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상황을 초월하는
사도바울의 영적누림
행16:19~25
2020.02.23 1부 말씀
지금 전 세계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공포에 떨고 있다. 세상에서 쏟아지는 각종 뉴스를 통해 우리 생각의 방향이 어디에 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람의 말은 분명 개소리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언약, 약속, 방법이다.
* 이 땅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고 성경은 이미 말씀했다.
사는 날 동안 고통과 지옥 배경을 통해 허우적대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왜 인간에게 이런 일이 찾아왔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이 땅에는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악마가 있으니 그 선악과를 볼 때마다 그 놈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예배를 통해 언약의 메세지를 주셨다. 그런데 이 사단이 에덴동산까지 침범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떠나게 만들었다.
창1:1 하나님이 우주와 만물, 사람까지 모두 창조하셨다. 그런데 그 만드신 세계 속에는 내어 쫓긴 흑암이 있다. 이 흑암은 빛 되신 그리스도만 싫어한다. 그래서 빛만 들어가면 발악을 하는데, 거기에 호들갑 떨지 말고, 속지 말고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있어야 한다. 성경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있을 때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시지만, 우리의 생각이 세상 여론, 위기 상황 속에 잡혀버리면 죽는다. 이 땅에 공중권세 잡은 자가 존재하여 틈을 타고 사람 속에 들어가 사람을 속인다. 그래서 생각자체가 하나님께 향해 있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면서 땅의 것에 묶여, 땅의 것을 바라보다가 속는 것이다. 이런 자는 진노가 찾아온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를 끝내놓으셨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 사망권세 잡은 사단에 의해 속지 말고 담대해라, 흑암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일어나 빛을 발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해라.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밟았다. 원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 가운데 살게 만드는 사단의 세력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멸하게 되면 이 땅에서 살게 된다.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을 우러러 봐라. 언제나 위의 것을 생각해라.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해주셨기에, 우리 몸에 3저주로 와 있는 뱀의 머리를 밟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는 길이 그리스도, 지옥권세에서 해방 받는 길이 그리스도, 이 땅에 죄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저주와 재앙의 시스템에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에게 그리스도를 주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흑암만 결박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그 언약이 살아서 움직여서 모든 육체가 재창조되어지고 유일성의 응답을 받게 된다. 히4:12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괴로워해야 할 시간에 괴로운 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는 자, 이미 불신앙에 넘어간 자다. 어떤 위기 상황에 괴로울 줄 모르고 있다면 심각한 사람이다. 바울은 위기상황 속에 괴로울 줄 알았다. 우리가 왜 괴로워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렇게 잔인무도 하구나’ 이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난 우리가, 모든 죄와 저주를 꺾을 수 있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생각하고 창3:15 그 이름을 찬미하면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신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 이 비밀을 모르면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다. 행16장 본문에 사람들이 악한 자로 돌변한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는 바울과 실라는 생각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분명히 둘로 나눠진다.
* 우리 영혼에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인생에 답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부터 확립되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알고 있으면 세상의 환란, 위기 상황에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담대해야 한다. 어제도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교회 문을 닫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성전을 지어놓고 “이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해놓고 문제 앞에 들통 나고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면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바이러스 같은 것은 영원한 불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만왕의 왕, 창조주이시다. 사도바울 때도 수많은 전염병이 있었다. 그래서 고전3:16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알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면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역사한다는 것을 말씀했다. 시91:6~7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은 어두울 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없을 때 퍼지는 것이다.
우리는 왜 자꾸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마귀의 일을 멸해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성전 삼으시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가지면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힘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불신앙만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밟아버리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나의 산성, 나의 힘, 나의 방패라는 것이 믿어지면서 내 입술을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찬양이 나온다.
오늘날 전 세계 교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지 못해 반기독교가 되어 불교보다, 이슬람교보다 수준이 떨어져버렸다. 윤리, 도덕이나 겨우 지켜가면서 살아남으려는 율법교회로 전락해버렸다.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 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 끝났다. 하나님의 수준은 우리의 수준과 다르다. 우리의 수준은 무엇을 했냐 안했냐, 먹었냐 안먹었냐 이런것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수준은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았는가?!” 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수준은 언제나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이 세상을 정복했는가?!” 이다.
