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없는 종교우상을 이기는
새 생명 그리스도
행17:16~21
2016.05.01 1부 말씀
바울이 좋은 전도의 기회를 놓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상이 가득한 아덴지역을 보고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지성주의가 발동되어 분을 내며 쟁론한 사건이 본문에 나타난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 실수하는 자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바울이 이것을 놓쳤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바울의 역사를 또 한 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의 시간, 인격이 무너지는 일들은 곧 갱신의 기회, 새로운 역사를 맛 볼 시간표가 된다. 바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내면을 끄집어내어 뽑아내라고 말씀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으로 싸우지 않고 세상을 이길 오력을 그리스도 그 이름 안에 주셨다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육신적 싸움이 아닌 영적 대결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절대자의 절대 사명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우리는 복음 전도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되었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의 재앙을 막아주는 이 시대 전도자 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일을 진행하도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먼저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적인 싸움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정의를 외쳤던 세례요한이 이 비밀을 몰라 목 베임을 당했고 바울도 자신이 가진 지식주의를 가지고 몸부림 쳤을 때는 현장에서 완전히 패했다. 우리는 육신적 싸움이 아니라 영적 대결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날 동안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고통과 멸망, 재앙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받은 자는 오직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사는 것이며 반드시 그 이름 하나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다.
그리스도는 악한 세력과 눈에 보이지 않는 멸망의 시스템에서 우리가 해방 받고 자유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 인생의 문제 해답,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악한 세력에서 승리하는 비밀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리스도 이름을 소유한 자만이 싸우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말다툼 할 필요도 없고 변명할 필요도 없으며 잔머리를 가지고 계산할 필요가 없다.
- 영력
그리스도 그 이름에는 하나님의 영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힘의 근원이기에 그 이름으로 충만할 때 악한 자들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다. 이것을 ‘영력’ 이라고 한다. 그 영력이 우리에게 임하면 세상에서 굉장히 담대해지고 ‘막힌 문들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열릴지어다!’ 할 때 개인에게도 그 힘이 느껴질 뿐 아니라 상대방도 그 힘이 느껴지게 된다.
- 지력
그래서 그리스도에서 나오는 그 영력을 가진 자에게는 지력이 있게된다.
우리는 성공을 목표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불신자를 앞서가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력과 지력을 가지고 있으면 직장생활이든, 인간관계든지 어떤 불신자의 현장에서도 항상 앞서가는 사람이 된다.
- 체력
우리에게 영력, 지력 곧 하나님의 힘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면 영혼이 잘 되기 시작하고 영혼이 충만해지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이다. 요삼1:2.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거꾸로 살아간다.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주사를 맞는다. 하지만 힘 있는 맹수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짐승이 오래 살듯이 자신의 육체를 강하게 키운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끝내셨다는 이 비밀을 알고 시작하는 사람은 겁날 것이 없기에 굉장히 여유로워진다. 곧 그리스도안에서 나오는 영력과 지력을 가지고 여유가 있는 자에게 체력도 따라오는 것이다. 영력과 지력에서 오는 체력이 있다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영력과 지력이 체력으로 오면 우리는 어떠한 마귀의 공격에서도 벗어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체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무슨 말을 들어도, 어떤 불화살을 우리를 향해 쏘아도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에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기 때문에 겁날 것이 없게 된다. 거울을 보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력과 지력, 체력이 임할지어다!’ 이렇게 고백해라. 그리스도 안에는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그리스도 하나로 충만해지면 몸도 마음도 생각도 다 아름다워지고 멋있어진다.
- 경제력
이 세 가지를 갖춰야 경제력이 따라온다.
