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곧 그리스도를 밝히 알고 믿는 축복의 발판
행18:1~11
2016.05.15 1부 말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가장 큰 죄악이 ‘무식’ 이라고 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공의 상태’ 라고 했다. 세상의 철학자들은 맞는 진단을 하는듯하지만 정작 여기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만이 우리 인생의 답이 될 뿐이다. 호4:6,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다. 우리가 먹고 사는 수준에 만족하는 인생이라면 짐승 수준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으로 전락해있다. 인간의 운명, 불신자 상태를 알고 있다면 이런 수준을 벗어나 정신이 차려질 것이다.
* 인간의 불신자 상태를 분명히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석가탄신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절에 있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았다. 석가는 아무런 답이 없는 사람이다. 석가는 부자 집 왕자로 태어나 어느 날 자신에게 찾아온 영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집을 나가 돌아다니다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설사병이 나서 보리수나무 밑에서 죽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석가의 동상을 만들어 온갖 쇼를 다하고 이상한 언어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땅의 재난이 왜 계속 되는지 답을 찾지 못한 채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상을 섬기면 반드시 그 가정의 자녀들은 실패하고 가정에는 재앙이 들이닥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영적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에 가서 빌고 절밥이 맛있다고 하며 먹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유도 모르고 그냥 먹으면 먹는 모든 음식이 독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이 땅의 질병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과 주위 청소년들의 문제 또한 너무 심각하다. 요즘 청소년들은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용돈을 줘도 안 된다. 아무리 섬기고 발을 닦아 줘도 안 된다. 자기 자녀에게 왜 이런 문제가 왔는지 그 문제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이런 청소년들이 겨우 교회를 오면 교회 전도사나 선생님들은 윽박만 지르고 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청소년들이 벌써 머리를 깎고 절로 가는 애들이 많다.
인간의 운명, 불신자 상태를 알면 왜 예배를 드리고 왜 예수를 믿어야 하고 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음에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소리쳤던 사람이다. 결국 그는 강력하게 비추는 햇살 아래 이 땅이 왜 이리 어둡냐고 소리치며 벽을 긁는 정신질환 속에 비참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한다.
-성경은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했다. 창3장 사건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망권세 잡은 사탄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집안 전체가 우상숭배 죄에 걸려들고 가문의 저주가 자범죄로 파고들어간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확증시켜 놓으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고 교회만 다닌다. 성경도 많이 알고 많이 읽고 암송도 하지만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인간이 운명 아래 묶여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격과 상관없이 느낄 수 없을 만큼 무엇인가 자신을 묶어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요8:44이다. 우리의 인생이 사탄이라는 운명의 굴레 속에 묶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을 주셔도 그것을 받지 않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지 않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우상숭배를 하며 종교를 찾아다니고 교회당, 절간에 가서 앉아 있다. 믿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아있다. 운명이라는 원죄의 굴레에 묶여 믿지도 않으면서 부다를 믿는 것처럼 절도 하고 교회당에 와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할렐루야 하고 있다.
요8:44의 이 충격적인 사건을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사탄, 마귀, 악령, 귀신, 이간자, 파괴자 이런 말들을 하면 이상한 말로 들으며 거부하고 무섭다고 하지만, 자신이 파괴자, 이간자가 되어 죄의 권세가 자신을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을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김씨, 박씨, 최씨...인 것처럼 하지만 사실 우리 씨 자체가 ‘마귀 씨’ 이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말해줘도 그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니며 불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 되셨다는 그 이름 하나만 거부하고 버리며 종교에 시달리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결국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몸부림을 치며 죽지 못해 사는 인생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마음이 병들고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로 심령이 오그라들어 이 땅만 바라보고 산다. 성경은 만왕의 왕, 영광의 주가 네 안에 들어가시니 머리를 들라 하셨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해도 생명이 10분씩 연장되고 오그라들었던 폐가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의 생각과 머리를 들지 않으면 생각과 마음, 정신에 영적인 병이 든다. 그래서 몸 전체가 자꾸 오그라들고 결국 육신적인 삶의 균형이 깨지고 백 만원짜리 해결하면 2백 만원짜리 문제가 찾아오는, 문제 해결하다가 쪼그라드는 인생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로 인생의 해답을 내지 못하면 결국은 우리의 문제가 자녀에게 그대로 간다. 자녀들에게 핏 값을 돌렸기 때문에 자식 간의 원수가 된다. 그래서 살아가는 날 동안 자식과 딸과 아들 사이가, 부부 사이가 지옥이 되어 산다. 젊었을 때 ‘그대는 나의 운명’ 이라고 했던 사랑이 왜 사라지고 이렇게 전락되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롬3:23.
