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1부 말씀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절대 긍휼을 입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창3:15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창3:15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죄를 핑계하는 사람이 된다. 육신적인 죄의 개념을 가지고 핑계대고 아니면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또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은 사회나 환경을 탓하며 ‘사회가 나를 이렇게 범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환경이 나를 짓눌러 이런 일을 저질렀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큰 위험을 낳는 틀린 기준과 잘못된 생각 이다.
*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신앙생활을 할 때 진정한 은혜와 감사를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오직 죄는 내 죄 뿐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내 죄’
예수를 믿는 않는 죄가 가장 큰 무서운 죄며 가장 큰 죄다.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범하면 우리는 매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데 막을 길이 없게 된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될 때, 내면 깊은 곳에 양심이라는 법이 새겨져 있다. 이것을 창3:15이라고 한다.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해 이미 분별할 수 있게 되지만 막을 길을 모르는 이유는 창3:15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능력 없이 양심의 법을 가지고 자신과 싸우면서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를 믿지 않고, 들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우리가 논할 일은 아니다. 예수에 관해 몰라도 누구나 양심의 법이 있기 때문에 양심에 따라 자신을 심판을 하며 그렇다/ 아니다, 옳다/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이 사람의 몸속에 있다.
죄를 잘 모르면서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은 방종하는 사람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회개만 하고 방종만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십자가상에서 해결해주셨다고 하면서 회개는 하지만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교회 안의 은혜 속에만 있는 것이다.
죄를 모르고 은혜를 먼저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관세음보살’ 한 사람이 이름만 예수로 바꾼, 은혜 속에만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나중에 무속인이 되고 점쟁이가 되고 제사를 지내고 우상을 섬기게 된다. ‘제사 지내고 회개하면 된다고 그랬어!’ 하고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으니 한번만 눈 감아 주세요,’ 이런 식으로 합리화 한다. 죄에 대한 민감한 의식(意識)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모르고 예수만 믿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리면서도 예수를 믿고 왜 불안해하는가? 예수를 믿는데 왜 근심이 오고 의심이 생기는가? 은혜라고 하면서도 염려와 의심, 낙심과 절망이 오면 ‘주여,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역사하옵소서, 믿습니다!’ 한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모든 문제는 끝난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냐고 건드려보면 우리 시아주버님이 목사, 누구는 장로, 누구는 큰 교회 부교역자...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꼭 알아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말하면 “다 알아요, 저도 예수님 믿어요!” 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데 왜 그렇게 근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하면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말한다. 그리스도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유와 해방이다.
죄는 자신도 모른 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세기3장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창6장 네피림으로 자신의 몸이 형성되어져 버렸고 결국 예수를 믿고도 의식주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보적으로 뭔가를 더 가져보려는 창11장에 각인되어져버렸다. 이것이 죄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서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다니면서 은혜 속에 있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방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 날 인생이 점점 쪼그라든다.
이 죄가 뭔지를 알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점점 진보되고 아름다워지고 멋있어진다.
인간은 창3장, 원죄로 인하여 모두가 전적 부패, 전적 타락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사는 날 동안 불가능한 존재, 안 되는 존재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욕심쟁이, 살인자, 비진리” 로 형성되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있고 구원의 약속을 듣고 있는 자가 되었다. 이것을 예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듣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된다. 이것을 알고 정말 감사하며 은혜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 올바른 고백을 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개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아도 괜찮사오니, 당신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나는 주워먹겠나이다.”
사울왕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울왕이 정신병자가 되어 온갖 이상한 행태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 잠자는 다윗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내기도 하고 특수부대 3천명의 군인을 동원시켜 도망치는 다윗을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한다. 귀신 들린 사울 왕 밑에 있는 신하들까지도 다윗을 괴롭힌다. 사울왕에게 시기, 질투의 영이 들어가자 국가의 위기를 건져 준 다윗을 오히려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사울왕이 오직 다윗을 죽이겠다는 생각에 잡혀 있는 그 틈을 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공격을 당하게 되고 사울왕과 그들의 아들들이 다 죽게 되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그의 유모에게 안겨 급히 성을 빠져나오게 된다. 그 과정에 유모가 므비보셋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는 절름발이로 성장하게 되었다. 다윗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므비보셋을 자기 궁으로 들인다. 그리고 언제나 다윗의 자식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라고 하며 사울이 남긴 재산도 그대로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때 므비보셋은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 보시나이까” (삼하9:8) 하며 너무 황송해 한다. 요8:44로 장악된 이 몸을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냐는 것이다.
