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복음에 있다
살후1:6~9
2016.4.13예수사랑교회 수요예배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의 기준을 뚜렷하게 말씀하셨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사람과 환경,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과 싸워야 한다. 우리 자신과의 영적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반드시 육신의 영의 힘은 사라지게 된다. 육이 죽어야 영이 산다. 육신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목사를 하면 사람만 피곤하게 할 것이고 육신을 죽이지 않는 사람이 사업을 하면 한방에 없애는 일만 만들뿐이다.
절대적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 음란이나 도둑질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십계명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뚜렷한 심판의 기준은 창3:15, 복음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굿뉴스를 체험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영적인 상태가 이상해지고 정신과 육신도 이상한 상태가 되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이상해지는 것이다.
* 심판의 기준이 복음에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사랑교회는 율법이나 윤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 심판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복음을 깨닫고 실천하면 그에 따른 결과는 반드시 나온다. 도둑질로만 살았던 사람에게서 도둑질이 사라지고 살인의 영을 가지고 사람의 뒤통수치며 이간3하는 사람이 어느 날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를 실천하는 의인이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십계명을 어기고 부끄러움이 있다 할지라도 복음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능력, 이 복음, 그 이름을 사용하면 어느 날 하나님의 시간표는 반드시 온다. 이것이 예수사랑교회가 가진 복음이다. 교회가 이렇게 가지 않으면 어느 날 종교가 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복음을 주셨지 종교를 심지 않으셨다. 그런데 지금 이상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 안에 종교가 심겨져 우리가 다 영적으로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성경은 알콜 중독자 노아를 의인이라고 했다. 그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어느 날 알콜 중독이 끊어지면서 방주를 지어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사람을 보면 미칠 것 같고 저런 인간은 죽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남을 정죄하는 살인의 영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사이도 처음에 만났을 때는 콩깍지가 씌어 만났다가 며칠 못 가 미칠 것 같은 관계가 된다. 만나서는 미칠 것 같고 헤어지자니 정 때문에 그냥 살고, 그러다가 어느 날 쌓인 것이 폭발하는 것이다. 예수사랑교회에서 10년 동안이나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이렇게 폭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은 그 사람은 예수사랑교회 오지 않았다면 바깥에서 사람 여럿을 죽일 수 있는 장기수용자 같은 사람인데 그나마 예수사랑교회에서 10년을 지내며 치유 받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말씀하셨음에도 자신이 정직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정직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종교다. 인간은 한 사람도 의인이 없고 이미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인 자로 태어났다.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을 반역하는 영이 있어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셔도 우리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며 하나님을 향해서 삿대질도 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저주 하는가?
창3:15을 적용하는 사람이 맞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트홀이나 투데이 블레싱 전도책자 이런 것에 사명을 가지고 심어야 한다. 사명을 받고도 무능과 무감각 속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 열매 없는 인생이 된다. 우리의 사역 속에 열매가 없는 것이 진노이다. 열매가 없다면 투데이 블레싱부터 사가지고 가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해봐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이 글을 읽고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겠구나...’ 생각했다면 이 천 원짜리 한 권이 일억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불신자가 이것을 읽고 자신이 인생을 이상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예수사랑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된다면 천억을 들여 만들어도 싼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심는 고난은 하나님이 전부 갚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 당하는 어설픈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진짜 고난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심는 것이 고난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심판의 기준은 복음이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고난을 받으면 그것이 전부 열매로 온다. 곧 이런 사람이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19:30, 십자가에서 목을 떨구시며 “다 이루었다” 이 한마디 남기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 앞에 우리가 서면 갈등, 시험, 분노, 도덕 이런 것이 사라진다.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신을 비춰보면 우리 자신이 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음란하고 더럽고 이간하고 생각이 너무나 완악해 회개할 줄 모르고 고집대로 살고 자신의 기준 속에 끊임없는 주관적인 개소리를 내뱉고... 심판대 앞에 비춰보면 우리가 사실 구원 받을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숨 쉬는 것 자체도 은혜이다. 그래서 예배 때 하나님의 강단 말씀을 먹지 못한다면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 시대 속에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을 꺾고 이렇게 예배 오는 것이 고난이다. 그 고난을 극복하고 예배당에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 고난의 늪에서 진노의 자녀로 살지 않는 방법이 바로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기 때문에 진노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몰랐던 우리가, 학벌도 없고 정말 어려웠던 우리가 예수사랑교회에 앉아 있다 보니 축복의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시들어간다. 사람들은 밥 세끼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정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잡힌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확인을 하고 찾아야 하는데 밥 먹는 문제 해결했다고 인생의 진리도 찾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형벌 중 형벌이다.
