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28 주일 1부 말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켜 내 자신이 먼저 참 자유와 해방을 누려야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이제 새 것을 위하여 옛 것을 버리는 씨름이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된다. 이것을 몰랐던 유대인들은 편협한 생각에 잡혀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저 더러운 새끼들, 저 혼혈아 새끼들, 저 음란한 놈들’ 이라고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고 그들을 무조건 미워했다. 이처럼 우리가 옛것을 버리는 씨름을 하지 않는다면 편협한 생각이 우리의 영혼을 장악해버린다.
* 영적싸움으로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잡는 성령의 사람이 되라
눅17장,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던 열 명의 나병 환자 중 단 한 사람 만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와 경배를 드렸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 이었다. 아홉 명의 유대인은 성령의 사람이 되지 못한 채 육식적인 치유만 받았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 단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음이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나를 축복해주신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만 들어도 중풍병과 앉은뱅이 된 것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선물인 새 것, 성령의 사람이 되어 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게 된다.
눅10장,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정상적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지만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그를 도왔다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도(롬3:23)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엇인가 편협한 생각의 틀에 묶여서 새사람이 되기보다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며 욕하고 비아냥거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리 예수사랑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 새로운 성령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 모든 옛사람의 것을 태워버려라.
본문 말씀에 나타난 빌립은 환난으로 인해 흩어진 사람 중 하나였다. 그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우리 인생에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 알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올 수 있지만 복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기에 절대로 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빌립이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메시아 하나님이 여자의 배를 빌려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각 사람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빌립이 이 비밀을 가지고 있었더니 하나님이 흩으시기 위해서 환난을 주셨고 사마리아 인들은 그 빌립의 말을 좇았다고 말씀했다. 우리 개인에게 환난이 찾아왔다면 흩어지면 된다. 그냥 떠나라는 것이 아닌,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다.(고전1:24)
복음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뛰어다니게 만든다. 그래서 반드시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 싸움을 하면 움직이게 되고 모든 허물들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된다. 복음은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청년 예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청년 예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청년 예수이신 하나님, 그리스도는 살아서 움직이시기에, 영적싸움을 할 때 허물 따라 사는 시달리는 얼굴에서 벗어나 천사의 얼굴처럼 평안하게 바뀌게 된다.
갈2:20, 우리의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다. 이것을 공포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무가치한 인생을 살겠는가? 무능과 무기력, 우상을 이기는 권세는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공포하고 싸워야 할 것 아닌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영적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무능과 무기력, 음란, 육체의 우상으로 다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육체로부터 오는 달콤한 그 시간이 영원까지 간다. 삼손은 여자 하나 때문에 눈알이 빠졌고 왕 중의 왕이었던 다윗도 여자 하나 때문에 눈물로 침상을 적실만큼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성경은 말씀했다. 달콤함은 고통이다. 이 땅의 모든 지체 것을 버리는 영적 싸움이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공포하면 살아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전도하지 않고 자신을 구원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적용하지 않으면 그 복음이 다 날아가 버린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실컷 복음을 듣고 좇았는데도 날아가 버렸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싸움이 되어 질 때 그 사람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 것을 위하여 옛 것을 버리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옛 것을 다 내어버려라. 율법과 종교, 이데올로기 사상들을 사로잡아 밟아라.
*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전도와 선교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편협한 생각을 깨뜨리길 원하신다
흩어진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와 전도는 단지 사람이 파송되는 것이 아닌 강권적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한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찾아왔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을 본 제자들이 두려운 나머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자들을 흩으시고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무엇인가? 복음의 사람들을 흩어 사마리아 성에 들어가게 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을 개, 돼지처럼 쓰레기 취급을 하며 절대 상종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성으로 지나다니지도 않았다. 그만큼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을 깨뜨리시기 위해 환란과 핍박을 만들어 놓고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사마리아 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을 받길 원했고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그 증거가 우물가의 여인이다. 그는 야곱 우물가에서 물을 기르면서 늘 메시아를 기다려왔었다. 그러던 중 그렇게 기다렸던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온 동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전했을 때 동네 사람들이 다 예수를 환영했다. 그랬던 사마리아 성에 빌립이 들어가서 메시지를 했을 때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말을 좇았다고 했다. 무조건 아멘!' 했다는 것이다. 아멘만 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터졌지만 성령을 받고 옛것을 버리면 끝난다. 누군가 사건을 저질렀다면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고 누구에게나 시간표가 있기 때문에 성령만 받으면 해결된다.
