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11:1~18절-
내가 예수를 믿고 바로 시작한 것이 군선교였다. 그때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을 만나게 되었다. 목사님을 젊은 나이에 잃고 혼자가 된 분이었다. 돌아가신 남편 목사님은 그 당시 유명한 목사님이었다. 부흥회에서 인기도 많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분이었는데, 이 목사님의 문제가 담배를 못 끊는 것이었다. 한 교회를 부흥시키면 담배 피우다 걸려서 추방되고, 이런 식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강북에서 성남으로 대구로, 안동에 갔다가 강원도 전곡으로 가게 되었다. 아궁이로 불을 때는 아주 시골 교회였다.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담배 생각이 나서 장독 안에 숨겨놓은 담배를 꺼내서 처음으로 한 대를 피고 있는데 장로님이 부엌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그 상태에서 쓰러졌는데 그날로 죽었다. 남편이 죽은 후 아무도 그 사모님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 사모님은 원래 교회에서 자라난 목사님 딸이었기 때문에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분이었다. 그래서 저와 군사역을 다니면서 피아노를 치고 혼자 노래를 불렀다. 그 사모님이 늘 부르던 노래가 ‘순례자의 노래’ 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면 항상 눈물이 났다. 한국교회를 바라보고 울었고, 교회 안에 행해지는 율법의 무서움에 울기도 하면서 한국교회가 참 미웠었다.
복음이 없으면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우리 몸속에 와 있는 창3장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창3장은 ‘독사’ 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을 이상하게 하면 거품을 물고 물어뜯으려고 하고 독으로 상대를 물어버린다. 자신은 교회 안에서 헌신을 모르면서 교회 안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물어뜯고 괴롭힌다. 우리 몸속에 창3장의 신을 뽑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훗날 비참함이 온다. 많은 사람이 창3장 신을 가지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정죄와 비판, 판단과 무시, 무지함… 이런 잔인성이 교회 안에 가득한 것이다.
* 신앙생활을 제대로 출발하지 않으면 저주와 재앙을 받는다.
우리 몸에 창3장이 쌓여 창6장의 네피림, 육신적 사람으로 전락 되었다. 육신적인 사람은 바벨탑 쌓기는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영들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여러 부흥은 우상숭배에 불가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이 ‘나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한다’ 고 결단을 내렸을 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할 것이다’ 는 절대 언약이 들어있다. ‘창3장의 저주와 재앙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는 ‘절대’ 가 우리의 신앙으로 와있어야 변화될 수 있고 갱신할 수 있다. 우리 몸에 와 있는 창3장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가짜다. 가짜 신앙은 ‘믿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는 것을 모르는 신앙이다. 그러나 진짜 신앙은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너는 복의 근원이라” 약속하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약속하셨다. 창3장 역사 속에 살면 저주와 재앙,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창3:15 여호와의 역사 속에 있을 때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 그분이 믿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불신자가 더 잘한다. 불신자는 서로 담배 피는 것으로 정죄하지 않고, 싸워도 술 한잔으로 금방 화해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작은 감정 하나만 싹터도 끝까지 죽이려고 하고 독사의 이를 가지고 물어버린다. 기분 나쁜 감정 하나가 파고들면 ‘내가 너를 죽여버릴꺼야’ 하며 독기를 품고, 끊임없이 사람을 이간하고 분리시키고 개소리를 한다.
예수사랑교회는 원시복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체질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고상한 겸손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며 연극배우로 살던 그 모습이 어느 날 악마로 노출된다. 우리 몸속에 그 몸신, 육신의 신은 죽을 때 쯤, 힘 떨어질 때 반드시 나타난다. 육체의 힘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놈은 종말이 와야 끝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우리 몸속에 있는 몸신, 육체의 신, 육신적으로 살려고 하는 더러운 것을 내어쫓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한다고 말씀했다. 이것을 하면 열방이 우리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3:15을 ‘나의 것’ 으로 확신하는 예수사랑교회가 있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나라를 도울 만큼 힘있는 나라로 서있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멀리 들여다보고 오늘 속에 나를 준비시키면 우리를 통해 모든 열방이 복을 받게 된다.
