 축복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신다.
* 인생의 완전한 열매를 맺는 시작은 무엇인가
→ 올바른 영적전쟁 완전한 열매를 맺는 축복이 어디에서 시작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영적 전쟁으로 시작해야 완전한 축복을 받는다. 복음의 축복, 완전해지는 길이 영적싸움에 있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열매 맺는 길을 언급했는데 왜 전 세계 교회가 쪼그라들고 성도 개개인이 후회 속에 살아가는가? 바로 영적싸움에 무지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복음이 무엇인가? 올바른 영적 전쟁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육신세계, 소모품 인생에서 영적 세계 속에 들어가야 열매를 맺고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
전쟁의 핵심은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싸워야할 대상이 불분명하면 그 전쟁은 얻을 게 없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나의 인생 전체를 강탈하는 강한 자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12:29 한마디로 사탄은 일평생 나를 속이며 무너트리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내 삶을 영적으로 보는 눈이 없기에 무너진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영적인 언어를 잃어버리고 육신의 소리를 내면 용서받지 못한다.
→인생의 열매 없는 결과 인생의 열매 없는 결과가 육신의 말만 하는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열매 없는 삶의 결과가, 끊임없이 육신의 말만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는 말은 무익하다. 문제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원인도 모르고 해결도 못하는 말만 하는 것,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는 것이 무익한 것이다.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아도 육신 생각이 가득한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키는 언약의 말씀이 무엇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잃어버리면 정녕 죽는다는 말씀이다.
창 3장,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사탄이 출현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지식을 가지고 사탄을 만나야 하는데 ‘죽을까 하노라’는 생각으로 만난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사탄을 만났으면 사탄의 정체를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런데 영적 지식이 희미할 때 사건을 만나자 그 상황에 끌려 들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속는 인생을 살게 되자 무익한 언어만 내뱉게 되었다. 아담은 원망, 불평, 핑계, 책임전가 하는 말을 했다. 이런 무익한 언어가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 사탄에게 속고 있는 상태다.
→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마귀의 의도 마귀 의도가 분명한 스토리텔링은 안보는 게 났다. 일단 보면 빨려 들어간다. 사탄의 의도가 분명한 말을 듣거나 말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그 사람이 이상해서 그러든지, 모르고 그러든지, 실수로 그러든지, 일부러 그러든지 사람 속에는 항상 마귀의 의도가 있다.
하나님은 마귀를 향해 ‘네가 이렇게 하였다’는 분명한 실패의 원인을 정확하게 집어내신다. 이것을 집어내야 하나님이 주신 해답 창3:15의 언약이 위력이 있다. 마귀의 의도를 모르면 실컷 영적싸움 하고도 딴 소리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마귀의 스토리는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머리를 깨트리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창3:15을 성취하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한다.
창3:15의 주인공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는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대속물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그래서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끝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무엇을 이루셨는가? 인간이 사탄에게 속은 인생에 대한 대가를 다 담당하고 짊어지고 끝내신 것이다. 이제는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바로 죄 사하는 권세를 주시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이다.
창 3장의 실수로 인해서 인간에게 더 큰 축복, 더 큰 권세가 임하게 되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16:20
복음이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롬16:25 영세 전에 감추어졌던 복음이, 사탄을 속히 발아래 상하게 하시는 창3:15인 것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태초부터 창3:15, 그리스도로 완전케 하는 축복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살아오면서 사탄의 공격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던 것이다. 속고 엉망으로 살라는 축복이 아니고, 문제를 축복의 발판으로 만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축복을 빼앗아 가고 우리를 무너트리는 마귀의 전략을 알고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 성령을 모독하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는 말과 생각 속에 있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성령의 역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한 사람은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정죄의 생각이나 언어에 걸려들면 안 된다.
인간은 결정적 순간에 어떻게 무너지는가?
사람은 자신이 치명적인 잘못을 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느낄 때 무너진다. 가룟 유다가 그렇게 무너진 것이다. 가룟 유다를 무너트린 것은 결정적 잘못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책감으로 인해 영원한 후회를 한 탓이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마13:2 가룟 유다는 마귀의 충동질로 인해 살았던 것이다. 자신이 치명적인 잘못을 했으면 마귀의 머리를 밟아야 하는데 스스로를 자책하고 후회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멋있는 인생을 시작했던 사울왕은 결국 죄의식 속에서 칼에 찔려 자살했다. 마귀 전략은 과거의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맞는 말로 정죄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들면 완전히 무너진다.