영력과 지력과 체력을 갖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먼저 깨뜨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욕심쟁이로 살며 자기 것이라고 움켜잡았던 것을 먼저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 가지가 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경제력이 올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오는데 먼저 하나님을 위해 쓰는 우선순위가 안 되기 때문에 그 기회를 자꾸 놓치는 것이다. 그런데 영력과 지력, 체력이 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헌신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지갑 잃어버리고 찾으러 다니면서 피 말리는 기도를 하고 온 몸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이 된다. 경제력 하나 때문에 발버둥 치는 인생을 살아간다. 영력, 지력, 체력을 가지고 언제나 기회가 올 때 옥합을 깨뜨려라. 누가 먼저 부름을 받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유월절 잔치를 위해서 누가 큰 다락방을 내어줬는지,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누가 옥합을 깨뜨렸는지, 이드로 장로가 무엇을 보았고 오바댜는 무엇을 보고 생명을 걸고 우선순위를 하나님 쪽을 선택했는지 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력이 쉽게 오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다. 주일 예배가 바로 그 기회다. 주일 예배는 유월절 잔치다. 그렇다면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도 우리는 공짜로 지금 앉아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그 하나님이 스스로 죽임을 당하셨는데 그 예배 하나를 온전히 드리지 못할 뿐 아니라 원망, 불평 속에 묶여서 헌금 하나에도 왜 헌금바구니가 돌아다녀야 하냐며 시비를 걸고 있다면 그런 모든 생각을 버려라. 영력과 지력, 체력을 주신 이유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깨뜨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어린이 주일에 예수사랑교회 유치부와 초등부, 중등부를 위해 한 번 써야겠구나, 다음 주 어버이날을 위해서 내가 헌신해야겠구나, 살아생전에 부모에게 하지 못했던 것을 교회 안의 부모님에게는 작은 용돈이라도 드려야겠다.’ 하는 작은 헌신이 경제력이다. 이런 헌신 앞을 미루고 ‘차차’ 하다가 어느 날 ‘아차차’ 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 인력(만남)
하나님 앞에 언제나 옥합을 깨뜨리는 사람에게는 자신도 느끼지 못할 만큼 사람이 붙는다. 이것을 ‘인력’, ‘만남’ 이라고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누구에게 진짜 제자를 붙이겠는가? 언제나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자에게 하나님은 수많은 인력을 붙이신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굉장히 여유롭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가야 한다.
*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철학과 지성주의의 허상을 무너뜨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붙잡자
- 문제와 환경 앞에 흥분하게 만드는 사단의 전략에 속지 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를 거쳐 아덴에 도착했다.
아덴은 그 당시 철학이 가장 먼저 탄생한 곳이며 음악과 미술, 마라톤이 시작된 곳 곧 문화를 만들어내는 도시였다. 종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고 정치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면 아덴은 철학이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은 철학사상을 만들어낸 곳이기도 하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있을 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철학이 원래 추구하는 목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냐는 것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철학의 전문인이었다. 그래서 철학의 도시 아덴을 도착했을 때 순간 그리스도도 사라지고 가슴이 뛰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면 사람이 이렇게 흥분을 하게 된다. 디모데와 실라를 멀리 두고 왔기 때문에 자신을 안내한 사람들을 보내 그들이 자신에게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보냈음에도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지 못한 채 흥분을 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상태에서 예수를 전하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바울이 우상이 가득한 아덴을 보고 심령이 분하고 자존심이 상해 흥분한 상태가 되었다. 자신이 엄청난 철학의 도시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실제 현장을 보니 이 철학을 수준 이하로 전락시킨 것을 보고 분노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변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수 부활을 말하다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 변론으로 돌아가고 변론을 하다보니 아덴에 있는 철학자들과 쟁론,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사단은 이렇게 우리를 장악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쟁이가 아니라 말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말쟁이’ 의 어원은 ‘곡식을 쪼아 먹는 참새 대가리’ 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말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분위기를 통해 흥분하게 만들고 티비만 봐도, 문자 메시지만 봐도 이상한 감정이 움직여지는 것은 사단이 장난에 걸려든 것이다. 이것을 영력과 지력, 체력, 경제력과 인력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아레오바고’ 로 바울을 다시 데려갔다. 분한상태에서 변론과 쟁론을 하며 말쟁이라는 소리를 하면서도 바울을 시장 중간으로 데려가 중심가에 모여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변론하게 했다. 그 때부터는 바울이 복음 전도도 완전 사라지고 자기가 가진 철학을 말하기 시작했다.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했다는 말도 없다. 말쟁이로 변론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 전도를 실패하게 된다.
- 세상이 만든 철학과 지성주의는 허상일 뿐이다.
그 변론을 마친 그 날 밤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은 엄청난 철학과 지식주의의 결과가 우상숭배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흥분하고 기분이 나쁘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우리 주위에 문학박사든 과학박사든 지식주의자가 있다면 겁내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야 한다.
최고의 철학과 지식주의자들이 모인 아덴은 우상 동네였다는 것은 그들의 심령 상태가 쪼그라들 뿐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근본문제, 창3장의 원죄로 인하여 사망의 법에 짓눌려 박수, 점술, 우상으로 흑암이 완전 사람을 장악해버렸다. 그래서 요8:44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가 사람을 장악해 멸망의 시스템 속에 가둬놓고 있었다. 이런 현장을 보았다면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바울은 현장을 이렇게 보지 않았다. 근본문제와 근본문화 속에 그들에게 찾아온 개인 멸망의 시간표를 봐야 하는데 이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요나도 욥도 현장을 이렇게 봐서 실패를 당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사건을 통해 우리를 이렇게 끌고 오신다. 성경적 말씀과 원리대로 한다면 바울은 그 현장을 보고 정말 불쌍히 여겨야 하는데 그 현장을 보고 분통이 터졌다. 자신을 나름대로 지성인으로, 헬라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자부심을 가진 옛 사람으로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아덴의 최고의 철학 수준이 우상숭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바울은 히브리 종교도 알고 헬라철학과 헬라말에 능통한 사람, 그 당시 위대한 철학자들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철학의 본산지에 와 보니 철학과 우상이 공존한다는 것에 대해서 분이 났다.
