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걸고 증거한 스데반의 그리스도
행7:54~60, 8:1
2015.06.14 주일 1부 말씀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맛을 보고 느끼면 참 행복과 평안을 누리면서 전혀 조급해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늦은 밤 중국에서 여러 사진들을 보내왔다. 중국에 있는 제자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메시지 하는 모습이었다. 그 제자는 복음을 알고도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마음에서 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조급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넘어가며 훈련을 따라가는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전할 제자라는 확신이 있었다. 보내온 사진 중 첫 번째 사진이 책상 위의 컴퓨터 인터넷을 통해 예수사랑교회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듣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곧 지금 서울에 있는 예수사랑교회 메세지를 천명으로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지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통해 또 한 번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 하나님은 분명 성경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면서도 대부분 영적인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몸부림만 치고 있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기에, 인간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지 말고, 먼저 영적인 싸움부터 시작해야 한다.
* 생명 건 영적싸움을 진행한 자는 세상을 이길 영적인 눈을 뜨게 된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 달린 광경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과 로마의 군사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고 소리쳤다. 곧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네 인생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한 번 기도해봐라.’ 하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지만 청년 예수 하나님은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해 간청하지 않았다. ‘내가 죽어야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살게 된다.’ 선택과 판단이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죽음의 현장을 오히려 기뻐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요셉은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시스템 속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고 한탄하고 탄식하지 않았다. ‘나를 앞서 애굽 땅에 보내신 것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택과 판단을 뚜렷하게 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너는 단창과 칼로 나오지만, 나는 살아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했고, 시므이가 다윗왕을 향하여 저주의 말을 퍼부었을 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입을 열게 하셨다면 그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영적전쟁을 몰라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해서만 몸부림을 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각이 달랐고 판단도 달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갖춰야 할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세다. 그래야 세상 현장에 가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인간적 욕구충족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판단과 선택, 생각 모든 것이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헌신은 “성령충만” 이다.
스데반은 강도에게 맞아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이런 사람들을 현장에서 이기려면 “생명 건 영적전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면 이렇게 죽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그런데 내가 아무런 지금 핍박도 없이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바로 영적싸움을 한 결과이다.
* 오늘날 모든 종교는 계시도 없는 진리를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이 자아실현을 자꾸 충족하게 만들어주려고 한다.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 더욱 충만하게 만들어 서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사랑, 용서, 화목 하라는 수많은 윤리, 도덕들로 이 땅을 가득하게 했다.
하지만 개인의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인간은 절대로 화목케 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만남이 원수 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인의 십자가 사랑 없는 화목 공동체는 마귀적인 것이다. 성경은 ‘광명한 천사’ 로 가장하여 사람을 속이고 약탈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했다. 고후11:14.
또 어떤 사람들은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없이 창조 질서를 보존해야 한다고 하는 ‘자연주의’를 주장하며 자연치유, 자연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우주의 기를 모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거의 승복을 입고 다닌다. 우주의 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병’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을 치유하다가 자신이 당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도 모른 채 사람에게 손을 대면 상대방의 질병이 그대로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기 운동 하는 사람들에게는 질병이 굉장히 많다. 그런 질병에서 벗어나려고 불륜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사실도 모른 채 ‘명상’을 한다. 그러면 모든 어둠의 흑암 세력들이 혼돈과 공허로 다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뭔가 깨끗해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엄청난 살인의 영이 있다. 창조주가 없는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우주의 기 운동들은 한 마디로 귀신 들린 것이다. 그들이 선포하는 영성들은 하나같이 인간 욕구의 한계를 넘고 죽음을 이기려고 무아지경 속에서 황홀한 것을 경험하기 위한 하나의 육신 충족이다. 그래서 자꾸만 허튼 소리를 하고, 뭔가 자기가 있는 지역에 진동이 일어나길 원하지만 결국은 남을 헤치는 사람들로 전락할 뿐이다. 성철 스님은 죽음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일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지옥으로 떨어져 한이 만갈래나 되는구나’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어지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공허와 혼돈, 흑암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스데반의 설교로 인하여 그는 순교에 임하게 되었다.
