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활로 바꾼 하나님의 전도계획"
(행 20:1-12)
예배를 드리러 왔음에도 생각부터 졸고 있는 저주의 영을 예수그리스도로 무너뜨려야 한다. 본문에, 창가에 걸터앉은 청년이 깊이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건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조는 자를 떨어뜨려 죽게 하셨는가? 조는 병은 영적인 상태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분의 회사에서 6년간 메세지를 했는데, “목사님, 왜 이제야 창세기 3장 메세지를 해 주십니까?” 따지길래, 내가 6년 전부터 메세지를 했다고 말하니까 충격을 받았다. 바울은 권고하고 집중해서 메세지를 전했고, 게다가 그의 설교가 무지 길었다고 했다. 이 긴 설교를 알아들었던 주인공 중에 가이오가 있다. 가이오가 ‘온 교회의 식주인’ 이 되었듯이, 말씀을 계속 먹으면 경제가 회복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늘 생각이 조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없다.
고후4:4 세상 신이 우리의 생각을 늘 혼미케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을 적극적으로 취하는 방법이 우리 영혼 속에 있어야 한다.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가 늘 생각으로 졸게 만들기 때문에 조는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깨뜨리는 것이 바로 적극적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소극적 방법이 바로 조는 생각이다. 생각이 늘 졸기 때문에 환경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창3:15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어떤 환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 할지라도 나를 해치지 못하며,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분은 살아계신 나의 아빠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에서부터 조는 것을 깨뜨리지 않으면 창가에 걸터앉아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도, 힘 있는 청년이라 할지라도 떨어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고속도로 운전을 할 때 생각이 졸고 있으면 길이 뻥 뚫려 있는 것같은 환상을 보고 앞차가 브레이크를 밟고 비상 깜빡이를 켰는데도 그것이 안 보여서 그냥 들이받는 것이다. 생각이 졸고 있으면 사망이 가로채는 인생이 된다.
조는 사람이 떨어져 죽었지만 바울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바울이 죽은 청년의 귀에 사망 권세 잡은 자를 향해 명령했다. ‘사망아 질병아 무능아, 생각으로 조는 틈을 타고 들어온 저주의 영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간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너는 지금 살아날지어다!’ 그리고 바울은 이 청년을 향해 일어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도만 하고 메세지를 계속 강론했다. 메세지 계속하는 중에 그 청년이 살아나서 다시 정신 차리고 메세지를 들은 것이다. 그랬더니 그 장소에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조는 교인으로 사는 것, 졸고 있는 믿음, 이런 것을 우리는 반드시 해결 받아야 한다. 조는 신앙은 언젠가 반드시 떨어진다. 그래서 떨어질 위험이 있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늘 조는 인생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 곁을 잠시 떠나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베드로가 졸고 있다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졸고, 따뜻한 불길에 몸을 쬐다가 졸았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은 했지만, 조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이다.
조는 신앙에서 벗어나 이제는 우리 몸에 성령이 임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력을 갖지 못하고, 말씀만 들으려고 하면 눈을 감는 이 더러운 장님의 저주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몸에서 산산이 떠나갈지어다!’ 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내 몸에 임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눈이 집중되지 못하면 조는 신앙, 조는 믿음으로 살다가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가룟 유다도 요13:2 눈이 집중이 안 되고, 예수님을 향해 집중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하지 않으니까 결국은 마귀가 생각으로 들어갔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 속에 창3:15이 없으면,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 사망의 상태에 있는 자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 사망이 우리를 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정신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했다. 깨어있어야 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는 우리가 왜 사망의 몸에 묶여 있어야 하는가? 창3장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 죄의 권세가 우리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원죄’ 라고 한다. 이 원죄가 가문의 저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가문의 저주를 타고 자범죄가 습관적으로 체질적으로 늘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3:15을 주셨다. 창1:27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에서 떠나게 되어 창2:7 생령이 없는 자가 되었다. 생령이 사라지고 악령이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운명, 사주, 팔자의 시간표 속에 잡혀서 늘 시달리고 고통을 받는 어려움 속에 있게 된 것이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고통 속에 행복이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어떤 분이 나에게 “목사님, 하나님도 안 믿고 제 맘대로 사는 사람이 저보다 더 잘돼서 너무 잘 살아요.” 하길래,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냐?” 했다. 그것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곧 사막에 이르게 된다. 