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 – 바울의 일사각오
행21:1~16
2016.07.31 . 1부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결정된 일이라면 ‘내가 바보가 되어도 좋다’ 해야 한다. 주의 뜻이라면 무능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여도 괜찮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이 맛을 보는 자가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다.
* 구원 받은 자가 맞다면 자기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령인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 받은 자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고 위대한 일은 ‘성령인도’를 받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말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앞에 어리석은 자, 무능한 자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위하여 몸부림친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까지 자신의 일을 위하여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바로 마귀의 자식, 의에 원수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명예를 위해 교회당 하나 짓고 인생을 마무리 한다. 교회당을 짓는 이유가 자신의 자존심 하나 걸려있기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벗어버리려는 사람이다.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순간 사단은 틈타고 들어온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일을 도모하며 자기 일을 위해 교회당을 다니면 하나님의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순간 저주가 찾아오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영혼을 장악하여 사람을 보는 의심에 눈빛만 강해지며 인간관계 속에서 챙겨주고 배려하는 쪽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시키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린다.
본문을 통해 나타난 사단의 유혹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굳이 바울이 그 십자가를 왜 져야 하냐며 바울을 생각 하는 것처럼 의리와 인정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모두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성령인도를 따라 인생을 살아 본 적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예수와 함께 자신을 못 박아 버리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기에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고 더불어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이 있어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갈릴리도 있고 빌립보도 있는데 왜 굳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냐, 이 중간 상태에서 로마로 가야 가깝다 하며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려고 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구제금을 디모데에게 맡기고 핍박을 피해 로마로 피하라고 한다. 우리 내면에 똬리를 튼 사단의 전략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십자가를 피하게 만든다. 어떤 중직자님이 목사님이 이제는 나이도 드셨고 요즘은 이상한 사람들도 운전대를 잡고 다녀서 많은 인사 사고도 있기 때문에 순발력 있는 젊은 운전기사를 쓰시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저를 사랑해주는 것은 기쁘고 감사하지만 왜 그 나쁜 일을 젊은 사람에게 부탁하냐,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내가 짊어지는 것이 맞지 않냐고 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이라면 사람의 소리를 반대로 들으면 된다. 사람들은 디모데를 보내라고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맞아 죽을 수 있는 일을 자신보다 연약한 디모데에게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하나님의 힘을 가진 사람이 당하면 괜찮다. 자신은 빗겨가고 상대방에게 맞으라고 한다면 너무 비열한 행동이지 않은가.
마귀는 이렇게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거야, 너만 뭘 그렇게 특별하니, 이까짓 것 별 것 아닌데, 이번 한번 뿐이야...’ 자기 스스로 말을 하든지 아니면 가까운 사람을 통해 듣게 만든다. 한 번 뿐이라고 했던 그 유혹은 나이가 먹어서도 끊어지지 않는다. 마귀는 언제든지 이 번 한 번 뿐이라고 유혹한다. 이미 마귀가 붙어서 함께 다니고 있다. 또한 ‘넌 아직 창창할 때야, 아직 젊고 시간도 많아’ 하고 속이지만 성경은 오늘 밤 떠나면 끝이라고 말씀했다. 정말 우리 안에 누가 말을 하고 있는지 찾아봐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제자가 맞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내 영혼 속에 찾아들어온 근본문제로 인하여 사단의 영향 속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자신에게 질문해봐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사단의 유혹이 오기 때문에 능력 대결, 능력전도, 영적싸움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신과의 영적싸움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봐라, 저렇게 조용히 예수 믿는데도 일이 술술 잘 풀리지 않냐, 넌 뭐 그렇게 시달려서 영적싸움만 하냐? 이틀만 쉬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잖게 굴어’ 하고 자신이 놀랄만큼 영적싸움의 시간표 속에 순식간에 달라붙는 놈이 있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는 놈이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허락 속에 이 엄청난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죄의 문제와 사단의 문제, 지옥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죽음을 선택한 날이 가까워진다고 말씀했다. 이 말을 육신적으로 알아들었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 사단, 마귀의 자식, 의에 원수가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혀는 사람을 불태우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라고 했다. 약3:6. 사람의 일이 무너져야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된다.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싸움 속에 근본문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자
