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
(창 12:10~2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기도는 했지만, 그의 신앙은 더 빈약해지고 불신앙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이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하면서도 늘 불신앙 속에 있는 것을 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믿으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갈 이유를 찾지 않는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된다. 이 말씀은 곧 내가 이제는 너를 간섭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코이노니아, 그분과의 교제, 신뢰, 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창12:8~9,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고, 자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서도, 또 이름까지 부르면서도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자신을 살리는 언약의 사람이 아니라 환경 앞에 두려움에 빠지고 알 수 없는 불안에 떠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지고 나를 바꾸고 현장을 바꾸고 마귀의 일을 멸하면 되는데 불신앙이 각인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기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려면 자기를 포기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져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 인생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로 다 끝내시고 이제는 나와 항상 함께 살아계신다. 이 고백을 정말 믿는 자가 된다면 정말 행복해질텐데, 오늘날 고백을 하고도 믿지 않고 사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창3:15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죽은 나를 다시 살려냈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동행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하고 동행하지 않고, 기도하고 불신앙하고, 기도하고 부끄러운 일을 늘 당하면서 산다. 창3:15 나와 동행하는 하나님과 의논하지 않는 결과가 이렇게 비참하다. 기도 속에 있는 사람이 맞다면 제발 하나님의 계획을 묻는 자가 되라. 그러면 자신과 영적싸움이 구체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 사람을 살리는 자가 맞다면, ‘나는 한 영혼을 놓고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상대방의 인본주의 앞에 나는 얼마나 양보하고 있는가?’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전도자’ 라고 하고 ‘사명 가진 자’ 라고 한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이름을 소유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새로운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진 자가 맞다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전도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창3:15 전도 현장에서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다. 언제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그 느낌을 현장에서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신자 앞에 부끄러운 일들만 당하고 있다면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유명한 권투 선수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청년 때까지 ‘케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 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데 영웅의 복서가 된 그에게 어려운 일들을 찾아왔을 때 교도소에 갇혀 있는 그를 모든 사람이 버렸지만, 모슬렘 사람들이 그를 돕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무하마드 알리’ 라고 이름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그의 전성기 때는 모든 대학에서 그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해서 그가 가진 학위만 50개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 하나가 터지자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건 하나만 터져도 사람을 그냥 버리는 이상한 종교로 전락해버렸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기준에 묶여서 이해도 안되고 용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작은 증거가 삶에서 나타나야 하지 않는가? 그 때, 무하마드 알리는 우상 경제로 자기 인생을 바꿔버렸다. 그가 가진 엄청난 돈을 모슬렘에 기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사랑교회가 할 일이 없다면 우상 경제에 빠진 현장에 메세지라도 보내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창3:15의 하나님은 우리 안에 메세지를 주시는 분이다. 다른 것을 주는 분이 아니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수많은 문화인들이 있다. 우리는 그 모든 문화 속에 메세지를 보내야 한다. 우리 교회 메세지를 편집해서 유투브에 올렸는데, 아무도 보지 않을 것 같은데도 어떤 동영상은 조회수가 15000이 넘는다. 거기에 많은 문화인들이 들어와서 댓글을 남긴 것을 보았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밥 먹고 사는가? 하나님의 의가 내 몸에 있는지 없는지 찾아야 한다. 문화를 움직이는 엘리트들은 굉장히 고통 받고 있다. 그들은 창3장의 원죄를 전혀 알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사는 만큼 혼돈과 공허, 흑암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고 사는 것이 종교다. 종교는 절대 구원을 가질 수도 없고 접근도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종교에 갇혀 일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종노릇하고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메세지를 보내야 한다. 나는 예수사랑교회에서 매일 올라오는 메세지를 외부사람들에게 많이 보낸다. 예수사랑교회 메세지를 보내는데 30~35분 전도가 걸린다. 그 사람의 카톡 사진을 보면서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나에게 2년 동안 한 번도 응답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아멘’ 하고 답장이 왔다. 어떤 사람은 한 달 동안 읽지 않는 것도 본다. 그러면 사실 굉장한 갈등이 온다. 그래서 카톡이 바뀌었나보다 생각하고 안 보내려고 그 사람의 카톡을 확인해보면 다 읽었다고 표시가 되어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기억하고 계신다. 말씀만 듣고 그 말씀을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실패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예수사랑교회가 왜 탄생했는가? 모든 생명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접속해주려고 탄생했다. 그래서 반드시 메세지를 보내줘야 한다. 교역자들의 핸드폰을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과연 하루에 누구에게 얼마나 메세지를 보내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예수사랑교회 성도들은 얼마나 예수사랑교회 메세지를 듣고 있는지, 누구에게 얼마나 보내는지 자신을 점검해봐야 한다. 주일 오전 7시쯤이 되면 유치부 예배 메세지가 올라온다. 나도 그 메세지를 들으면서 세수하고 준비를 한다. 하나님의 메세지가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만 되어도 사람들 영혼 속에 파고들어가게 되어있다. 창3:15의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메세지를 주러 오셨다. 곧 메세지를 듣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다는 것을 선언하라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면 어느 날 땅바닥에 엎드려질 일들이 찾아오고 눈이 멀기도 하고 각종 병들이 찾아오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겁을 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것은 부지런히 메세지를 전달하는 현장을 갖는 것이다.