훌륭하게 산 사람은 괜찮은가?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하나님도 욥을 인정했다. 그런 욥을 마귀는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1:11 아직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그런 짓을 할 놈이라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도 있다. 마귀는 우리를 무너트릴 궁리만 하고 있다. 결국 의롭게 산 욥도 사탄의 공격으로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마귀의 전략을 이기려면 무조건 해방시켜야 한다. 이 시점부터 완전 복음 갖고 싶으면 모든 과거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해방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현재를 누릴 수 있다.
→ 하나님의 새로운 시발점, 영적인 눈을 뜰 때 하나님의 계획은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영적인 눈을 뜨는 순간이 하나님의 새로운 시발점인 것이다. 바울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죽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어둠을 보는 영적인 눈을 뜰 때부터였다. 의로운 욥도 마귀가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욥이 어떻게 이겼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한 것이다. 오랜 몸부림 속에서 얻은 주옥같은 깨달음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회개할 일은 이것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다. 욥의 똑똑한 친구들의 칼날 같은 정죄, 다 필요 없다. 욥은 자신이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한 것이다.
평생 예배 중독자처럼 신앙생활 열심히 한 우물가 여인이 어떻게 무너졌는가? 그는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불행하고 문란한 삶을 살았다. 그런 우물가 여인의 인생에 전환점이 언제 왔는가? 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할 때부터였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오랜 세월동안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건, 영적인 지식을 얻으라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영적인 지식, 내 인생을 무너트리는 사탄의 전략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4:26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는 그 때가 인생의 진정한 전환점인 것이다. 이것을 발견했다면 현재 상황 속에서 흑암을 꺾어야 한다. 이 계획을 발견한 사람에게 열매가 열리기 시작된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3:8
마귀 일을 멸하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다.
마귀 일을 멸하는 창3:15의 권세를 믿고 권세를 고백해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이렇게 계속 하면 이제까지 육신의 말과 상황으로 우리를 혼미케 했던 마귀가 떠나가기 시작한다.
우리를 완전히 덮고 있던 흑암이 떠나가야 우리 자신을 끌고 온 강한 자를 보게 된다. 강한 자가 있다는 말씀을 믿고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면 강한 자를 느끼게 된다. 아무리 몸부림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운명의 굴레가 내 가족과 가문의 저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막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최선을 다해서 믿었던 또 한 사람이 있다. 군대장관 고넬료는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믿고 최선을 다하는 전문성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향하여 베드로가 어떠한 메시지를 던졌는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너는 지금 마귀에게 눌려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영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늘 육신적 반응 하다가 무너진다.
그리스도를 가지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왜 어두워지는가? 흑암으로 덮인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반응하기에 어둠이 사람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이다. 마귀가 올무를 만들어 놓고 걸려들게 하는 전략이 반응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3:7
마귀가 올무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외부의 공격에 의해서 어두워질 때가 많다. 이런 우리 자신을 끌고 왔던 옛 사람의 강한 자가 깨지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다.
→ 미래가 열리는 길 밀려오는 흑암의 권세가 꺾이고 풀려져야 미래가 열린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강한 자로부터 해방 받아야 어려운 상황과 문제를 헤쳐 나갈 길을 알게 된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미래를 향해서 전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어떻게 미래를 행해 살아갈 것인가? 더 이상 과거처럼 마귀에게 끌려가지 않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와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찾아야 될 미래의 길이다.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고전12:2
우상이 끄는 대로 살았으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반응하면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고 행1:8, 성령 충만과 권능을 가지게 된다.
그 미래를 향해 가면 마28:18~20, 생명 공동체, 복음 공동체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끝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우리 몸 안에서 움직여야 분별력이 생긴다.
성령은 어느 정도 위대한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더 이상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은 자들에게는 영적인 분별력이 온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우리 속에 있는 강한 자의 영향을 안 받아야 정확한 분별력이 온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성령에 이끌리는 자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영적인 자는 자신과 모든 것을 판단하는 분별력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 분별력이 무엇인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은 ‘살려주는 영’이신 것이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어떻게 영을 분별하는가? 살리는 영이 그리스도 영이다. 이 영으로 충만해져야 우리를 죽이려는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죽이는 언어에 더 이상 속지 않고 분노를 쌓아 두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의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육신적으로 몸부림치면서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운 영들이 꺾여야 변화가 시작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어떤 것인가? 환경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운명적인 것이다. 운명은 죄로부터 오는 저주의 삶이다. 이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같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죄의식을 갖는다고 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자꾸 부르면 우리의 생각이 영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내 안의 변화가 있다면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나에 대한 사탄의 공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지 않을 때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상황을 바꿔보려고 몸부림 쳤지만 돌아온 결과는 늘 같았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진리인 그리스도를 알면 모든 환경과 상황으로 부터 자유케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마귀로 부터 공격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하지 않고 마귀 머리를 꺾는다.