사람의 일이 무너지지 않으면 근본문제 그대로 있는 것이다.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욕심쟁이의 이 근본문제가 사라질 때 말씀을 성취시키는 시대의 사람, 언약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는다. 이 세상의 성공은 세상의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땅에서 준비하고 예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1~2. 근본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길이요, 진리, 생명 되신 그리스도, 영원한 나라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근본문제로 인하여 멸망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무서움에 갇혀 산다. 더운 날 창문도 열 수 없고 잠을 자도, 길을 가도 늘 두려움과 무서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사람은 늘 조는 상태로 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평생 깊은 잠을 못자고 늘 불신자 상태로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늘 조는 것이다. 고전12:2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우상 앞에 끌려 사기를 당한다고 말씀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신앙생활을 뚜렷하게 하라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영이 하나님의 영인지 시험해 봐라. 하나님의 영이라면 언제든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영적싸움이 시작된다. 요일3:8, 예수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있으면 영적싸움은 저절로 된다. 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라. 요일4:18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는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셨음에도 우리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안고 산다. 이것은 곧 염려다. 자기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염려 속에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모태에 조성되기 전부터 택하시고 부른 이유가 있기에 모든 염려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겨버려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욕심쟁이가 끌고 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엡6:12, 육신에 불화살을 쏘며 사람의 육을 파괴시키는 하늘의 악한 영이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로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공격을 받는 것이다.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 입에서 궤변이 나온다. 의에 원수, 사람을 유혹하며 자기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우리 안에 있다. 본문에 바울의 띠까지 풀러 자기 발에 같이 묶어 둘만큼 사단은 무섭게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영적싸움 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고통과 저주가 전혀 무섭지 않다. 불화살이 오기 전에 미사일을 쏘는 것이 영적싸움이다. 예루살렘에 핍박과 환란이 있다고 해도 ‘권세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진 생명을 손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하늘의 천군천사가 보호하며 다니엘과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들의 실오라기 하나 건드리지 못했던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염려로 시달리지 말고 믿음을 선택해라.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염려와 두려움, 무서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싸움이 시작될 때 아무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자기만 아는 참된 응답이 그리스도로 시작된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듯이 그리스도 그 이름을 자신에게 능력으로 선포하고 명령하고 다스리고 충만해지면 우리 삶에 말씀이 성취된다. 사41:10, 두려워 말라, 약점에 잡히지 말라 하셨다. 그런데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끊임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며 살고 있다.
강대국은 정신병이 급증하고 개발도상국이나 미개국은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시달리며 중진국은 전부 의식주 문제로 생을 걸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 우리는 말씀 성취자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말씀 성취자는 무엇을 보는가? 의식주로 몸부림치는 자들이 아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심지도 않고 길쌈도 매지 않고 창고에 들이지도 않는데 24시간 아무 문제가 없다. 신묘막측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느낀다면 새 한 마리도 너무 예쁘고 우리 입속에 들어가는 상추 하나도 너무 신기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이 없으면 염려만 하고 불안하며 두려워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종교, 철학, 선행은 스스로를 속일 뿐 아니라 자신을 속일 뿐이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 의는 더러워지고 낡은 옷과 같이 부정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죄의 삯인 사망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일어나 빛을 발하도록 만들 것이며 열방의 재물들이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를 통해 오게 만들 것이며 나 여호와의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통해 이뤄갈 것이기에 근본문제만 해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일이 곧 전도와 선교다.
