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누려야 할 기도의 자세
살후1:10:12
2016.4.27예수사랑교회 수요예배 말씀
인생의 가장 큰 비밀은 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믿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지금 근본 문제에 장악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근본문제는 바로 나로부터 출발한 ‘자기’ 자신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의 의미도 모른 채 교회만 다니면 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문제 속에 심각한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말을 정말 잘 듣는다. 세상의 말 속에 사실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실은 없다. 우리는 세상의 말을 듣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의 말을 듣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인격을 갖춘 사람 곧 하나님과 대화가 되는 인격적 존재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이 한 가지를 듣고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오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인생은 반드시 되어 진다. 그런데 세상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사람은 점점 쪼그라든다. 왜냐하면 세상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근본문제에 여전히 잡혀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창3:15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바로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이다. 나로부터 출발한 내 자신을 사로잡아 얼마나 복종 시키냐에 따라 말씀을 따라가게 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유한 자는 반드시 기도의 행동이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행동”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면 날마다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고 내게 응답하시고 은혜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고 살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 행동은 하지 않고 ‘내놓으세요, 원수를 갚아주세요!’ 이렇게 협박적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한다. 이런 것은 마귀 자녀가 하는 짓이다. 불효자는 늘 부모에게 내놓으라고 하지만 효자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행동해라. 오늘의 말씀 속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행동하면 응답은 당연히 오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 바울의 기도가 명확히 나타난다.
바울의 규례는 오늘의 말씀, 오늘의 기도, 오늘의 전도를 꼭 행동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진 자이다. 그리스도 십자가를 가진 자는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은 이 세상의 제도, 법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간다면 이 봄날에 얼굴이 새까맣게 탈만큼 이마에 땀을 흘리고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좋은 봄날에 ‘아, 꽃이 피네, 바람이 부네, 꽃향기가 느껴지네’ 이런 것을 느끼며 살고 싶다면 행동해라.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어려운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세상 기준이 너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향해 성경은 이 세상 신에게 미혹되어 세상 임금이 지배하는 가운데 우는 사자가 그 영혼을 삼켰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힘들게 인생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기도로 끝낸다.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 ‘기도’ 이다.
우리에게 기도의 행동이 나오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불신앙 속에 인본주의하며 살게 된다. 그래서 거지근성을 가지고 불신자들에게 노예 되는 수준으로 살아간다. 불신자가 우리의 밥이 되는 수준으로 바꾸길 바란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를 키우는데 있어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 무엇을 봉사하는 것에 불신자를 쓰면서 돈을 주고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그 십자가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면 교회 안에서의 헌신, 행동은 저절로 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교인도 움직이게 했다. 심방, 인간관계, 목회... 모든 것을 기도로 풀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도가 왜 이렇게 소중한가? 기도는 ‘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소원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이 사람이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스도 십자가가 영혼 속에 있는지 기도에를 통해 알 수 있다. 잠31장을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첫 번째, 허탈한 말을 하지 않는 것. 그래서 거짓말을 끊는 것이 잠언의 주제이다. 하나님 앞에서 쓸데없이 무엇인가를 간청하고 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게 하는 해달라는 것이다. 한번 뿐인 인생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서 가난해지고, 부자 되고 지옥 가는 이상한 인생을 산다. 그래서 솔로몬은 매일 아침마다의 묵상이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였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 시작부터 끝가지 하나님께 달라는 것뿐이다. 거의 대부분 자신의 원통함을 풀지 못해 한풀이 하는 기도뿐이다. ‘신발이 왔사오니 몸도 올 줄 믿습니다. 뼈를 부서뜨려서라도 교회 오게 하옵소서.’ 이렇게 꼭 무속인과 같이 기도한다. 사람들은 이런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들고 아버지 아버지 하며 부르짖는 것을 기도라고 한다.
* 바울은 본문을 통해 세 가지의 뚜렷한 기도제목이 있었다
첫째,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그리스도 십자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은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그 이유와 내용,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시고 부르셨다는 믿음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근거로 믿는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이다.
