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읽는 통찰력이 없으면 무모해진다"
(행 27: 1-12)
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맞바람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사도행전27장 1-12절-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 고백이 정말 우리 영혼에서 흘러 나온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 창3:15을 하나님의 절대 목표, 절대 주권, 내 인생의 발판으로 삼았다면 반드시 참된 응답은 시작된다.
*창3:15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언약이다.
창3:15의 언약을 붙잡을 때 참된 하나님의 능력 속에 기도 응답이 시작된다. 그 응답을 맛봐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고 증인으로 설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행26:18 하나님을 증명했다. 창3:15, 참된 능력의 하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흑암에서 빛으로, 사단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신 분이 창3:15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단의 권세에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3:15 성삼위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 권세로 우리를 사단의 늪에서 뽑아내셨다는 것이다. 창3:15이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어 하나님께 드디어 돌아오게 되었고, 죄사함을 얻어 자신의 신분과 권세를 믿음으로 가져 거룩한 자가 되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으며 보좌의 축복과 시공간의 초월의 능력을 날마다 맛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증명해보라고 하면 온갖 이상한 하나님을 끌어다가 부르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이제 정확한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심부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행27: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자신과 같이 창3:15 참된 능력 속에서 기도 응답받는 모든 생명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창3:15의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지 못하면, 이것을 증명할 증거가 없으면 육신적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멀어져가는 관계만 될 뿐이다.
오늘날 곳곳에 재앙이 일어나는 이유는,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그 첫사랑의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전 세계는 지진과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창3:1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회개할 줄 모른다. 그래서 일본, 터키,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이런 나라마다 재앙에 잠겨있고, 미국, 중국, 유럽 뿐 아니라 전 세계 각 나라 마다 무시무시한 고통의 저주 속에 갇혀버렸다.
계2:4~5, 창3:15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했다. 죄 사함을 받는 그 길을 잃어버렸고, 거룩해지는 그 엄청난 성화에 이르는 축복을 상실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버렸기 때문에 흑암의 나라에 잡힌 것이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길,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길, 마귀의 일을 멸하고 자아를 사로잡아 깨뜨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로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이 그 사람을 덮어버리는 것을 흑암의 나라라고 한다 그 첫사랑을 버린 지역이 지금 터키 지역이다. 계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영적싸움을 갖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는 것이다. 계2:2, 터키 사람들은 인내심이 강하고 예절도 있고, 좋은 성격과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적싸움 하나를 놓쳐 재앙 시스템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의식주 앞에 기독교가 무릎을 꿇어 이슬람 국가로 바뀐 곳이 터키다. 성경은 분명 의식주 앞에 무릎 꿇지 말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눅12:24, 27) 의식주 문제에 시달리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나라 심부름을 한다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 터키 지역에서 한국으로 촛대가 옮겨왔는데, 한국도 이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이런 시대 속에 예수사랑교회가 다시 한 번 새롭게 도전하여 237 디아스포라, 5천 미종족을 놓고 1천만 세계복음화에 도전하는 전도제자를 찾아 세워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참된 능력 되시고, 알파와 오메가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망의 법에 매이는 육신적 기도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행26:22~23,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참된 능력, 창3:15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높고 낮은 사람 앞에 자신이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한 것을 전할 뿐이라고 선포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모든 저주와 재앙이 넘어 간다. 출14:14,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니 뱀의 머리만 밟아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않는 것은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가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어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뱀의 머리부터 깨뜨려야 한다. 우리 안에는 옛사람의 자아, 자신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놈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놈의 별명은 교만이다. 우리 안에 얼마나 교만의 눈빛이 가득한지 그것을 뽑아내야 한다. 교만의 눈빛이 있기 때문에 높은 자든 낮은 자든 대속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심부름을 하는 자신이 되어 질 수밖에 없는 창3:15 언약의 흐름을 탔다.
행26:23 되리라고 하신 창3:15이 무엇인가? 나의 고난을 담당하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나의 죽음의 문제, 지옥의 문제를 담당하신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생명의 빛을 비추신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정말 부르고 선포하면 자신이 거룩해지는 놀라운 성화의 축복이 시작된다.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말이다. 세상의 임금이 우리를 보고 완전 쫓겨 가든지, 무릎을 꿇는 참된 축복이 시작된다.
