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스토리가 된 사도바울
행13:13~16
2015.11.29 주일 1부 말씀
선교를 하는데 있어 우리 삶에 항상 나타나는 모습 속에 자신을 점검해 볼 것이 있다. ‘나는 강단의 메시지 속에 내 개인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타고 한 주간을 살고 있는가?’ 성령의 인도 속에 자신의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도중이탈자가 될 뿐이다.
*예배의 만족 속에 강단의 메시지가 반드시 우리 자신의 스토리가 되는 올바른 믿음
예수사랑 가족들에게 정말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단코 속지 말라” 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속지만 않아도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다.
우리가 속는 이유는 창세기 3장의 저주와 진노가 우리 삶의 24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으라고 말씀하셨다. 롬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말씀하셨기에 고후10:4~5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는 것이다.
창6장,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영혼 없는 육체로 살아가는 삶 속에 하나님은 창3:15하나님의 절대적 언약을 붙잡아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자신과 영적싸움을 시작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완전한 자며, 의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어느 날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삶을 살며 끊임없는 진노와 저주의 불화살을 개인이 맞게 된다. 여기서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다.
현실과 세상, 사단의 문화 속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 알 수 없는 질병의 염려와 두려움, 낙심이 엄습할 때마다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너는 일어나 걸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피 흘리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그가 죽으심으로 나는 새로운 재창조의 몸이 되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모든 질병은 산산이 무너지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함이 임할지어다!” 하고 인본적인 방법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끊임없이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 남은 자, 남겨진 자, 이 시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루터기로 인침을 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함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가 열어주신 참된 길이 “예배” 이기에 반드시 예배로 만족해야 한다.
예배로 만족하지 못하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의 스토리가 없다. 목사인 저 역시도 예수사랑교회 강단의 말씀을 붙잡고 개인의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어느 날 자신도 무시를 당하는 날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담기 시작하면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인생이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케 된다. 그래서 예배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문제를 만족시켜라.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깨어있으라.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자가 되라. 언제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해라.”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따라간다면 우리 인생에 못할 일이 없다. “너는 오늘 그리스도 이름으로 죄 사함 받을지어다. 너는 머리끝에서부터 다리까지 그리스도의 힘을 얻을지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자다.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의 존재를 항상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딤후3:15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말씀과 진리의 터 위에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라고 했다. 예배로 만족하지 못하고 말씀을 놓치는 것,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서 벗어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죄’ 다. 그래서 주일 강단 메시지를 놓치면 다른 행동이 나온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스토리와 증거가 되어야 한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녔지만 수많은 메시지를 놓치고 개인의 스토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도중 이탈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스토리로 만들지 못해 선교여행에서 이탈된 마가의 믿음
1차 전도를 시작하고 전도자의 일행 속에 함께 가야 하는 마가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돌아갔다.
마가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좇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큰 집을 소유하한 부자로 자신의 집이 마가다락방이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마지막 성찬식 가졌던 장소였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120명의 제자들이 모인 곳도 마가다락방, 마가 요한의 집이었다. 여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인 사람들이 10여 일 동안 기도했고 그들에게 식사제공과 모든 헌신을 했던 사람이 마가 어머니이다.
그 장소에서 오순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예수님 부활 이후 첫 번째로 교회가 탄생되었고 예배의 처소가 되었다. 초대교회 당시 현실의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지만 마가 다락방에 임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분위기 속에 믿음의 아들 마가는 자랐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응답의 장소에서 자라난 마가가 도중 이탈자가 된 것이다. 분위기 속에 나온 헛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사랑교회의 분위기 속에만 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헛것이다. 분위기 속에 있는 믿음을 선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체험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의 분위기에 빠져있다. 개인의 문제 앞에 기도원으로 가거나 능력 있다고 하는 목사들을 찾아다니다가 귀신들린 박수 엘루마 같은 사람을 만나 비참해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분위기 속에 있는 믿음’ 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스토리로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예배를 실패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와서 앉아있으면서도 메시지를 듣지 않는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목사들이 메시지를 해놓고도 분위기에만 빠져있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잡는 목사가 많지 않다. 나 역시 과거에는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창3:15, 이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24시, 25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는 창3장의 저주, 이 세상 신, 흑암으로 장악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혼미케 하는 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이것과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과의 영적싸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잡지도 못할 뿐 아니라 떠돌아다니며 그 말씀을 설명해준다고 다니다가 설명해주는 사람이 저주를 받고 어설프게 알다가 더 비참해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자신이 분명히 체험했다. 과거에 그리스도 그 삼중직, 하나님의 축복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에 담지 못하며 예배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끊임없이 분위기 속에서 나오는 어정쩡한 믿음을 가지고 막연하게 살게 만드는 불신앙의 저주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이렇게 마귀의 일을 사실적으로 무너뜨렸더니 그 이름을 부를수록 힘이 생겼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매일 얼마나 누리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가 나온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힙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에 담지 못하게 하는 저주의 질병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분위기 속에서만 하나님을 믿는 척, 기도하는 척, 아는 척 하는 저주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질지어다!” 이것이 우리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조금씩 체험하게 되면서 유일성의 응답이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람은 독립적인 사람이 된다. 독립적인 믿음을 갖지 않으면 분위기에 따라 믿는 척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불신앙 하는 사람들을 만나 불신앙으로 간다.
