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행16:6
행 16:6~10
2016.03.06 1부 말씀
성경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응답, 축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오늘날 성도들은 ‘나는 왜 안 되는가?’ 하며 문제 속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교회들이 창세기 3장으로 출발되었기 때문이다. 창3장으로 출발 된 가난, 질병, 무능, 정신병, 시달림 등 이런 문제에 잡혀 교회만 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문제 하나 해결해 달라고 몸부림을 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치료 해주시기도 하고 또 늦게 치료 해주시기도 하는 중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것을 구원이라고 착각하며 교회를 다닐 뿐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말씀도 없고, 오늘의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늘의 전도는 상상도 못할 만큼 이기심 많은 개인주의로 전락해있다. 그래서 자기 기준의 판단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작은 문제만 와도 예배를 자기 기분에 따라 드린다. 그래서 창3장으로 출발된 삶은 절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으로 시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 우주와 지구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의 시스템 속에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하나님의 형상’ 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사람은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유일한 비밀, 방법이다.
그래서 예배 때 반드시 ‘사단 있다’ 는 메시지를 항상 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죄를 범하게 만들어 우리의 자유 의지를 빼앗아 저주와 죽음으로 끌고 가는 사단의 세력을 빛 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밀어내라는 것이다. 창1:2~3.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서 출발되어야 한다.
창3장의 얻어맞은 것을 붙잡고 저주의 문제 하나를 해결해 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신앙인으로 살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고, 육신적인 응답은 받을 수 있지만 영적인 참된 평안은 없다. ‘창3장 문제로 시작된 인간의 문제는 오직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박살냈다.’ 는 것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출발될 때 하나님은 모든 흑암을 깨부순다. 그런데 이것으로 출발하지 않고 창3장의 시달림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늘 ‘되냐, 안 되냐’ 하며 쟁쟁거리고 쫀쫀하고 사람이 이상해질 뿐이다.
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3장으로 시작하지 말고 이 말씀으로 시작하여 빛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예배 하나에 만족하고 예배 속에 모든 문제를 끝낸다면 엄청난 축복은 반드시 시작된다.
* 바울의 성령 인도 속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기독교의 역사
본문은 바울이 정확한 성령의 인도를 받음으로 유럽의 역사가 바뀐 역사적 사건이다.
예루살렘은 멀어 보이지만 아시아와 육지로 이어지는 지역이고 유럽은 반드시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지역이다.
아시아 지역은 그 당시 우상이 난무했던 지역이었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가야 했던 유럽은 헬라 철학만 있을 뿐 종교는 없었던 지역이었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뜻대로 아시아로 갔다면 아마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우상화 되어졌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시아 지역은 역사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항상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우상을 세우고 섬기는 곳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다. 아마 알렉산더 대왕의 형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빌립보(필리포스 혹은 빌립2세)이다. 그래서 마게도냐 첫 성의 이름을 ‘빌립보’로 지었다. 바울의 성령인도는 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기독교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을 탄생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창3:15을 가진 백성들을 절대 매너리즘에 빠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움직여 가신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인간 역사와 만나고 계시는 하나님, 인간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히브리 종교와 히브리 역사를 통해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신 역사를 끊임없이 소개하셨다.
우리가 엄청난 이 언약의 흐름을 타고 하나님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창3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같이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 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 사역을 위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아담, 하와 이후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 이후 그 출애굽의 역사 속에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그 이후, 이사야, 다니엘을 거쳐 초대교회 이후 우리에게 까지 이 엄청난 하나님의 복음이 와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진행할 때 죽지 않았던 다윗의 뿌리가 우리에게 까지 왔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우리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세계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창3장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개입이 나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정말 믿는다면 불신자에게 노예 되지 않는다.
히브리 종교는 곧 기독교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기에 그 뿌리로 인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탄생되어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것이다. 창3:15로 출발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로 여기신다. 우리가 이 복음의 가치를 알게 되면 이 세상을 겁내고 두려워하고 염려,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정복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이 세상에 시달리지 말고, 속지 마라. 우리는 다윗의 뿌리, 그리스도의 뿌리로 형성된 하나님의 자녀다.
·노아가 단을 쌓고 창3:15, 피의 예배,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불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하시고 그와 동행하시며 구원의 방주를 짓게 하시고 심판에서 면하게 하셨다.