우리 몸속에 있는 창3,6,11의 네피림, 큰 용사가 지금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그놈을 결박하고 내어쫓고 명령하고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가진 우리가 이 땅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몸부림치며 명상 같은 것을 해도 안 된다. 우리는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이길 수있는 힘을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지금 하고있는 명상은 사람들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귀신의 소리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에 길들여지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무한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난다. 우리 몸에, 복음의 확장을 방해하는 율법적, 종교적 그 이기주의를 그리스도의 법으로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스도 속에는 법이 들어있다. 율법적 사고를 깨뜨리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셨다. 그리고 종교적 연극배우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고 분명한 법을 주셨다. 우리 몸에 먼저 와 있는 창3장 욕심쟁이로 인해 우리 몸에 이기적인 것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없애라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주셨다.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눅9:23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다면, 영원한 구원의 시간표 속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 기독교만이 자기를 부인하도록 그리스도의 법을 주셨다.
우리 앞에 펼쳐진 자기 십자가가 ‘무속’ 이다. 우리 몸속에 들어와 있는 무속의 영, 이 더러운 귀신의 영이 육신적으로만 살라고 우리를 속인다. 그래서 이 무속의 신이 끊임없이 우리를 이기적으로 살게 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이해하거나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를 신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무속이다. 오늘날 이런 것을 가지고 예수 옷만 바꿔입고 산다. 예수 십자가만 걸고 다니게 한다. 그래서 ‘나는 00교회 다닌다’ 고 하며 돌아다니게 한다. 이 무속의 영을 무너뜨려야 매력적이고 행복하고 기뻐진다. 그래야 세계복음화의 구원의 열차를 타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모든 문제를 다 끝내버리셨다. 내 몸에서 안 끝났다고 발작증세를 일으키는 무속의 신을 꺾어라.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라는 의미를 모르면 구원은 없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면 내 안에 무속의 신, 몸신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후11:14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연극배우로 쇼를 하며 사는 것이다. 늘 시비를 걸고, 시기, 질투 속에 산다.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쓸쓸함, 고독이 찾아오고 그 순간 연극을 제대로 못하면 자신을 학대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정말 끊어라. 나를 포기하는 창3:15이 없으면 롬8:6~7에 늘 걸려든다. 사망 권세 잡은 사단에 걸려들면 생명도 없고 평안도 없다. 마음과 생각, 정신과 모든 것이 어린아이 같은 수준이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갈팡질팡하며 늘 삐지고 갈등하고 시험드는 자가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못한다. 처음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창3:15로 신앙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무속의 영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 옷만 갈아입은 것이다. 교회를 30년 다녔다고 해도 이런 상태로 다니기 때문에 정신병이 온다. 영적인 병은 말할 것도 없다. 삶에서 절대로 답을 내지 못한다.
*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신 생활의 원리, 행위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승리했다.
자신도 영적싸움 없이는 이방인을 만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어떻게 같이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복음을 말 할 수 있냐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의 일을 설명한 것이 본문이다. 할례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일을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아놓고도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신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 속에 있는 고집덩어리를 뽑아내라고 말한다. 잠재의식 속에 우리 고집으로만 살고자 하는 문화적 편견, 이 완악함을 무너뜨리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창3장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자꾸 부정 속에 들어가게 된다. 따뜻한 인정과 사랑, 온유, 이런 것이 없고 상대를 그냥 부정하는 것이다. 내 몸에 창3장을 부정하고 불식시키면 확신적, 합리적인 것이 온다. 확신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이 온다. 그러나 우리 몸에 창3장을 부정하지 않고 불식시키지 않으면 절대 믿음이 오지 않는다.
이방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기독교인이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왜 이방인 집에 들어가 이방인을 만나고 함께 음식을 먹었냐고 베드로에게 따지고 있었다. 사실은 이방 사람을 상종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를 알게 한 것이 기분 나쁜 것이다. 우리 안에 진짜가 들어가야 전도자가 된다.
이렇게 시비를 거는 유대인을 향해 베드로가 사실적인 증거를 믿으라고 메세지를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을 했다면 이제는 의심을 끝내고, 결론을 내고, 모든 것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해도 맹하게 있는 것은 우리 내면에 완악하고 딱딱하고 굳어진 것이 있어 계속 복음을 거부하고 밀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 우리 몸에 먼저 와 있는 무속신앙, 몸신으로 장악된 그놈을 내어쫓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하면 이제 더 이상 개소리 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얼마나 이간하고 시기, 질투하고, 교회 안에서 내 편, 저 편을 가르는가.