막3:13~15, 하나님이 나를 왜 원하셔서 부르셨는가? 구원 받으라는 것, 곧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온 인류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 지옥까지 담당하시고 기구한 운명, 사주, 팔자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을 뿐 아니라 개인과 가정이 멸망 받아야 하는 그 저주의 늪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래서 그분을 영접하고 그 부르심에 ‘아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인정하는 사람은 ‘전도도 하며’- 곧 개인의 다락방이 이뤄진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내 영혼을 사로잡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저주의 영을 내어 쫓는 권세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믿고 영적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선택적인 뿌리는 천명, 사명, 소명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의 백성, 그의 들어갈 나라를 선전할 하나님의 대사(大使)로 부르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되었다. 우리 자신을 대사로 믿어봐라. 대사로 믿지 않고 거지로, 노예근성으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미가 뭔지도 모른 채 교회만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창3:15이 일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대사로 임명되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의 대통령 급으로 그 나라를 가게 된다. 그래서 자국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가면 대사가 책임을 지고 보호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대사로 임명하셨다.
-행동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는 응답이 없다. 응답은 믿는 것이 응답이다. “목사님, 그래도 저는 믿어요..” 하지만 정말 믿으면 얼굴부터 바뀐다.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때문에 사람이 밝아질 수밖에 없다.
‘믿는다’ 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에 조건도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아멘’ 하는 것이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응답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다. 응답을 받는 자로서의 자세는 창3:15의 말씀에 자세를 갖추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인쳐 주시고 성령이 내 안에 역사하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택하셨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으로 나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기도이며,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의 자세를 갖춘 자이다. 그래서 응답을 받는 자로서의 바른 자세는 오늘의 말씀 속에 ‘아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우리가 ‘아멘’ 하는 것, 이것을 응답이라고 한다.
-그래서 말씀에 응답하는 자세가 곧 기도다.
‘하나님이 나를 예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으니 염려와 노예에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는 해방 받았다!’ 말씀 속에서 이런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종교로 젖어든 신앙생활 속에서 쥐약을 먹고 예수사랑교회와 일반 교회가 같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사랑교회는 엄청난 차이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교회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을 기도라고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매달리지 말고 말씀으로 누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예배를 자기 기분에 따라 들쭉날쭉 드린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생활은 항상 응답에 따라 움직이는 종교로 전락되었다. 사람들은 응답을 전부 착각하고 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 성이 무너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봐야 위대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유명한 신부님이 30년 동안 이 세상의 아름다운 언어를 다 끌어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언어만 썼다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너무 아름다우시며, 당신은 빛이시며... 이런 기도를 듣고 싶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그 신부님의 중심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를 사용해도 자기 내면의 숨은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 한 번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네가 어디있느냐” 였다.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부가 되고 쇼맨십으로 하나님을 믿는 척 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늘 ‘응답 받기를 원합니다’ 하며 응답이 문제라고 하는데 진정한 응답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서 대답을 받아내겠다고 하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대답을 얻고자 절규하며 몸부림친다. 이런 것이 응답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어디있느냐” 하셨을 때, 아멘, 내가 여기있습니다 이렇게 응답 했더니 하나님은 “왜 여기에 있느냐”-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누가 두려움을 주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물으시며 인간을 속게 한 놈을 찾아내게 하셨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박살내라고 답을 주셨다. 이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이 응답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응답을 찾겠다고 온 산을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사람의 많은 말은 들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따라가지 않는다. 나는 여러분과 반대로 살아간다. 나는 세상의 어떤 말을 들어도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에서 왔다 간다. 그리고 오기 전에 꺾으면 상대방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말씀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수많은 말들을 듣고 전부 이상하게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말씀, 오직 한 분 것만 들어야 일심이 된다. 그래서 듣는 자세가 곧 믿음이며 응답이다.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응답이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은 응답으로 산다.
만약 내가 상대방하고 말을 하면 깊이 생각하고 대답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말을 듣자마자 생각도 없이 말한다면 그것은 동물과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 번만 깊이 생각해도 누구에게 따질 것도 없고 이상한 것은 거의 사라진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우리가 뭘 몰라도 말씀 따라 떠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호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의 감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응답은 감상이 아니라 ‘순종하는 행동’ 이다. 그래서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행함을 말한다.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라, 죄의 권세를 꺾어라,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열렸으니 모든 문제 끝났다는 이 삼중식 그리스도 그 이름이 나오면 그리스도 십자가를 위대하게 만드는 영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갈보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옵소서” 말씀했다.
