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성공자를 살린 바울의 원색복음
행17:1~9
2016.04.17 1부 말씀
‘나’ 라고 하는 것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인생사는 날 동안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람과 사람,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비교의식만 하다가 죽는 결과만 낳게 된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선포했던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이 원색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인생의 영세전의 문제와 영원까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짐으로 참된 영적 자유인이 될 수 있다.
* 열등감과 비교의식에서 해방되는 인생의 답은 오직 창3:15이다
마귀가 우리 영혼에 심어놓은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육체적 고통까지 가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상황적인 어려움이 계속 밀려오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자신은 심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비교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걱정 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채울 술이나 다른 어떤 것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그 뿐 아니라, 죽음과 같은 공포와 어둠이 밀려오면 그 어둠이 깊어질수록 육체적 통증이 시작되어 지금 병원마다 ‘통증 클리닉’ 이 생길만큼 사람들은 시달리고 있다. 병원에서는 신경을 건드려 아프다고 말하기도 하고 심한 사람은 수술까지 하지만 그런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아무 답도 주지 않는다.
오직 우리 예수님만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세상은 절대로 이 진리 되신 예수를 알 수 없기에 오직 그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길은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로 세상의 모든 지식의 근원을 밟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쾌하고 간단하게 말씀하셨다.
마16: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왔던 제자들을 향해 마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질문에
마16:16 “주는” 곧 창3:15의 오시겠다고 하신 메시아, 바로 주되신 그리스도, 진리 되신 그리스도라고 뚜렷한 신앙고백을 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요14:18, 그리스도를 부르는 만큼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하셨다. 우리에게 열등감을 통하여 비교의식을 주는 것이 음부의 권세다. 이것이 우리 영혼에서 깨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 광명한 천사로 자신을 요8:44로 가장한 채 살 뿐이다.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를 볼 수 없으나 창3:15을 인생의 해답자로 믿는 자는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3:15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창3장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형성된 것이 열등감이다. 그 열등감을 통하여 죽는 날까지 비교의식 속에 인생을 허망한 나날로 보내게 된다. 그래서 창3:15을 믿는 자라면 살아가는 삶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예수 피를 바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화살, 땅에서 솟아나는 재앙과 저주를 피하게 된다. 사7:14,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이라 하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의 신분이 바뀌게 되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고 살아계심을 느끼게 되어 우리도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롬8:9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있어야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요14:17~20 예수님이 부활 하신 이후에는 우리의 날들 속에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14:26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된다면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주시기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감을 이루는 습관은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이런 습관이 없다면 정말 구원 받아야 한다. 우리 삶이 눈만 뜨면 리모콘에 손이 가고, 눈만 뜨면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짜증나고, 눈만 뜨면 원수 덩어리만 보여 미칠 것 같고, 눈만 뜨면 하얀 과자를 사정없이 빨아대고 있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자신이 이런 습관들 속에 인생의 방향도 없이 사는 예측불허의 사람이 아닌지 점검 해봐야 할 것이다.
*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앞에서 뚜렷한 자신의 습관이 있었다
행17:1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탄생 된 이후 150km 나 되는 길을 사흘 동안 걸어 두 성을 거쳐 데살로니가 지역으로 갔다.
데살로니가 지역을 가자마자 바울이 먼저 한 것이 기도처를 찾는 일이었다. 바울이 기도처를 찾는 중에 유대인의 회당을 찾게 된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사는 집보다 회당을 먼저 세우고 그 중심으로 자신들의 집을 짓고 산다. 이것이 구약의 성막 중심에서 비롯된 그들의 신앙이다.
행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규례’ 는 바울의 습관을 말한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생활 습관을 4가지 정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언제나 안식일을 생명처럼 지켰다.
예배를 목숨보다 더 중요시 여길 만큼 절대적으로 사수하며 엄격하게 지키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문제는 오직 예배를 통해서만 해결 받는다. 그래서 예배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번다고 예배도 쉽게 빠진다. 그런 사람이 바로 열등감, 비교의식에 잡힌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해 정신문제, 영적문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와 소로 만들지 않고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 예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게 하셨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우물가 여인이 이상하게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를 만나 그의 배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예수를 만남으로, 예배를 통하여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을 놓친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싶을 때 드리고 안 드리고 싶을 때는 안 드리는, 제 멋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근본을 놓쳤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은 ‘하나님을 만나야 문제가 해결 된다’ 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인생의 근본은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겠다’ 는 것이다. 성공하면 뭐할 것인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식 잘 키우는 것이라고 하고 자식 잘 키우면 뭐할 것이냐고 물어보면 결국 답이 없다. 답이 없이 근본도 모른 채 살고 있다. 고전2:10~12, 인간은 세상의 영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아 무한한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는 존재라고 말씀했다. 부부가 아무리 돈이 많고 행복해보여도 남편의 영과 아내의 영이 다르다면 결국은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으로 전락할 뿐이다. 영이 같아야 사랑도 있고 행복도 있다. 우물가 여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다른 영의 남자들을 만나 계속 헤어지는 일들을 겪어야 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 영으로만 해결된다. 예배 말씀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면 일주일 동안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와 진리 속에 자유인이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인생의 문제 속에 하나님은 이미 해답을 주셨다.