행7:54절, 유대인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들어오면, '아멘 그렇습니다' 해야 하는데, ‘뭐야 이거, 무슨 또 마귀 마귀 그래? 무슨 영적 싸움, 영적 싸움 그래?’ 마음이 찔리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한다. ‘오늘도 뻔해, 제목 보니까 창세기3장 나올 것 같아.’ 이런 사람들은 분명 자기 마음에 과녁이 박혔음에도 자신을 못 바꾸고 오히려 이를 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다. 특히 교회를 다니면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20~30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메시지를 자신의 것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지난주 내 마누라가 목사님한테 나에 대해 일러바쳤어’ 이런 생각이나 하며 메시지는 전혀 가슴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행2:37, 마가다락방의 역사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 회개하고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이 있었지만 자기 회개와 자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와 재앙인지 성경을 통해 분명히 말씀한다.
->유대인들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 앞에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이 충만했다. 무엇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스데반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스데반은 분명 모든 인간의 영혼은 창세기1:2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법치국가, 질서를 강조해도 자기 하나를 다스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귀의 인도를 따라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에 찔림이 와도 사단의 역사로 바꾸고 거부해버린다. 창세기3장으로 말미암아 이런 상태 속에 원죄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는 전쟁을 시작하라고 창세기3:15을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 인간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모든 영을 그리스도로 산산이 무너뜨려라.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그 사람은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말씀 하셨듯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결단코 영적인 전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고 내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을 때 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소유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서 담대하라’ 말씀하셨다. 세상을 바로 완벽하게 이기시기 위해 십자가를 친히 담당하러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어떤 대적자 앞에서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영혼 속에 있다면 성령 곧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영적인 상태와 악한 것으로 인하여 이론 사상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제목의 책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책들로 중독되어지면 사람이 영적 전쟁, 영적 싸움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며 그런 설교들은 인간적 욕구충족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거짓으로 중독 시킬 뿐이다.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다.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가 있어야 되는데, 사람들의 이론적 계시를 가지고 진리라고 한다. 철학이나 이론은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몸으로 느끼도록 도와줘야 한다. 혹시 하나님을 못 만났다면 영혼 속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된다. 영접하는 순간 내 자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시’ 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가 없는 이론들을 계시라고 속아 끊임없는 자아실현과 자아충족을 위해 살아가지만 인생에 찾아오는 분노를 절대로 끊을 수 없다. 우리 영혼 속에 이론, 철학, 종교에 집착하게 만드는 저주의 질병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뜨려야 한다.
행7:57-58, 하나님을 잘 믿는 백성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쳤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계시가 없는 교회 안에서 종교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들은 이렇게 엉뚱한 짓들을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이렇게 마귀가 된다. 요8:4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주는데, 그 마음에 찔리기만 할 뿐, 오히려 살인자로 돌변했다. 그래서 일평생 죽는 날까지 거짓말쟁이로 살아가며 자비가 없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같은 쓰레기는 죽어도 되!’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인다. 이것이 바로 이론 사상에 길들여진 중독과 집착의 결과다. 결국 이상한 육신적 정의감만 앞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마귀적인 것으로 무서운 가면을 쓴 것이다. 본문을 통해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개하며 거듭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스데반의 기도는 무엇인가?
무지비하고 폭력적인 사람들로부터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욕구충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선택과 분별력이 없어 잘못된 판단 속에 신앙생활 자체가 우왕좌장해서 사람 자체가 늘 혼미하다.
자신의 영혼을 살아계신 주 예수께 맡기고 오히려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들의 죄악을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혹시 나로 인하여 저들이 죄악을 짓는다고 해서 저들에게 죄악을 덮어씌우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있으면, 내 영혼 속에서 자비와 사랑, 용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마음만 찔리고 자비가 없고 더 무자비하거나 말씀을 들었는데 폭력적이고 분노적인 것이 있다면 영적싸움, 영적전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있는 나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스데반은 자기 인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살려달라고 몸부림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만큼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다.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뇨?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문제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셨고, 게바에게 보여주셨고, 열 두 제자에게 보여주셨고, 오백여명이 넘는 마가다락방에서 보여주셨고,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여주셨고, 만삭되지 못한 어설픈 사울에게까지도 우리 예수님은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 속에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전도와 선교, 우리의 믿음 자체는 헛것이 될 뿐이며,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이제,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과 영적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삼키시고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죽음의 독침에서 자유함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사망의 독침’에서 벗어났기에 어떻게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죽음을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
예수를 시인하면서 죽어야지, ‘하나님 왜 나를 안 살려주십니까?!’ 하며 죽는다면 이것처럼 무서운 저주가 없다.
