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길을 축복의 길로 바꿔주시는 여호와이레 하나님"
(창/创 22:1-14)
그리스도에 ‘오직’ 을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배경 속에 하나님 나라의 자녀 된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 그 이름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 만 번, 십만 번, 일천만 번이라도 불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을 받게 된다. 성령충만이 우리 몸에 오면 드디어 하나님의 힘을 가진 자로서 기도가 시작된다. 나는 여기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에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는다’ 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예수 사랑 모든 가족은 영적 전쟁하는 믿음의 군사가 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절대 헌신의 시험까지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우리의 신앙이 절대 헌신에까지 도달할 때, 인생은 새로워지고 이 땅의 모든 것은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유리벽 사이에 놓고 사랑한다 하지 말고, 창3:15 여자의 후손, 내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자, 그리스도 하나님과 일체감이 느껴지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의 뿌리를 내려놓은 아브라함을 깊이 들여다보고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해 절대 헌신에 이르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 헌신의 자리에 도달했을 때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한 몸이 되는 일체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절대 믿음을 소유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복으로 잘 뿌리내려져 자녀 세대에도 복의 근원의 축복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한 숙연한 질문들이 그의 역사 속에 많은 작품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인생의 수많은 길 속에 많은 사연과 고통, 흥분할 일도 많았다. 경악해야 할 상황에 3일간 침묵 속에 빠져보기도 했다. ‘지구 안에, 내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가 되었을까?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왜 선택을 받은 것일까? 이상한 나를 하나님은 왜 버리지 않고 말씀을 주시는 걸까? 왜 나를 모리아 산까지 오르게 하시고, 이 자리에 서게 하셨을까?’ 모든 유혹을 이겨야 모리아 산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모리아 산이 어디인가?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솔로몬 성전,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길을 가신 곳이다. 이 땅에 창3장의 유혹을 이기는 사람만이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십자가의 사랑을 잃어버려 무례한 자가 되고, 배은망덕한 자, 매력이 없는 자,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이상한 종교인이 된다. 정상에 이르는 그 믿음이 모리아 산, 번제단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신학자, 율법에 흠이 없던 바울은 갈2:20을 고백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그리스도와 일체감으로 사는 것이다. 나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할 지어다’
임마누엘, 이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결국은 이상한 상태로 살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정신 사납고 귀신들린 자처럼 이상한 자로 전락해버렸다. 임마누엘 속에서 영적인 축복이 나와야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무례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의 무례한 말투들이 얼마나 이상한가. 우리 예수사랑교회만이라도 무례함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임마누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자기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다. 자신에게는 좋은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무례한 자가 된다.
왜 자신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사는가? 창3:15과 내가 일체감을 갖지 못해서 뱀 머리를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본질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님을 믿는 그 일체감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멈추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내리치라고 할 때 멈추라고 하신다. 모리아 산에 올라 갈보리 산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느끼는 그 심령을 가지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신다. 내 심령 속에 새겨놓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모든 것을 멈추라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무한한,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3:15의 역사를 맡기시기 위해 언약을 주셨다. 역사를 바꾸는 놀라운 하나님의 드라마가 이제 나를 통해 펼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3:15의 역사를 바꾸는 이 드라마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하나님이 왜 이상한 나를 부르시고 갈보리산 십자가 앞에 세워놓으셨는가? 이 은혜를 예수 사랑 가족들이 가지면 가지는 만큼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행2:36 최고의 멋진 메시지 한 구절을 소개했다. “확실히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무너진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자,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말씀을 어설프게 알아들었던 초대교회는 AD 70년 경, 디도 장군으로 인해 다 무너져버렸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 내 인생 모든 문제 해결자,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에, 하나님에게 일체감을 가지고 절대적 사랑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꾸는 드라마틱한 현장 속에 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칼을 꺼냈을 때 “멈추라” 하셨다. 이제 바로 너 자신만을 위해 인생을 절대 살지 말라는 싸인이다. 우리 영혼 속에 “예수는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긍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가졌다면 정말 무례함이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지구상에 가장 멋있는 공동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그들은 무례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늘 취해있었고 흥분해있었고 웃음과 기쁨, 환희 속에 있었다. 그래서 네 이기심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진 사람은 참 미련한 사람이다.
마6:33 예수님이 우리에게 육성으로 남긴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놓았다면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전도제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모리아산의 축복을 받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 회복되는 행복한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창22:1의 ‘어느 날’ 이 왔다. 복의 근원으로 하나님이 이끌어주셨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헌신의 시험대, 모리아 산까지 끌고 가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진 그 갈보리가 바로 이삭을 번제로 드린 모리아 산이다. 창3:15의 하나님을 믿으면 구속사적인 놀라운 역사 속에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기도 하고 체험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본 자’ 라고 표현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창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이런 것을 걱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속에서도 창3:15 “뱀 머리를 밟으라”는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된다.