- 그리스도 이름의 개인적 체험 없이 분위기만 좇았던 헛 믿음
그리스도 이름을 체험한 독립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체험적이고 독립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스스로 결단하는 믿음 속에 “사람의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를 듣고 불신앙하게 만드는 사단은 무너지고 너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을지어다!” 이렇게 결단하는 힘이 생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으면 끌려다니는 인생이 될 뿐이다. “나는 네가 필요해~!” 하며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나를 찾는 자가 있다. 벧전5:8.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이런 박수무당이 있는데 깨어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분위기에 잡힌다.
분위기 속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개인이 체험한 믿음이 되려면 사람의 말을 따라가지 않고 강단의 메시지를 따라가야 한다. 그 때, 독립적인 사람, 결단하는 사람이 된다.
막14:51~52, 예수님이 체포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마가가 베로 만든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예수님을 좇아갔다. 예수님이 진짜 잡혀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너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한 패지?” 하니까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발가벗은 채 도망갔다.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않고, 그 이름으로 결단하지 못하면 이렇게 어정쩡한 사람이 된다.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좇으니까 어린 나이에 그 분위기 속에서만 따라갔을 뿐이다.
바나바의 생질이었던 마가는 바나바의 안디옥 전도에 함께 따라왔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을 받을 때 바나바에 의해 젊은 수행자로 선택을 받게 된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라붙어 1차 전도 여행에서 좋은 제자로 함께 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따라간 마가의 믿음의 한계가 오늘 본문을 통해 나타난다.
신앙생활은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신앙생활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할 수 없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부르고 찾아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반드시 개인이 체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적이지도 않게 되고 결단하는 힘 자체가 없다.
구브로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고 바나바를 따르는 굉장한 사건들을 보며 마가가 그 현장의 감격과 행복한 분위기 속에 자신도 우의정이나 좌의정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지역에의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종교 지도자, 바보 섬의 총독이 단 번에 무릎을 꿇는 엄청난 현장의 분위기를 마가가 느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겠다는 것이다. 산적과 강도가 많고 거친 산맥을 통과하며 지역마다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략이었다. 마가는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거기 가면 죽을 수도 있다, 굉장히 힘든 지역이다, 배를 잘못타면 배가 뒤집어져 죽을 수 있다, 강도가 많다는 등 수많은 부정적인 말들을 듣게 된다. 자기와 함께 하는 부활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지고 완전 부정적 사람이 되었다. 그 때 바울은 마가를 향해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말한다. 하지만 마가가 창3,6,11장으로 덮이니까 바울의 회유도 듣지 않고 자신은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어린 마가를 억지로 끌고 갈 수 없어 마가를 두고 간다.
마가의 중도하차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는 불편해졌다.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마가를 호되게 혼내고 떠나보낸 바울에게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다. 다소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도 축에도 낄 수 없었던 사울, 그 반면에 바나바는 마가다락방의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 진짜 지도자였다. 하지만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메시지를 시켰고 1차 전도여행에서도 바울을 시켰다. ‘어떻게 저렇게 교만할 수가 있어’ 마귀가 있기 때문에 바나바도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들이 가진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고를 한다.
많은 핍박을 받고 매 맞는 일도 당하고 배고픔과 옥에 갇히는 일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느끼며 엄청난 전도의 성과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선교에 동참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축복과 대우를 했다. 이런 분위기를 본 마가가가 자신의 이탈을 후회하며 2차 전도여행에서는 다시 함께 하겠다고 했다. 분위기에서 나오는 믿음은 이렇게 늘 상황에 따라 왔다 갔다 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체험해야 하는데 마가는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 분위기 속에서 좋은 일만 기대하는 신비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마가를 향해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안된다고 했다. 그 때 바울에 대해 섭섭함이 있던 바나바와 다투게 된다. 그래서 바나바는 생질 마가를 데리고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난다. 전도의 문이 계속 열리는 바울의 현장을 목격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베드로를 좇게 된다. 그리고 베드로 밑에서 마가는 드디어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5:13, 마가를 “내 아들” 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드디어 마가는 바울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개인이 체험하지 않고 개인의 결단 없이 독립적이지 않다면 늘 분위기 속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과의 관계만 멀게 하며 하나님의 일을 그릇되게 할 뿐이다.