행10: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나의 행동이 합당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것이 베드로의 증거였다. 욥바에 있는 나를 가이사랴에 있는 사람이 찾아와서 그들의 메세지를 듣고 따라갔을 뿐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너무나 율법적이고 종교적 이기주의에 잡혀 못 알아 들으니까 베드로가 그 메세지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이 끊임없이 율법적이고 종교적, 이기적이면 교회 안에서 점점 독이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의 열차에서 훗날 버림을 받게 된다. 메세지를 계속 듣다보면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알게 된다. 가짜는 늘 이간하지만 진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다. 그 차이가 즉각 일어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 받아야 한다.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말씀으로 내 몸을 해결해야 한다. 믿음으로 해결하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이 이제야 열렸다고 그 증거를 선포하고 있다. 이 사건이 있기까지 4천년이 걸렸다.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으로 강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스도의 법을 주어 죄의 권세, 사망권세, 지옥권세, 저주와 재앙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깨뜨리라는 것이다. 사람 몸에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것이 무의식으로 완전 체질화 되어졌다. 이것을 깨뜨리려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한 법을 주셨다. 그리스도로 깨뜨리지 않으면 평생 이상한 상태로 인생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먼저 이뤄놓으신 사건이 행11장 본문이다. 보좌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법으로 다스리고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일이 바로 전 인류의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활의 원리, 원칙이 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세상 풍습에 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기서 벗어나는 비밀을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 풍습을 부인하는 그 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틀에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것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 그 권세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주셨다. 내가 지방에 가서 교회에서 사역하는 교사들에게 강의를 하면 그리스도의 의미도 잘 알고 설명도 하지만 이기적인 눈빛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자신을 깨뜨리지 않고 그냥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렘넌트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맡은 아이가 변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맡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내 자신을 바꾸는 영적싸움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살피는 어린 아이가 어느 날 할아버지 소리를 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날 귀신들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날 아파서 드러누웠는데 병명이 나오지 않고 신경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혈액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병이 온다. 사단이 이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적싸움하지 않으면 우리 육체를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것을 바울이 기록한 것이다. 사단의 가시가 자신의 육체를 철저하게 무너뜨린다는 것을 바울도 알았다. 자신이 이놈에게 잡혀 육체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자고하지 않도록 영적싸움 시키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풍습에 매일 수 밖에 없고, 문화와 제도에 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것이다.
엡2:1 “죄와 허물로 매였던 너를 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내 영을 살리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 영을 살리지 못하면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가 될 뿐이다. 고전15:56 사망이 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죄의 권세가 그대로 우리 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다.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만 와도 죽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법은 어떤 것인가? 죄의 권세, 사망권세, 지옥권세를 깨뜨리고 해방받는 법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법보다 더 높은 법이 우선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저는 양심의 법을 지키면서 살고 있어요” 하길래 양심도 타락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원죄로 태어난 자에게 무슨 양심이 있겠는가? 양심의 법에 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유익에 빗나가면 양심도 법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리 몸에 예수그리스도 그 십자가 구속의 사랑이 은밀하게 흘러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법 중에 법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의 법이 먼저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먼저 뱀의 대가리를 깨뜨려라!” 세상의 법이 우리를 묶어놓으려고 귓구멍으로 들어온다. 세상 풍습의 법, 세상에 살아남으려고 하는 세상 시스템의 법이 어느날 우리의 눈과 마음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마12:28~29 강한자도 결박하고 우리 속에 먼저 들어간 것도 내어버리라는 것이다. 요5:24 먼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라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셨다. 골1:13 그리스도를 통해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라고 하셨다. 요1:12 그래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세상 국법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따르는 진리의 법이다.
