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기회로 바꾸는 전도,
선교의 가슴
행15:36~41
2016.02.21 1부 말씀
구원의 감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헌신, 절대적 선교가 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로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지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며 사명이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우리에게 주신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 생명 되시기에 마음껏 그리스도 그 이름을 찬양하며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답이 나타난다.
* 인간의 문제는 창3장에서 시작되었기에 오직 창3:15로만 해결 된다
- 창3장의 아담과 하와를 공격하여 넘어뜨린 사망 권세 잡은 자, 운명으로 덮어버린 그 사단은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가 가진 기준, 사상, 이념, 철학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난 창3장이다. 그래서 문제는 하나인데 사람들은 너무 다양한 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요19:3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만 우리 인생의 모든 고통이 해결된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얼마나 이 감격 속에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시간표는 찾아오며 그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 구원의 감격이 없이는 문제 해결이 없다. 광야에서 빵이나 먹고 물이나 한 모금 얻으며 육신적으로 필요한 것을 갈구하는 존재로 살 뿐이며 인생사는 여정 속에 끊임없이 불화만 일으키고 온갖 가면을 쓰고 고상하게 하나님을 믿는 척 하다가 처절하게 낙오자가 되는, 응답 없는 인생을 살 뿐이다.
- 능력대력을 하지 않으면 육신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본문에 나타난 마가 역시 이 능력 대결이 사라지니까 자기 기준과 자기 사상이 찾아오면서 한 가지의 일로 함께 못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예수님을 위해 재산과 목숨까지 내놓으셨던 자신의 어머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바울의 후견자가 되었던 삼촌 바나바. 이렇게 엄청난 배경을 가진 마가가 능력대결을 잃어버리자 고상한 사람으로 전락했다. 그래서 밤빌리아 사역에서 큰 질병에 시달렸다.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 사단의 권세를 박살내라.’ 이 바울의 메시지를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밤빌리아 1차 전도여행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고 겨우 버가까지 데리고 왔음에도 마가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섭섭한 채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권세 있는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도 운동에 가담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불신앙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찌어다!’ 해야 하는데 이것을 하지 못하고 바울과 바나바만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다. 1100Km가 되는 고산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여러 핑계를 대고 갔을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고백해놓고 결국엔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는 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 이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지만 찬양 예배 때 박수 치는 자신만 바라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박수를 치면서도 박수 칠 힘도 없고 힘을 다하고 사랑을 하는 마음 하나가 없다. 다윗이 범죄를 저질러 나단 선지자에게 지적을 당했을 때 스스로 자신이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려 범죄 하였고, 그 이름에 감격하지 않고 그 구원을 망각하고 잃어버린 것에 침대와 베갯잇이 다 젖도록 회개하였다고 고백했다. 구원의 감격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것이다. ‘내 인격으로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 속에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여기에 취하게 되면 절로 힘이 생기고 감격과 감사, 헌신, 절대적 축복이 저절로 오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능력 있는 사람이 힘 있게 할 수 있다. 이것이 감격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고상 떠는 것, 믿는 척, 기도하는 척, 찬양하는 척,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하지만 갈보리 십자가, 그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지 않았다. 죽음 가운데 부활하셔서 우리를 믿음에 믿음으로 이르도록 하는 강력한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그 이름 하나에 결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감격이 없다. 이것이 마가의 신앙이었다.
우리를 지배하는 생각이 무엇인가? 짜증과 피곤함 속에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고상한척 하지 않는가? 이것을 끄집어 내지 않으면 결정적 순간에 우리 인생이 죄를 범하게 되며 구원의 감격 속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케 하셨다. 롬7:17~19, 사도바울은 자신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지만 날마다 죄업이 솟아오르며 창3장으로 인하여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오직 우리의 구주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고 고백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할 때 멋진 교역자, 평신도, 식주인, 보호자,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안에 모든 불신앙을 창3:15,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뜨려야 한다.
인간의 창3장 이 저주의 문제는 오직 창3:15로만 가능하다고 창조주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이마에 땀이 나서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가 싸움하지 않고 아름답게 산다고 해서, 아이를 낳고 잘 키운다고 해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3:15 없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며 고상 떨 때 창3장의 저주는 또 다시 찾아온다. 그래서 자신이 당하는 것이다. 어떻게 당하는가? 자신이 ‘신’ 이 된다. 자신의 고집, 절대적 불신앙 속에 구원 받지 못하는 길을 자꾸 걸어가면서 감격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 다원주의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기독교 방송을 장악한 교단들이 뉴에이지,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WCC에 가입했다.