오직 성령 충만을 받게 된다면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된다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직접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어 유대 땅에 일어났던 복음의 능력이 드디어 사마리아 성 까지 들어갔다.
전도와 선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가졌던 사마리아 인들에 대한 미움과 우월감 같은 편협한 생각들이 우리 속에도 있다면 이제부터 깨뜨려 버리고 낮아져야 할 것이다.
우리 속에 편협한 생각들은 쉽게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신앙이 있고, 선교의 열정이 있다고 해도, 교회생활을 잘 한다고 해서 편협한 생각들이 깨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경건함으로 몸부림을 쳐도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과 같이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한계에 부딪히게 만드신다.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간접 살인을 저지르며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저 사람이 혹시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큰 일 아닌가? 내가 왜 이런 짓거리를 했지? 내가 왜 이렇게 무능하고 무기력 할까? 도대체 왜 내 육체의 우상은 이렇게 완악한 것인가? 나는 이거밖에 될 수 없는 사람인가?’ 죄책감과 죄의식 속에 무능과 무기력의 우상이 자신을 막 짓눌렀을 것이다. 이런 상태까지 주저 앉아있던 사울의 편협했던 생각들을 깨부수는 시간표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며 그리스도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할 때 사람은 살아나고 일어나는 것이다.
스데반의 일로 환란과 핍박이 찾아오자 하나님은 제자들이 사마리아 인들에 대해 못된 생각을 품을 겨를 도 없이 정신없이 도망가게 만들었다. 무작정 도망쳐 들어간 곳이 그들이 더럽다고 했던 사마리아 성이었다. 그냥 사마리아로 들어 간 것 같지만 우연히 들어간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인들보다 자신들에게 더 더러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건을 만들어서 만나게 하신다. 얼굴 바라보고 깨지라고. 혹시 보기 싫은 인간이 있다면 내 것 깨뜨리면 된다. 혹시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나로 인한 피해자 라고 여기면 된다. ‘저런 인간은 정말 죽어야 돼’ 하지만 정말 죽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해 정말 죽었다면 무슨 말이 있는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신 못 차리는 날이 온다. 빌립에게 있는 유대사상이 죽지 않으니까 정신 못 차리는 시간표가 찾아왔다.
요나를 봐라. 얼마나 편협한 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는지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는 강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신 못 차리도록 고기 뱃속에 집어넣었는데도 꺾이지 않았다. 요나와 같이 우리 안에 고집스러운 나를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0만 원짜리 문제 해결하고 200만 원짜리 문제를 맞닥트리는, 늘 정신없이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한 인생이 된다. 하나님은 새것을 위해 이런 옛 것을 버리길 원하시기에 이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나쁜 생각들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짓밟아 버려야 한다.
전도의 역사가만 기록된 사도행전에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이 기록되었다. 우리 예수사랑 모든 가족들이 바로 이러한 시스템 속에, 영원히 기록될 전도의 역사 속에 있는 것이다. 지구 탄생 이래 입양아 사역은 예수사랑교회가 처음이다. 교회사 탄생이래에도 처음 있는 일이다. 성경에 모세 때나 조금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정확하게 시작한 교회는 한국에도 없었는데 예수사랑교회가 이 시대에 맡아서 시작한 것이다. 입양아, 혼혈아 사역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인 줄 믿는다. 우리가 그들을 초청하고 전도하여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도하는 것이다. 예수사랑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교회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행8:5,12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들은 빌립에게 구제와 봉사를 맡겼지만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하여 사람을 흩으시고 빌립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 사마리아 성까지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곧 사망 권세 잡은 마귀로부터 묶여있는 자들을 풀어주시려고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흩으시려고 은혜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전도와 선교에 방향을 맞추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면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길과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으면 된다.