* 인생의 진정한 고난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심을 때 오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먹었다면 그 말씀을 통해 심는 고난이 있어야 한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존심 싸움, 쟁쟁거림 다 버리고 한 생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모든 생명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세계복음화가 아니면 교회도 할 필요가 없다.
살후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합당한 자격을 얻는 자는 그 분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진정한 고난은 그분의 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이라고 하면 늘 얻어맞고 예수 믿어도 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 믿는 자가 하나님을 위해 심으면 돈은 저절로 온다. 내가 이 일에 증인 이다. 나는 그리스도 하나를 모든 사람에게 주기 위해 그 분의 나라를 위하여 심었더니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축복하셨다. 예수사랑교회 산업인들이 유일성 속에 들어가면 음식점을 해도 유일성의 맛이 나온다. 유일성이 곧 전문성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 나라를 들어가기 전에 어떤 고난을 받고 있는지, 그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심고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밥 좀 먹고 사는 수준이 되었다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은 여러 사건을 일으켜서라도 그 사람을 겸손하게 하신다.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심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서 사건은 터진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사람이 맞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우리 자신이 말씀에 잡히지 않고 말씀에 따라가지 않으면 마귀에게 잡히게 된다. 약4:7, 말씀에 순복하는 자는 마귀를 대적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따라오라 말씀하셨다.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신의 기준, 이성적,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자존심을 내려놓고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심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고난이다.
이제 우리 자신이 산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나를 넘어서 성령의 절대적 인도를 받는 것이 곧 ‘전도’ 이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저절로 증인이 되는데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다른 문제들이 자꾸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를 통해 겸손해지고 깨닫고 확인하고 자복하라는 것이다.
행14:22, “...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환란은 마귀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창3장의 이 현장이 환란인데 우리는 밥 먹는 문제 하나 해결되어서 평안하고 좋다고 한다. 마귀에게 경배하는 것이 환란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봐라,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라, 선악과를 따 먹어 봐라 하는 이런 환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을 가진 자는 이 마귀의 환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심판의 기준, 복음의 기준은 창3:15을 적용하여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래야 네피림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네피림 문화 속에서 창6:14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바벨탑을 쌓아 쓸데없는 환란이 찾아온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환란은 대부분 자기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 많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환란을 받으면 안식이 오고 평안해진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환란을 받으면 고요해지고 정말 행복해진다. 이 행복을 가지고 여유로움 속에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는 아름다움이 우리 영혼 속에 있어야 한다. 과거의 ‘나’, 옛 사람으로부터 잡혀있는 창3장의 상태는 요8:44일 뿐이다. 우리의 환란과 고난은 여기에서 온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은 거의 없다.
‘나’ 라고 하는 존재, 이 심리상태에서 당하는 환란을 정말 꺾어라. 요8:44, 출20:3~5, 마11:28 살인, 미움, 분노, 헛소리, 잡소리, 비교의식, 자존심...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면 이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져라. 욕심쟁이로 살면서 일어난 문제를 고난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사탄에 의한 고난이다. 예수님은 그런 고난을 주지 않으셨다.
‘나는 정말 깨어있어 그리스도에게 언제나 붙어있는가? 어떤 위험과 환란, 고난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언제나 겸손하고 그 분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 자신을 향해 점검해봐라. 사도바울은 엄청난 겸손함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육체 속에 사단의 가시를 주었다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인본주의로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신이 자고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의 그릇으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의 사람으로 인쳐 주셨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그분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을 심는 자가 된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 그 이상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겸손은 불가능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면 약점투성이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없을 때는 이 약점 때문에 늘 괴로워했다. 그런데 창3:15, 복음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나서부터는 절대 약점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지 않을 대상이 하나도 없고, 내가 상대방을 용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나는 복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복음의 기준으로 답을 내면 종말론적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 그분의 나라가 보이고 그 나라를 향해 걸어가고 있고 내세가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해 깨달으라고 고난도 허락하신 것이다.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배설물이라고 하면서까지 자신을 낮췄듯이 우리의 모든 교만을 내려놔라.