영세 전의 문제, 창3장은 우리 앞에 이미 와 있다. 옛 뱀, 마귀라고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 이 땅으로 내어쫓겨 우리를 죽이려는 자가 있다. 이 놈을 우리 예수님이 폭로하셨다. 예수님 보다 먼저 온 놈, 그 놈이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말로만 그리스도, 그리스도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절대적 하나님의 방법, 능력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 자신에게 자꾸 죄를 범하게 만드는 이 저주의 영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봐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감격보다는 세상적인 일을 도모하며 세상적 불신앙 가운데 범죄를 짓는 저주의 질병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영원한 축복을 주셨건만 그 축복을 망각하고 이 세상 사단에 속아 바벨탑 인생을 살게 만드는 어둠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무너질지어다!’ 이것을 하면 하나님은 제자를 붙이신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닮아 따라 살게 되고 결국 서로의 관계가 어정쩡해지다가 어느 날 배신자, 이탈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복음의 전도 제자를 만나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 하나로 인격과 상관없이 복을 주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회의 본질을 잃었을 때 나라를 잃고 로마에 속국이 되며 개인의 신분을 다 망각한 채 노예와 거지 근성으로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의 절대적 본질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만왕의 왕, 그리스도’ 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며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교역자는 이것을 뚜렷하게 가지고 성도들을 양육하여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이름을 체험할 때 육신 신앙에서 영적인 축복의 사람으로 바뀐다. 이 체험이 없이는 절대로 육신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비주의, 박애주의, 종교 생활 속에 신세타령하며 끊임없이 사람의 위로만 받으려고 할 뿐이다.
-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끝내셨기에 ‘오늘의 말씀’ 이 성경대로 와야 한다. 이 말씀을 빼앗기지 않아야 교회, 직장, 가정생활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오늘의 기도’ 다.
마가가 이것을 놓쳤기 때문에 바울의 메시지 앞에서는 ‘아멘’ 했지만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 말씀의 일치가 없었다. 말씀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절대적 신앙 근본을 가져야 영적 대결로 기도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그 때 전도도 하며 사람을 만나도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이 체험하고 맛을 본 것, 자신의 잔에서 넘치는 것을 주기 때문에 아까울 것이 없다.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야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신다.
막3:13~15,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를 가지고 자신을 살려낼 때 다른 사람과 자신의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사용하게 된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을 살릴 길이 없다. 마12:28,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에게 임하며 그 하나님의 배경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는 것이 한 성령으로 역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28:18~20, 하늘과 땅의 권세인 그리스도가 있기에 능력 대결, 진짜 흑암과 싸울 때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 우리 주위에 육신적 위로나 세련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겸손한 자가 되라.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밀 하나를 말씀하셨는데 상대보다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섬기라는 것이다. 능력 대결하는 자에게는 모든 문제가 끝났기 때문에 절대 혈과 육으로 부딪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의 바톤주자, 그리스도를 잡았다면 누가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해도 그냥 달려가라.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하고 다른 것 바라볼 것 없이 달려가면 된다. 우리는 이 시대 차세대 선교사, 전도제자이기 때문에 되냐, 안 되냐 할 것도 없다.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인생을 확정 시켜야 한다. 갈보리 십자가 보혈의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 만왕의 왕, 참 제사장, 참 선지자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자는 오직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저주의 영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지어다. 쟁쟁거리지 말고 슬퍼하지 말지어다. 불신앙 속에 낙망하는 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지어다!’ 다윗 왕과 같이 자신을 꾸짖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감격, 기도, 전도라고 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문제를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살려내야 한다. 이것을 재창조의 응답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면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에 힘들 일이 없다. 행1:1예수는 그리스도, 행1:3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행1:8 모든 문제 끝, 행1:14 마귀야 가라, 그 이름으로 박살내고 파괴시키면 된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근심하게 만들고 염려,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끌고 가는 사단의 생각을 그리스도로 사로잡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시작된다. 이 때부터 우리 자신이 증인이 되어 세계복음화를 향하여 전도 운동 속에 들어가게 된다.
-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세가 머물러 계시기에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의 권세를 무너뜨려라.
그러면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하는 절대적 하나님의 시간표,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
1차 전도여행에서 수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교회의 법, 교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예루살렘 총회에서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 야고보의 고백을 통해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의 법, 교회에 흐르는 권세는 생각을 바꾸게 하고 마음이 열리면서 나님의 뜻으로 ‘아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법을 잃어버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리와 교권싸움뿐이다.
