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묶인 삶을
해방시키는 그리스도
마 16:16~20
지금 현재, 나의 신앙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많은 문제 앞에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흐름 속에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막연히 살고 있듯이 우리가 복음을 알면서도 둔감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알고 있다면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세월을 아끼고 그리스도에 집중하라고 이미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인에게 하루 하루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르면 하루를 굉장히 쉽게 허비하며 살아가며, 우리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건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냥 흘려보낸다.
우리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를 언제나 맞이한다. 문제없이 사는 것 같지만 날마다 많은 사건에 둘러싸여 있고, 여러 상황 앞에 우리를 굳어지게 하는 일들은 늘 일어난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일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스쳐 보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이 고백을 통해 우리의 잠자던 영혼이 깨어나면서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떤 문제도 우리 삶의 전환점을 주는 분기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에게 오는 여러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문제도 있고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도 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냥 묻어두고 살 뿐이다. 하지만 영적인 감각을 가지면 모든 문제는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닌 삶의 절대적 기준, 하나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문제가 아닌 ‘삶의 절대적 기로’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 내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언약의 백성이 된 것이라면, 우리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은 ‘내가 진짜 증인의 삶을 살 것인가, 어설픈 성도나 목사로 살 것인가’ 이다. 우리는 어설픈 그리스도인이 아닌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진짜 증인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완전한 복음이 나의 것이 되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 완전한 복음이 내 것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복음이 내 것이 되지 못하면 항상 어설픈 내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모든 문제는 진정한 증인이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문’ 이다. 이 문을 믿음으로 통과할 것이냐, 아니면 얼렁뚱땅 불신앙으로 통과할 것이냐 가 중요하다.
*창3장의 세상을 살면서 찾아오는 여러 문제와 내면에서 겪는 일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롬1:17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가 담겨 있기에, 그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자의 삶은 오직 ‘믿음’ 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실하고 사실적인 증거를 가진 증인으로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여정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 놓여 진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말고 ‘내가 믿음에 이르기 위한 오늘을 살고 있구나’ 하고 문제를 재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고 어떠한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분기점이 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내 자신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신에게 가장 크게 발견되는 것이 ‘불신앙’ 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영혼에 별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예배도 나오고 오랫동안 지속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제 앞에서는 믿음이 나오지 않고 염려와 근심, 불신앙, 집착이 나오는 자신을 발견한다. 믿음은 있는데,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앞에서 보석과 같은 믿음이 담겨져 있지 않고 불신앙과 중독 상태에서 시달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발견할 때, ‘하나님을 믿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사실을 믿는다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며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큰 믿음에 도달 할 수 있게 되는지를 찾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믿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나는 인생의 목표가 어설프지 않은 진짜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그리스도를 모르는, 근본문제를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 목표가 증인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 명예적인 것, 자기중심적인 것을 가지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여정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만 있기에 문제만 해결하다가 죽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다가 죽는 인생이 아니다. 이런 인생을 목사님이 정의해주셨다. ‘밥 먹다 죽음’. 밥 먹는 문제만 해결하다가 죽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이 응답을 받으려고 굉장히 집착을 하고 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면 응답이 생명력이고, 핵심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응답은 ‘문제 해결’에 지나지 않았고, 여기에 대한 굉장한 집중력과 집념을 갖고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40일 금식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굉장히 그 문제에 집착을 한다. 타 교회 성도가 전화로 신앙상담을 하는데 복음으로 말을 해줘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리스도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육신적인 문제 해결에만 굉장히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 분의 문제는 근본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제가 안 풀리고, 자식이 속을 썩이는 문제가 아니라 육신적인 삶에 집착하고 있어 그리스도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 상태가 진짜 근본의 문제다.
육신적인 상태에서 응답을 받아봐야 그 사람은 운명의 틀에 갇힌 채로 응답을 받을 뿐이다. 잠시 후면 침몰할 배, 큰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기뻐하면 뭐하겠는가? 이런 응답은 무의미한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현실 앞에 우리는 진짜 응답을 가진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진짜 응답이 무엇인가? 응답의 근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진짜 근원적인 응답은 내 응답의 근원을 알고 바꿔주는 것이다. 곧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문제가 왔을 때 문제 해결이 초점이 아닌 근원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근원적인 응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문제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문제만 해결하려고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이라는 뜻은 근본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을 일컫는다.