창12:1~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하셨듯이, 이 시대 우리가 메세지를 전달하는 대리자가 되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 나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축복할 것이요,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저주할 것이라는 엄청난 명령까지 하셨다. 창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메세지를 주셨다. 창12:2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지금 이 말씀이 나의 것이 되었는데 여기에 전혀 반응이 없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의 더러운 자아다. 이런 더러운 자아를 반드시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언약에 아무 사명감을 느끼지도 못하고 생명을 걸지도 않는다면 정말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셨다. “갈대아 우르에서 벗어나 정신문제를 해결받아라. 우상 경제 좋아하지 마라. 그것으로 인생을 마치면 저주받는다” 그래서 우상 경제의 지역에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어 메세지를 주셨다. 바벨론 포로에 잡혀간 다니엘에게도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단1:8 다니엘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받고 뜻을 정했다. “우상 경제, 우상 제단에 드린 물질을 내가 먹지 않을 것이다!”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달받은 다니엘이 이렇게 고백했다. 단1: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뜻을 정하면 하나님께서 주위의 사람들도 바꾸신다. 출애굽기에서도 모세에게 하나님은 출3:15 메세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메세지를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메세지를 주신다. “불신앙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는 간직하고 받으라” 로마를 복음화해야 하는 바울도 행19:21 “나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말씀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언약으로 믿으면 메세지를 받는 것이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7: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자기 몸에 메세지를 했다. 창3:15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신학이나 교리, 이상한 목사의 말을 듣고 감동하지 말고, 하나님의 메세지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메세지가 내 몸에 매일 오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내 몸에 하나님이 주시는 메세지가 없으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환경 앞에 자신도 모르는 불신앙에 젖게 된다. 계2:1~3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영적싸움을 하고 있는지, 행동하고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이런 비밀을 내 몸에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삶과 현장에 변화가 온다. 복음의 메세지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이슬람 국가에 사이트를 뒤져서라도 구원의 메세지를 계속 보내야 한다. 불교의 나라 태국, 인도나 일본은 심각할 정도로 정신병이 급증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인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겠다”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밥 먹기 위해 사는 것은 가장 더럽게 인생을 사는 것이다. 교리적, 신학적으로 메세지를 너무 잘 풀어나가는 분에게 “그 메세지를 가진 당신의 상태는 지금 어떻습니까?” 물었더니, “아, 그런 것은 생각 안 해봤는데요” 했다. 엄청난 신학적 메세지를 가지고 있지만 인생이 너무 더러워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더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비밀, 그 언약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빛, 소금 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메세지가 내 몸에 있다면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몸에 없다면 우리는 메세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들린 것이다. “나를 왜 괴롭게 하십니까?”(막5:7) 이 말은 “나는 더러운 상태로 살겠나이다!” 이 말과 같다. 자신이 더럽고 추하고 악해도 당신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야 사업도 현장도 응답을 받는다. 다른 길로 가면 안된다.
*인생에 일어나는 문제와 상황과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가야 한다.