* 영적인 축복과 능력대결을 체험할 때 진정한 변화는 시작 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마가가 따라붙으려 하자 바나바의 어떠한 설득에도 바울은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바울이 왜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는가? 마가는 영적인 축복, 신령한 하나님의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채 그들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 영적인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면 헛소리만 하다가 교회의 흐름만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이 된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지 못하면 구원의 내용이 영혼 속에 자리 잡지 않아서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이 자신의 기준과 수준에만 박혀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서 오도 방정을 떠는 사람이 된다. 구원의 감격이 없으면 능력 대결이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능력대결 하는 자를 말한다.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 성령의 사람은 사단을 웃지 못하게 하는 자, 사단이 싫어하는 일만 하는 자이다. 그런데 영적인 신령한 은사를 갖고 있지 않으면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운동, 자기 자랑, 자기 지식, 자기중심 이다. 나는 중국에 가서도 한 번도 내 자랑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 천하에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인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수많은 군중 앞에서 발가벗기시며 수치심과 모멸감을 당하셨음에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처절한 죽음으로 끌고 가는 그 분의 그 순복함. 이 은혜가 우리 자신에게 임한다면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으며 잘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사람으로 축복하셨기에 오늘도 내일도 전도 운동을 위하여 살고 현장을 가는 것이다.
- 바울이 마가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강하게 거부했던 이유는, 마가는 늘 작은 육신적 감정과 육신적 위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안 안디옥을 떠나 여러 지역을 지나며 자신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핍박과 온갖 고생, 그 속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도의 역사를 예루살렘 보고를 통해 듣게 된 마가는 충격과 감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의 부탁과 외삼촌에 대한 사랑,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어 사명과 소명을 가지고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바울의 결정은 단호했다. 마가는 예수님을 정말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 바울을 따라가지 않은 바울의 2차, 3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마가는 베드로를 따라 붙게 된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드디어 예수님의 인격과 신성을 자신의 영혼 속에 담아 놓게 되었고, 우는 사자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다는 것을 깨닫고 마귀와의 철저한 영적싸움을 진행했을 때 드디어 그는 베드로로부터 ‘내 아들, 믿음의 아들, 충성스러운 자, 나의 후원자’ 라는 말을 듣게 된다. 벧전5:13. 마가가 얼마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켰는지 자신을 거부했던 바울에게 까지 가서 화해 했다. 이것이 바로 영적싸움의 진가이다. 자신을 이탈자, 탈영병이라고 까지 말한 바울에게 배신과 섭섭함을 당하고 알 수 없는 모멸감 속에 외로움과 고독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있다면 당당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향해 딤후4:11, “나의 일에 유익한 자” 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하나를 발견하고 체험할 때 오는 비밀이다.
- 행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마가가 영적싸움을 하지 않았을 때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으로 인해 그는 이탈자, 낙오자, 배신자, 탈영병이 되어버렸다. 일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영적 대결을 하지 않았더니 한 가지로 함께 하지 않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번의 실수를 반복하여 죄를 짓는 자가 되었다. 구원의 감격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영적인 신령한 하나님의 은사가 체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이기에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적용하면 반드시 힘이 온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적용하지 않으면 생각과 중심도 있고 대단한 결심을 해도 나아가는 영적인 힘이 없게 된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그 영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베드로도 이것을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했을 때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의 예언 앞에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칼까지 차고 다녔지만 작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이다.
- 바울에게 있어 바나바는 떨어질 수 없는 인간관계, 자신의 사역 속에 굉장히 많은 신세를 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공식적인 일을 뚜렷하게 구분 할 줄 알았다.
교회는 개인에게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곳이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개인적인 일을 교회 안에까지 들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뚜렷하게 구분했다. 선과 악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일 앞에서 반드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나바와 심한 다툼이 있었지만 그것이 마가에게는 갱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다.
- 또한 이 사건을 통해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고 바울이 실라를 데려가는, 한 쌍의 전도 팀을 두 쌍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실라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로마 사람이었고 로마의 시민권도 가진 자로서 로마에 대해 정치, 언어, 인구 등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 실라를 통해 2차 전도여행에서 로마의 정보를 알게 되었고 ‘나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구체적인 기도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하나로 능력 대결을 실천해 나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지는 하나님의 뜻, 이것을 가장 멋있게 이루는 전도제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오직 육신적 응답만을 갈구하는 종교인이 가득한 이 시대 속에 오직 그리스도 그 하나의 능력대결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비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나를 구원하신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에 대한 감격보다는 세상적인 것을 도모하며 이 세상에 무엇인가 쌓으려고 하는 불신앙의 저주를 무너뜨리고 육신신앙에서 벗어나 영적인 축복,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뚜렷한 구원의 내용을 가진 기쁨과 감격 속에 능력대결을 통하여 나의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 앞에 한가지로 함께 하는 자가 되어 땅 끝까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전도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