성경은 근원적 문제를 말씀한다. 창3장,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할 사람에게 인생의 문제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성경의 시작이다. 이 근본을 우리는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근본이 부딪쳐오는 강도에 따라 신앙생활의 수준은 달라진다. 그래서 흑암에 묶인 사람은 근본을 얘기할 때 몸이 꼬아지면서 듣지 못한다.
원래 인간을 상실한 사건이 창3장이다. 창1:27~28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것을 정복하고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원래 인간의 정체성이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조건 하나가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에게 집착하고 애완견에 집착하고 심지어는 생명도 없는 스마트 폰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불안해하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함께 해서 채워져야 할 영적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것들은 아무리 집착하고 살아도 그 무엇으로 만족과 행복이 아닌 끝나는 순간 후회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근원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만 영혼이 채워지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같은 것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 것으로 채우면 끊임없는 중독증세만 일어날 뿐이다. 이것이 원래 인간을 상실한 창3장의 비밀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누릴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의 말씀을 영혼 속에 담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문제가 오면 우리 영혼 속에 말씀이 나오지 않고 세상의 것이 나온다. 그만큼 말씀이 담겨있지 않고 마귀의 것, 창3장이 들어간 것이다. 말씀을 담았는데, 마귀가 준 거짓말, 방향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에 인생을 집착하게 만드는 거짓말이 들어가서 말씀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 마귀의 영이 사람 속에 들어간 사건이 창3장의 근본문제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창3장을 이렇게 들은 적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벌 받았다’ 이런 식으로 항상 들었을 뿐이다. 모든 축복의 근원은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에 깊이 들어갈 때 나온다.
창3장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말을 듣고 마귀의 소속이 되어 끊임없이 마귀의 충동에 따라 죄만 짓고 사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즉각 해주신 말씀이 요1장,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말씀하신 후, 요2:24~25,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육신적인 기적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들어갔는지 알기 때문에 이 땅에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창3장 사건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 속에 다른 영, 마귀의 영이 들어가 사람을 장악한 것’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람들의 삶의 여정이 무엇인가? 창6장, 오직 육신적인 방법으로만 몸부림치며 인생을 살아간다. 이것을 ‘네피림’, 귀신들린 시대라고 말한다. 하늘에 구멍이 뚫려 귀신들이 떨어진 것을 네피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뭐라고 표현 하셨냐면,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거하지 않아 육체 자체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영적인 존재, 영적인 것으로 좌우되어야 할 인간이 육체로 전락하여 오직 육신적인 것만 추구하며 육신적인 방법으로만 몸부림치는 상태를 성경은 정확히 말해 ‘귀신들린 상태’ 라고 말씀했다. 우리 영혼에 마귀의 영은 영적으로는 눈을 닫고 오직 세상의 육신적인 것이 전부인 것처럼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온갖 방법으로 되는 것 마귀가 만들어서 그 당시 위대한 용사들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이런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도 아닌데 위대한 전문성을 가진 자들이 곳곳에 있다. TV만 봐도 대단한 사람들이 나오고,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의 자식들에게 반하여 시집가고 장가가는 혼합 종교의 시대가 왔고, 오직 육신적인 것에만 집착해서 차 한 대 사면 매일같이 세차하고 타이어까지 닦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창6장의 시대를 동일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창11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목표가 육신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삶, 육신적인 집착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삶, 저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소유하면 또 이용하는 것.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만 한다. 그래서 돈을 가져도 쓰지 못하고 숨겨놓고 벌어들이는 집착에 빠져있다. 장관이 되면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하고, 대통령 한 번 하면 두 번하려고 하는 것. 이렇게 끊임없이 육신적인 것만 추구하며 산다. 그런데 그 끝이 무엇인가? 허무함뿐이다. 바벨탑은 결국 무너져 없어진다. 그래서 인생 마지막이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해지던지, 아니면 이런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마약하고 도박하고 도피할 뿐이다.
곧 사람들은 인생의 근본문제를 모르고 있다. 육신의 틀에 갇혀 성공하고 열심히 사는 근본문제에 묶인 것, 이것이 저주다. 그래서 육신의 틀 안에서 응답 받고 있는 것은 응답이 아닌 저주에 묶인 것이다. 창3,6,11장은 오늘날에도 늘 나타나는 인생의 모습이다. 이 근본문제는 지금 이 시대도 유효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육신의 틀에 갇혀 살면 인생의 말로가 비참할 뿐 아니라 영원한 지옥까지 끌려가는 마귀의 전략 속에 빠지는 것이다.
