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까지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
(창 4:8-15)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본문에, 가인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만 할 뿐,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이것이 종교다. 종교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를 유지하는 것처럼 위장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변화는 없다.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이기주의, 그 이기심이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을 찌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인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 “독사의 새끼”라고 표현하셨다. 우리 자신을 회복하지 않으면 창1:2로 돌아가게 된다. 늘 혼돈과 공허, 흑암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태 속에서 주저앉는 것이다. 창1:2로 돌아가면 창3장에 머무르는 인생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축복을 회복하라고 우리에게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을 주셨다.
*창3:15로 뱀의 머리를 깨뜨릴 때,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창1:27은 나의 것이 되고 창2:7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게 된다.
이것으로 나를 살리는 집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다” 그 빛을 가져야 한다. 요1: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빛을 받아야 기도가 되어지고, 어둠과 흑암을 밀어낼 수 있고, 뱀의 머리를 깨뜨릴 수 있다. 자신에게 빛을 비추고 자신이 빛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영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땅의 힘의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갖게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이 힘이 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세계복음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심을 때 많은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을 하는 것은 겨자씨를 심는 것 같이 아주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의 신앙이 아닌 예배는 무효라는 것을 보여주는 본문이 창4장 이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계속 메세지를 주시는데도 못 알아듣는다. 요8:43, 빛을 받지 못하면 못 알아듣는다고 말씀했다. 창3:15로 회개하지 않으면, 창3:21 그리스도의 옷을 입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다. 롬5:6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언약에서 이탈되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하셨기에, 우리가 연약하고 실패할 때 그리스도 이름을 붙잡으면 반드시 살게 된다.
그런데 창4:1~15, 가인은 회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았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이 된다. 십자가 신앙이 내 몸에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그런 예배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무효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드리는 자를 향해 ‘틀렸다’, ‘받지 않는다’, ‘관심없다’ ‘난 널 버린다’ 하셨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그리스도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예배를 주셨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 구원 속에 하나님의 무한한 성령의 역사가 있다.
롬5:6, 8, 10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말씀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질 때 피흘림의 제사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했으니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속죄제가 될 수 없다. 우리 몸속에 피흘림의 제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 그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우리 가슴에 새겨놔야 한다.
행2:36, 자기 자신을 죽이는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나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내 인생의 주인을 그리스도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주인을 바꾸지 않고 나로 살기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결단력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늘 손해를 많이 보는 것이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창1:2로 돌아가 버려서 늘 창3장에 속는 인생이 된다. 이것이 늘 존재하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전도캠프를 가보면 날마다 죽는 사람은 전도캠프가 행복하고 즐겁고 기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가느냐, 가지 않느냐 갈등하지도 않는다. 개인에게 자유와 힘이 오기 때문이다. 이번에 아프리카에서 그루터기가 포럼을 하는데, 아프리카를 가고 싶은데 아버지가 돈이 없다고 해서 기도를 세게 했더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음이 감동이 되어 캠프를 오게 되었다고 행복한 고백을 했다.
구약 성경에 계속 나오는 것이 양이 죽는 것이다. 내 대신 양이 죽는 것이다. 양을 죽일 때 머리에 손을 얹고 ‘내 대신 네가 죽는구나’ 하고 피흘림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예배는 창3:15에 굴복하고 창1:3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를 이길 자 없다. 창3:15은 약4:7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창3:15 하나님의 뜻을 알면 낯을 들지 못하는 상태로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빛이라고 축복해주셨다. 왜 우리를 빛이라고 하셨는가? 이 땅에 흑암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의지력만 가져도 성공자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그 생명을 알고 빛을 발하면 흑암이 결박되는 역사가 시작된다.