뱀 머리를 밟으라고 하면 억지로라도 그냥 밟으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이 말을 ‘이해가 안된다, 헷갈린다, 무슨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말한다. 모르겠다고 하지 말고 일단 마귀의 일을 멸하면 된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마귀의 일이 많은가. 무례하고, 배은망덕하고, 잔머리쓰고... 이런 수많은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는 순종만 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아브라함은 수많은 번뇌와 고뇌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모리아 산까지 드디어 올라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갈보리 산, 이 제단 위에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과 미래를 아브라함이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3:15을 주시고 우리가 밟는지, 밟지 않는지를 테스트하신다. 밟지 않으면 이스마엘처럼 되고 하갈처럼 된다. 아비멜렉처럼 되고 비골 장군처럼 되고 따라온 군대들과 같고 블레셋과 같이 된다. 뱀의 머리를 계속 깨뜨리면 자신과 세상 사탄을 보는 눈이 열린다. 그래서 ‘아, 내 몸에 와 있는 3저주를 멸하시려고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복음을 주셨구나.’ 하나님의 힘, 3중직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증인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렇게 독선적으로 사랑하시려고 하시는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네 사랑하는 네 아들, 독자 이삭이 우상이 되면 너의 생명이 끊어진다’ 는 것이다. 아무리 귀한 자녀, 남편, 아내, 물질이 있어도, 이런 것이 끼어드는 만큼 손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그 어떤 것이라도 끼어들면 끼어드는 만큼 고뇌와 번민 속에 살아야 한다. 부활의 영에 무엇인가 끼어들면 내 몸에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과 다른 것은 그 어떤 것도 섞일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것이다. “네 사랑하는 네 아들, 네 독자 이삭마저도 버리고 모리아 산 앞에 서라” 어떤 것도 집착하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의 제1계명이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는 것이다. 어떤 것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다른 신,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하신다. 우상 그 자체가 재앙, 저주, 죽음,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나와 무엇인가 중간 역할에서 뭔가 끼어들면 인간성이 망가진다. 그래서 무례함을 가지고 발악하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 교회의 분위기다. 창3:15 아브라함이 맛본 그리스도를 우리도 맛보고 체험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에 자신을 부인하는 기도를 각인시켰다. 언제나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기도는 틀린 것이다. 신앙도 틀리고 인간성도 망가진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깨달았다. 하나님 나라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일2:16이 우리 몸에 연결되어 있으면 하나님 나라와 연결이 되겠는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끼어들면 하나님과 관계가 가로막힌다. 더 이상 유리 방황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해야 한다. 하나님 우편에 서셔서 통치하시는 그분과 연결되어야 세상을 바꾸는 드라마 속에 멋진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자신과 영적싸움하는 기도가 각인되었던 아브라함은 드디어 불신자도 알아보는 자가 되었다. 창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렇게 자신과 사탄과 영적싸움을 하고 있으면 보좌의 영향력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이미지도 바꿔야 한다. 교회 올 때는 립스틱도 바꾸고 장롱 속에 있는 좋은 옷도 꺼내서 입는 것이다. 교회를 오는데도 시커먼 운동화를 구겨 신고 오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한다. 항상 행복한 자로 살아야 한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면, 일체감을 느끼면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시내 산의 눌림에서 벗어나 갈보리 산의 누림이 시작된 자들이다. 시내산에 머무는 것은 모아둔 것을 써보지도 못하는 것이고, 모리아 산은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것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 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면 안디옥 교회처럼 모델이 된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이렇게 영원한 응답이 연결된 존재다. 그래서 불신자가 우리를 보면 두려운 대상이 되고 동맹을 맺고 싶어하고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야 한다. 요19:30 다 이루시고, 이제는 세계 복음화, 땅 끝까지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것을 우리를 통해 시작하시기 위해 창3:15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셨다. 그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감람산 보좌의 배경이 펼쳐진 자들, 오순절 응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의 기준, 이기적인 생각들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누리지 못하고 죽는다.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아들을 칼로 찔러야 하는 일이 생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절대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3일 동안 본 것이 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발견했기 때문에 칼을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임마누엘 하나님을 누리지 못하면 교회 밖에서는 힘이 없고 교회 안에서만 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교회 밖에 나가면 아무 힘도 없고 커피 한 잔도 못 사 먹으면서 교회 안에서 얼마나 큰소리를 치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고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밖이든 어디서든 하나님의 힘이 임마누엘로 와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약점까지도 담당해주셔서 우리는 모든 문제가 끝난 자가 되었고, 교회 안에 오순절의 응답이 가득한데 우리가 숨길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성취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만 따라가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면 하나님을 본 자가 된다. 창3:15을 그대로 순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뒤꿈치를 물려도 ‘아야!’ 하지 않고, ‘네 머리는 깨졌다!’ 하면 하나님을 본 자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뒤꿈치를 물렸다고 새털 같은 문제 앞에서도 쟁쟁거린다. 