요8:31~32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을 못 하면 그것은 가짜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면 참으로 너희는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말씀으로 살지 않고 시비를 걸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는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라. 얼마남지 않은 생애를 왜 지저분한 것에 낭비하려 하는가? 진리가 아닌 것에 집중하거나 고집부리거나 매달리거나 몸부림치지 마라. 진리가 아닌 것에 시간을 낭비하면 시14:1 “어리석은 자” 가 되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이 부패되어져 그 사람의 행실이 가증하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보이게 될 날이 온다. 이미 선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무서운 저주와 재앙이 지금 우리를 엄습해오는데 왜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가?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무속의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13:10 무속의 영을 뽑아야 한다. “행 13: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몸에 몸신이 들어있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옥황상제, 동자보살, 할아버지영…. 우리가 자꾸 다른 나로 사는 이유가 이놈 때문이다. 혼자 잘 있다가 다른 놈이 내 안에서 발작 증세를 하면 이상한 문자도 보내고, 전화하고 커피 마시면서도 남의 욕만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먹기 때문에 사람들이 암에 걸리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 눈빛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누림의 표시가 나와야 한다. 마6:22 눈은 마음의 등불, 마음의 창문이라고 했다. 이상한 눈빛으로 사람을 속이는 자가 되면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완악하고 딱딱하고 굳어져버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악함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행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베드로에게 이 말씀이 생각이 났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되는구나’ 모든 옛사람의 틀을 깨뜨리고,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켜야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마가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행1:4 오로지 기도 속에 있었을 때 행2:42의 말씀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포럼하고 메세지를 가지고 떡을 떼며 하나님의 말씀의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받은 이 떡을 가지고 곱씹으면서 기도 속에 있었던 행5:42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 했던 마가다락방의 사람들에게 어느 날 말이 사라졌다. 우리가 던지는 모든 메세지는 영이다. 우리의 하는 말이 영이기 때문에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잠을 못 잘 때도 있다. 그런데 영적싸움을 하는 사람이 자기를 꺾고 상대를 꺾으면 상대가 드러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옛사람으로 살면 안된다. 예수사랑교회를 다닌다는 이력서를 보여주려면 멋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행위, 원칙이 성령세례다. 베드로가 말씀이 먼저라는 것이 생각이 난 것이다. 반드시 우리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명령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방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는 말씀이 생각이 났다.
창3장의 사건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깨뜨리는 사실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 사건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굳이 이 땅에까지 오셔서 복음, 그리스도를 주셔야 했는가? 이 증거가 우리 삶에 가장 우선 되어야 우리의 삶과 생활, 모든 것들이 바뀌는 것이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갔는가? “나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 고넬료 집에 갔다. 가서 내가 무엇을 했는가? 사단에게 눌린 것을 해방 받으라고 그리스도를 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메세지를 하는 순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나는 확인했다. 그리스도의 법으로 눌린 것들을 해방 받으라는 그 메세지를 선포했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나는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 세례를 알게 되었다.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자가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다” 뱀의 머리를 깨뜨리지 않으면 성령세례가 아니다. 그래서 자꾸 몸에서 더러운 다른 것들만 나온다. 더러운 것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율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도 자유케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3:15, 분명한 사실을 주셨다. 예수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에 성령을 기름붓듯 하셔서 그 기름부으심이 세 가지 부분에 대해 자유케 해야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사실을 말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베드로는 목격자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행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사실을 진짜 믿음면 증거는 나의 것이 된다. 성령세례가 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그렇게 세례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에는 언제나 역사성, 실제성,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함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언제나 사실에서 시작해야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실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맨날 사건 속에서만 흥분을 한다. 어떤 사건이 있다면 창3:15 사실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창3장은 늘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낸다. 이때 우리는 창3:15 사실적인 것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행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새 방언을 말하는 사실적인 증거가 왔다. 그래서 행11: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베드로까지 7명이 그 집에 들어갔다. 함께 경험한 사실을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선교적 경륜을 가진 생각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얻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사고가 있어야 한다. 왜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게 해야 하는가? 행2:36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가 되게 하시고, 이제는 살아남을 수 있고 영원한 나라까지 갈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으면 영적싸움을 하지 않아도 율법적이거나 종교적, 이기적인 것은 그냥 사라진다. 그런데 영적싸움을 하면 힘이 생기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에 더욱 좋아진다. 말씀을 따라가는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서로 구원받은 사람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되겠는가?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을 어디에서 행동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자녀 된 신분권세를 주셨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는 것이다.