아담 이후 인간에게 근본적인 선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3:15, 창3:21 선을 주셨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 뜻을 알아야 저주와 재앙, 지옥권세, 사탄의 권세가 무너진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선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창3:21 양의 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면 들어가도 나가도 죄뿐이고, 사는게 재앙이다.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죄인이다. 사는게 죄가 된다면 이것은 무서운 재앙이 아닌가? 재앙의 사람을 만나면 우리도 거기에 피해를 입는 것이다. 들어가도 죄, 나가도 죄를 가진 사람, 빛을 발하는 힘이 없고 흑암을 결박하고 물리칠 힘이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수많은 사람에게 재앙을 안겨주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일반 종교인들은 새벽기도 가다가 사고로 다 죽는 사건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창4장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알려주셨다. 창3:15을 적용하지 않으면 사람 몸 자체가 재앙 덩어리다.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아벨에게 고할 뿐 창3:15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분명 창3:15을 적용하지 않으면 죄가 너를 다스린다는 메세지를 주셨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면 매일 불화살 맞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살인의 칼춤을 춰야 하는 무서운 사람, 일평생 악질로 살아야 하는 더러운 자가 된다. 가인이 왜 아벨을 쳐 죽였는가? 창3:15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변명, 책임전가 핑계만 나올 뿐이다. 아벨을 향해, 네가 예배를 잘 드려서 내가 찍힌 것 아니냐는 식이다.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이 이렇게 없다. 원죄를 볼 줄 모르면 죽는 날까지 창3:15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면 우울증, 정신질환이 찾아온다.
영적인 문제가 왜 오는가? 자기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온다. 나는 귀신들린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봤다. 그런데 교회를 일평생 다닌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남만 가르치려고 하면서 누구 말도 듣지 않았다. 이 영적 문제가 가인에게 온 것이다. 가인의 영적문제가 오늘날에도 똑같이 온 것이다. ‘너 때문에 미움이 왔어!’ 이것이 가인 체질이다. ‘너 때문에 분노가 왔어. 너만 아니면 난 괜찮았을거야. 왜 나를 건드려?! 너만 보면 짜증나!’ 결국 아벨을 돌로 쳐죽였다. 사람들은 수많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굉장히 완악하다. 나를 보는 눈, 곧 내 내면을 보는 눈이 없으면 사람을 의식하는 감정만 쌓인다. 결국 그 감정이 ‘저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가인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벨을 빈들로 끌어다가 안 보이는 곳에서 죽이는 것이다. 그 당시에 가인과 아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담이 930세를 살면서 많은 사람을 낳았지만 가인과 아벨을 모델로 삼고 우리에게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틈타고 오는 것을 잘 차단하는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엡4:27 마귀로 틈을 주지 말라고 했다. 이 비밀을 알고 틈을 주지 않으면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사람은 결국 인간관계가 다 깨지고 집안 식구도 원수가 된다. 교회, 직장, 가는 현장마다 무너지는 일이 일어난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자꾸 증폭되어 거인과 같은 힘을 갖는 것이다. 내게 있는 틈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살인자가 되든지 악마가 된다. 죄의 권세는 점점 살인의 광기를 갖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 정신질환자들의 주특기는 폭력을 휘두르거나 상대방에게 침을 뱉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정신문제, 자살하는 것이다.
고후10:4~5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뜨리고, 마12:28,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더러운 것을 내어쫓지 않으면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온다고 했다. 창3:15, 언약이 무기력해지면 범죄가 일어난다. 예수사랑교회에 붙어서 창3:15을 일심 전심 지속하면 진짜 빛이 난다.