이 육신의 틀에 갇혀 사는 것의 시작이 창3장 ‘마귀가 사람 속에 들어간 것’ 이다. 그 뿌리가 요8:44 “너희 아비 마귀” 로 시작되었기에 결과는 항상 재앙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있는 것이다. 창3장에 출현한 마귀가 2천년 지난 오늘까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어떻게 우리를 능수능란하게 끌고 가는가? 바로 ‘중독’ 이다. 우리를 중독자로 만들어 죽는 날까지 끌고 가는 기술을 쓴다.
무엇에 중독을 시키냐면, 육신적인 맛, 육신적 쾌감에 중독 시킨다. 그래서 한 번 권력을 맛보면 그 권력의 맛에 더 큰 권력을 맛보고 싶고, 돈을 맛보면 더 큰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치킨 맛을 보면 암 걸린다고 해도 치맥을 또 먹는 것이다. 중독은 아무리 끊으라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마귀는 큰 죄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나쁜 짓을 하면 회개라도 하고 예수라도 믿겠지만, 육신적인 즐거움, 육신적인 삶, 육신적인 체질에 중독 시켜 놓았다. 그래서 스포츠 하나만 미쳐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영화 하나에만 미쳐도 토요일에 영화 세편은 다운 받아서 봐도 주일에 예배는 안 나온다. 이런 것에 중독되면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그 시간들, 세상의 것을 흡수하는 그 시간이 행복이고, 인생의 천국이라고 느낀다. 이렇게 삶의 무감각하게 중독을 시켜 어느 날 인생의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와도 느끼지 못하다가 한 방에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분에게 토요일 밤에 영화 보는 것 끊고 예배 나오라고 했는데도 못 끊더니 어느 날 부인이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는데도 예배를 지금까지 못나오고 있다.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무엇인가 중독으로 끌고 간다. 그래서 어느 날 자기 몸이 다 망가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성경만이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문제는 사람 속에 마귀가 들어간 창3장의 문제이기에 사단의 권세를 이길 창조주 하나님이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 분이, 바로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유일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 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첫 번째 약속이 창3:15이다.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인데, 그 분이 사단의 머리를 밟고 박살낸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성취시킬 분이 드디어 오셨다. 이것을 알고 영접하면 된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해주셨다. 우리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진짜 문제는 우리 속에 다른 놈이 들어와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인 해결책은 우리 속에 다른 놈을 뽑아내고 새로운 영, 살리는 영, 그리스도의 영을 주인으로 시인하고 영접해라. 그래서 구원의 길은 딱 하나, 요1:12 뿐이다.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즉각 들어오신다. 그래서 영접한 자들에게는 롬8:14~15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했다. 곧 근원적인 해결책의 첫 번째는 새로운 영을 소유하라는 것이고, 그 새 영을 소유했다면 이제 그 영에 이끌려 인생을 살 때 우리 인생이 축복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윤리, 도덕, 세상의 기준과는 관계가 없다. 인생을 개판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기준은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림을 받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그 영에 이끌려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12:28,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사는 것이 그의 영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명백히 말씀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해라,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모든 문제를 풀어가라.’ 는 것이다. 운명에 묶인 삶에서 나를 계속 해방시킬 때 어느 날 증인이 된다. 무엇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가? 운명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영접해서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런데 운명에 길들여진 삶이 있으면 운명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육신에 중독된 체질, 육신의 것에 가치를 두는 잘못된 세계관, 운명에서 해방 받을 뿐 아니라 운명에 길들여진 삶도 바꿔주는 것을 ‘거듭남’ 이라고 하고 그 사람을 증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운명적인 삶을 해방시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곧 날마다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분명한 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
마16:13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였다. 예수님의 절대적 관심은 여기에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 물어보고 싶지 않은가? 그 때 “지구상에 너밖에 없어” 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친구지” 라고 대답한다면 원수 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 물으신 것이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 때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다시 물어보신다. 나를 따라오는 너희는 과연 알고 따라오느냐 그냥 따라오느냐는 것이다. 그 때 유일하게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창3:15 약속하신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주인공이 바로 당신, 그리스도, 나의 그리스도 라는 것을 베드로가 최초로 고백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한 번의 고백으로 영원까지 보장받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되는 길을 얻게 되었다. 베드로 인생의 시작점이 바로 이 고백이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이 고백을 하는 이 시간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가 아니면 절대 말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고백할 수 없다. 빌3장,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께 발견되었다고 했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 고백을 하는 순간이 하나님께 발견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이 은혜를 느껴야 한다. 그래서 그냥 고백하지 말고 진짜 흑암이 꺾이는 고백을 해라.