비 한 방울 없이 24시간 태양만 내리쬐는 상태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 한 방울 없이 태양만 24시 그 사람에게 내리쬐는 것은 재앙 중 재앙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표시를 내지 않을 뿐 이미 사망상태가 되어 고통 속에 공황장애를 겪으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하하하 웃다가 정말 미쳐 버렸고, 또 어떤 아이는 엄마가 뺨을 한 대 때리는 순간 귀신이 들어가 버려서 통제가 안 되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인생이다. 창3장의 올무에 묶인 상태, 창3장 저주의 함정에 빠져있는 상태 속에 사람들은 살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도 바벨탑의 재앙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1:28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를 주셨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진다.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 되신 복음이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을 24시, 25시, 영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교회는 성경적 플랫폼이 아닌 전부 이상한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 개인 우상 종교를 만드는 플랫폼의 저주에서 우리는 완전 해방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창3:15에는 조는 인생으로 살면서 창3장에만 깨어있으면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으로 깨어있지 말고 영으로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깨어있어야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를 부인하지도 않고 육신으로 깨어있는 자가 되면 무시무시한 망대, 적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 속에 마구잡이로 총을 쏘는 망대가 될 뿐이다. 마귀 나라에서 계속 정보를 받아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안테나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창3장의 플랫폼, 창6장 네피림의 파수 망대, 창11장 바벨탑을 만드는 안테나가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이런 것에 매료당하지 말고 진짜 성경적 복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졸지 않는다. 예수사랑교회는 혼미한 교회가 되지 말고 복음으로 정신을 차리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전 세계 교회는 전부 우상 플랫폼이 되어 그들이 하는 기도는 전부 요일2:16일 뿐이다. 그들이 쌓아놓은 종교는 요8:44라는 증거다.
우리는 ‘복음의 플랫폼, 복음의 파수망대, 복음의 안테나’ 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열방이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상 종교는 이념과 사상일 뿐이다.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교만한 얼굴로 여호와 하나님이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전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생활은 내 삶을 과거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미래로 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갱신하지 않는 체질이다. 이것은 약도 없다. 자기를 방어하는 말만 사용하는 사람은 갱신이 없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악인은 교만한 얼굴로 말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통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한다. 이렇게 우리를 속이는 종교 우상 지도자에게 빠져들지 말고, 졸고 있는 태도를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복종시키고 말씀에 올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14:1 우상숭배하며, 다른 복음을 갖는 자는 전부 마음이 부패되고 어리석은 자, 행실이 가증한 자가 될 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행하는 자가 없도다” 절대 영적싸움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신과 세상 환경, 사탄과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멋있게 군중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사단의 심부름꾼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오셔서 요8:44를 선포하셨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고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이 말씀을 선포하셨다. 종교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불행해진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셨다. 성막 중심으로 살라는 것이다. 성막 안에는 언약궤가 있기 때문이다. 창3:15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왜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는가? 창3;15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았기 때문에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통해 성전을 짓게 하셨는가? 창3:15의 중심이 된 사람은 세계를 정복해간다. 초대교회는 왜 마가다락방에 모였는가? “예수는 그리스도” 복음 중심 속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예수는 그리스도 속에 있으면 “성령충만, 마귀야 가라” “세계복음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속에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되어지는 존재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마귀의 일을 멸하는 가장 매력적이고 신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 나온 베뢰아 사람은 ‘신사적인 사람’ 이라고 했다. 자신과 세상 환경, 사단과 영적싸움을 가장 잘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잔머리 쓰지 않았다. 의심, 걱정, 염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야 가장 멋있는 사람이 된다.