창3:15을 스스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심각한 정신문제다. 메세지에만 중독된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게으르다.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에 빠져있다. 그래서 매너리즘에 휩쓸려 사람 자체가 꼴불견이다. 뱀 대가리를 깨뜨리는 일에 나태하면 범죄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한 것에 통곡했다. 지금부터 깨달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창3:15로 발동기를 돌리지 않으면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과 영적싸움이 있어야 말씀이 진단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능력이 생긴다. 창3;15에 나태하면 불가능 속에 주저앉게 된다. 요일2:1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헛되고 가치 없는 일에 걸려드는 범죄자가 된다. 잠21:25, “게으른 자의 욕망이 자기를 죽이나니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창3:15을 스스로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심각한 정신문제다. 이것은 완전 사단의 밥이 된 사람이다. 사탄의 종노릇하는 사람은 자기 욕망 속에 절대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것을 너무나 싫어한다. 그런데 창3:15을 적용하면 지구상에 가장 예쁜 사람, 귀부인이 된다. 콩고를 갔더니 전부 얼굴이 빛난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이번주 말씀이라고 했다. 자신과 영적싸움을 하면 말씀이 성취된다. 자신과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되지 않고 귀신들린자, 똑똑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맛이 간 상태가 된다. 엡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가 악한 때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틈을 주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작은 생각 하나가 들어오면 하루종일 그 생각에 신경이 가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하지 않는가? 그래서 알콜 중독자는 술로 취하고, 대마초하는 사람은 약에 취한다. 악한 놈에게 걸리면 이렇게 된다. 이놈에게 걸리지 말라고 뱀 머리를 깨뜨리라고 하는데 신경질을 부리고 발악을 하는 사람들은 귀신들려있기 때문이다. 엡5:17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오직’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답이 딱 나온다. ‘내가 해야겠구나’ 이해한 사람은 ‘네가 해!’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무나 주지 않으셨다. 창세 전에 예정한 자에게만 주셨다. 그래서 영적싸움하지 않는 게으름의 정체는 욕망이다. 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절대 영적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 아니다. 그놈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그놈이 있다. 잠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오히려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했다. 개미는 일심 전심 지속으로 영적싸움을 한다. 밟으면서 걸어간다. 그래서 개미는 절대 여왕개미가 있는 통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영적싸움을 하면 예수사랑교회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잠12:27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결박하면 되는데 하지 않고, 밟으면 되는데 밟지 않는다. 걸음은 걸으면서도 밟지를 않는다. 이런 자들이 전부 자기 사랑에 빠진 자다. 사실은 자기 사랑이 아니라 마귀에게 빠진 자다. 그래서 매일 마귀의 욕망이 나에게 솟아나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욕망은 정말 더러운 가짜다. 헛된 것을 잡으려다가 지옥까지 떨어진다. 잠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자기 사랑에 빠져서 겁만 먹고 있다. 우리는 그놈을 잡아야 한다. 다윗은 사자가 덤벼들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자의 입을 확 찢어버렸다. 이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귀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강한 자를 결박하지 못하면 세상을 정복해보지도 못하고 무너져 버린다.
*게으른 자들에게 창3:15의 하나님이 다시 찾아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또 들려주신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네 이웃이 어디 있느냐? 네 사랑이 어디있느냐?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창3장은 잡아떼는 것에는 천재다. “내가 아우를 돌보는 자니이까?!” 이기주의적인 거짓말로, 고집으로 잡아뗀다. 이렇게 말하는 놈을 깨뜨려야 한다. 범죄하고도, 죽여놓고도 아우를 돌보는 자냐고 거짓말하는 이기주의를 깨뜨려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핏소리를 들으신다.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고 끝까지 사랑하고 기다리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이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우리 영혼에 십자가 사랑, 십자가 신앙이 없으면 모든 것이 죄다. 바람결이 매일 피부에 느껴지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느끼는 것이 지구상에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강도한테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다. 마지막 그의 숨이 떨어지는 절규 속에서 “내가 당신의 나라에 나의 영혼을 의탁합니다. 같은 강도의 영혼도 받아주십니까?” 했을 때,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
나의 하나님, 진짜 아빠는 이렇게 끝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매일 공급해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다른 말을 한다. ‘내가 아우를 돌보는 자니이까? 저놈 때문에 내가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상한 말로 호소한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두고 제자들에게 요19:27 “...네 어머니라” 했다. 인간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지, 서로 해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이 크셨으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소리치셨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가슴에 새기고 느끼면서 침묵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 예수님의 목마르심으로 인해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축복을 갖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아버지여 저들의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라고 까지 하셨다. 당신의 영혼을 의탁하시면서 이제는 십자가 신앙을 가진 자들, 우리의 영혼까지도 아버지에게 의탁하셨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이 분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시고 보좌화 하셨다. 또, 요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출입을 지키고 기억하고, 우리를 다 알아보신다고 말씀하셨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 앞에서 “내가 아우를 돌보는 자니이까?!” 이렇게 대들면 되겠는가?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와도 침묵해야 한다. 침묵만 잘해도 하나님의 큰 보호와 사랑을 덧입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주춤해서는 안된다. 이랬다 저랬다 갈등하면 손해만 보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항상 먼저 구하는 생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알고 계신다.