새롭게 시작되는 다민족 선교예배를 통해 전도와 선교의 일을 생각만 해도 재물의 능이 온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 모든 염려와 무서움, 두려움이 사라지는 하나님의 완벽한 축복이 전도와 선교다. 아무리 큰 회사를 가지고 있어도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없으면 그 사람은 헛 인생을 산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가지고 근본문제에서 정말 빠져나온 자가 맞는지 확인해봐라. 불신자 상태, 영원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의 저주, 가문의 저주, 정신질환, 삶의 균형은 깨져있고, 내세 없이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에만 시간을 낭비하며 자식에게까지 영적 유산을 남겨주는 멸망의 시스템에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전에 나를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모태에 조성하기도 전에 나를 구별하셔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면 전도와 선교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부딪쳤던 사도바울은 전도와 선교에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일사각오 했다. 그랬더니 주의 손이 항상 바울과 함께 하며 모든 사람에게 주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언제나 사람을 만나서 근본문제를 설명해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전도와 선교다. 이것을 우리가 벗어버리려고 하는 순간 문제가 온다. 전도와 선교는 반드시 일사각오로 해야 할 우리의 절대적 소명, 절대적 사명, 절대적 천명이다. 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자에게는 문제가 문제되지 않는다. 바울이 전도와 선교 앞에 일사각오 했기에 모든 사람의 감정적인 말을 거부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주기철 목사님의 생을 담은 ‘일사각오’ 라는 영화가 있다. 주기철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여러 핍박과 모함을 당하고 강단에서 메시지를 하지 못하도록 끌어내려도 그를 굽힐 수 없자 감옥에 집어넣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분이 돌아가신 후 이듬해 한국은 해방된 것이다. 우리는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다. 우리 자신이 죽을 때 많은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목사가 죽은 이후에 많은 열매가 나와야 바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사가 죽자마자 교회가 싸움이 일어났다면 이상한 것이다.
* 전도와 선교의 일에 일사각오한 바울의 신앙을 따라가자
범사의 신앙생활에 본을 보이는 자가 되라.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잡혀 죽을지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전도와 선교를 위해 죽을 각오를 시작해라. 하나님의 복음이 각인되어 있으면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도와 선교에 관심을 가진 팀장들이 예수사랑교회에 많이 나와야 한다. 팀장들은 말씀을 성취시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팀원들은 팀장들의 말이 각인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그리스도, 그리스도 말로만 하면서 이상한 말만 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일사각오도 없이 말만하는 자가 된다면 이런 사람을 교회 안의 박수, 자기 일을 도모하는 자, 마귀의 자식, 의에 원수, 자기 배만 채우는 자,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다. 실패는 가치 없는 일에 마음을 쓰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행20:24, 주 예수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그것을 감당함에 있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험해도 괜찮다고 할만큼 사도바울은 왜 그렇게 예루살렘을 가고자 몸부림 쳤는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런 아가페적인 신앙, 곧 신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구제는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기본이다. 하나님 앞에 구제와 헌신을 하는데 있어 생명도 아낌없이 드릴만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위하여 죽겠다는 말을 굉장히 쉽게 한다. 일평생을 두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닥친 위기의 상황에는 구경꾼처럼 보고만 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당장,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위기와 핍박이 왔고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는 어려운 상황에 누가 뭐라 해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언제든지 급하게 생명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했다. 빨리 가서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많은 말도 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늘 줘야 할까 말까, 만나야 할까 말까 늘 갈등하며 사람의 눈치를 본다. 하나님의 쪽으로 선택해라. 하나님이 함께 하면 갈등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뭔가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기 때문에 늘 갈등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우리는 흔들리기 일쑤이다. 늘 자기 일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주는 것, 가는 것이 된다. 참된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기 때문에 갈등이 없다. 내가 주면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약속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을 살아계신 하나님은 잊지 않고 갚아주시는데 주의 뜻을 위하여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대접한 것은 두고두고 하나님 나라에까지 갚아주신다고 약속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 복음을 맡겨놓고 우리의 처소를 지으러 가신다고 했다. 우리가 전도와 선교에 어디까지 관심을 두고 있는가. 많은 목회자 자녀들이 한국에 와서 훈련 받기를 갈망하지만 비행기 값이 없어서 못 올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걱정이 없이 산다고 하는 사람도 말씀이 들어가면 거룩한 걱정이 온다. 하나님의 일을 놓고 기도하면 간절함과 애통함이 온다.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확신이 없다. 20년을 살고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같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한다. 결혼 했으면 얻어맞아도, 핍박을 받아도 확신을 가져라. 사람들은 답도 없이 그냥 끌려 다닌다. 확신이 있어야 핍박이나 고통도 이길 힘이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고민하셨는가? 십자가를 피하기 위한 고민이 아니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의 뜻인지 아닌지 그것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결혼을 했다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예수사랑교회 붙어있으면 반드시 응답은 온다. ‘창세기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 가정을 파괴시키는 저주의 영, 하나님 떠나서 형성되었던 옛 사람, 옛 종교, 옛 믿음, 옛 사상들은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 맺게 하며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저주의 영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무너질지어다!’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기에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당당함이 시작되었다. 그 때 사단의 머리는 박살난다.