골1:13, 창3:15 그가 이 땅에 와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이제는 그리스도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이 엄청난 그리스도 하나님을 지금 모든 사람이 약화시키고, 변질시키고 혼랍스럽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고난의 죽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 몸속에 그리스도 그 생명의 빛이 우리 몸에 없으면 고난과 재난의 시작이다. 끊임없는 저주 가운데 흑암에 사로잡힌 채로 의식주에 질질 끌려다니는 인생이 된다. 그러면 사람에게 점점 이상한 힘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네피림의 힘이다.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네피림의 힘. 뱀의 머리를 절대 깨뜨리지 않고 제 맘대로 신앙생활하는 네피림의 힘. 그 네피림의 힘을 가진 사람들은 성전 건물 같은 것을 보고 감동한다. 내가 복음이 없을 때는 우리나라에 가장 멋있게 세워진 교회 건물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복음을 받고 나서부터는 교회 건물에 전혀 감동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교회 장로님들이 자기 교회와서 주일에 사용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 장로님들 중심으로 모여서 우리교회 인터넷 메세지를 듣고 있다. 그분들은 성전 건물에 감동을 받아 빠져나오지 못한다. 예수님은 성전 건물을 보고 감동받은 자들을 향해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말씀했다. 그것이 종말의 시작이다. 성전들이 다 무너지고 잔해더미가 될 것이기 때문에 성전을 보고 감동을 받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 여기에 감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에 진짜 감동하면 생각이 치유되고 모든 삶이 바뀐다. “모든 문제 끝” 그분이 끝냈다는 것, 여기에 진짜 감동이 있으면 “마귀야 가라” 선포하고 두 다리를 뻗고 잘 만큼 평안을 누린다. “성령충만” 여기에 감동이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내 심장이 아닌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게 된다. “세계복음화” 여기에 정말 감동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잠겨있는 자다. 바울은 이런 통찰력이 있었다. 그는 문제 속에 언제나 하나님을 누렸다.
우리는 말세지말의 시대에 성전을 바라보고 감동을 받지 말아야 한다. 말세에,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성전에 들어가 사람들의 모든 것을 약탈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전을 보고 감동을 받은 자들은 언제나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 자기가 피를 토해가면서도 강단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것을 보고 감동받은 성도들은 자기 목사님이 피를 토해가면서까지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떼를 쓴다. 그리스도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성전을 통해 감동을 받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놓고 자신들이 선지자인 것처럼 나타나서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굉장히 그리스도인 것처럼 흉내를 낸다. 사람은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흉내를 내고 있다. 광명한 천사로 자기를 가장한 비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미혹하여 성전을 어마어마하게 짓고 거기에 감동받게 만든다. 그것이 종말이고 말세다. 사람들의 생각은 갱신이 되지 않고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내면에 엄청난 미움을 가지고 결국은 전쟁까지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는 시대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전쟁과 난리, 문제가 일어나도 창3:15에 감동받은 자들은 침착하면 된다. 역사는 창3장으로 반복되고, 창3:15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모든 이념과 사상은 사람들은 분열하게 만들 뿐이다. 성전을 보고 감동받은 자들은 이념과 사상으로만 성장하기 때문에 결국은 살인의 악마, 사악한 자가 된다.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이 세상 신, 세상 임금은 곳곳마다 기근과 여러 형태로 사람들을 고난과 죽음으로 끌고간다. 그래서 창3장 원죄, 이 이리떼에게 사람들을 던져준다. 성전을 보고 감동받는 자들,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가득한 이 시대, 그리스도 그 이름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전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미움을 받는다. 하지만 미움을 받아도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 때문에 미움을 받고 살벌해져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에 닥친다 할지라도 담대해야 한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만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자들이 미움을 받고있는 그 환란을 틈타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100명이 넘는다. 사이비 종교, 무속과 점술이 심각하게 급증했다. 귀신들린 자들을 향해 국회에서는 성직자라는 칭호를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사람을 속이고 악의 파멸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거짓 선지자, 사이비 종교가 일어나면 서로를 물고 뜯는 국민성이 나타날 뿐이다. 불법이 성행하고, 공동체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명되기 위해서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유월절 피를 바르면 모든 저주와 재앙이 넘어간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멋지게 회개도 하고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질 때 우리는 언제나 눅10:19을 나의 것, 나의 언약으로 붙잡고 회개하며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소식을 만민에게 전해야겠다는 강력하고 끝없는 사랑이 우리 몸에서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행1:8 땅 끝까지 이르러 견디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을 받는 자들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창3:15의 언약의 여정 속에 없으면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이런 상태로 살면 사는만큼 상태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스러워진다. 하나님의 온전한 그리스도, 그 선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눈에 대단히 멋있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한 자들,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창3:15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을 보고 감동 받지 않는다. 전1:2 이스라엘 3대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모든 부귀영화를 다 가졌던 지혜의 왕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왕’ 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전도자“ 라고 했다. 전도자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전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것이다. 