아브라함의 목표는 ‘가나안’, 이 하나였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런데 하란에 머무르는 바람에 초상을 치뤄야 했다. 가나안으로 갔다면 그의 아버지도 가나안 땅을 구경하고 죽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하란에서 죽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갔는데 마침 기근이 들었다. 이런 상황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한다. 기근이 들면 샘이라도 파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브엘세바, 약속의 우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슬슬 옮겨갔다. 단을 쌓으면서도 내려가고 내려가서 결국은 가나안에서 애굽 국경까지 간 것이다. 기근이 들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상천하지의 하나님!’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 기생라합은 무식해도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상태가 이상해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기근이 들어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 해서 가나안 땅에 왔다면 이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면 어디를 가야 우물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질문하고 사람의 말을 듣고 움직였다.
예수사랑교회 강단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세지로 받고 결단만 해도 많은 응답이 있다. 나는 자동차 시동이 걸리는 순간 예수사랑교회 메세지가 나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 역시도 쓸데없는 것을 틀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리스도를 놓치는 순간 짜증나고 신경질 나고 기분이 나빠지고 별 이상한 일들이 다 일어난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 귀로 들리는 소리, 뇌에 입력된 언어, 여기서 나오는 것은 전부 원망, 불평, 더러운 것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들어도 ‘원더풀’이 되고, ‘뷰티풀’ 라이프가 시작된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응답을 받지 않는다. 예수사랑교회 강단 메세지에서 전부 응답을 받는다. 교역자들의 대표기도를 들어보면 저 사람이 일주일 동안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기도문에 있는 것으로 대충 기도하는지 다 느껴진다. 이런 것이 느껴질 때마다 ‘큰 일났다. 저 사람의 무능을 통해 애굽 왕이 저 사람에게 개소리를 하게 될텐데...’ 너무 안타깝다.
본문의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불신자에게 지적당하는 인생으로 전락되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면 사탄이 침입하지 않는 망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탄에게 장악이 되었다. 우리 인생이 언약의 여정이 되고, 그 여정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정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 역시도 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 종에게도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이 필요하오니 내게 성령으로 역사해주옵소서.’ 창3:15은 슬픔이 아니라 소망 중 소망이다. 창3:15 공간 속에는 슬픔이나 아픔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창3:15 그 공간 안에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창3:15의 공간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요14:6 “나는 길이요 진리, 생명이라” 창3:15 그 공간 속에 있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 우리 영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주신 메세지를 붙잡고 메세지를 받은 주인공로 시작한다면, 눈물과 부끄러움으로 몸부림치던 이상한 삶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본문을 통과 한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 사라는 향연에 귀빈이 되었다. 이제는 절대 자기가 쉽게 움직이지 않고 메세지를 받고 움직이는 자가 되었다. 메세지를 받지 않는 인생 여정은 한계와 낙심, 실패와 절망, 불신자들로부터 지적당하는 일 밖에 없다.
우리는 세계복음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창3:15의 근원적 축복, 대표적 축복을 받은 자이고,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가진 자다. 갈보리 십자가 언약과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부활의 영, 그리스도를 가지고 이제 기념비적인 축복을 가진 자다. 그뿐 아니라 이제는 창3:15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이 시대 주인공, 이정표를 가지고 진행하는 자들로서 빛의 경제를 가진 이 시대 유일한 주인공이다. 절대 불가능을 절대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인 축복을 가진 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명령을 주셨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함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나안에 간 것이다. 가나안 땅까지 오는 여정 속에, ‘아,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축복하시는구나’ 이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단을 쌓고 희생제사를 지내며 ‘하나님의 절대 뜻대로 살겠습니다. 오, 창조주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여호와 이십니다!’ 이렇게 찬양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오는 문제가 찾아온 것이다. 우리 예수님이 어떤 문제 앞에서든지 우리가 가질 자세에 대해 말씀하셨다. “담대하라. 창3:15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아브라함의 실패와 회개의 사건을 통해, 내 삶을 간섭하시는 창3:15의 하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우리 삶의 결단이 시작되어야 한다.
본문에, 아브라함의 첫 번째 실패가 나온다. 창3:15의 하나님은 메세지를 주는 하나님,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인데 이것을 놓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의논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메세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불신앙의 세상에 속지 않는 비결이다.