돈이 없으면 3일만 굶어봐도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뱀 머리를 깨뜨린 만왕의 왕,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롬5:6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동반자~’ 라고 노래하면 된다.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가지면 된다. 창3:15, 마16:16이 내 몸에 일체감으로 와야 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쳐라”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순종하고 3일 동안 번뇌가 있었다. ‘하나님은 가까운 곳도 아닌 사흘 길을 가서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이 왜 이 말씀을 주셨을까? 왜 이렇게 강조하셨을까? 아, 창3:15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 날 위해 죽으시는구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 마누라를 속여 늘 연약한 상태로 징징거리며 살던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 내 힘으로는 이스마엘 아들 하나도 자기 몸으로 정리할 수 없었던 연약한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구나, 그 수많은 자신의 인생 여정 속에 연약함으로 살았던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과 묵상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진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원죄도 모르고 조상죄, 가문의 저주도 모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롬5:10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고 원수로 장악된 원수 덩어리, 하나님의 일은 하지 않고 이기적인 몸 하나만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 치는 나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구나. 아, 그리스도께서 이런 엄청난 사랑을 내게 베푸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던 것, 담으로 쳐졌던 것을 다 헐어버리고 1인칭 되게 하시는구나’ 일체감을 느끼게 하신다. 그래서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분이 나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기 위해 나를 두드리고 계신다. 계3:20 “내가 문밖에 서서 너희를 향해 매일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예수는 그리스도 하면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도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연약한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죄인 된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어주셨다. 이 사랑을 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이 시작되어 위대한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바로 갈보리 언덕을 향해 3일을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창3:15이 누구신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그 분,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바로 요8:56 내 앞에 서신 분이구나’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분명히 말씀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 종교는 아브라함이 이미 알고 있었던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른다. 모든 종교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신지를 모른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
히11:17, 18, 19절 이 세 구절 속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들어있다. 아브라함은 창3:15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라는 시험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아낌없이 드렸다. 왜 드렸는가? 창3:15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이 죽어도 하나님의 그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래서 언약을 따라 낳은 자녀는 반드시 죽어도 산다는 절대 언약이 있었다.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주를 통해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고 그의 아들 이삭도 언약으로 낳았기 때문에 죽어도 영원히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졌다. 잉태할 수 없는 몸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언약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갈등 없이 믿음에 결단했다. ‘주여,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만 다시 말해주세요’ 하지 않았다. 많은 변명도 할 수 있었지만, 한마디 변명을 하거나 밤새 시달리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비했다. 사라에게 찾아가 목놓아 울거나 상의하지 않았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문제가 왔다면, 침묵 속에 결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두 종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났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일러 주신 곳, 번제로 드라고 한 모리아 산에 가기 시작한다. 모리아 산에서 생나무를 잘라 번제로 쓸 장작으로 쓰면, 생나무라 타지도 않겠다는 그런 잔머리를 쓰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마른 장작을 쪼개어 십자가 지게에 그것을 이삭이 짊어지게 한다.
창22:4~5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115세가 된 아브라함이 망령들어 상속자 이삭에게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할까봐 모든 종들을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만 데리고 산에 올라간다. 아브라함의 종들을 ‘해골’ 이라는 골고다 언덕에 있게 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이”라고 한다. 이미 집착에서 벗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집착하든지 내려놓아야 한다.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내 독자”라고 하면 내려놓을 수가 없다.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 다시 돌아오겠다” 아브라함은 분명한 미래까지 보았다. 미래의 응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문제에만 갇혀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창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에게 지우게 한 지게가 바로 십자가다. 이삭이 지게를 짊어진 것처럼, 예수님이 모리아 산, 골고다 언덕을 그렇게 올라가셨다. 그리고 로마 군정들이 칼과 창과 불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듯이, 아브라함도 불과 칼을 불을 들고 올랐다.