나는 자식들이 버린 부모들을 돌봐주면서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볼 때가 있었다. 그런데 끊임없이 원망 불평 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저 감사하다고 하며 죽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믿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혹시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면 ‘하나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생명의 근원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시작된다면, 사망의 독침의 저주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분명히 죽음의 독침은 죄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독침을 맞은 것, 곧 죄의 권세이며 그 죄의 권세가 율법이라고 말씀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율법이 바로 무서운 재앙이다.
요5:24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이며,
골1:13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나라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이제부터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를 살려내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면 전쟁을 하게 된다. “내 영혼 속에서 자비와 사랑, 용서도 없이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지금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주의 천군 천사가 움직여지고 이 세상을 정복하도록 명령해주셨음에도 그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주저앉게 만드는 저주의 이론, 사상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중국에 있는 제자는 바로 이렇게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내 마음이 너무 기뻤다. 개인의 영적전쟁 없이도 메시지는 누구에게나 할 수 있다. 나는 주변에 그런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세 시간씩 기본 메시지를 하고 강의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셨기에 마귀의 일을 멸하면 죄를 짓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자꾸 부인하고 거스르면, 마음에 메시지가 들어와도 회개하지 않고 이빨을 갈고 귀를 막는다. 하나님의 말씀 절대 안 듣는다. 사람의 말도 안 듣는다. 그래서 결국은 살인자가 된다.
스데반의 피는, 교회를 살리는 교회의 씨앗이 되었고 생명이었듯 우리의 피가 그 순교의 피가 되어야 한다. 순교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영적인 전쟁을 하는 사람이다.
*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체험하는 시작이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살해당했지만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고 말씀했다.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죽음으로서 부활을 체험할 수 있기에 어떤 모양으로 죽던지 죽음 앞에 자유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그렇게 잘 믿는 권사님이 강도로부터 피살을 당했대, 세상에’ 피살을 당했다고 하는 사람은 안 믿는 것이다. 피살을 당해도 ‘잔다’ 해야 한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죽음 앞에 침울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잔치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망대에 깔려 죽은 열 여덟명이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다. 눅13:4. 이 땅은 끊임없는 재앙과 멸망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죽는 것이 복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그 어떤 죽음이라도 죽음이 아니라 ‘잠’ 이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사망관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올라오라고 부르시는 시간표다.
우리가 죽는 그 순간은 예수님이 서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기에 ‘죽음’ 을 환영하고 기뻐하고 영접하는 그 영원한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지켜보신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죽음 앞에 구출작전 없이 왜 죽게 하셨을까
스데반을 돌로 치며 죽이려고 하는 급박한 순간에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출 작전 없이 그냥 죽었다. 홍해도 가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먹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는 수많은 구출작전을 행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왜 그대로 두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담고 우리를 환영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죽음은 곧 하나님 나라에서의 환영이며, 기뻐하는 잔치며 예수님이 서서 우리를 영접하는 환영의 만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데반을 향해 구출 작전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광야에 있는 자들은 왜 구출 하셨는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구출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한 스데반과 같이 죽음의 독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하는 자유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음에도 우리 안에 각인된 수많은 종교적 이론, 철학과 사상으로 인해 끊임없이 욕구총족을 위해 살아가며 말씀을 듣고도 내 자신을 바꾸지 않으려는 마귀적이고 세상적이며 정욕적인 모든 완악함을 완전히 무너뜨려 이제는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자 되게 하옵소서. 스데반의 생명이 교회를 살린 생명의 씨가 되었듯이 영적싸움 속에 자비와 사랑의 순교의 피를 흘려 모든 생명을 살리는 전도제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