아브라함이 점점 남방으로 가더니 애굽으로 마음과 생각이 완전 기울어져버렸다. 이제는 뇌의 방향이 애굽으로 맞춰져버렸다. 뇌에 애굽이 입력되니까 애굽 말만 하려고 했다. 그 당시 애굽이 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애굽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만 만나면 “애굽 어때요?” 하고 묻기 시작했고, “애굽은 잘 살고 배부르는 땅, 맛있는 음식이 풍성한 곳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온 몸이 애굽으로 기울어졌다. 세상 문화는 이렇게 무섭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온몸이 애굽 세상으로 기울어져 언어도 애굽 말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애굽 사전 갖다가 애굽 말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전도도 못하는 사람이 일주일동안 해외를 나간다고 하면 그 나라 언어 사전을 펴놓고 배우려고 한다. 육신적으로는 너무 빠르게 움직인다. 불신앙은 사탄이 왕노릇 하는 것, 사탄이 임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아주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혀 간다. 결국 육신적 안목과 정욕으로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되었다. 자기 부인을 팔아서라도 이렇게 다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실해버린 아브라함의 상태가 이렇게 이상해졌다. 하나님의 영광, 찬란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 땅에 짓밟혀지고 오히려 육신의 안목과 정욕을 따라 인생의 여정을 가고 있었다. 육신적 안목으로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결국 이방인 왕으로부터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놈이 완전 미친 놈이네.’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런 상태다. 하나님의 권위를 완전 상실한 실패자로,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세상적 사고로 살면 안된다. 세상적 사고로 살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멸망이고 가증스럽고 더러운 일 밖에 없다. 하나님이 죽음과 부활로 간섭하지 않으면 우리는 버려진 자들보다 더 이상한 자들이 된다. 그리스도가 지금 죽음과 부활로 우리 몸을 간섭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다. 나도 정말 매일 느낀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만큼이라도 나를 간섭하셔서 내가 망하지 않고 살게 되었구나’ 그래서 너무나 은혜다. 본문을 통해 왜 우리가 실패하는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 인생은 점점 망해간다. 브엘세바 약속의 우물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아야 한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있다. 우리 삶에 마귀의 일이 없다면 우리는 이상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마귀의 일이 있을 때마다 창3:15을 적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것이다.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기근이 드니까 아브라함이 사람들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애굽이 굉장히 잘살고 먹을 것이 많고 애굽 내려가기 직전에 브엘세바, 그 약속의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의 물은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았다는 그런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아브라함이 그곳으로 간 것이다. 창3:15 말씀에, 뱀 대가리를 깨뜨려도 발꿈치를 문다고 했다. 약속 속에 뒤꿈치를 무는 것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지 않고 살면 우리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뒤꿈치를 물릴 때 죽음과 부활의 메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죽음을 담당하시고, 영원한 부활과 생명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잠겨있으면 된다.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나와 함께 역사하기 때문에 언제나 그분의 계획을 묻고 간섭을 받아야 한다.
뒤꿈치를 물리는 사람은 언제나 창3:21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된다. 물렸어도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를 메세지로 주신다. 계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세상은 애굽이다. 여기는 사탄이 존재하고 있다.
창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라함이 자기의 부인을 보고 두려움이 찾아왔다. 사람을 바라보고 뭐가 이렇게 찾아들어온다. 창12:2 “아리따운 나의 사람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자기를 합리화하는 시인이 되어버렸다. 창12: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이제는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만큼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사라져버렸다. 메세지는 받지 않으면서, 단만 쌓고 여호와의 이름만 부르는 것은 소용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고 그분의 간섭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분의 계획조차 묻지 않는다. 그래서 늘 자신이 결정하고, 삶은 염려와 두려움, 걱정, 낙심, 절망, 짜증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적 해석의 결과는 이뿐이다. 사라도 영적인 눈을 열고 아브라함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선포해야 하는데 메세지가 나오지 않는다. 메세지를 받기만 할 뿐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창3:15 뇌에 각인시켜 놓지 않고 창3장이 뇌에 각인되니까 개소리만 나올 뿐이다.
그래서 사라도 무능으로 주저앉는다.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이름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세계복음화!” 힘있게 나와야 한다.
창12: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인간적 계획을 짜놓고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잡혀있고 사라는 어떤 남자를 한 번 만날볼까 하는 음란의 영으로 자꾸 충만해지고 있었다.