절대 은혜와 감사가 없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롬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64:6 우리는 인생사는 날 동안 아무리 의인처럼 살아가려고 몸부림쳐도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죄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 예수를 믿어도 헛믿음의 사람이며,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십계명을 지키면 그걸로 망하는 인생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을 통해 롬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하며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노래하는 것이다. 세계복음화를 하려면 위대한 슬로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를 통해 죄가 무엇인지 알면 성령이 우리 영혼 속에 머무르게 되고 모든 논쟁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없다. 성령이 없으면 논쟁 속에서 사단의 밥이 될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논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장악된다. 그래서 신학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완전 맛이 가는 것이다. 그 대표자가 철학자 니체였다. 목사의 아들이자 신학자였음에도 ‘하나님은 없다’ 는 말을 하며 정신병자로 인생을 마감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은 언제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 자유와 해방이 있게 되고 그러면 제자가 일어난다. 엘리야는 거짓선지자들의 싸움에서 비가 오게도 하고 비가 오지 않게도 하는 능력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듣고 겁을 먹어 도망가서 숨는다. 숨어 겨우 하나님께 하는 말이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성령이 없으면 사단의 공격을 막을 길이 없다. 엄청난 기적을 행했음에도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사람의 말에 갑자기 쪼그라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맞는 것인데 자기 방법대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맞는다면 제자 운동이 삶에서 일어나야 한다. 엘리야가 영적인 눈을 떴을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의 제자를 숨겨놓았는데 그 사람 하나를 만난 적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은혜는 있고,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 능력은 있지만 ‘제자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자는 영적싸움을 아는 자, 흑암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을 제자라고 한다. 그 제자들을 만나야 현장이 변화되고 이것을 이어 나갈 자들이 일어나는 전달의 역사, 증거가 있게 된다. 이것을 ‘전도’ 라고 한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율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창조의 양심은 기쁨이었다
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자, 이방인에 대하여 고발하는 내용이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마가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한 두 명이 로마에 가서 십계명을 가지라고 강조한 것이다. 로마에 죄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지키라는 모세의 법을 준 것이다. 곧 복음을 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고 십계명이 없는 자들에게 율법을 가지라고 강조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가기 전 로마 안의 기독교 교회가 이상해져 간다는 정보를 받아 로마에 다시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롬1:19 하나님은 알만한 것들을 이미 우리 속에 넣으셨다. 사람이 창조 될 때에 영혼 속에 새겨진 것이 양심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음속에 양심이 있다. 그러나 창3장으로 인해 이것이 깨졌다. 깨진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면 얼굴 형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이 마음속의 양심이 이렇게 깨진 것이다.
원래 창조의 양심은 기쁨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창3장 사건으로 인해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람 속에 들어가 버렸다. 이것을 죄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양심, 기쁜 마음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죄를 지은 다음에 수치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숨는 인생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쁜 양심으로 받아 자기를 세워나가야 하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부르셨을 때,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 “누가 너에게 두려움을 지적했느냐” 이렇게 만든 실체, 선악과를 따먹게 만든 뱀을 하나님은 저주 하시고 사람은 은혜를 받게 되었다. 뱀은 이제 종신토록 기어 다니며 흙을 먹을 지니라 말씀하셨기에 죄가 뭔지 모르고 교회만 다니며 은혜 속에만 있는 사람은 뱀에게 잡아먹히는 인생이 된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시골 동네에 오이밭이 있었다. 우리집은 너무 가난해서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한 밤중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항상 오이밭에 가서 오이를 따먹고 형제들을 주려고 옷에도 넣어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 주인 동네에 가서 괜히 노는 척을 했다. 내가 혹시 들키지는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한 번은 내 안에서 ‘야 이놈아, 네가 심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따먹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소리가 들렸는데 ‘누구한테 들었지? 이게 즐길 것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양심의 소리 인 것 같다.
율법은 죽은 법, 이미 끝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끝내셨을 뿐 아니라 과거에도 이미 율법은 끝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율법에 눌리고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의 법을 따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욕망으로 인해 죄를 범하게 되면 두려움 속에 돈이라도 몇 푼 갖다내고 용서받으려고 한다. 이것을 잘 알고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종교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율법 자체가 이미 죽은 법이라는 것을 늘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다. 율법은 절대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더욱 두렵게 하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양심의 가책마저도 마비시켜 고민에만 빠지게 만드는 것이 율법이다. 율법을 강조하는 교회마다 ‘주여, 용서해주세요.’ 하게 만든다.