어떤 일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모든 문을 열어주신다. 창4:11~12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사는 것이 저주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우리 몸에 와 있는 저주, 모든 피조물의 저주를 풀 길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먹는게 다 독이다. 십자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예배를 다니면 그게 전부 저주와 재앙이다. 그래서 예수사랑교회 다니는 사람은 암이 있어도 사라진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고 그 이름을 선포하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것이 저주다. 사는 날 동안 유리 방황하는 집시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정착하는 인생을 살기를 축복한다. 하나님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면 살면서 악만 남긴다. 눅17:21 “하나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음이라” 어디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시 인생으로 전락한다. 집시 인생은 사람 꼬셔서 밥이나 한 번 얻어먹는 수준으로 사는 것이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 받은 몸에서 자꾸 헛소리만 할 뿐이다. 창4:13~14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우리 몸에서 이런 헛소리가 끊임없이 나온다. ‘하나님이 창3:15을 주셨으니 한 번 해보자’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가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모습이다. 죄벌이 무겁다고만 하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사랑, 더러운 욕망에만 빠져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표시가 나서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다고 한다. 너무 이상한 논리만 편다. 자신이 사람들을 의심하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볼꺼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지, 사람을 죽이라고 허락하지 않으신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때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사람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살인자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시지, 사람을 죽이라고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사람은 살게 되어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하고도 베드로는 도망가고 배신하고 예수님을 저주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베드로야 고기 많이 잡았느냐?” 하시며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배에서 뛰어내려 예수님께 온 베드로에게 “와서 조반 먹어라” 하셨다. 아무리 수 만 번의 실수를 해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왜 이런 사랑을 베푸시는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로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십자가의 신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요1:14 이 속에만 들어가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진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심판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하면 그 사람보다 7배나 더 받게 된다. 정말 십자가 신앙을 가진 자가 맞다면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시50:7~8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하나님의 아들, 그 십자가 신앙을 가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가진 자가 병들었다면 회복의 시간이고, 그리스도의 생영을 가진 자가 연약하고 실패하고 주저앉아있다면 그것은 곧 축복의 발판이 된다. 우리 인생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창3:15로만 돌아가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이 고백을 수 천 번, 수 만 번 했더니 드디어 그 입에서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괜찮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다. ‘내가 저 앉은뱅이를 돌보는 자니이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계명이라고 했다. 더이상 죄의 권세에 묶이지 말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해방의 길을 알려주는 전도캠프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한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하셨고, 행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말씀하셨다. 우리의 삶의 본질은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지식, 최고의 표적, 최고의 상급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가는 길, 모든 저주와 재앙이 끊어지고 마귀의 일이 무너지는 이름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가 나의 모든 질고를 담당하셨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될 때 하나님은 24, 25, 영원으로 함께 하신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 가인까지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체험할 수 있는 말씀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메세지만 고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람을 의식하는 감정 따위를 언제나 내어 버리고, 무기력 속에 게으름 속에 나태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 충만을 허락해 주옵소서. 창세기 3장 15절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매일 찾아와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하나님의 음성에 답을 내는 자가 되게 하옵시고, 이제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전도 캠프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가 되게 하옵시고, 이제는 죄벌이 무겁다고만 외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에 내려놓고 자유와 해방을 받는 십자가의 신앙이 내 영혼 속에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범죄를 하고도 자신을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원죄에 묶여 살아야 할 인생에서 빠져나오도록, 창세기 3장 15절, 십자가의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보지 못해 개인의 변화 없이 남만보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종교의 체질을 버리고,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것에 게으르면 자기를 사랑하는 욕망에 잡히고 범죄 속에 빠진다는 것을 깨달아, 마귀로 틈을 주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의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 창세기 3장 15절로 영적싸움을 날마다 실천하여 나를 살리는 집중 속에 있게 하옵소서. 한 주간, 창세기 3장 15절을 잃어버린 나에게 매일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연약함 앞에 내 죄벌이 무겁다고 하는 사람의 감정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오게 하시고, 모든 생명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십자가의 신앙이 흘러넘쳐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전도캠프가 지속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