이 헛된 세상에 헤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정말 허무한 것이다. 헛되고 헛되다는 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는 참되고 참되며 참되고 참되도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하나로 우리는 감동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강단에서 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 메세지를 다시 듣고 내 자신을 갱신한다. 그리고 내 안에 아직도 사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 영혼 깊숙히 있는 그 사단을 정말 뽑아낸다. 우리 속에 숨어있는 창3장 원죄의 재앙을 뽑아내는 비밀은 참되신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 속에 숨은 재앙이 무엇인가? 우리 몸에 있는 요8:44다. 요8:44에 감동을 받으면 되겠는가? 이것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내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요8:44가 우리 몸에 있으면 끊임없이 우리를 우상숭배 하는 곳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성전을 보고 감동을 받게 만들고 우리 영혼이 우상을 숭배하게 만든다. 성전에 엄청나게 감동을 받아 그 성전에 들어가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는데,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성전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들어도 “예수가 그리스도” 이 하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상태가 굉장히 이상해진다. 막5:1~10에서는 이것을 군대 귀신 들린 자라고 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무슨 말을 지껄이고 사는지를 모른다. 결국 전부다 육신적 질병으로 시달린다. 지옥 배경을 가지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혼자 예민하고 혼란스럽다. 갱신과 회개가 안되기 때문에 말 한 마디를 할 수도 없다. 마귀가 주는 시험에 걸려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하지만,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을 들게 만들어서 넘어뜨린다. 그래서 늘 시험드는 상태에 있다. 네피림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을 피하라고 창3:15을 주셨고 창6:14 영혼에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네피림 시대에 사는 우리는 모든 것을 자꾸 ‘내 것’ 이라고만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나의 것으로 가지려고 한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파괴되어도 성공만을 위해 살려고 한다. 이런 것이 전부 지옥배경이다. 사람이 영적인 것을 모르고 살면 내 몸에 무슨 문제가 찾아왔는지를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3:15 기도의 힘을 가지라고 하신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강건해지는 것이다. 창3:15을 들숨과 날숨을 통해 각인시키면 시23:1~6 복음이 우리 삶에 시작되어 복음의 능력이 증거된다. “창3:15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창3:15 그리스도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언제나 인도하시는도다” 늘, 언제나, 항상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신 그분에게 우리는 감동이 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이 이름에만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통찰력이 임한다. 창3:15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나의 발판으로 삼으면 복의 근원이 되어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천국의 열쇠를 갖게되며, 이 땅에서 풀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오직 복음 운동 속에 있으면 바울과 같이 미래를 읽는 통찰력이 임한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다. 여기에 감동이 있어야 한다. 창3:15 그분이 우리를 흑암 가운데 끄집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복음에 심부름을 하는 직업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고 만나는 사람마다 메세지를 했다. 자신은 미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소명의식과 사명의식 속에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행26:25 사도바울은 오직 복음 운동 속에서 살았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일이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왜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부활하셔야 했는가? 내 몸에 영원히 함께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고후5:17을 깨닫고 갈2:20 살아가는 방법을 알았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언제나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 그래서 심장이 뛰어도 내 심장이 아닌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 것이다. 숨을 쉬어도 들숨과 날숨에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호흡하는 것이다. 부를 때마다 감동이 되기 때문이다. 왜 그 이름에 감동이 되는가? 나 같이 연약하고 보잘것없고 재생산도 안되는 쓰레기보다 못한 더러운 자를 하나님이 자녀 삼아주셨다. 마귀 피를 뽑아내고 하나님 당신의 피를 나에게 새롭게 공급해주셨다. 마귀의 몸을 없애주시고 그리스도 생명의 떡으로 나를 입혀주셨다. 얼마나 멋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 부르면 부를수록 자기가 성화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불러도 그 이름을 모르고 부르면 발악을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만 지를 뿐이다. 그런데 정말 그리스도를 알고 부르면 반드시 달라진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보았다. 행19:21, 엄청난 대부흥의 역사 속에서도 낮은 자세로 “나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계획을 보았더니 행23:11 그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의 통찰력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뜻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셨다. 우리가 복음 운동이라는 이 통찰력을 가지고 그분의 주권 속에서 그분의 계획과 뜻을 따라 조금이나마 이뤄가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내게 말씀하신다. “바울아, 너는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서에서도 증언하게 되리라” 행1:8이 몸에 성취되고 현장에서 성취되고 막16:17~18이 몸에서 작동되기 시작한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이런 비밀을 몰라 힘들고 어렵고 교만하고 짜증 내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바울이 드디어 지긋지긋한 3년의 감옥생활에서 벗어나 로마로 출발하는 시간표를 갖게 되었다. 행1장에서부터 28장을 거쳐 이 복음의 역사가 드디어 예수사랑교회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조금 실천했는데 하나님이 정말 많은 은혜를 주셨다.