원래 진짜 율법은 기록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마음에 담겨진 율법이 있는데 이것이 창3:15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망권세에 잡혔을 때 하나님이 약속을 다시 새겨주셨다. 이것이 창3:15이다.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양심의 법, 창3:15은 이미 심겨져 있던 것이다. 원래 인간은 어둠이 밀려올 때 밀어낼 수 있는 빛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나님도 안식일에 아담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자를 밀어내라.” 죄가 무엇인지 이미 알려주신 것이다. 곧 사단의 공격을 막지 못하는 것이 ‘죄’ 다. 이것을 막지 못하면 우리가 당하게 된다.
그런데 육신적인 개념에 빠져 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절에 있는 중 스타일처럼 죄를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라갈 수 있는 깨끗한 양심, 창3:15은 하나님의 근본이면서 인간의 근본이다. 인간 근본의 양심과 진정한 법은 창3:15이다.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아라!”
하나님은 율법이 있기 전에 가인에게 이것을 알려주셨다. 그런데 가인은 이 근본 양심인 창3:15을 적용하지 않아 살인자가 되었다. 종교와 복음 사이에 아벨은 은혜 속에만 있다가 얻어맞은 것이다. 아벨도 창3:15을 가지고 힘을 얻어 영적싸움을 했다면 당하지 않았다.
욥도 율법이 있기 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욥은 언제나 평안도 없고 안식과 온유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 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왜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은 두려움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사단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사단의 공격으로 인해 욥은 자녀 일곱을 다 잃고 자기 부인도 자기를 향해 저주하고 떠난다. 사단의 공격을 막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시 깨우쳐주시려고 피의 제사를 다시 말씀하시고 심지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영원히 항상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시면서 보좌의 축복까지 주셨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사단의 공격을 막지 않는 것이 죄다.
* 율법의 완성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사단의 공격을 막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자유와 해방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십계명, 율법을 주신 것은 마음의 법이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 율법의 완성자가 예수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기만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싸우면 살아난다. 우리 몸속에 그리스도를 살려내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지 다른 목적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십계명을 몰랐어도 하나님은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기에 우리 또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롬4:13~16)
교리적으로, 율법적으로 믿으면 그냥 멈춰 있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이다. 두려움이 와도 사로잡아 버리고, 다른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버리기 시작하면 쌓이지 않고 없어지기 때문에 어느 날 깨끗해지기 시작한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에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영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자녀 된 신분권세를 가지고 염려, 근심, 걱정, 의심할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사단의 공격이다. 사단의 공격을 잘 막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다. 죄의 권세를 막으면 모든 피조물이 내 앞에 와서 복종하게 된다. 그래서 현장의 변화가 오고 제자가 세워질 수밖에 없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이상한 말을 하는데 ‘제자화’가 안된다.
로마교회가 이런 위기에 처해있자 하나님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제자화 해버렸다. 로마교회가 거짓말쟁이들로 인해 죄가 뭔지도 알려주지 않고 방종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구원의 여망이 끊어져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롬2: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우리 인생에 죽어서도 변명할 수 있는 법은 딱 하나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 반드시 심판이 있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나 항상 함께 하시는데 이것을 가지고 밀어냈는냐/당했느냐, 밟고 결박하고 내어쫓았느냐/당했느냐,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지켰느냐, 여기에 따라 만물이 우리 앞에 복종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비밀이다.
십계명을 몰라도 우리 안에 양심의 법은 분명히 있다. 옳다, 그르다가 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있다고 말씀했다. 이것은 영적싸움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이런 자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 자기 육신의 배만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가룟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쌍묘의 비극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의인이면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으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네가 이제는 의롭다 함을 받아 구원을 받았다” 했으면 구원 받은 자로서 언제나 자유와 해방을 가져야 한다. 사단의 공격을 진짜 막아라. 불화살이 날아올 때, 무시로 성령안에서 미사일로 미리 쏘라는 것이다.
롬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런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심판의 그 날이 온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은 점점 더 분명해지는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 그 이름이 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다. 율법, 행위, 판단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다면 사단의 공격을 막아라. 한국이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 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막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는 무엇이든 내게 구하라” 말씀하셨다. 우리 예수사랑교회만이라도 영적으로 깨어 흑암을 막자. 죄의 권세를 가진 사단, 여기에 민감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 모든 불안에서 탈출하여 자유와 해방 속에 행복한 한주가 되길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사람들은 죄의 의미를 몰라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방종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공격을 막을 길이 없어 두려움과 염려 속에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속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참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율법과 교리로 믿었던 과거의 신앙이 무너지고 날마다 영적으로 깨어 죄의 권세를 가진 사탄의 공격 앞에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로 내게 쌓여진 창세기3장을 사로잡아 복종시켜 믿음의 진보가 나타나게 하시고 제자를 세우고 현장을 변화시키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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