북한이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의 시체까지 먹을 정도의 시기도 있었지만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굶어죽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항상 찾아오는 고난 앞에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인사는 “주님 곧 오십니다.” 였다. 고난 속에 예수님의 재림을 보며 믿음으로 지켜 가는 것이다. 내가 처음 중국을 갔을 때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온 자매가 사흘 동안 복음편지 메시지를 듣고 이 좋은 복음을 자신의 동포들에게 가서 전해줘야 한다며 다시 북한으로 건너갔던 그 때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종말론적 세계관을 지향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도 서로 통용하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창3:15, 출3:18, 예수피를 바르는 것, 사7:14,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나라를 위하여 환란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이 있는 것이다. 요16:33,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환란을 당해도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환란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진리를 위한 고난은 굉장한 안식이 오지만 우리의 욕심에 의한 고난과 실수에 의한 환란은 시달림을 가져다 줄 뿐이다.
*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는 고난과 환란은 하나님이 갚으신다
본문에 우리에게 환란을 주는 자가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해자가 있다.
사람들은 거의 뚜렷한 색깔이 없이 애매한 고난 속에 있다. 요8:44로 인하여 미혹된 욕심, 동기를 가진 고난. 이것을 죄의 고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유일성을 가는데 있어 나타난 그 가해자는 하나님이 꺾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예배도 뚜렷하지 않고 복음의 색깔도 없고 늘 애매한 사건 뿐이다.
이런 애매한 것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앞에서 해결할 방법은 한가지다.
요19:30,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모든 문제를 끝내신 사건을 봐라. 지구상에 이것보다 더 억울한 죽음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 예수님은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남기셨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미움과 증오를 품지 않으셨다. 그 자신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면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복음이 기준이 되어 내가 용서함을 받았고 모든 문제가 다 끝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괜찮을 수밖에 없다.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신 것은 가해자들의 운명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신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올 진노, 운명의 시간표가 불화살로 날아오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3,4대 이르러 저주를 받는 그 문제, 도끼가 발등상에 놓여있는 저주 앞에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지 않으면 가해자로서의 운명을 살게 된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영향을 받아 살인자로서 인생을 살게 된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가해자의 운명대로 살면 사탄의 심부름을 하다가 결국 사탄과 함께 놀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영영한 지옥에 갈 뿐 아니라 3,4대 이르러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의에 하나님께서 환란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란으로 갚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를 끊고 오직 복음을 심어야 한다. 헛소리 하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을 심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과 평안함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8.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간당하고 유일성 외치다가 핍박을 받고 매를 맞고 배고픔과 손해를 당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절대적인 유일성의 사람은 평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로 핍박을 받는 자는 누구도 원망할 필요가 없고 자신이 받을 상급,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가면 된다.
살후1:7~8,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마지막 심판의 기준은 율법적인 것이 아닌 복음적인 것이라고 말씀했다. 창3:15로 복종하는 훈련이 안되면 그 사람에게는 형벌이 올 수밖에 없다. 복음적이지 않기 때문에 살인을 심고 도둑질, 간음, 음란, 완악함, 자존심을 심어 결국 의에 원수가 되는 것이다. 복음을 심지 않으면 이런 무서운 결과가 온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창3:15을 모르고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만 찾으면 영적 상태와 육신과 정신의 상태가 다 이상해진다. 복음을 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당한 것이다. 우리가 사탄을 꺾는 복음을 심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복음을 위해 심지 않으면 결국 사탄의 심부름만 하게 되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환란과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은 그리스도를 아느냐 모르느냐,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 복음에 복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딱 이 뿐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이다. 자살하라고 속삭이는 어둠의 세력, 귀신들림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어 쫓을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난다. ‘우리 심령을 오그라뜨리고 도박하게 만들며 간음과 알콜 중독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저주의 질병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 지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예수는 바로 그리스도 되셨다! 모든 불신앙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 지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다. 내가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너를 꾸짖나니 너는 내게서 떠나갈 지어다!’ 이렇게 하면 시원해지고 자존심도 사라지는데 이런 것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움 때문에 숨게 되고 수치심과 죄책감 속에 용기 없이 거짓말로 속이는 사람이 되어 더 이상한 문제가 터지게 된다. 창3:15이 우리 삶에 기준이 되지 않으면 당한다.
마22:1~14, 임금이 베푼 잔치에 와야 하는데 오지 않자 종들을 시켜 길거리에 있는 아무나 다 데려오라고 하셨다. 이것이 그분의 기준, 복음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누리며 그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심판의 기준은 복음에 있다고 말씀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 예수사랑 모든 가족들이 분명한 창3:15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스도 능력을 가지고 자신과의 영적인 싸움을 통하여 나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심으며 고난을 받는 최고의 멋진 군사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바울의 옥문을 여신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날마다 체험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언제나 깨어있어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는 자로 날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하옵소서. 세속주의와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성령세례를 허락해 주시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싸움을 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육과 정신의 영은 사라져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따라 인도 받는 자 되어 영원한 생명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