우리는 여기서 벗어난 영적 자유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바울의 실패를 축복의 발판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경륜
사도바울이 아덴에서의 사역을 실패하고 고린도에서 완전 용기를 잃었다.
사도바울이 왜 실패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진단서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 진단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식간에 자기 지식을 의지해버렸다. 우리가 우리 지식을 의지하면 불쑥 불쑥 만나는 문제 앞에 무너지게 된다. 우리의 정체가 ‘마귀 씨’ 였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자신이 가진 지식 하나도 믿지 못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헷갈려 한다. 그래서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하는 인생이 된다.
또한 바울의 실패의 원인은 인간적 방법의 시도에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철학적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어려서부터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 것처럼 인생을 살며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살인자, 광기로 전락했다. 그런 사도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면서 자신이 들통 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3:16,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늘보좌에도 계시고 내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허락하셨음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인간적 방법으로 살았던 과거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우리도 이 비밀이 없이는,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몸에서 느끼지 못하면 용기를 잃게 된다.
바티칸성전과 같이 거대한 건물 앞에만 서도 우리 자신이 너무 연약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종교, 우상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을 향해 바울이 그 신을 자신이 알게 하겠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슬쩍 메시지를 한다. 예수를 이상하게 설명했더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철학적 방법으로 변론, 토론하고 쟁론을 벌였고 말싸움을 하다 보니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향하여 ‘말쟁이’ 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리가 말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전도는 안 된다. 쟁론과 변론을 많이 하면 전도도, 영접도 안 된다. 그런 방법을 쓰지 말고 ‘예수 믿으라’ 고 말해라. 듣던지 아니 듣던지 일방적으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 고 해라. 이것이 가장 좋은 말이다. 자꾸 인간적 지식과 방법으로 시도하려는 인본주의, 합리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 언제나 십자가 사건으로 시작했던 바울이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는 것으로 메시지를 끝냈다.
하나님의 진단을 잃으면 정체성도 잃고 나약한 존재가 된다
바울의 아덴 사역에는 핍박, 박해, 환란도 없었고 저항의 세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엄청나게 나약한 상태로 용기를 잃고 숨어서 빠져나올 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고린도 지역으로 도망을 갔다. 그래서 전도자라는 사도의 정체성도 잃은 채 먹고 살기 위해 천막 만드는 곳에 취직을 했다.
인간이 운명에 묶이면 불신자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는 하나님의 진단을 잃어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더러운 자가 된다. 요8:44의 정체를 잃어버리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나약해진다. 용기를 잃고 ‘이 문제 속에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 이것을 내가 받음으로 오늘 살아있는 것이다!’ 이 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어마어마한 건물과 돈 앞에 무너지게 된다.
바울이 바나바를 만나서 들었던 메시지는 불신자 상태, 마귀 씨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감람산에서 부활 메세지를 주셨다는 것이었다. 이런 팀 사역을 통해 엄청난 힘을 받았던 바울에게 이 메시지가 사라지고 자기 지식만 남는 무서운 저주와 재앙이 개인을 장악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의 그 찬란한 빛 앞에 무릎을 꿇었던 영광의 예수를 순식간에 잃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인들과 이방 왕 앞에 세우게 할 것이라는 사명도 잃어버렸다.
또한 스데반을 죽인 사람으로서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스데반의 죽음까지도 짊어지는 전도자로 살겠다고 하는 사명의식도 사라져버렸다. 대 사도, 대 전도자가 평신도로 전락해버리고 회당에 가서 말씀만 겨우 전하는 자가 되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자신의 내적 고민을 고백한다. 아덴에서 실패한 기억이 줄 곧 그 마음에 비수를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천막 만드는 직업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만남이 일어났다.
롬16:4~5, 그 곳에서 ‘나의 동역자’ 자신을 위하여 목이라도 내어 놓는 자라고 표현할 만큼 만남의 축복이 있었다.
불신자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앞에 겸손해라. 바울이 이것을 잃어버렸다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로마에서 베이스 캠프를 치고 전도사역을 진행할 수 있었다. 불신자 상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들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 지역에서 에베소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갈 것이라는 바울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들의 천막 치는 업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로마로 갈만큼 세계복음화의 절대성을 잡았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선포되는 불신자 상태를 정말 알아들어야 한다.
