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으로 죽여도 복음으로 살아난 스데반의 죽음
행7:54~60
2019.05.19 1부 말씀
우리가 당해야 할 일을 창3:15의 후예인 스데반 집사가 앞서 당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미안하고 감사해야 한다. 본문에 감격과 감사가 없다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라. 스데반이 유일하게 ‘인자’ 라고 했다. 우리 눈에 ‘인자’ 가 보인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비밀을 목표로 두고 그 이름을 체험하면 하나님의 감격과 감사, 은혜가 넘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너무 가득 차 있어 자기 몸에서 창3장을 보지 못한다. 창3장은 우리 자신이 모르는 죄다. 우리가 짓지도 않은 죄가 우리 몸속에 원죄의 DNA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 몸속에 창3장이 각인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창3:15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창3장을 모르고는 창3:15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사망의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나’ 라는 존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장악하고 있어서 예배에 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 좋은 말이다’ 생각은 하지만 설교내용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네피림이 되고 큰 용사가 되어 사람이 완전히 육체로 전락해버린다. 곧 자신도 모르게 본능대로 사는 체질, 습관, 성향, 성품으로 온몸이 젖어버렸다. 그래서 주위를 생각하고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언제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가짜의 가면을 쓰고 인생을 산다. 이런 것이 우리 육체 속에서 매일 솟아나고 매일 충만해진다. 버렸다고 하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면 또 와있다. 뿐만 아니라 가문을 타고 온 가문의 DNA가 우리 몸까지 영향을 끼쳐서 마귀의 자식, 의에 원수, 바른 길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부모, 조상들로 부터 전달 된 시스템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점을 치고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기준과 방법으로 자신을 다스린다. 이것이 우리 몸에 육체 우상으로 굳어져버렸다. 이 상태 속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얼마나 완악한지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가 되어버렸다.
나는 과거에 이것이 내 몸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에 몸부림만 쳤다. 근본문제를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늘 감정에 젖고,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사복음서에만 자꾸 머물러있었다.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늘 예수님으로만 젖어있었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 늘 매달리고 간청하고 간구하는 수준으로 살았다. 그런데 아무리 간청하고 매달리고 소리를 높여도 내게는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성경이 과연 진짜인가?’ 하는 의심까지 오기 시작했다. 성경 안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볼수록 정신문제가 심각하고 삶의 균형이 깨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도 안 되고, 세상도 안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의문 속에 있을 때 창3장을 발견한 것이다. 창1:2 이 땅은 혼돈과 공허, 흑암이 장악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1:3 빛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는 것이다. 내가 만약 창3장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직도 신앙생활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창3장을 발견한 이후 나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전환점이 왔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하나님의 영광이시구나. 여자의 후손 메시아, 예수는 그리스도’
‘인자’ 는 ‘인간의 구속자’ 라는 뜻이다. 우리의 길이요, 진리, 생명 되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 스스로 ‘인자’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구속자, 너를 구원하기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너를 인치기 위해 구원자로 왔다” 바로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셨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재림의 주, 심판의 주, 만왕의 왕으로 철장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동일하게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에게 간청하고 매달리고 구해도 왜 기적들이 일어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이 본문이다. 스데반의 순교 앞에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다 없애버리시고 스데반을 살려주시는 기적을 나타내주셔야 하는데 하나님의 구출작전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셨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 숨어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늘에서 새로운 잔치가 벌린다.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펼쳐지는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데반의 영혼을 엄청나게 환영하셨다. 사람들의 욕구충족은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욕구충족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그분의 나라에서 환영하고 받아주고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남은 생애 일어나 빛을 발하는 자들이 되자. 내 몸속에 창3장으로 각인된 것은 흑암, 혼돈, 공허이기에,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몸에 할례 받지 못하고 세례 받지 못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몸에서 떠나갈 지어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고상을 떨면서 하나님을 아는 척, 믿는 척, 응답 받는 척, 기도하는 척하게 만드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몸에서 산산이 무너질 지어다! 내 몸에 창3장이 원죄로 와 있음에도 완악함으로 귀를 막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은 내 삶과 가정, 내 자녀들에게서 산산이 깨어질지어다!’ 우리는 언제나 파수꾼의 사명을 해야 한다.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파수꾼의 사명을 진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내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완악함, 배려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어둠의 세력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삶에서 가라!’ 이제는 창3:15을 가지고 자신을 깨우고 깨뜨려야 한다. 병이 들었다면 그리스도 이름으로 재창조, 유일성의 응답을 그리스도로 실현하자.