둘째, 바울이 회당을 찾은 이유는 그 안에 ‘만남’ 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항상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다. 저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인가, 영적싸움을 하는 자인가, 세상의 탑을 쌓지 않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는 전도제자인가? 예배를 통하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자신의 만남 속에 항상 이것을 생각했다. 그런데 예배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도둑놈의 눈으로 사람을 들여다 볼 뿐이다.
셋째, 하나님이 어떤 기회를 통해 전도의 문을 여실 것인지에 관심을 두었다.
유대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다. 성경 본문을 읽다가 “여기에 대하여 해답을 가지신 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서로 토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나눈다. 그 때 사도바울은 자신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어나 말씀을 선포했다.
넷째, 바울은 성경의 뜻 속에 언제나 “예수는 그리스도”를 밝히 풀어 전했다.
“예수가 곧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그가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지금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되시며,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밟으셨던 것처럼 우리가 영적싸움을 시작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는 것을 바울은 항상 선포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관례와 습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는 귀부인이 바울과 실라를 좇게 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즉각 해답을 얻었다는 것이다.
왜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했는가?
인간의 영혼 속에 열등감과 비교의식으로 인생을 살게 만드는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는 이름, 하나님 만나는 유일한 길,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저주의 영을 꺾는 이름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없으면 마음의 집시가 된다. 인생의 답도 없이 별을 따라,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살아가는 존재 곧 정신문제 속에 외롭고 서글프고 허무한 인생으로 세상에서 괴로워하며 우는 존재라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술 한 잔 꺾으면서 울고 탄식하고 마음이 병들고, 나홀로 나홀로 하며 울고, 우울증에 빠진다. 마음이 병들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죽어, 죽여, 너를 무시하는 거야, 너는 자존심도 없냐....’ , ‘저 여자가 너를 좋아해, 저 남자가 너를 좋아해’ 이런 소리를 듣고 돈도 없으면서 괜히 꽃 사서 간다.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 속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떠도는 몸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귀부인은 부유한 지식인 로마인이나 돈이 많은 유대인과 결혼한 유대 여자들을 말한다.
그 당시 돈과 권력,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은 유대 여자를 아내로 선택하기를 원했다. 자유분방했던 로마 여자들 보다는 유대인 여자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 자신의 몸을 다스리고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유대여자, 귀부인들이 인생의 답을 갖지 못한 채 하나님만 믿고 있다가 바울과 실라가 말한 “예수가 그리스도”를 듣고 드디어 하나님을 정말 믿기 시작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창3장의 원죄로 인해 운명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찾고 찾아도 만날 길 없는 인생에서 하나님 만나는 길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밖에 없으며, 그 메시아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한 사건을 설명했을 때 귀부인과 경건한 헬라인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 창3장에서 시작된 사단의 뿌리, 시기와 질투를 그리스도로 끊어버리는 개인의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 되었다는 것을 믿자 함께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대편에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이렇게 시기만 한다. 누가 상대방하고 말만 해도 “너는 내가 팀장이야”, “너는 우리 부서야” 하며 시기와 질투 속에 잡힌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 외에 인간에게는 해답이 없다. 교회는 이것을 말하는 곳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살길이 되는데도 사람들은 온갖 종교와 목사의 말에 길들여져 이 분명한 사실 하나를 모르고 있다. 그래서 창3장을 모른 채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면 굉장히 무서운 영적 상태로 돌변한다. 인정사정없는, 인사불성의 사람이 된다. 사단의 뿌리인 시기 질투를 가지고 노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통제가 안 된다. 20,30년 신앙생활을 하고도 교회를 다 뒤집어 놓거나 아니면 아예 무능과 무기력 속에 주저 앉아있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악의 뿌리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끊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영적 상태의 뿌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도 모르게 요8:44로 전락하여 자기의 위신과 위상만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 안의 장로님들이 그 위신과 위상을 건드리고 인기만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고 자신들의 잘못된 생활이 노출되면 미쳐버린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시기와 질투가 끊임없이 노출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원수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가 너를 꾸짖는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지어다!” 이것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 명령 한 번을 하지 않고 거룩한 척 위선을 떨다가 죽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되는 문제만 찾아오면 미쳐버리게 된다. 이것을 ‘종교’ 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생명력 없는 종교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애매모호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육신적인 신앙 때문에 끊임없이 분쟁만 일으키고 한 번도 반석 위에 자기 인생을 교회로 세워보지도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이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성령이 계신다면 그 이름을 힘입어 죄를 짓게 만드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불신앙을 꺾어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는 자가 되지만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헤치는 자가 되어 교회의 반역자가 된다. 마12:28~30.
우리가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다면 그리스도 이름으로 벗어버려야 한다.