바울은 창3장 원죄로 인해, 마귀, 사단으로 인해 지루한 법정 공방을 끝내고 로마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다. 인간의 교활하고 간교하고 더러운 계략이 깔려있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뤄진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서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풍랑도 잠잠케 되는 것이다. 마28:18~20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그 현장 속에서 우리는 시작하고 있다.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 는 그 말을 바울이 알아들었더니 행27:1 배를 타고 이달리야로 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라는 말이 나온다. 로마로 갈 한 팀이 세워진 것이다. 로마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할 수 있는 누가를 비롯한 좋은 제자들이 한 팀이 되어 간 것이다. 그래서 바울과 한팀이 되어 한배를 탄 사람들은 결정된 대로 따라가게 되었다. 이들은 결정된 대로 바울을 따라갔지만, 이 속에는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 예정, 모든 것이 있었다. 교역자는 언제나 “우리가” 이 엄청난 믿음 속에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가? 죄수의 몸으로 떠났다. 멋있는 사람으로 간 것이 아니라 죄수로, 가장 낮은 자세로 로마를 향해 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고백 속에 로마를 출발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로마로 들어갔다.
바울이 처음에는 죄수의 몸으로 갔고 백부장과 선주, 선장은 모든 것을 갖춘 자로 함께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바울의 말 앞에 순복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백부장 율리오는 권력을 가졌고, 선주는 경제를, 선장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날 하나님의 참된 능력으로 자신과 영적싸움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이 무릎을 꿇는 증거가 나타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적 권세는 점점 높아지는 것이다. 이 능력이 바로 창3:15이다. 여기에 감동만 되면 영적 권세가 점점 자라난다. 자기가 죄수의 신분이어도 상관이 없다. 내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권세가 점점 높아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27:7~8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그 당시 배는 엔진의 힘이 아니라 오롯이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연을 거스르고, 순리를 역리로 바꾸면 뒤집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 속에 기도로 인생을 살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재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행27:12 본문에, 이들은 간신히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들이 동쪽에 있는 미항이라는 항구가 아닌 서쪽에 뵈닉스 항구로 가자고 한다.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 사람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났으면서도 정신을 못차린다. 이것이 바로 창3장이다. 하나님이 여러 번 경고를 하셨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를 돌이킬 줄 모르고 바울의 말보다 다수결의 의견을 선택했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뵈닉스 항을 선택한 것이다. 쾌락을 위한 다수의 원리가 작동한 것이다. 권력과 경제, 기술 곧 네피림의 힘을 가진 자들이 하는 것은 육체의 타락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276명의 생명의 책임자였다. 그는 276명의 생명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에 통찰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와 함께 배를 탄 저들이 흑암의 권세에 몰살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힘의 능력, 성령으로 역사해주옵소서.’ 생명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참된 기도의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백부장, 선주, 선장은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들의 쾌락과 겨울 내내 바람이 잠잠할 때까지 그 섬에서 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세상은 전도자의 말보다 세상의 것을 가진 자들의 말을 더 잘 듣는다. 많은 사람이 전도자보다 가진 자들을 지지하기 때문에 그 성원에 의지하여 결정하고 미항을 떠나 뵈닉스로 갔지만 그 결과는 파선이었다. 그런데 파선된 그 현장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주셨다. 자신의 기술, 경험을 가지고 자기를 우상화하면 순간 통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세상 임금, 세상 흑암 앞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창3:15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참된 능력 속에 기도 응답이 없으면 미래를 읽는 통찰력이 없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무모할 뿐이다. 이제 예수사랑 가족들은,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이 가진 기술로 뭔가 판단하려고 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창3:15의 참된 기도가 시작되기를 축복한다. ‘이 땅 칠십억 그 인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내게 성령의 충만함과 통찰력을 주셔서, 사람들이 전도자의 말을 듣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 역사해 주옵소서.’ 이런 고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감동으로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계속 발판으로 삼고 하나님의 주권 속에 계획을 볼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영안을 열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능력은 창세기 3장 15절, 마태복음 16장 16절 고백 속에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말씀해주셨사오니,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이제는 증명할 수 있을 만큼 감동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들이 정확한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심부름하는 자가 되게 하옵시고, 우리의 직업이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을 가졌다는 확신 속에 만인을 살리는 전도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간 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첫 사랑,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라’는 믿음을 상실하고 그리스도를 변질시켜 재앙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에,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을 절대목표, 절대주권으로 믿고 발판으로 삼아 참된 응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복음도 없는 성전에만 감동을 가지고 이념과 사상으로 사람을 분열시키는 창세기 3장의 반복되는 역사 속에, 무속과 점술로 기근과 고난, 죽음으로 몰고 가는 세상 신, 사단을 보는 영적인 눈을 뜨고, 내 인생의 문제도 모른 채 나를 의지하고 내 판단을 믿으며 갱신과 회개도 없는 교만을 깨뜨리는 영적싸움을 지속하여, 풍랑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감동된 자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창세기 3장 15절 기도의 능력으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내게 맡겨진 생명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자,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을 가지고 만인을 살리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