* 우리는 죽은 자에서 새로운 영, 그리스도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다.
마른 뼈다귀 같은 내 몸에 하나님의 생기, 그리스도를 불어 넣으면 그 생기가 몸속에 들어가 큰 군대와 같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깨어질 지어다!’ 선포해라. 고전15:25~26,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창3:15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그리스도 하나로 왕 노릇한다면 그리스도가 만물을 복종케 하시며 다스리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이 죽어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생명의 삶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성경 말씀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생명들에게 동일하게 성취되어지고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삼켰다’ 는 말은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이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그 인자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의 문제를 그리스도가 삼켜버리셨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고전15:55~57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이 이제는 우리를 사로잡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로 외치고 명령하고 다스리고 충만해야 할 우리가 사망의 독침을 맞으면 힘이 빠져버린다. 고전15:56죽음의 독침은 죄라고 했다.
죄는 무엇인가? 죄는 우리가 가진 기준, 율법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윤리적 기준,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면 자신도 모르는 판단과 정죄, 심판으로 자신의 영혼을 무너뜨린다. 그래서 죽음의 독침은 죄,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했다. 우리가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그리스도를 외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율법은 우리가 가진 상식, 기준, 수준 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율법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진단서를 주셨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왜 참 순교자가 되었는가? 그는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았다. 얻어맞으면서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았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 믿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가해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귀족사회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종교인이라고 진단하셨다. 이들은 딱 하나,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었지, 하나님이 주신 창3:15 메시아,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창3장을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자기 몸에 와 있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창3:15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이 죽을 몸’ 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창3:15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면 영혼이 죽지 않는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종교인이었다. 창3:15메시아 그리스도가 인자, 우리의 구속자라는 메세지를 듣고 나서 오히려 이들은 더 돌아버렸다. 이런 자들은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이 아니라,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들, 십자가의 원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라고 했다. 설교를 듣고 나서 갑자기 왜 더 완악해졌는가? 우리 몸속에 그놈이 있다는 증거다. 말씀이 들려오지 않아서,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인자, 우리의 구속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원흉의 본거지가 우리 몸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드시 그리스도로 해결하자. 스데반을 죽인 공회원들은 복음을 듣고는 살인자로 바뀌었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는 훈련이 안되면 어느 날 우리 자신이 살인자로 바뀐다. 절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굳어진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에 천 명이 넘는 교회들은 다 재판에 걸려있다고 기독신문에서 보도 한 적 있다. 어느 날 악의에 찬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완악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약4:7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지 않으면 절대 마귀를 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 순종하는 자는 마귀를 대적한다. 창3:15 우리의 구속자, 인자, 만왕의 왕 그리스도는 우리 몸속에 와있는 요8:44,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행7: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모세도 창3:15을 말했지만 창3:15 메시아, 그리스도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은 자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다. 이 말이 그들의 정곡을 찔렀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문제, 불신자 상태를 스데반이 정확하게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는데 그 예수마저도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의 몸속에는 원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의 틀을 깨뜨리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 해결 불가능하다.
행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성령을 거스르는 자가 된다. 마12:28~32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로 영적싸움 하지 않으면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에 죄사함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훼방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다. 말씀을 듣고 찔림을 받았다면 은혜의 날로 바꿔야 한다. ‘이 말씀은 분명 나에게 한 말이야’ 한다면 나를 바꾸면 되는데,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를 가는 것이 우리 영혼에 너무 많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딱딱해지는 저주와 재앙을 그리스도로 깨뜨려야 한다.
행7:57, 이들이 얼마나 완악해져있는지 이제는 귀까지 막아버린다. ‘나는 인자를 보노라. 우리의 구속자 만왕의 왕,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고 돌을 집어 던졌다. 돌을 집어 던지는 사람이 뭔가 더 대단해 보이니까 구경하는 사람들까지도 군중심리에 의해 같이 돌을 집어 들었다. 로마법을 어기면서까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든 것이 군중심리다. 사람들이 전부다 마귀로 변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이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완악함, 발악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듣는 마음이 없으면 싸우게 되고 늘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부인이 잔소리 좀 하면 소리 지르지 말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면서 조용히 들어봐라. 듣는 마음이 없으면 싸우게 되고 살인까지 일어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다.