창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그리스도 하나를 잃어버리면 사람이 이렇게 무능해진다. 무능한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무능은 무시무시한 재앙을 가져온다. 바로의 궁으로 끌어들이면 “나는 아브라함의 아내다!” 해야 하는데 아브라함을 바라보면서 바로의 궁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이 먼 길을 떠나오면서, 하늘의 별을 보면서 “우리 함께, 끝까지 갑시다” 이런 약속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그런데 바로의 궁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사라가 대항했다는 언급이 없다. 아브라함은 목축업자, 나그네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궁으로 들어가 보니 궁에서 나오는 향수 향이 너무 좋았을 것이다. 세상 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자를 이렇게 무능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노린다고 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정말 비참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메세지를 받는 자가 되고, 그 메세지를 주는 자, 메세지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원더풀, 뷰티풀이 없은 삶은 굉장히 위험한 삶이다.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사라가 그 궁에서 얼마나 바로를 꼬셨던지 바로가 아브라함을 보고 후대했다고 되어있다. 사기꾼처럼 바로를 속인 것이다. 이런 사기꾼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우리는 정말 은혜로 사는 자들이다. 무능의 결과는 ‘사기’ 다. 이런 기구한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더럽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도록 이 시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고 수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는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을 받자마자, ‘내가 저주를 받았구나. 육신적 정욕, 육신적 안목은 대박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구나.’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은 내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 순간 그에게 깨달음이 온 것이다. 그때, 바로의 궁에 들어간 사라를 보고 히죽히죽 웃던 바로 왕이 갑자기 몸이 틀어지고 혀가 나오고 사라를 볼 때마다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재앙이 온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하나님이 큰 재앙을 내리셨다. 목욕을 시켜주고 옷을 입혀주는 사람들의 손이 굳어지고 모든 곳에 재앙이 임한 것이다. 육신의 안목대로 움직여서 많은 것을 받았지만, 받자마자,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하고 깨닫는 순간 하나님이 바로의 궁에 재앙을 내리셨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을 것을 다 받고, 사라를 원망할 것 다 하면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메세지를 받은자, 그 메세지를 받고 전달해야 할 내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회개가 있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창12:17~18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이 바로에게 무엇을 계시해주었는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것을 말씀해주셨다. 그 때, 바로도 바로 결단을 했다.
창12:19 “네가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사라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창3:15의 그 하나님이 누구인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는 분인가? 요3:16의 메세지를 주신 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창3:15의 하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내게 돌아오라고 메세지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하나님이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 그 상처의 삶 속에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밖에 없는 언약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아내 앞에 비겁한 삶을 살았던 과거가 이제는 축복의 발판이 되어 어떤 상황에도 도전하는 승리의 기술자가 되었다. 이방인에게 책망을 당했다는 수치심과 부끄러움, 다시는 내가 이 길을 가지 않겠다는 절대를 갖게 되었다. 창3:15을 따르면 모든 것을 당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기도가 없으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패 속에서도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까지 왔을까?’ 깨닫고 다시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오늘 속에 메세지를 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이 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불신앙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우리들이 메시지를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계 복음화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제는 우리가 갖게 됐사오니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근원적 축복, 대표적 축복, 시대적 축복, 기념비적 축복, 불가항력적 축복이 언제나 메시지로 저들에게 들려지게 하시고, 그 말씀을 가진 자가 되어 어떤 현장 앞에서도 불신앙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창세기 3장 15절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오늘 우리들이 메시지를 받았사오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로만 되어진다라는 그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간 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언약,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환경 앞에 불안해하며 버려진 자로 살 수밖에 없는 나에게, 죽음과 부활로 날마다 간섭하시고 불신앙의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메시지를 매일 받고 움직이지 않으면 인생에 찾아오는 문제 앞에 한계가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기도, 마귀의 일을 무너뜨리는 영적싸움 속에 세상적 사고와 안목, 사람의 말과 인간적 해석을 무너뜨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을 묻고 찾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비밀을 누리게 하옵소서. 나는 이 시대 세계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의 약속과 창세기 3장 15절의 메시지를 받은 자로서, 이제는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우상경제와 종교에 갇혀 일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음을 전달하는 현장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사명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