18절 “너는 베드로라” 하나님께 발견되고 하나님의 관심 속에 들어가니까 그분의 축복이 시작되었다. 이제 시몬이 아닌 베드로로 이름을 바꿔주셨다.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 돈다발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신다. 곧 우리의 근본이 바뀌는 순간이 신앙고백을 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바뀌었는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시간이 고백하는 순간이다. 고백하는 순간에 이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신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이다. 이 반석, 곧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았던 사도바울은 고전3:16 “네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알고 고백하는 자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단의 머리를 밟으신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순간 하나님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퇴마사들은 귀신을 쫓기 위해서 생쑈를 다하고 사람 진을 다 빼놓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고백만 했을 뿐인데 음부의 권세가 더 이상 이길 수 없도록 하나님이 밟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만 고백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그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마16:19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이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한 가지 부탁하셨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유일하게 남겨두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주도권을 주셨다. 세상 종교는 아무리 빌어도 ‘부처님 마음이다’ 는 식이다.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내가 풀면 하늘에서 나를 위해 움직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다. 모든 것을 주님이 다 끝내시고 우리에게 주도권을 사용하는 이 한 가지를 믿는 믿음을 남겨두셨다.
믿음은 실천, 행동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열쇠, 문을 열수 있는 열쇠, 막힌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권세를 사용하는 실천하는 믿음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할 일이 영적싸움 밖에 없다. 그래서 그 권세를 사용하는 영적싸움의 엄청난 주도권이 나에게 왔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하는 만큼 하늘에서 움직인다. 한 번의 고백 속에 엄청난 축복이 온다는 것을 확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마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고 큰 축복을 제일 먼저 받은 모델이 되었다. 그런데 고백 이후 즉각 실패가 찾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에게 “마귀야 가라!” 이런 말을 들은 것이다. 베드로는 분명 알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를 알고 고백은 했는데 문제는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지고도 마귀 짓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남기신 것이다. “영적싸움”. 그런데 베드로는 싸울 대상이 보이면 칼을 빼서 남의 귀는 자르면서도 자신은 못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적싸움은 “너 자신을 부인하라” 는 것이다. 진짜 적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나서 바로 실패한다.
그리스도를 알면 적을 알게 된다. 마귀의 전문성은 우리 속을 관찰하는 것이다. 마귀의 전문성은 정치, 경제에 있지 않다. 그래서 마귀가 개입해서 다 망하는 것이다. 마귀의 전문성은 사람 속을 현미경처럼 잘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것이다. 욥1장,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살피며 사람 속을 들여다보고 다녔는데 공격 대상 하나를 찾았다고 하나님 앞에 고발한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너무 잘 믿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깊은 불신앙을 숨겨놓은 욥을 발견한 것이다. 욥은 마귀에게 걸려들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의 인생이 운명적 사건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우리 삶에도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재수 없는 사건이 아니다. 인생에 반드시 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시간표 속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람 속에 들어간 마귀의 시간표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억울해 할 일이 아니라 근본을 개혁해야 한다.
자기 안에 마귀가 있는지도 모르고 늘 “할렐루야, 믿습니다” 하고 아무리 참고 경건하게 살아도 마귀가 ‘니 안에 나 있다 새끼야’ 하면서 마귀가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귀를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죽기 전에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 잘 참고 은퇴해서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이 무너진다. 마귀가 그 날만을 기다린 것이다. 터질 날이 오면 마귀는 그 날을 놓치지 않고 바로 끌어내린다. 그래서 운명은 필연적인 것, 마귀의 계획이다. 이것이 해결되는 것이 근본문제 해결이다. 그런데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도 문제 앞에 믿음에 이르지 않고 믿음에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우리 안에 육신의 생각으로 중독된 사단을 밟는 영적싸움의 집중 속에 영적인 체험을 시작하자.