행7:55 가해자들의 완악한 행동에 반해 순교자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성령충만을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으로, 허튼 소리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방언을 성령충만 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싸움판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나도 방언이 터져야 성령충만 인 줄 알고 방언을 받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많은 방언기도를 해도 내 심령이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믿음자체가 더 떨어졌다.
본문에,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히는 것을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성령충만 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인자, 구속자가 늘 들여다보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말씀했다. 어떤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평안을 누리고 있었다. 성령충만은 스데반과 같이 돌에 맞고 피가 터져도 더욱 담대해지고 평안이 찾아오는 것이다. 자유함과 고요함을 가지고 가만히 있었다. 스데반이 자신이 가진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그들과 대항한 것이 아니었다. 소란한 와중에도 엄청난 평안함을 가지고 오히려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에볼라가 있다고 해도 선교를 떠나고 러시아 비밀 경찰 체포조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간다고 해도 담대하게 가는 것이다. 몇 년 전 중국에서 수련회를 할 때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수십 명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집회장소를 에워쌌고, 어떤 한 사람이 앞에 나와서 메세지 하는 내 마이크를 빼앗아 갔다. 그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계속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이크를 빼앗아 간 사람이 오히려 더 떨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성령의 역사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말 어설프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정말 내 자신을 바꾸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달리는 자살, 교통사고, 양주소비, 인터넷 음란물, 청소년문제, 저 출산율 이런 문제들이 일어난 이유는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충, 대강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집중, 1인칭이 안되기 때문에 무속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대충하지 말고 언제나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선포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 골3:2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스데반은 그런 현장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은 위의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보았다. 땅의 것은 창3,6,11, 행13,16,19,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살인자, 욕심쟁이, 더러운 것뿐이다. 스데반은 보좌에 계신 우리의 구속자, 우리의 구원자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이루신 갈보리 십자가 사랑을 보았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나를 들여다보면 이해 안 되는 사람이 없다. ‘하나님이 나 같은 쓰레기, 원흉자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게 되었구나’ 그리스도로 나를 보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구속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영접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싶은 애절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죽음, 부활로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왕이시다. 그래서 스데반이 본 그리스도는 바로 창3:15 인자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평상시 영적싸움을 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구속자를 볼 수 있다. 평상시 마귀의 일을 멸하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도 성령충만 속에서 기도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스데반이 고백했다. 창3:15의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당해야 할 고난, 죽음, 영원한 지옥배경까지 다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인쳐 주셨다.
행7:60 “무릎을 꿇고...” 스데반은 인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인자가 자기 생명 속에 있기 때문에 뱀의 머리를 박살내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참 왕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어떤 상황에도 무릎을 꿇는 기도의 제사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를 세우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구속자가 내 몸에 계시고 하나님 보좌에도 계시니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간청이 아니었다. 우리 안에 엄청난 구속자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자가 되셨기에, 인자되신 나의 구속자, 나의 주인, 만왕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오히려 기도한다.
딤후4:16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남긴 유언이 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저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자신은 그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와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책임을 묻거나 재앙을 주지 않겠다는 절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우리의 별명은 ‘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자는 것이다. 그래서 재림주로 오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 일어나게 되어있다. 스데반은 지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로부터 살해를 당한 것이 아니다. 고요히 자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갑자기 죽으면 ‘사고로 죽었다’ ‘칼에 찔려 죽었다’ 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어떤 죽음도 자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모양으로 죽었든지 죽음 앞에서 자유 해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언제 어떻게 죽어도 죽음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부르셔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잠이 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잔다’ 고 표현해야 한다. 스데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반드시 창3:15로 각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일에도 남의 말 하지 말고 남을 향해 중상모략하지 말고 우리를 향해 돌로 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자가 되자.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육신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인해 원죄로 장악된 창세기3장을 보는 눈이 없고, 사망의 생각에 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세상의 기준과 감정에 잡혀 살아가야 할 인생에서, 이 근본문제를 깨달은 창세기3장15절의 후예로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자들처럼 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고 내 영혼을 파괴시키는 죽음의 독침, 율법을 그리스도로 깨뜨리고 오직 영적싸움의 훈련이 지속되어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옵소서. 스데반이 인자, 곧 구속자를 보았듯이, 그리스도가 내가 당해야 할 죽음과 지옥배경을 해결하시고 나를 인치셨음을 믿어, 어떤 상황에도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기도의 자세를 갖추고 하나님이 하시는 계획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