데살로니가 유대인 회당에서는 여전히 메시아만을 기다리는,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그런 유대인을 향해 메시지를 선포한 것이다. “당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드디어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 사망과 지옥의 권세를 다 끝내시고 죽은 자 가운데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결단 내리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되는데 유대인, 종교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무서운 저주가 영혼을 장악하고 있다. 말씀 앞에 자신이 회개하면 되는데 깡패를 동원시킬 만큼 사람이 더 완악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 늘 가이사 황제를 욕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가이사 황제 편에 선다. 수많은 시기와 질투, 핍박이 영혼에서 솟아나 ‘니들 한 번 해 봐라’ 하는 식으로 분노 하고 있다.
창3장은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난 사건이다.
그래서 인간이 악령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 인간이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심령에 하나님의 영이 빠지는 순간 마귀가 열등의식을 심어 놓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죽는 날까지 분리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를 깨뜨리는 분리의 영이 있다. 이렇게 분리하다 보니 늘 소외감을 갖게 되고 그러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소외되고 홀로 있으면 공포감과 두려움 속에 분노가 온다. 그러면서 적의감 속에 자신도 모르는 상심에 젖는다. 그 상심 속에 나타나는 것이 시기와 질투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가 나타나면 이미 완전 맛이 간 상태가 된다. 그 시기와 질투 속에 나타나는 것이 원망, 핑계, 책임전가다. 이 원망 속에 허망 된 지배욕을 갖게 되고 이 지배욕으로 인해 좌절과 망상 속에 자신을 학대한다. 이렇게 삶 자체가 사단에게 늘 걸려든다. 자신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결하고 조금만 말씀 속에 들어가면 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다 듣는 것, 이것이 걸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세상적 근본에 잡히고 하나님을 믿는 근본이 없어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규례나 자기 습관이 없는 것이다. 늘 문제에 걸려들어 노가다 인생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세상적 습관에 걸려들면 바다의 수많은 플랑크톤에는 관심이 없고 작은 가짜 미끼에 걸려드는 인생을 반복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반드시 창3:15 그리스도로 자신을 바꿔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우리 안에 오면 언제든지 박수를 쳐줄 수 있게 된다. 누가 땅을 사도 면류관을 가져도 기뻐해주고 축복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완전 바뀌게 된다.
눅9:23,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바꾸고 따라 오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더 이상해진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것으로 나를 바꾸고 예수님을 따라가라.
갈2:20, 나를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시기의 악마성’ 이라는 글이 있다.
한 수도사가 자기를 성찰하기 위해 먼 순례의 길을 걷게 된다. 수도사가 거듭나지 못하도록 마귀의 졸개들이 여러 시험과 유혹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 수도사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대장 마귀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자, “야, 이 놈들아, 그것도 하나 처리를 못하냐, 내가 알아서 할게.” 하며 수도사에게 가서 그의 귀에 붙어 한 마디 한다. ‘네 동생이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대주교가 됐다.’ 이 한마디에 순례자 수도사는 힘이 확 빠져버렸다.
이것을 시기라고 한다. 시기가 이렇게 무섭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왜 늘 시기와 질투 속에 있는가. 사단이 원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 속에 숨겨놓은 열등의식과 비교의식 때문이다. 이것을 뽑아버리고 만왕의 왕 창조주 하나님 근본을 우리 영혼 속에 영접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예수와 함께 못 박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와 함께 우리 자신을 못 박지 않으면 살아가는 날 동안 문제만 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않아도 문제를 만들어 내는 생산 공장이다. 자신을 건드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코가 왜 이렇게 부었지? 코 암인가? 눈이 왜 이렇게 노랗지? 죽을 때가 되었나...?’ 우리 귀에 붙어 자꾸 문제를 만들어내는 놈이 있다. 그 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켜라. 이것을 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의 누림도 없을 뿐 아니라 은혜가 없다. 그래서 늘 불만과 불평으로 입이 나와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비에 젖지 않으면 영적인 에너지가 없어 발전이 없다.
마귀는 우리에게 비교의식을 자꾸 심지만 우리 영혼 속에 오직 그리스도 하나님만 계시기를 축복한다.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자기와 같은 명품 옷 입은 사람만 봐도 사람이 돌게 된다.
인간은 반드시 한 번은 죽기에 인생에 답이 없이 산다면 외롭고 슬프고 고독한 인생이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셨기에 이제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우리에게 장악된 죄와 사망의 저주를 몰아내고 그리스도 이름을 불러야 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3장 원죄를 몰라 마귀가 우리 안에 심어놓은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시달리며 정신과 육신의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창세기 3장 15절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어 영세 전부터 영원까지의 문제가 해결된 영적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에 답을 내지 않고 세상의 습관에 걸려들어 사탄이 뿌려놓은 시기, 질투 속에 무엇인가 찾아 돌아다니는 공허와 허무를 그리스도로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교감을 이루는 습관이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여 원색적인 복음을 통하여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살려내는 그리스도 인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