예수님의 기도 후 받은 응답이 무엇이었는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신이 죽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요18:11, 예수님께서 내가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거부하겠냐 하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잔은 죽는 잔 이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신을 죽이면 그리스도라는 능력과 권세가 살아서 역사한다. 상대방에게 먼저 죽으라고 하지 말고 우리 자신부터 먼저 죽이는 자 되자. 그런 사람이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목사님, 진짜 이상한 사람인데도 그렇게 해야 하나요?” 하지만 자신 때문에 정신문제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내 정신문제를 치유시키기 위해, 주의 손이 함께 하는 것을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적용할 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대방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붙여준 생명이라는 것을 가슴에 담고 그리스도로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줄 믿는다.
나 역시도 목사님들이 모여 회의하는 곳에 가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온다. 그래서 뭔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할 말이 사라진다. 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이 오면서 희열을 느낀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정의를 위한답시고 내가 움직일 필요가 없다.
바울은 두로에서 이레를 머물면서 제자들을 만나 기회가 있는 대로 복음을 전했다. 행21:4,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감정까지 실어 가지 말라는 말까지 보탠다. 행20:22~23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성령이 하신 말씀이 있음에도 사단은 이렇게 우리의 육신의 감정을 건드린다. 굉장히 의리 있고 형제애를 느끼고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의 역사를 망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 앞에 인간적인 불신앙, 인간적인 욕정이 그리스도로 끊어져야 한다. 인간적 해석을 따라서는 결단코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
행21:8~12 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들어가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만나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는 말을 또 듣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선지자가 맞지만 자신의 감정에 북받쳐 바울을 붙들고 가지 말라고 쇼를 한다. 인간의 정이 움직여 그를 붙들고 절대 가지 말라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 가시 전, 다 이루었다고 하기 전 마귀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잡아서 유대인들이 네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려와라, 그러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고도 예수님이 내려오지 않자 또 하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 무능하구나, 유대왕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한다. 마귀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는 꺾을 수 없다.
행21: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예수님도 이런 상황에 사단을 폭로하셨다. 바울은 너희가 사단의 정체를 알았으니 인간의 정, 욕정을 끊어버리고 감상적인 눈물을 거두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잘못된 것이 감상적인 눈물이다. 바울은 죽을 각오가 되어있으니 감상적인 사람으로 쓸데없이 눈물 흘리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고 로마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곧 오늘 내게 맡겨진 현재의 일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현재의 일이 중요하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의 몫이 무엇인가? 나의 자아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피해가려고 불신앙 쓰지 마라. 문제 앞에 담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라. 바울은 눈물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를 했다.
행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의 사람들 또한 훌륭한 믿음을 가졌기에 바울의 메시지를 알아 듣고 주의 뜻은 이뤄지는 것임을 알고 입을 다물고 말을 그쳤다고 했다.
우리의 삶에 오늘의 몫이 있다. 주의 뜻은 이뤄진다. 오늘 현실에서 나의 감성적 사상을 사로잡아 복종시키고 언제나 주의 뜻이 이뤄지리라는 이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근본문제에 묶여 사탄의 영향력 아래 살며 자신의 일만을 도모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두려움과 염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속에 능력대결, 능력전도의 비밀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절대적인 그리스도의 뜻을 붙잡았던 바울과 같이 전도와 선교 앞에 죽음을 각오하여 모든 사람이 나를 통해 주의 은혜를 느낄 만큼 범사의 삶에 본이 되는 자 되게 하시고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의 몫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달아 인간적 감정을 끊고 언제나 주의 뜻을 이루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