인간은 원죄라는 운명에 묶여 그 누구도 빠져 나올 길이 없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우상과 종교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저주와 재앙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오는 길, 해방 받는 길은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헛소리를 하던 발악을 하던 상관하지 않고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를 외친 것이다. 우리 운명을 사로잡은 사탄의 권세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 말씀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신앙생활은 절대 독처해서는 안 된다. 팀을 구성해야 한다. 독처하는 전도자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한국교회에 신앙생활을 독처했던 많은 사람들은 다 무너졌다. 전도 베이스캠프를 치는 제자들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바울이 드디어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 창3장으로 시작된 요8:44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언대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온 생명들을 승리케 하신 그 비밀을 놓쳤음을 깨닫고 간밤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을 때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다. 불신자 상태를 꺾으려면 반드시 “예수는 그리스도” 이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 그 이름에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고전9:16,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자기 영혼을 향하여 죄의 권세, 사망권세, 지옥권세가 사로잡으려고 찾아올 때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외쳤다. 탄식하며 용기를 잃을 때도 “예수는 그리스도” 노래를 불렀다. 롬7:23, 죄의 권세가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을 때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모든 것을 해방케 하시며 사망의 몸에 곤고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모든 저주와 재앙을 끝내셨음을 고백했다.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깨어질찌어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셨기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가 복이 있고 긍휼을 받은 자만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그래서 불신자 상태를 모르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사기이다. 근본문제를 모르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근본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이 숨겨놓은 자,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에 하나님이 문을 여신다. 불신자 상태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체험하고 확신하면 하나님이 움직인다.
평생을 제 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한 두 시간을 앉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남편이 멋있는 곳을 데려 간다고 해도 주일만은 사수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이 흩어놓은 자이기에 어디에 있어도 주일을 사수하는 것이다. 이렇게 흩어놓은 자, 우리를 통해 가는 곳마다 안디옥 교회가 탄생하는 지교회 전략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 ‘남은 자’ 이다.
불신자 상태를 고발해주고 해결해주는 전도자의 보호자, 식주인이 되고 가는 현장마다 팀 사역을 통하여 사람을 해방케 하기 위해 교회와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자를 ‘남은 자’라고 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존재하며 모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은 언약의 사람이었던 바울은 자신을 향해 말씀의 포로,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자신은 이제 그리스도에 붙들린 존재로 자유가 없다고 했다.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를 말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 붙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상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해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 빌3:12, 사도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갈 때 진정한 자유 속에 있게 된다. 요8:31~32
창3장에 붙들려 사는 인생은 자유가 없다. 그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탄이 묶어 놓고 지옥과 같은 삶을 살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요8:44 마귀로부터 일평생 붙잡혀 지옥까지 끌려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주의 말씀에 붙잡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딤후2:1~7,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은혜의 사람이 되고 군사, 농부, 경기하는 자처럼 확신을 가지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는 매이지 않는다. 말씀을 따라 붙잡힌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가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70년 만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전 인류 앞에 큰 억압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전진해 오늘날 우리 예수사랑교회까지 와 있는 것이다.
말씀에 붙잡힌 하나님의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가 오는가?
바울이 말씀에 붙잡힌 자 되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바울을 붙잡았다. 불신자 상태에서 해결되는 말씀에 붙잡히자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는데 그 붙잡힌 말씀이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으며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 살아있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골수를 쪼개 찔러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발견하면 말씀이 나를 포로 삼는다. 그래서 나를 통해 입을 열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바울이 발견하게 된다.
이제부터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하고 출발을 해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붙잡혀 사는 사람이다.
우리 사는 인생 여정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의 발판이 되었다. 말씀에 붙잡힌 내 앞에 해와 달이 무릎을 꿇고 생산되는 모든 물질은 우리 앞에 복종되며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나를 통해 모든 것이 형통케 된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에 충만한 자는 과거의 문제 때문에 슬퍼할 이유도 없고 왕따를 당하는 서러움 속에 한을 푸는 자가 아니라 ‘지난 날 내 인생 모든 과거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고 고백하는 축복이 시작된 것이다.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우리 인생 살아가는 여정 속에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잡혀 그리스도만 말하는 인생의 결과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시는가를 보는 인생이다.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라는 명확한 하나님의 답을 주셨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먹고 사는 것에 만족하는 수준으로 살면서 인생에 찾아오는 계속되는 재난의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스스로 우상을 섬기고 종교 속에 시달려야 하는 운명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문제 해결 받았다는 분명한 답을 얻는 예배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속이는 마귀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면 살아갈 용기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잃기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신자 상태를 꺾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택정함을 받은 언약의 사람이기에 나의 실패는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는 축복의 발판임을 알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진단서, 말씀에만 붙잡힌바 되어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만 말하는 자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