초대교회는 언제나 떡을 떼며 교제했다. 본문에도 떡을 떼며 교제하며 메세지를 강론했다. 행5:42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했다. 남의 말을 하는 것은 진짜 나쁜 것이다. 절대 남의 말은 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 3저주의 문제로 묶여 있고, 운명 사주 팔자, 사망권세에 묶여 있는 존재가 딴말을 하면 되겠는가? 먼저 우리 자신의 신분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정말 멋있어진다. 신앙생활이 예배 중심이 되고, 경제 생활이 헌금중심만 되면 모든 것이 전부 회복된다. 이것은 교회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회를 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부분이 안되면서도 말만 많다.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이 찾으시고 축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남의 말 하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 찬양하고, 전화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는 자 되어야 한다. 찬양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 선포하면 어느 날 그리스도가 체험되고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 속에 증거로 남아 증인이 된다.
성막의 성소 안에는 언약궤와 떡상, 향단, 등불, 물두멍, 뜰이 있었다. 성막 안에 있는 ‘떡상’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신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떡상은 곧 교회 안에서 얻는 영적인 힘을 말한다. 강단에 흐르는 복음의 말씀을 먹는만큼 영적인 힘이 시작된다. 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향단’ 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그 말씀 속에 아주 놀라운 향기가 있다. 말씀을 묵상하는만큼 기도응답을 받는 것을 ‘향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등불’ 이 있었다. 언제나 켜져 있는 등불. 기도 응답을 받는 사람은 복음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는 것이다.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게서 나가라! 너는 죄사함을 받았음이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나는 죄사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이름으로 각종 연약한 질병에서 치유받았다!’ 복음의 빛을 내 몸에 비추고 어둠을 밀어내는 것이다. 또, 그 속에는 손을 씻는 ‘물두멍’ 이 있었다. 내게 있는 것을 씻으면 씻는만큼 영광스러운 보좌의 축복을 받게 된다. 영적싸움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시공간을 초월하는 성령의 역사와 무한한 보좌의 축복을 받게 된다. 굉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힘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뜰에는 이방의 뜰, 어린이들이 모이는 뜰, 기도의 뜰을 갖고 있어야 한다.
*창3:15 그리스도의 생명은 들어있었지만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떨어지는 인생이 된다.
아무리 복음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믿음 자체가 없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하지만 본문에, 3층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가 떨어진 청년이 생각은 졸고 있어도 영혼 깊은 곳에는 생명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 창3:15,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말씀을 주셨다. 그 이름을 소유한 자에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며, 천국의 열쇠를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영적싸움을 하면 모든 문이 열려진다고 했다. 유두고는 이런 말씀을 듣고도 실제 믿음의 행동이 없었다. 행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그리스도의 생명만 있으면, 사망이 불화살을 쏴도 죽지 않는다. 유두고가 가이오, 베뢰아 사람들처럼 실제적인 영적 전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떨어지지 않았다. 영적싸움을 하지 않는 신앙은 어느 날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행12:4 본문에는 1차, 2차, 3차 전도운동에서 세워진 제자들 이름이 나온다.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에베소 교회에서 탄생한 제자들의 이름이 나왔다. 마게도냐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해 주일 동안 머물면서 바울이 강론한 메세지를 들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은 그 메세지를 듣다가 창가에서 솔솔 불어오는 그 바람을 맞이하면서 점점 깊이 졸았다. 시간이 갈수록 뭔가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하는 것은 정말 무섭다. 눈꺼풀 하나 올리는 것은 어떤 힘센 장사도 못 할 일이다. 졸음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조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창3장 저주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사람 속에 복음이 들어가면 조금만 팀사역을 해도 바로 회복된다. 창가에서 깊이 졸다가 떨어져 죽은 자를 향해 바울은, ‘생명’ 이 있다고 하고 그냥 올라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팀사역을 하면 튕겨 나간다. 그런 사람은 갱신이 안 될 뿐 아니라 복음 자체가 없는 것이다. 복음이 아주 작은 불씨처럼 있기만 해도 그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제자,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증거를 말할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종이다. 나는 현장에서 이런 것을 정말 많이 확인했다.
행20: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성만찬을 하면서 바울의 설교를 계속 들었다. 바울은 밤중까지 계속 설교를 했다. 예수사랑교회 메세지가 길다고 하면서 졸고 있다면 영적싸움을 깨뜨리는 힘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떠나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순례자, 나그네의 마음으로 메세지를 했다. 사망이 들이닥치고 음부의 권세가 해치고 우는 사자가 우리를 물려고 하는 것을 바울은 보았기 때문에 메세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흑암이 정말 있다면 어떻게 정해진 대로만 짧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성도들을 아주 갈증나게 만들어서 삥을 뜯는 사람, 장사꾼이지 목자가 아니다. 진짜 태권도 사범은 기본자세만 가르치지 않고 다양한 것을 가르쳐주고, 우리 자녀에게는 다양한 음식을 통해 골고루 먹게 하는 것이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바울은 이 말씀을 믿었다.