사람들은 철학을 나름대로 최고의 지성, 큰 자랑으로 생각하지만 지성주의 자들이 추구하는 지성, 철학은 ‘허상’, 사람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철학이 우상으로 전락된 것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 속에 분을 내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면 지능적으로 간교한 말만 발단되어 죄만 짓게 된다.
얼마 전 이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은 ‘내가 말 빚을 지고 가니 큰일 났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말들의 책은 다 불살라 버려라. 모두 허상이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명적 그리스도의 뿌리가 없는 철학은 헛된 속임수 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지성도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의 우상에 불과한 무능과 무지일 뿐이다.
- 창3:15로 출발하지 않으면 믿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이 자신이 아덴에서 실패함을 뉘우치는 메시지를 훗날 친필로 기록해 디모데에게 전했다.
딤전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그래서 오직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전한다.
인간은 언제든지 창3:15로 출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망령되고 헛된 거짓말과 지식의 변론을 일으키는 자들을 따르는 것은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곧 창3:15에서 벗어나면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답이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해라. 딤후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창3:15로 출발하지 않으면 다툼만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로만 해결되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고 영력, 지력, 체력, 경제력, 인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바울은 결국 아덴에서 실패하고 배를 타고 고린도 지역으로 추방 당한다. 거기서 던진 메시지가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다. 창3:15 하나님의 그 미련한 전도 속에 하나님의 비밀을 숨겨놓으시고 지혜로운 자들,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여기셨다고 말씀했다. 고전1:21~24. 그리스도가 없는 지혜와 지식은 부끄러움을 당할 뿐이며 곡식을 쪼아 먹는 새 대가리, 말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깨닫고 그 고통을 호소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시대적 재앙을 막는 자로 부르셨기에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자의 변론을 끊고 이 시대 멋진 전도자로 살자
- 사도바울이 변론한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 만난다면 절대로 변론하지 마라.
사도바울이 변론한 사람들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하는 현실적이고 육체적, 쾌락주의에 빠진 자들이었다. 창6장의 네피림, 영혼이 없는 육체의 사람들,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변론을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놓치고 영력이 없으면 순식간에 이렇게 당한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너무 싫어한다. 운명론자들, 불가지론자(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으로 진실을 따질 수 없기에 인간이 말하는 신의 존재나 믿음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 자들)들은 영생과 부활을 믿지 않는다. 바울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변론한 결과는 말쟁이가 되어 큰 실패만 맛 볼 뿐이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죽음을 말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며 오늘의 현실을 중요시 여기고 결국은 향락주의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상이다. 그들은 행복의 근원이 향락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주장한 자들이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또한 스토아 학파는 금욕주의를 만들어 신이 자연이고 자연이 신이라는 범신론을 심었다. 이 두 학파의 사상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이런 문화 속에 유일성 그리스도를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기에 이 시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재앙을 막아주는 시대적인 사람이 되길 바란다. 오직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만이 능력이며 권세이다.
지식주의, 우상, 철학을 다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가장 멋진 전도자의 길을 걷는 멋쟁이가 되길 축복한다. 그래서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갈 때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이 “영원한 천국의 문은 열릴지어다. 만왕의 왕,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한 예수사랑 가족이 왔다!” 고 하는 시24:7~8의 말씀이 성취되며 히4:12~16 살아있는 말씀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 되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육체에서 답을 찾으라고 하는 세상의 지식과 철학에 속지 마라. 육체로부터 찾을 것은 창3장뿐이다.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해결자 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문제 속에 답답하고 고통이 있다면 거울을 보고 서 너 번만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너는 일어날 지어다!” 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힘의 권세를 사용한다면 겁날 것이 없다. 낙심하며 속지 말고 한 주간 승리 있기를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 없는 지식주의, 철학, 종교우상에 빠져 살아야 했던 나에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시고 복음 전도 운동을 위해 선택하시고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창세기 3장으로 시작된 우상과 철학, 향락적 지식주의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힘은 오직 창세기 3장 15절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음에 결단을 내리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주신 영력, 지력, 체력, 경제력과 인력을 가지고 영적 대결하여 세상의 근본문제와 근본문화, 개인멸망을 끊어주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