요19:30,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다 이루셨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다. 그 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그리스도 그 이름 속에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인 것들을 해방시키셨기에 롬8: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향해 아멘 했기 때문에 모든 진노가 넘어간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면 형식주의자가 되고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가지고 있지만 가면을 쓰고 신앙생활을 하며 위기상황이 오면 두려움과 염려, 걱정과 근심에 잡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가 그리스도” 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 위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힘을 가진 자들은 ‘죽으면 죽으리라.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셨기에 두려움을 떨고 있는 너,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너는 그리스도로 살라!’ 자신을 향해 선포한다. 전도자, 세계복음화의 제자가 맞다면 바이러스 같은 것에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잘했다 칭찬 받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딤후3:5 형식주의자들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 이런 자들에게서는 돌아서라고 했다. 형식주의자들은 실천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목숨 걸고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첫 번째 모델이 되어주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고 대속주가 되셨기에 우리가 목숨을 걸어도 그 분은 살아서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요일3:12 가인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마라. 가인은 땅의 것을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결국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는 것, 근본문제를 모르고 살아서 아우를 죽이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 자기 행위가 악한 자가 되었다. 우리 인생에 근본문제, 곧 하나님을 떠난 죄 가운데 빠져 사망권세 잡은 사단에 의해 길들여졌던 것에서 이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다면 이제는 위기 상황에서도 정말 담대해야 한다.
유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위기 상황이나 환란,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방법,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는 자는 화가 있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창3:15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저주와 재앙을 사로잡아 결박시키는 만왕의 왕이 되시며,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여셨기에, 이제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비밀이 시작되었다. 그 주,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이런 자는 이제부터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사망권세 있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절대 공격할 수 없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천국열쇠, 그리스도 그 이름의 열쇠를 자꾸 사용하는 것이다.
벧후2:15, 창3:15의 길을 떠나고 마16:16을 버리는 자는 자꾸 미혹된다. 우리 생각의 방향이 그리스도께 잡히지 않으면 미혹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의의 삯을 가지고 이 세상의 길을 따라간다. 고후4:4~5 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이제는 그리스도 있는 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나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 하나로 하나님은 모든 축복을 주셨다.
본문에, 귀신들린 여종과 주인이 어떻게 살았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시여, 이 땅에 하나님의 큰 구원을 전달하시는 전도자들이시여!” 소리는 내지르지만 믿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형식주의자들, 귀신 들린 자들이라고 한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에게서 났다” 하는 것이다. “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 성전에서 함께하시려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해 놓고 예배는 안 드린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참 슬프다. 빛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상실해서 전염병 앞에 덜덜 떨고 있기 때문이다. 이단교회는 무너지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그들이 올 것을 대비해야 한다고 늘 말해왔다. 왜 이단들이 무서워 교회가 문을 닫는가? 복음이 없어 귀신들린 자들을 따라다니는 자들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꺾고 구원을 받도록 돕는 것이 교회가 아닌가?
*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문제를 찬송으로 바꿨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그리스도 이름을 찬송했을 때 흑암이 걷히고 옥문이 흔들리면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렘33:1~3 “환란날에 내게 부르짖으라” 엄청난 바이러스 공포에 떨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은 결국 창3:15, 마16:16, 행1:8을 생각하지 않고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고후11:23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 뻔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은 자는 어떤 위기나 상황 속에서도, 죽을 뻔한 일들을 당해도 담대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롬16:25~27 그리스도, 이 복음을 1인칭 하는 사람들에게는 있는 자리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를 마음껏 누리며 공포에 사로잡힌 현장을 오히려 전도의 문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자, 성령의 역사 속에 있는 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기도와 찬송이 있기 때문이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자가 되라. 예수사랑교회는 후대를 찾고, 세워나가며 바통주자를 만들어가는 곳이기에 예수사랑교회 성도들에게는 아무 문제 될 일이 없다. 디모데를 찾고 세우는 일을 진행했던 바울은 문이 막혀도 하나님이 새로운 문을 여셨다. 이것이 행16장 전체 내용이다. 행1:8을 성취시켜 가는 예수사랑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계획 속에 있기 때문에 헬라인, 귀부인, 산업인, 전문인들이 이곳에 와서 서밋의 축복을 받게 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도 이기적 미신신앙을 배척해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을 가지고 우리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기적 미신신앙, 욕심쟁이, 탐욕, 증오, 무지...이런 것을 밀어내야 한다.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로 사람을 괴롭히는 자들이 누구였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이었다. 구원의 길을 전한다고 바울을 찬미했던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귀신들린 자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한 번의 기도 속에 사람이 온전해졌으면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데, 자기 이익에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고 이상한 사람이 되어 바울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교회를 보면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복음을 가지고 사람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에게 직접적으로 욕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문자 메세지로 목사를 욕한다. 