‘누구 때문에 내가 교회 간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절대적 방법 그리스도로만 해결 받는다. 사망아 질병아, 무능과 가난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게서 떠나갈지어다. 지금까지 나를 묶고 있던 창세기 3장의 저주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질지어다!” 선포해라.
-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삼촌 바나바가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려다가 안디옥교회를 탄생하게 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하고 지도자는 삼촌인데 설교는 바울이 해서 인기는 바울이 다 받네. 바울이 메시지를 하면 이적과 능력, 귀신이 나가는데 우리 삼촌은 뭐지?’ 마가는 수많은 인간적인 생각들에 잡혀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갖지 않으면 이렇게 나약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독립적 신앙이 없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도 없다. 찬송하니까 같이하고 다른 사람이 기도하니까 기도하고 사람들이 믿으니까 그냥 따라서 믿었던 신앙생활을 버려라. 그리스도는 창3장의 저주와 진노를 꺾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사는 24시간 속에 염려와 두려움, 낙심, 절망과 죽음의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결박하고 내어 쫓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지만 하지 않으면 끌려 다니는 인생이 될 뿐이다. 그래서 신앙은 개별적이고 확실한 체험을 가져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로 거하시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 받으며, 나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사단의 세력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결박하는 권세가 나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나와 동행하시고 절대적으로 나를 인도하신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응답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살아가는 인생 속에 잠시 실수하고 실망스러운 일이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승리케 하시며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승리케 되는 것이다. 이 확신이 우리 영혼 속에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기에 쉬지 않고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 사람에게 의존하는 믿음
어린 청년이었던 마가는 늘 사람을 의존하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다. 영적으로 바꿔야 한다. ‘교회가 나를 어떻게 해주겠지?’ 하는 생각도 버려라. 예배로 만족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가지 않으면 교회는 의미가 없다.
질병과 두려움, 미래의 응답 없음에 낙심하는 생각 속에서 무능과 무기력으로 똬리를 틀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저주를 무너뜨리고 결박해라. 그러면 환경의 변화가 온다. 흑암이 떠나가면서 사단의 머리가 박살난다.
마가가 벧전5:8을 성취시키는 사람이 되었을 때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곧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영적싸움을 했더니 자꾸 더 나쁜 짓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올 때마다 자기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강단의 메시지를 따라가면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영적싸움을 하면서 점점 나빠지는 사람은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것, 그 사람에게 숨어있던 것이 나와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80세 넘어 죽을 때 변한다. 사실은 숨어있는 영적문제가 62세에 안 터지고 젊어서 빨리 터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강단 메시지를 따라 결단하는 사람은 살게 된다. 상대가 이상해도 먼저 내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마가의 변화된 믿음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스토리로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나에게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나는 얼마나 살고 있는가?’ 말씀을 듣고 자신을 점검한다면 우리는 도중 이탈자가 아니라 세계복음화의 리더로 쓰임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이제 분위기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개인이 체험하여 사람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듣고 말씀에 결단하는 삶이 일어나야 한다.
마가는 베드로와의 전도여행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계속 듣게 된다. 복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하지 않으면 누구나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체험하게 된 것이다(막1:1).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전도도 하며 내 영혼 속에 장악된 창3장의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기 위함이며(막3:15),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주로 오신 것이다(막10:45). 인간은 죄의 권세를 그리스도로 밟지 않으면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개인의 스토리로 만들지 못한다. 지금도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보좌에도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시면서 그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에게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다(막16:17~20).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마가는 드디어 ‘마가복음’ 을 기록하게 된다. 원래는 베드로 복음인데 마가가 기록해서 마가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귀신 이야기다. 원래 마가는 바울의 귀신 축사를 굉장히 기분 나빠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영적싸움을 강조한 바울을 떠났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돌아오게 된 것이다.
“구주 예수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그 구주가 곧 예수는 그리스도 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현장마다 다니며 전했다.
강단의 메시지를 잡지 않으면 이탈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자신을 세웠던 마가.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마가의 변한 소식을 듣고 모든 교회에 그를 천거한다. 그가 영적싸움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딤후4:11,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요 사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영적싸움 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목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강단의 메시지로 만족하지 않고 강단의 메시지를 따라가지도 않으며 분위기에서 나오는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목사인 나의 가슴과 통하고 나의 기도가 여러분에게 통하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로 답을 내는 것이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무능과 무기력 속에 육체로 살아갈 인생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남겨진 자로 나를 부르시니 감사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말씀을 나의 것으로 잡지 못하고 분위기 속에 사람을 의존하는 막연한 신앙이 무너지고 예배의 만족 속에 나의 구주가 되신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날마다 체험하여 불신앙을 무너뜨려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결단의 힘이 있게 하옵소서. 이제는 모든 인본주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의 스토리가 되는지 내 자신을 점검하여 세계복음화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계획을 이룰 사명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