→ 사탄의 궤계를 무너트리는 싸움 사탄의 궤계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탄의 대가리에서 나온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을 밟아야 사탄의 궤계가 무너진다. 모든 견고한 진을 무너트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이 무엇인가? 바로 영혼에 하나님이 없다는 가정 하에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다. 영적 세계를 잃어버리고 선악과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다. 이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켜야 한다. 인생 전체에 걸쳐서 어떻게 하면 나를 무너트릴 것인가만 연구하는 마귀의 조직이 있다는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나는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마귀가 나만 연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상황, 정말 싫어하는 말, 정말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마귀는 정말 싫어하는 상황에서 정말 싫어하는 말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하게 만든다. 진화론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환상의 조합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것을 다 이겨야 한다. 더 나아가서 복음의 작품을 남기려면 허비하게 만드는 삶을 버려야 한다. 자신과 환경과 사탄의 궤계를 이겨야 하나님의 일을 남길 수 있다.
*오늘 예배의 축복 속에 있다면 복음의 승리자다
→ 오늘의 축복 속에 있는 완전복음 어떤 삶을 살았든지 지금 예배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까지 승리한 증거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자.
이제까지 자신을 살리고 여기까지 이끌어 온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상한 인생을 반복적으로 살았고, 더러는 무능한 놈이라는 말도 들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았어도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가장 축복된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오신 것이다. 이상하고 무능한 삶을 반복적으로 살았으면서도 조금씩 진보되어 여기까지 와서 앉아 있는 그 힘이 어디에 있는가? 끊임없이 마귀 전략에 넘어지고 무너져왔는데, 내가 어떻게 많은 성도들 앞에 서게 되었는가?
그 해답이 바로 오늘의 축복이다. 모든 것을 이기는 오늘의 축복 속에 들어가서 꾸역꾸역 여기 까지 온 것이다. 이것이 완전 복음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헛되이 만들어선 안 된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했다면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복음이다. 우리를 일으켜 끌고 온 것이 무엇인가? 아무리 이상하고 무가치한 인생을 살았어도 오늘 시작하면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게 복음이다.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고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거는 다 끝난 것이다.
은혜의 날이 지금이라는 것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이 되어야 복음이라는 것이다.
→ 오늘 해야 할 일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랑과 공의를 가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심으면 반드시 열매 맺는 게 하나님의 공의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영적인 것을 심어야 영원한 열매를 맺는다. 바로 영적싸움 하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열매인 것이다.마12:28
마귀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즉시 마음에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영적싸움이다.마12:28 이것을 할 때 앞으로 더욱더 진보되고 갱신될 것이다.
진보하고 갱신하는 미래를 향해 가야 한다. 그런 미래가 어떻게 보장되는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시작하면 열매가 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 진정한 행복의 근원, 임마누엘 복음 안에 살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행복의 내용이 뭔지 묻고 싶다. 그리스도 안에 살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참 좋은 것이 많다. 꿈꾸고 그림 그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일단, 뒷마당 있는 아름다운 양옥집 한 채 짓고, 내 말 안 듣는 사람들이 내 말 잘 듣고…, 등등.
나도 예수사랑교회 목사로 가면 이런 목사로 갔으면 참 좋겠다하는 것들이 있었다. 내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에 드는 충성된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할수록 껄끄러운 사람이 많아졌다. 내가 그리던 그림이 아니었다. 꿈꾸는 행복한 전도자의 삶이 있는데 자꾸 반대로 가는 것 같고 내가 원하는 삶은 안 올 것 같았다. 그러면 사람이 자신의 성을 쌓고 싶은 동기가 발동된다.
나는 현장에서 아니면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는 사람들을 봤다. 또한 성공한 목회자들도 봤다.
그들은 결코 좋은 열매를 맺고 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수지만 멋있게 사는 사람들도 만나봤다.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한 가지가 있었는데 원죄적 고독임을 알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상황과 환경이 조금만 삐끗하면 급격히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놓았는데 질병 하나에 삶이 무너진다. 자녀가 속 썩여도 삶이 어두워진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근원 없는 행복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내가 복음을 따라가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 때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내가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될까?’ 행복한 전도자를 보면서, 강단 메시지를 들으면서 제 목표가 한 가지가 되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임마누엘의 축복이고 그것이 내 행복의 근원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으로 행복해야 한다. 임마누엘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고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 목표이다. ‘임마누엘에서 나온 작품’이란 말이,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다’는 말이다. 임마누엘에서 나오지 않는 작품을 남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은 소모품으로 살다가 불행하고 쓸쓸한 인생으로 마감한다.