청년 유두고에게 “길이요 진리 생명 되신 예수그리스도” 가 영접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보았다. 요5:24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그 말씀을 믿고 바울은 올라와서 메세지를 계속 했더니 유두고가 살아서 올라왔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믿음으로 결단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래서 떨어져 죽은 자가 일어나서 올라오는 것이다.
영적싸움하는 제자들은 시체를 보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바울의 메세지를 듣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떤 환경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에 올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가려면 다양한 문들을 통과하면서 가야 하는데 환경 앞에 실족하면 되겠는가. 행20장 본문의 핵심은 유두고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내버려두고 계속 말씀을 강론했을 때 살아난 것이다. 말씀에 정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내 영혼에 새겨놓으면 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누구도 건들 자가 없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오늘의 전도가 살아 있으면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절대 타이밍을 알 수 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집중했는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사역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내가 이곳에 오지 못할 거라는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로 가지 않고 미래로 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 못 할 사람도 없다. 용서하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 있는 것이지, ‘내가 용서했다. 내가 뭘했다’ 고 하면 이상한 사람이다. 바울은 로마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사역에 권면과 강론을 통해 믿음을 지키라고 위로했다.
*왜 절대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
교회 안에는 외적인 공격도 있지만 내적인 공격도 엄청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다. 복음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끈질기에 복음 전달을 막는 자들이 있다. 전도와 선교에 관심 없는 자들이 끈질기게 음모를 꾸며서 괴롭히기 때문에 절대 믿음을 가지고, 절대 영적싸움 속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바울도 딤후4:1~2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휘말라지 마라.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 영혼을 빼앗기면 안된다. 우리의 삶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해라.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자가 있어도 그들을 끊임없이 권면해줘야 한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복음도 아닌 언어들을 자꾸 집어넣는 자가 있다. 복음이 아닌 언어를 자꾸 쓰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이상한 상태가 되고 과거로 가는 삶이 된다.
딤후4:5~7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영적전쟁, 영적싸움을 지켰다’ 는 말이다.
딤후4:10~1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영적싸움이 식어버리면 어느 날 귀가 가려워, 세련되고 멋지다고 하는 이상한 용어에 따라다니다가 다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우상이다. 종교 우상은 ‘사람’ 이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들으면 답도 없이 끌려다닌다. 인생을 해결해 주지도 않는 사람의 세련되고 멋진 언어에 길들여진다. 세상의 지식은 우리를 더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는 더이상 우상 종교에 길들여 지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증서로 준 성경 말씀에 올인 해야 한다.
딤후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몸에 들어와 입을 벌리고 자꾸 다른 말을 쓰도록 하는 ‘사자’ 가 있다. 우리는 이것과 싸워야 한다. 복음이 아닌 이상한 것을 우리에게 자꾸 퍼뜨리는 것을 무너뜨려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음에도,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한 마귀를 무너뜨려야 한다. ‘사자의 입’은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것이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않고 자기 밥이 되게 한다. 목사가 성도를 밥으로 삼으면 디겠는가? 목사가 성도를 이용해서 종교 우상을 만들고, 부흥의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면 되겠는가? 짧은 인생,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차려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오직 복음만 전하며 살아야 한다.
유대인들의 내적인 핍박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기득권 세력들은 정말 무섭다. 욕심쟁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더 높이 쌓기 위해 속이는 말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함께 할 사람들을 사람들과 제자들을 나열했다.