* 육신적 수준의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받아 새롭게 시작하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수준은 거의 대부분 육신적 응답에 국한된다. “교회 나오면 감기 안 걸려”, “교회 성도들이 많아서 장사가 잘 될 거야” 전도하는 내용도 대부분 이런 식이다. 감기 걸리면 비타민 먹으면 된다. 예수 안 믿어도 좋은 재료를 쓰는 식당은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식당 안에 예수님 사진은 걸어놓고, 성경구절은 붙여놔도 맛없으면 그 식당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인도를 못 받는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 가면 예쁜 여자 많다고 하며 데리고 오는 사람도 있다. 여자들은 남자가 꽃 하나 들고 오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여자를 책임 질 수준의 남자가 아니라면 포기해야 한다. 남자 역시 분명한 믿음의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선포했더니 분명히 능력이 나타났다. 그리고 막3:15,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사용하고 약한 것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했다. 곧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신들의 우상을 타파하며 무능과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라고 분명히 선포했다는 것이다. 행8:6~8, 그 증거가 뚜렷이 나타난다. 빌립이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를 사용했더니 사마리아 인들이 빌립의 말하는 것을 좇고 중풍병자, 앉은뱅이들이 일어나고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갈 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는 메세지는 없다. 빌립의 말을 좇고 기쁨도 있고 세례도 받았다고만 되어있다.
곧 여기에서의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육신적 표적을 보고 감격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육신적으로 무엇인가 나타나면 ‘어휴 좋겠다’ 하다가 또 문제가 터지면 ‘이상하다’ 하는 식으로 보여 지는 표적, 육신적 응답 앞에 왔다갔다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마리아 사람들의 주특기였다. 성령으로 오는 기쁨이 아니었다. 예수 믿고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했더니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긴 했지만 그런 기쁨은 즉각적인 문제가 따라온다. 육신적 표적만 보고도 사람이 따라 붙을 수 있다. 그가 바로 본문에 말씀한 마술사 시몬이었다. 곧 이런 표적 앞에는 귀신 들린 자도 따라 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성령 충만 이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유혹을 당하면 순간은 좋은 것 같아 보이나 무능과 무기력, 육체의 우상이 우리를 덮을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여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이름을 덧입고 일어나 걷게 하시고 그 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다고 약속하셨다.
8:10, 사마리아 인들은 사람들에게 눈속임을 하는 초능력자를 보고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고 할 만큼 좌우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를 믿어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렇게 좌우 분별을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렇게 할 때 분별력이 생기는 것이다.
사마리아 인들은 예수그리스도에 진짜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마술사의 속임수와 빌립의 표적을 분간하지 못하고 나타나는 표적에 그냥 할렐루야 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목사가 썩은 이를 금니로 만들어 준다고 하면 다 거기 있지 않은가? 초능력의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며 뭔가 보여 줄 수 있지만 그 일을 행하는 자신만은 자신을 안다. 나는 가짜라고. 그런데 그 가짜가 진짜로 바뀌는 방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가지고 새 것을 위하여 자신의 옛 것을 버리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된다. 그러면서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밟게 된다면 그 이름에 충만해지면서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어보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을 통해 볼 수 있다. 많은 목사들이 초능력과 같은 능력을 행하며 큰 기적들을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짜에 불과하다.
진짜 하나님의 새로운 선물, 성령을 받아야 된다. “오직 성령 충만 받으라” 는 메세지가 우리 영혼 속에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가 되어 하나님 권능으로 앓고 있는 허물, 영적인 문제들을 정말 내어 쫓고 새롭게 도전하고 시작하여 우리에게 자리 잡고 있는 무능과 무기력, 육체 우상, 땅의 지체가 죽고, 우리 안에 청년 예수 하나님이 살아서 성령으로 역사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무능과 무기력, 육체의 우상에서 빠져나오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소유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기에 육체의 우상과 내 고집, 편협한 생각을 무너뜨리는 영적싸움을 통하여 이제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옛 것, 앓고 있는 허물들을 벗어버려 전도와 선교에 방향 맞춘 그리스도의 증거 있는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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