·애굽 땅에서 예수의 피를 바른 자들이 출애굽 했고, 이들이 광야 40년을 지내며 성막 교회를 지은 것이 교회의 탄생이다. 곧 교회는 창3:15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을 말한다.
·교회의 의미를 깨달은 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정복하게 되지만 창3장에 잡힌 자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었다. 그래서 우리가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로 시작되었다면 오늘부터 그 살아계신 하나님, 인간 역사 속에 구원 계획을 진행하고 계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로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히브리인을 선택하시고, B.C.와 A.D의 전환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예루살렘에서 다시 시작하셨다. 이 기독교의 뿌리가 드디어 헬라 땅을 넘어 로마까지 넘어 온 것이 지금의 역사 앞에 기록된 교회사, 기독교 이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소아시아 그리고 배를 타고 유럽까지 질주한 역사가 성경에 뚜렷이 나타난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시작할 때 배도 타고 비행기도 타는 인생이 되지만 그 이름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 집 하나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늘 밥 먹는 문제에 시달리며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인생만 될 뿐이다. 늘 당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질병이 와도 그것을 질병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계획을 진행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질병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가난하고 질병이 많아서 선교도 할 수 없다.’ 고 하는 부정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발견한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이끌림을 체험하고 나서부터 말씀에 붙잡혀 전도했다. 그래서 예배 때 선포되는 말씀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TV뉴스에 붙들려 인생을 살아간다. 이 세상에 들리는 소리는 다 사실이지만 진실은 담겨있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큰 하나님의 진실이 담겨있다.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 품의 독생자 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진실하시다. 그래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실 된 말씀에 붙잡혀야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진실한 그 말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말씀에 붙잡힌 자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본문의 헬라로 가는 이 과정을 통하여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헬라, 헬라에서 로마, 로마에서 미국, 미국에서 한국으로 까지 오게 되었다.
마게도냐 첫 도시 빌립보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 그 다음 철학이 기다리는 아덴까지 가게 되고 아덴에서 드디어 성경이 기록된다. 헬라어의 언어는 굉장히 조직적이고 철학적이며 깊은 논리가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덴을 거치지 않고 고린도에서 바로 로마로 가고자 했지만 하나님은 아덴에서 바울이 가진 사상을 철절하게 무너뜨리신다. 바울이 가진 인본주의적 최고의 언어들로는 논리적인 헬라 문화와 철학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곧 창3:15로 출발된 그리스도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결단한다. 우리 자신과 세상과 사단을 이기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도, 그리스도 밖에 없다.
자신과 세상과 사단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 전부터 일어나는 수많은 인간의 고통과 재앙, 저주를 해결할 길이 없다. 에덴동산에 나타난 뉴에이지 사상이 모든 사람을 다 덮어 버렸다. 하나님이 이 사상을 깨뜨릴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를 주셨음에도 오늘날의 기독교는 네피림 사상으로 전락되었고 교회는 귀신 들린 사람으로 가득하며 큰 용사라고 하는 사람을 목사로 앉혀놓고 종교는 하나라고 외치는 통합종교 시대, 바벨탑 사상이 완전 덮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큰 용사라는 사람들에게 잡혀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리스도 그 이름에 원수가 되었다. 행13:4~12, 의에 원수가 되어 육신적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도 모르게 귀신들린 자와도 단합하고, 썩어 없어질 몸 하나를 위해 우상을 섬기며 집안 구석구석마다 박제 같은 것을 걸어두고 우상화 한다. 인간이 이렇게 흑암세력의 작품으로 변질되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실 되게 호소하고 있음에도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 돌아다니며 개인의 멸망의 시간표 속에 불화살을 맞고 살아가다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헌신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인생 마지막에 속았다는 것을 겨우 느끼게 된다. 거짓말쟁이에 잡힌 인생이 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진실 되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전적으로 생명을 바치고 출발하는 것을 말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 되신 그리스도, 그 언약에 생명을 걸고, 생명을 드리고 출발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된다.
우리가 생명을 바치고 출발하면 우리 인생의 여정에 작전을 짜는 계획들은 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내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오늘’ 이다. 인간은 잠시 왔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오늘, 지금,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혼에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사용할 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오늘’ 해방 된다. 내일을 어떻게 할지 묻지 마라. 오늘이 너무나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 한 시간의 예배를 똑똑히 드려야 한다. 이 하나를 하지 못한다면 절대 세상을 정복할 수 없다.