본문에도, 바울에게 달려들어 옷을 찢었다고 했다. 그리고 바울을 가두고 지키라고 명령까지 했다.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은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내면이 악령에 사로잡혀 발악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 모습이다. 사람이 미치든지 죽든지 자신과 아무상관이 없는 일이 된다. 오직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 돈만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 조금 손해를 봐도 우리 아빠가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에 저 사람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이해줘도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해주시기 때문에 괜찮다고 해야 한다. 이익에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 바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발광을 하고 자신의 유익에 소망이 끊어졌다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 되겠는가?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귀신들린 주제에 자신들이 로마사람이라고 민족주의와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들을 현혹시키는 풍습을 전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습” 곧 다른 문화로 취급해버렸다. 사람 속에 있는 사단이 문화라는 말로 교묘히 바꿔버렸다. 사람 속에는 이렇게 수많은 마귀의 말들이 나온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를 문화와 풍습이라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그래서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을 가로막는 자들이 되었다. 복음자체를 풍습으로 이해시키려고 했다. 오늘날 광화문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기독교를 정치적 문제로 돌려버리고 있다. 기독교에 정치색깔을 띄게 하면 핍박은 당연히 찾아오게 되고 전도의 문은 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 받으라고, 이 땅의 재앙을 막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멋있게 누리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풍습과 문화와 관계없는 초문화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천명으로 주셨다. 모든 사람에게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 구원 받게 하라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생명이 끊어지는 날까지 성령충만으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죄와 사망에 묶인 자를 그리스도로 풀어주고, 개인을 묶고 있는 가문의 저주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으라고 전달해라. 불신자 상태로 삶의 균형이 무너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라.
바울이 이것을 전하자 바울과 실라를 괴롭히려고 무리를 선동하는 자들이 일어났다. 자기가 손해를 봤다고 소란을 떨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무리를 선동하고 바울과 실라를 죽이라고 군중심리를 발동시키며 소란을 피웠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바울과 실라는 그들을 향해 충분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 할 수 있는데도 매를 맞고 비참함을 당하면서도 침묵했다.
벧전2:19 “부당하게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어떤 위기 상황과 매 맞음, 슬픔과 고독이 찾아와도 우리는 하나님만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는 슬픔의 시간이 가장 아름답게 된다. 매를 맞을 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쓰레기 취급을 당했던 나를 하나님이 재생산시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기에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행복이고, 내 슬픔이 아름다움이라고 고백한다. 심심하면 도망가고 심심하면 입을 함부로 열었던 베드로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은혜가 된다는 고백을 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목숨 걸고 나를 사랑할 수 있냐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물으셨을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표가 왔다. 베드로가 “네, 사랑합니다” 고백했을 때 예수님이 “그러면 이제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내가 너를 데려가겠다”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말이 필요 없다. 설명할 것도 없고, 따질 필요도 없다. 무엇을 따지고 할 말을 다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불신앙,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색깔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가되어야 한다. 내 삶이 원통하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변명 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 되라. 하나님의 필연 속에 있음을 믿는 자가 되라. 하나님의 절대계획 속에, 언약의 여정 속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믿어라.
우리가 기도 속에 들어가는 순간이 바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두고 가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향하면 모든 방법이 다 나온다. 나를 때린 사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미치는 일이다. 감옥에 갇혀서 나를 때린 인간만 생각난다면, ‘귀신들려 살려줬더니 감옥에 넣었다’ 며 원통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형편없는 인간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미치겠다. 주여, 결과가 이런 것입니까? 나를 왜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소리친다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바울은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했다.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셔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달리신 그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에게 고난을 준 자들을 바라보고 분하고 슬프고 견딜 수 없는 증오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생각의 방향을 하나님께 두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방법을 주시고 그 방법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서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목자, 나의 힘이시니,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영적 누림이 나의 것이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위기 상황들을 초월하는 영적누림이 우리 영혼 속에 충만해져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사람들은 땅에 것만 생각하며 다가오는 진노를 막지 못하고 바이러스 공포에 떨고 있는 현장 속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문제를 끝내셨음을 믿어 모든 저주와 재앙에서 뱀의 머리를 밟고 유일성과 재창조의 축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절대 계획, 사도행전 1장 8절을 성취시켜 나가는 예수사랑교회로 나를 부르셨기에, 막힌 문 앞에서도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날마다 믿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내게 찾아오는 불합리한 일과 부당한 일속에 슬픔과 고난이 찾아와도 오직 찬송과 기도로 내 생각의 방향을 하나님께 두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발견하여 어떤 위기 상황도 초월하는 영적 누림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