→ 성령충만 위한 마음의 성실함 임마누엘에서 나오는 복음의 작품을 남기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일을 남기고 싶으면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78:72
다윗이 작품을 남기고 고백한 것이다. 마음의 성실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진단하셨는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
이제까지 살면서 선한 것을 쌓은 성실함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작품을 남기고 싶으면 마음에 선을 쌓는 성실함이 있어야 한다.
성실함의 초점을 행위나 삶에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성실함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세상의 성공자와 비교하면 부끄러운 점도 많고 게으르고 부족하고 열등감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열매 맺는 길은 마음에 선을 쌓는 것, 즉 성령 충만을 쌓는 성실함이 있으면 열매 맺는다는 것이다.
→ 성령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기도 회복 내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할 것도 많고 부끄러운 일도 많고 정죄 당할 일도 너무나 많다. 그런데 분명히 내가 믿는 예수님은 다 끝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죄감 속에서 반성할 일이 뭐가 있는가?
반성할 일 없다. 다 끝내셨다. 그런데 우리에게 딱 한 가지 요구하는 게 회개하라는 것이다. 복음을 가지고 나를 돌아봤더니 의외로 회개할 것이 없었다.
얼핏 보면 다 회개할 일이고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어야 하는데 깊이 생각하면 회개할 게 없다.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내 삶은 왜 이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개하라는 말은 갱신하라는 말이다. 갱신할 부분은 기도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다 끝냈는데 누리지 못한 것, 흑암 안 꺾은 것을 회개해야 한다. 잘못했는가? 한 번 잘못해서 망하기도 한다. 누구는 다섯 번 잘못하고도 잘 산다. 한 가지 선택을 잘못해서 망한 것은 운명이지, 자기 잘못이 아니다. 그냥 당한 것이다. 성령인도 못 받아서 당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가지 않아서 당한 것이다. 이것 외에는 다 사하여 준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우리의 잘못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죄는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만 사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2 심지어 예수님을 모독해도 사해주시지만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사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 완전 복음으로 누리는 완전한 자유 우리 자신을 죽이는 어떠한 정죄, 죽이는 영을 거부하길 바란다. 자유해야 정상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수 있다. 엉망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눌려서는 마귀의 일을 밟을 수 없다. 마귀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참소해도 우리가 회개할 것은 기도뿐이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
우리의 고백으로 인생은 새로워진다. 인생 이상하게 살았다는 증거가, 입만 열면 더러운 말이 나오는 것이다. 완전 복음을 소유했다면 완전한 자유 속에서 능력을 누려야 한다.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걱정한다. “내가 너만 보면 진짜 가슴이 답답해진다. 진짜 너 생각하니까 너무 힘들다”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가까운 사람들이다. 사람 마음에 깊은 어둠을 집어넣고는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식을 사랑하는데 왜 그렇게 자식을 노엽게 하는가? “너 큰일 나, 나중에 밥도 못 먹어!”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왜? 남의 영혼에 어둠의 말을 집어넣고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가? 세상의 어떠한 정죄의 언어도 거부하길 바란다. 진짜 사랑하면 자유를 주고 힘을 준다. 진짜 사랑하면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미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해준다.
“예수는 그리스도, 너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 말만 하는 것이 완전 복음이다.
그 사람 영혼 속에 “네가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까 완전 자유하고 성령 충만 받으면 세계복음화 할 수 있다.”는 말을 넣어주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사랑이고 능력이다.
이것을 자신에게 말하고,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보든지 ‘그리스도’만 고백하는 완전 복음 가진 제자 되길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죽이는 전략 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완전 복음 예수는 그리스도를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 이름 하나를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문제를 끝내고 나 자신과 환경과 사탄을 이기는 영적 싸움 속에 임마누엘 축복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임마누엘의 축복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남기고 복음의 작품을 남기는 영원한 축복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리스도로 어떠한 상황이 오고 어떠한 이상한 삶을 살고 아무리 내가 행복하지 않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영으로 나를 살려내는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그 힘을 가지고 누구든지 사람을 살리는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간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영적 지식이 희미해져 육신의 세계 속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행복을 위해 살다 영원한 후회를 남기는 삶을 살지 않도록, 예배를 통해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사탄의 전략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이기는 완전 복음, ‘예수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 영적인 눈을 열어 싸움의 대상, 마귀를 분별하고 흑암을 꺾는 영적싸움을 시작하여, 나를 둘러싼 환경에 절대로 속지 않고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육신적 반응과 무익한 말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을 누리는 좋은 나무가 되어, 영원한 복음의 작품을 남기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