요4:24, 남편이 여섯이나 되었던 우물가 여인이 인생을 처절하게 망하고 들은 메시지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였다. 지금 데리고 있는 남편과 갈등 때문에, 상처를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니다. 창3장으로 출발된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창3:15로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 문제 앞에서 창3:15로 출발한 바울의 믿음의 결과와 문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애를 쓴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셔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막으셨다. 창3장으로 출발하면 막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다.
간질이 있던 바울이 지중해를 건너기 위해 오랜 시간 배를 타고 가기에는 무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 쌓아온 수많은 정신적 전략을 가지고 나름대로 신중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시아의 문을 닫으시고 마게도냐의 문을 여셨다. 곧 인간적인 계산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은혜다. 자신의 생각에는 위험 요소가 없는 곳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을 기다렸다.
바울은 평생 동안 말라리아와 안질, 간질 이런 질병으로 시달렸지만 이것으로 신앙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리스도로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의 질병을 ‘육체의 가시’,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이며(고후12:7), 이것을 통해 자신은 ‘모든 것을 이기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고 했다. 곧 시달림을 감사로 바꾸는 창3:15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질병을 ‘사단의 사자’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육체를 장악한 사단을 뚜렷이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의 질병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사단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영혼 속에 똬리를 틀고 나를 장악한 사단아,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따라 인생을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무능과 가난, 질병의 저주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너는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회복 받을 지어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사단아 가라!” 이렇게 명령하고 다스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행16:10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 속에 숨겨있다. ·바울의 전도 팀에 속한 ‘우리’에는 실라와 함께 누가가 있었다. 의사 누가는 바울과 동행하고 치료하면서 바울을 이 상태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전도여행에 함께 하게 되었고 로마의 사역까지 바울과 계속 함께 하면서 이 때, 사도행전을 쓰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게 된다. 헬라문화 속에서 헬라어를 쓰는 누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사도행전이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았다. 그 질병 속에 사단의 가시가 장악하고 있지만 그 사단의 가시는 창3:15을 절대 이길 수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바울은 질병, 사단의 가시까지도 은혜로 받아들일 만큼 생각과 마음을 바꿨다.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 위대한 축복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을 선택하지 않고 불신앙을 선택해 에덴동산을 떠나게 되고 버림을 받았지만 바울은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름의 능력으로 사단의 사자를 밟아 그리스도 능력으로 자신을 하나님 안에 머물게 했다.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인정할 때 밤에 환상을 보게 된다. 바울이 자신 안의 불신앙과 어둠을 인정하고 생각을 바꿨더니 환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불신앙과 어둠을 인정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아덴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내적 신관, 초월적 신관을 가진 철학자 들이 있었다. 그런 헬라 철학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가면서 승화되어졌다. 이렇게 바울의 성령 인도 속에 하나님은 엄청난 역사를 이루시고 그 역사 속에 지금도 나를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느낀다면 굉장한 기쁨 속에 절대적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행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는 것은 미리 앞서 흑암을 결박하고 영적 전쟁을 진행하는 영적 싸움에 힘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힘쓸 때 그의 건강이 회복되어져 배안에서 간질이 사라지고 열병도 없어졌다. 이렇게 영적싸움을 하면 영, 육간에 강건함이 시작된다.
우리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 될 만큼 애써 기도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었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간구하셨지만 아무런 답이 없을 때,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인정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따라가고, 말씀에 붙잡힌 자만이 이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뤄가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이름으로 힘쓰면 길은 열리고 전도의 문은 열린다.
과거에는 자신의 기준대로, 자신의 능력대로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며 살았지만 ‘주는 그리스도’ 라고 결단한 자는 이제 하나님이 이제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신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부활 메시지가 우리 인생의 답이 되고, 부활 메시지를 따라 말씀의 흐름을 타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 그 중심 속에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뤄 가신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절대적 진리 속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평안을 안고 오늘부터 행복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원받은 분명한 기준도 없이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문제 하나를 해결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빛 되신 그리스도를 소유하여 예배로 만족하는 올바른 시작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로 시작한 바울이 자신의 기준을 버리고 성령인도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 까지 개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과 세상, 사탄을 이기는 정복자로, 구원의 계획을 진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생명을 바치고 말씀을 따라가는 믿음을 보이는 자 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라고 나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머물게 하신 그 은혜를 삶 속에 날마다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