행20:12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주일날, 부활하신 날, 생명이 이 사람에게 들어갔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는 생명을 얻는 날이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안식일을 지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그 부활주일, 예수님이 살아나신 날이 오늘날 주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예배 때,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들으면 생명이 들어간다. 유대인의 풍습과 습관이 바뀐 날이 주일이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다 이루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셨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 가 들어가면 생명이 살아난다.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하나님이 주신 날이다. 그래서 주일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날이 되어 사망권세 잡은 자가 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증명하는 증거의 날에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세계복음화” 이 속에 있으면 된다. 그러면 굿을 할 필요도 없고 점쟁이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다. 이상하게 불안한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힘, 그리스도를 부르면 부요케 된다. 그래서 예배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는 날, 거듭나는 날, 살아계신 주,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이 된다.
*우리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아가페적인 사랑을 받아 이제 영원한 가족,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로서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행20:7 떡을 떼는 것은 아가페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성찬’ 은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는 예식이다. 창3:15을 눈으로 보는 예배가 바로 성찬이다. ‘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성찬을 주셨구나’ 이것을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2:36을 식사할 때마다 꼭 고백한다. ‘너는 정녕 알지니라, 너는 진실하고 사실적으로, 확실히 알아라. 네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네 인생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 신분으로 네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오늘 밥값을 네가 내라’ 밥값을 내야 한다. 자꾸 얻어먹으려는 거지 근성, 노예근성을 버려야 한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영적싸움만 해도 달라진다. 홀로 있어도 밥 값 내러 오라고 전화 온다. 이런 것이 전부 전도 현장이다. 밥만 제대로 사줘도 전도가 되고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전달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경제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셨다.
행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우리는 서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면 그리스도로 서로 권면하고 강론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자세다. 나의 마지막 날에 메세지를 듣고 메세지가 하는 날을 하나면 멋진 마지막 생애를 사는 자가 된다. 그러나 창가에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은 말씀을 놓쳐서 졸다가 떨어졌다. 메세지가 너무 길다는 생각에 잡혀서 깊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것이다. 행20:8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조는 사람 때문에 불을 더욱 밝혔다.
유두고가 놓친 것이 영적싸움을 우리교회는 절대 놓쳐서는 안된다. 영적 싸움을 놓치지 않는 자로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면 하나님은 전 세계 복음 받을 자들을 보내주신다.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절대 흑암에 대한 심각성을 모른다. 사단, 마귀, 악령, 귀신의 실체에 대한 그 심각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다. 사단, 마귀, 악령은 우리 가정을 쑥대밭 되게 하고 우리 가는 길에 저주와 재앙을 뿌리는 자다. 일평생 하나님에 대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무감각 상태 속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귀가 육신적 사고로 완전 묶어놓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메세지를 들을 때 졸고 있다. 늘 피곤한 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사고가 터지고 몸에 병이 온다.
행20:9 깊이 조는 날, 사단, 흑암에게 확 덮어버리는 날이 온다. 깊이 졸다가 자기 힘으로 이기지 못하는 날이 온다. 이런 삶에서 벗어나는 날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오늘 죽음을 부활로 바꾼 하나님의 전도계획을 우리들이 참으로 맛보고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젠 전도계획을 보고 생각부터 졸고 있는 이 태도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나를 바꾸고 운명을 바꾸는 자가 되게 하셔서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하여 듣는 자가 되게 하옵시고, 그래서 그 말씀 속에서 일어나는 그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응답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이젠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하오니 우리에게 깨어있을 수 있도록 영적 싸움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옵소서. 한주간도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졸다가 떨어지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깨어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날 교회는 개인의 우상 종교를 만들어내며, 개인은 창세기 3장의 저주와 올무 속에 갇혀있는 이 시대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생명의 말씀, 복음으로 내게 오신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24, 25, 영원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구원을 받아놓고도 영적싸움을 놓쳐 흑암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고 사탄 마귀의 실체도 몰라 생각으로 졸게 하는 마귀에게 당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언어만 쓰며 갱신하지 않고 사는 체질을 무너뜨리고 복음으로 정신을 차려, 답도 없는 사람의 말을 듣고 끌려 다니는 종교우상에서 벗어나 오직 생명을 얻는 예배의 말씀 속에 집중하게 하옵소서. 바울의 메시지만 집중했던 제자들은 문제 앞에서 죽음을 부활로 바꾼 하나님의 전도 계획을 발견했듯이, 강단 말씀을 먹는 만큼 영적인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아, 오직 영적 싸움의 실제적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