우리 속에 숨겨진 불신앙, 내가 싸우지 않고 섬기고 있는 내 우상.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이삭 같은 놈 하나 있다. ‘절대 이것만큼은 버릴 수 없습니다. 주님’ 마귀라고 알면 벌써 쫓았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이삭이 있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마귀의 전문성을 대항하기 위해 우리도 전문성을 하나 가져야 한다. 내 속에서 움직이는 그 놈을 밟는 전문성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여정이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이 실천하는 믿음. 그래서 문제 속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문제 속에 평상시 나의 영적상태가 어떤지 발견해야 한다. 평상시 무엇에 길들여져 살아왔는지가 문제 속에서 나타난다. 그 때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은 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력이 생기지 않는다면 평상시 영혼이 형편없이 살아왔던 불신자 상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제 해결 이전에 단계가 있다. ‘내가 도대체 무엇에 중독되어 있어서 문제 앞에 그리스도 하나로 영적 도전 하나를 제대로 못 하는가’ 이렇게 먼저 자신을 발견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완벽한 축복을 주셨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말을 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다 끝났다는 모든 복을 다 쏟아부어주셨다. 그런데 그 이름에 올인,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상시 내 상태가 다른 것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마약, 도박, 여자.... 이런 중독은 눈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그리스도에 집중할 수 없는 내게 있는 중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특별한 중독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육신적 생각에 중독되어 있는 영적 상태를 모두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이상하게 살지는 않지만 상태가 좋지 않고, 사고치지 않아도 상태가 바닥이다. 집중하고 싶지만 되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르게 들어온 육신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와 있어서 무슨 생각이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문제다. 한 가지라도 육신 생각에 집중을 하면 세상의 전문성이라도 온다. 그런데 쓸데없는 육신 생각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중독된 습관, 체질, 마귀의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우리 속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느끼라고 강단은 늘 이 마귀를 폭로하는 것이다. 우리 깊은 내면에 나를 꺾겠다고 버티고 있는 놈이 한 순간의 실수 앞에 틈타고 들어오기 때문에 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마귀는 우리 영혼의 저격수다. 그래서 잠도 안자고 놓치지도 않는다. 평생 우리가 참고 조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진짜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전문성은 내 속에 있는 마귀를 밟아주는 생명력이 우리 안에서 움직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내면 속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실체가 움직여진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방법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것이다. 이 고백 안에 모든 축복,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있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이 고백에 대해 왜 확신을 가지고 올인 하지 못하는가? 우리 영혼 속에 확실한 영적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될 것이다” 범사가 잘 되는 것만 쳐다보고 믿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다. 남이 육신적으로 잘되는 것을 확인하고 믿으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는다. 우리는 영혼이 잘되는 때부터 느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원하는 응답이 오기 전에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다.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범사가 잘되는 응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영적인 체험은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신앙고백에 집중할 때 된다. 곧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들을 우리가 하루에 한 번만 가지고 고백만 해도 우리 영혼이 성령의 역사 속에 풀어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눈 뜨자마자 핸드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것만 집중해도 즉각 영적체험이 시작된다. 그 영적인 체험을 통해 범사에 모든 것이 풀리는 절대적 성령충만의 시간표가 오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더 큰 믿음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래서 날마다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 속에 담긴 축복에 집중하고 선포할 때 우리에게 행1:8 증인이 되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될 줄 믿는다.
그러면 그 영을 힘입어 살며 그의 영에 이끌리면 어느 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그의 영에 이끌리면 몸부림치지 않고 경쟁하지 않았는데도 축복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가장 행복하게 열매 맺는 길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모든 잡생각, 시기, 질투, 욕심을 다 버리고 주의 영에 이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면 어느 날 행복하고 축복된 자리, 사랑받는 자리에 앉게 될 줄 믿는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믿어도 자신을 장악한 사단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육신의 틀에 갇혀 몸부림쳤던 운명에 묶인 삶에서 해방되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절대적 하나님의 은혜 속에 신앙고백에 집중할 때 나의 모든 문제는 영적상태가 바뀌는 순간임을 깨닫고 내게 주신 열쇠를 사용하는 영적싸움의 실천 속에 내 안에 숨겨진 불신앙을 무너뜨리고, 평상시 육신적 생각에 중독된 영적상태를 점검하여 마귀를 밟는 영적인 도전 속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삶이 되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 세계복음화의 대열에 서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