본문에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니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이 내 영혼 속에 충만케 하옵소서.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내 삶에서 무너질찌어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두려움은 산산이 무너질찌어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부르시고 이제는 가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어린양을 먹여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네 독자 이삭을 바쳐라” 명령하셨다. 그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핑계를 댈 수도 있었다. 곧 장가갈 나이인데, 이 아이로 별처럼 번성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실언하십니까? 우리는 주로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한다.
행동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너를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려라” 하면 아멘! 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입에 거의 “NO!" 가 붙어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좀 더 있다가 바치겠다 이런 말 하지마라. 그러다가 ‘차차’ 가 ‘아차차’ 가 되어 세상 떠나는 날이 온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한 군사가 되기를 축복한다.
둘째, “모든 선을 기뻐함과...”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특권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즐거움과 그 영광의 특권 속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능력으로 나타나고 능력을 더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신다.
살전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삶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행위든지 보여라.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행위가 없다. 하나님이 기도 하라고 하면 ‘아멘’ 하고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가 안 나온다. 특히 목사들은 정말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그 열매가 나타난다. 목사가 되기 전에 기도를 많이 해놓지 않으면 너무 많은 생각 속에 기도가 안 된다. 기도가 안 되어지면 설교를 준비하다가 모든 성도들의 말과 얼굴이 다 떠오르면서 본문 말씀을 희석시킨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이 설교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성도들은 다 죽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훈련기간의 과정 속에 자신과 영적싸움을 충분히 하면 그런 것에 영향 받지 않는다. 영적싸움을 젊어서 얼마나 많이 하느냐에 따라 그 영권은 달라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선을 얼마나 영적싸움으로 진행하느냐에 따라 그 위에 능력이 덮이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싸움 속에 목사가 되면 영권은 와 있게 된다. 이것을 몰랐던 마틴루터도 종교개혁 속에 죽음의 그림자와 공포로 엄청나게 시달렸다. 그래서 수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눈빛을 버티지 못하고 오그라들어 결국 암에 걸리고 사모는 육신적 질병에 다 시달린다.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라.
예수님도 이 훈련을 새벽미명마다 하셨다. 신학생, 전도사, 교역자도 새벽에 자신의 영혼을 깨우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 그 이름의 능력과 영광이 머무르길 축복한다.
셋째,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믿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따라온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절대적 확신 속에 믿음을 선택하면 하나님의 역사도 따라온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행위가 반드시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어. 아멘, 아멘, 내가 믿음을 가져야되. 내 영혼아 깰지어다’ 하며 알람이 울리면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런 알람이 나올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김집사, 박집사 다 불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움직여라.
행위가 따라야 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의 행위에 하나님께서 힘을 더하신다고 말씀했다. ‘나의 행동하는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되신 권세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전1:3, 믿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 앞에 봉사하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작정하고 행동했을 때 하나님은 그 위에 힘을 주셨다. 그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는 자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 하나님을 위한 믿음의 행동을 시작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오늘날 사람들은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투자한다. 그런데 명예를 위해 큰 것을 투자하는 사람은 바보짓을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는 일에 크게 투자해라. 그리스도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은 그 위에 힘을 실어 역사하신다.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온 힘을 다 쓰고 에너지까지 쓰는데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향해 반문해봐라. 나는 정말 응답의 사람이 맞는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면 우리가 몸부림을 쳐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면 아멘 하고 행동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으로 힘을 실어주신다. 이것이 바울의 비밀스러운 기도였다.
바울은 그리스도 하나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넘었고, 그 사도행전의 역사를 넘었더니 바울 서신이 나왔다. 그런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생명의 역사를 넘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은혜 가운데 진행했는지에 대해 사도요한도 요한일서에도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고백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넘었던 베드로도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남겨주시기 위해 그리스도 십자가를 그 분이 달리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주셨건만 여기에 대한 아무 행위가 없다면 거기에 대한 몫을 우리가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핏 값을 자신이 지불하는 자 되지 마라.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행동할 때 그 핏 값은 사라진다.
그래서 여러분이 멋진 예수사랑교회의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 영광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축복이 있음을 믿는 자 되게 하셔서 우리 삶의 어떤 행위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함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뤄가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위에서 힘을 더해주신다고 말씀 하셨사오니 날마다 저의 참된 백성들에게 성령충만을 더해주옵소서. 그래서 한 시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세계복음화 소원을 이루는 멋진 그리스도 인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신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