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교회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셨다. 이 은혜, 사랑을 받았다면 교회가 무엇인지를 정말 알아야 한다. 나의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사상 때문에 상대방이 실족 된다면 내 것을 깨뜨려야겠다는 절대가 있어야 한다. 심심하면 교회 안에서 시비를 걸고 넘어뜨리고 자빠지게 만들면 안된다. 내가 양보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위해 ‘당신이 위대해지고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가슴이 있어야 한다. 외롭다는 마음보다 다른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상대가 기쁘고 멋있어지고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일에 내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해도 괜찮다는 것을 갖는 것이 바로 선교적 경륜이다. ‘이미 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밟혀도 괜찮고, 씹혀도 괜찮다. 나는 십자가에 이미 날마다 못 박아 죽는 존재다. 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헌신할 수 있다’ 딤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행11:14~15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구원의 메세지를 던질 때 하나님의 성령은 은밀하게 움직이신다. 구원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그 시간, 그 날이 하나님의 날인데,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사람을 만나면 구원에 이르는 메세지를 해야 한다. 교회 안에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하는 것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내가 군 사역을 할 때 나와 함께 사역했던 분들 중에는 말씀 전에 자기 연주로 군인들을 다 잠들게 하는 분도 있었고, 실컷 메세지를 하면 군선교회 권사님이 나와서 군인들에게 “어머니” 를 부르라고 시킨 분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원망을 해본 적이 없었고 사람을 바꿔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바꿔주셨고, 그들이 이 복음을 마음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의 그 생각이 내 몸에 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으로,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다. 빌2:6~8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다 내어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사랑이 내 몸에 왔다면 그분의 메세지가 생각으로 있어야 한다. 막10:45 그분은 우리의 대속주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섬겨줄 것이라고 약속했고, 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사건을 치르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창3:15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는 이 땅에 죄인이 되어 뺨을 맞고 침뱉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속옷까지도 제비뽑기로 빼앗기신 분이다. 인간의 잔혹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멸시 천대를 다 받으시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셨다. 왜 그런가? 나를 위해서다. 날 위해 그렇게 당하신 분이 지금 교회 안에 성령으로 함께 역사하고 계신다. 그래서 내 완악한 생각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래야 성령은 역사하신다.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 하나님의 축복이 나의 축복이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세상에 매여, 세상 풍습에 매여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으로 살 것인가? 우리의 살 날이 많지 않다. 우리 인생에 살 날은 오늘 밤에도 끝날 수 있다. 우리는 사는 날이 없다. 죽을 때 사는 것이다. 진짜 죽어야 영원히 사는 것이다. 율법적, 종교적, 이기적인 틀에서 생각에 매이지 말고 갈2:20속에 새로운 생명이 되기를 축복한다.
어떤 새가족이 예수사랑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어떤 분이 어디에 사는지 수사관처럼 꼬치꼬치 물었다고 했다. 잠재의식 속에 내 몸이 율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도를 못 하는데 남이 전도를 하니까 기분이 나빠서 시기, 질투하는 것이다.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 그 사람을 끄집어내고자 하는 생각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사단이 깔아놓은 것, 곧 귀신들림, 더러운 똥이다. 우리 영혼에서 이런 것을 버리는 날이 되라. 창3장 사단은 우리 몸에 현재 진행형으로 나로 살라고 소리치고 외친다. ‘너 말고는 다 필요없는 존재다. 네가 행복해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살아라!’ 이놈이 우리 몸에 똬리를 틀고 소리치는 것이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라. 그러면 죽은 말씀인지 살아있는 말씀인지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어떤 말씀을 나에게 비추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에 답이 되고 내가 당하고 있는 일들 속에서도 해답이 되고, 성경 속에서 언제나 답을 찾게 된다. 그 때부터 우리 몸에는 율법적 종교적 이기주의들이 사라지고 참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를 가지고 믿음으로 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고 나는 살고 있는지 점검하는 예배가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은 의심하지 말고 복음을 말하라는 것으로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날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율법적 종교적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던 옛 사람의 삶을 살지 않고 이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판단들을 중지하고 선언하고 이제는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 충만을 더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성령이 가라 하면 가고, 먹으라 하면 먹고, 이제는 의심하지 말라 하면 않겠습니다 하고 나 자신을 내려놓는 믿음의 전사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라는 절대적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교회의 일을 막는 자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성령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주일 예배의 말씀을 듣고 언제나 순종하는 자가 되어, 성령 받은 사람이 되고 성령 세례 속에 날마다 기쁨을 갖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언제나 먼저 체험하고, 사람을 살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창세기3장을 인정하지 않는 신앙생활 속에 육신적인 사람으로 전락하여 하나님이 없다하며 나를 부인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무속의 영을 가지고 예수의 옷을 입고 교회만 다니는 이 시대에, 말씀을 통해 창세기 3장의 사실을 알고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됨을 깨달은 복의 근원으로, 미래를 보고 나를 준비시키는 자로,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이 시대 주인공으로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주시기 위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유일한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신 창세기 3장 15절 그리스도로 뱀의 머리를 밟으라고 하셨기에, 내 몸에 먼저 들어와서 내 고집으로만 살고자 하는 완악함과 세상풍습의 법을 깨뜨리는 영적싸움의 일을 가장 우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일어나는 증거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복음의 확장을 방해하는 율법적, 종교적 이기주의를 무너뜨려 어떤 누구라도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교회에 헌신하며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적 경륜을 이루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JESUS’ LOVE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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