창22:7~11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3:15을 가지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누리면 누리는 만큼 모든 축복을 받는다. 그분은 우리를 언제나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멈춰라”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집착하지 말고 “드라마틱한 나의 역사 속에서 너의 역사를 새롭게 바꾸도록 나의 일을 맡겨 줄 것이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가슴에 새겨놓게 되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그의 아들을 통해 이 은혜를 주셨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지구의 문제, 이 일을 나에게 맡기시려고 보잘것없고 연약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시려고 모리아 산 앞에 나를 이끌어오신 것이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동반자, 생애 최고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내 몸에 일체화 되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 왜 나에게 “네 사랑하는 네 아들 독자를 바치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번제 할 어린양,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둔 어린양, 예수그리스도를 말씀한 것을 아브라함은 깨달았다.
창3장,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이 원죄 때문에 끊임없이 무례함으로 발악하는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로잡아 짓밟아버리면 오늘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에게 맡겨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맡기신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사랑하는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맡기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갈보리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맡기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 순복해야 한다. 메시지만 난무하는 메시지 전쟁에서 아무 목사나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언약을 계승할 줄 아는 사람, 십자가 앞에 서는 사람, 십자가를 체험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과 행동으로 표현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한 번만 전환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요1:12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일체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다. 롬5:6, 8. 10절을 바울이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가 되었다. 연약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는 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만 열리면 된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것, 이삭이 사는 숫양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상이 우상이 되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을 뼈져리게 심어주었다. 나의 부인, 남편, 자식, 내가 가진 돈과 명예, 이런 것이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은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테스트를 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모든 방해거리를 철저히 차단하고 믿음을 회복하여 고후5:17로 자신을 세워야 한다. 날마다 새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로잡아 버릴 것을 잘 버리면 된다. 고후10:4~5 버릴 것을 반드시 사로잡아 내어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이렇게 하면 ‘예수님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예수님의 만남이었어.’ 고백이 나온다. 잘 살고 못사는 건 팔자가 아니다. 믿음, 영적싸움의 차이, 하나님을 절대 믿는 믿음에 달려있다.
창22장,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미리 갖춰갔다. 나무가 없다, 장작에 불을 붙일 수가 없다 이런 변명, 핑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그런데 종교인들을 보면 준비성이 너무 떨어진다.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신앙으로 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을 정말 버려야 한다.
*하갈, 이스마엘, 아비멜렉, 블레셋 모든 것을 다 허락한 다음에 하나님의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를 다 끝내주셨기 때문이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테스트는 축복보다 먼저 찾아오는 안내자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를 체험해보라는 몽학선생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여러 시험거리를 그리스도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1: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름만 부르면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세계복음화” 하나님의 역사를 내게 맡기셨기 때문에 웃으면서 고백하면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같은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신앙이 될 때 “너는 번성하리라”는 축복이 이어진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그 축복이 아들 이삭과 자손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전무후무한 응답, 대표적인 축복이 이삭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안 된다. 육신의 우상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아주 나쁜 사탄의 전략이다. 예수님이 마10:37~38 결론으로 말씀해주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우리의 응답이 무엇인가? 나의 응답이 무엇인가? ‘부활의 주, 예수그리스도시여 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할 때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나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00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내 어린양을 먹이고 내 어린양을 쳐라”하신다. 그대 모리아 산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 시대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 시대 렘넌트 예배를 통해 온 교회가 사랑의 힘을 모아 세계 렘넌트를 살리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고통의 길을 축복의 길로 바꿔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육신적인 우상들도 끼어들지 못하게 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 충만을 허락해주셔서 영적 싸움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연결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이젠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 그리스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영원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안을 열어주셨사오니, 아브라함의 믿음의 뿌리가 우리에게도 그런 믿음의 뿌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왜 내 인생에 시험이 찾아왔는가를 오늘 이 속에서 번뇌 속에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을 허락해주셔서 부활의 몸을 체험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점검하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복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참으로 가슴에 새겨놓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어린 양을 먹이고 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내 몸에 뼛속까지 새겨져 자신과 세상과 사탄과의 길들여졌던 욕망의 저주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가장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간 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성령충만 속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무엇이든 응답받는 믿음의 군사로 살게 하시고, 모든 문제를 누릴 수 있는 갈보리 산의 축복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절대 헌신의 자리까지 도달했을 때 그를 의로 여기신 것이 나의 믿음의 뿌리가 되어, 독생자 그리스도가 내 몸과 하나 되는 절대 믿음, 절대 사랑을 알고 임마누엘 속에 자기 자랑과 무례한 말투를 버리는 변화가 시작되게 하옵소서. 이상하고 연약한 나를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셔서 창3:15의 역사를 맡겨주셨기에, 어떤 시험거리에도 말씀 앞에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 끼어드는 모든 육체의 우상을 무너뜨리고 이기심을 버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미래의 응답을 보는 자가 되어 고통의 길을 축복의 길로 바꿔주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