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는 그리스도"
(고후 10:3-8)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성경적인 축복이 무엇인가? 성경의 모든 축복은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 시대 전도자 김서권 목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속에 원색 복음을 만났다. 그리고 생명 공동체를 이루는 예수사랑교회를 만났다. 내 안에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는 전도 여정이 될 것이다.
우리 안에 견고한 진을 왜 무너뜨려야 하는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는 견고한 진이 우리 안에 있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세계복음화, 디아스포라 미션이다. 지난주 인생 최고의 가치는 바로 후회없는 신앙생활이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우리는 행1:8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이 일에 쓰임을 받고 헌신하고 제자를 삼는다면 후회가 없는 가장 가치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행1:8이 인생의 참 목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 말로는 덧없고 비참하게 늙어갈 뿐이다.
누가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가? 창3장의 원죄로 인해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원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마귀에게 당하는 것이 바로 창3장의 저주다. 마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가치없는 인생을 살게 하려고 욕심쟁이로 살게 한다. 요8:44로 살면 세계복음화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 동기와 욕심으로 산다. 동기와 욕심이 가득한 자가 바라보는 곳은 바로 세상의 풍습과 풍조다. 고후4:4,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놈이 마귀라고 했고, 엡2:2~3에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우리를 미혹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했다. 마귀가 활동하는 이런 세상에서 눈을 뜨지 못하기 때문에 훌륭한 일을 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노예, 포로, 속국 된 상태로 살고 있다.
노예, 포로, 마귀의 속국이 된 것은 마귀에게 눌려 있다는 것이다. 곧 인생 자체가 마귀에 눌린 인생이다. 가짜 행복에 취해있으면서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 가짜 행복 안에는 자유가 없다. 세상에서 까불면서 자유하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진짜 자유가 아니다. 진짜 자유가 무엇인가? 요8:31,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진리 속에 자유 할 수 있다. 내 인생, 내 운명을 묶고 있는 마귀에게 풀려나는 것이 참된 자유다.
롬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생각한다고 말씀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의 생각은 아무리 훌륭해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뿐이다. 왜 하나님과 원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순종할 수 없다. 그래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육신의 생각에 중독되고 취해있기 때문에 세상에 행복이 있다고 착각하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현실 속에, 거룩한 주일에 아침부터 채비하고 예배를 사수하는 예수 사랑 성도가 이 시대 진정한 행복자다. 우리는 사실 세상의 것으로는 행복을 찾지 못한 자들이다.
도박, 마약, 음란 이런 세상의 것에 하나라도 중독이 되면 우리 몸은 절대 자유롭게 움직여질 수 없다.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의 행복, 세상의 삐까뻔쩍한 시스템이 모두 헛된 것이다. 전1: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창3장 저주로 일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 수고가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지구 탄생 이래 솔로몬은 최고의 재벌이었다. 그런 솔로몬이 한 말이 전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썩고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죽을 때 단돈 10원도 가져갈 수 없는 존재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그 주검을 두고 기도했지만, 우리 친척들은 수의에 5만원 짜리 몇 장을 넣는 것을 보았다. 저승 가는 노잣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장의사들이 다 가져갔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조금 잘났다고, 조금 가졌다고, 조금 되어졌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은 무가치를 넘어 무능할 뿐이다. 그래서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다.
이렇게 낙이 없는 인생이 지속되면 반드시 인생 종말에는 창3장이라는 비참한 열매를 맺는 저주를 맞이하게 된다. 마12:33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현장은 좋은 나무가 아니다. 종교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말이, 교회가 그리스로 이동하니까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가면서 제도와 율법이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는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는 기업이 되더니 한국에 와서는 비로소 대기업이 되었다고 했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덕을 끼쳐야 할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시대 우리 예수사랑교회를 부르신 줄 믿는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창3:15을 모르는 교회는 종교이고 쇼일 뿐이다. 종교는 거짓이고 마약이다. 그래서 계속 사람을 중독으로 끌어들인다. 그리스도로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는데 자꾸 이상한 기도가 땡기게 만든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청년들이 아침부터 이상한 기도를 하는 것을 현장에서 보았다. 이상한 목사를 만나 이상한 영에 길들여져 중독된 것이다. 복음 없는 교회는 사람들을 불신자보다 못한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만들고 창3장의 운명의 ‘어느 날’을 맞게 한다. 그 어느 날이 무엇인가? 운명의 시간표 속에 불화살을 맞는 날이 찾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노후 대책은 실컷 세우면서 사후대책은 없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다.” 영원한 후회가 있고 그 이후에는 저주와 재앙, 가정과 가문의 3, 4대 반복적인 대물림과 중독이 이어진다. 이것을 운명, 재앙이라고 한다.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 창3:15 여자의 후손 예수그리스도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는 종교일 뿐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신가? 요일3:8 운명의 주관자,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만왕의 왕이시다. 요14:6 참 길, 참 진리, 생명되신 선지자 이시다. 막10:45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심으로 모든 죄와 저주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참 제사장이시다. 이 영적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세계복음화!”
*하나님이 주신 응답의 원리는 창3:15 빛 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포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 명쾌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우주와 별, 하늘의 달과 바다의 물고기, 새와 꽃을 만드셨다. 창1:2 사탄이 있는 곳에 나를 보호하고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그래서 창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것이 응답의 원리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 창조의 의미를 깨닫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응답의 원리,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답의 원리는 창3:15 빛되신 그리스도 이름을 선포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것이 응답의 원리다.
창3:15 그리스도 이름을 선포하면 사탄의 권세가 무너진다. 그리스도로 빛을 발하면 반드시 사탄은 무너진다. 엡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과 싸움이라고 말씀했다. 내가 사는 건물에 철학관이 하나 생긴 것을 보았다. 내가 사는 동네에 무당집이 있다는 것이 좀 부끄러웠다. 그 집을 두고 계속 기도하다가 제자를 데리고 지역 캠프를 하면서 그 집을 데려갔다. 막상 가보니 철학관이 아니라 논현동에서 신점을 봤던 점집이었다. 보통 무당집은 5만원이면 점을 보는데 20만원이나 했다. 과거에 무속캠프를 하면서 영접을 하는 무속인을 만나기도 했지만, 제자를 데리고 가기 때문에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혈과 육의 싸움을 한 적도 많았다. 나를 때리려고 했던 무속인의 팔을 잡은 적도 있고, 나한테 욕을 하는 무속인한테 더 큰소리를 친 적도 있다. 하지만 남는 것은 서로의 상처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혈과 육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욕 중에 가장 심하게 욕을 했다. 그래서 내가 “아줌마!” 했더니, “원장님이라고!”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줌마,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마음으로 믿어 시인해서 구원 받으세요. 나는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 자리에서 계속 이 짓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만 말했다. 그랬더니 나한테 소리를 지르고 경찰을 불렀다. 무속인은 무섭지 않았지만 오히려 경찰이 온다고 하니, 내가 사는 동네라 관리인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알고 있는데 내가 목사인 것이 탈로나고 온 동네 소동이 나는 것에 살짝 두려움이 왔다. 경찰이 오니까 무당이 자기 영업방해를 했다, 괴롭혔다, 협박했다 하며 온갖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복음만 전했습니다.” 했더니 옆에 있는 제자에게 어디서 왔냐, 누구냐, 무슨 관계냐 물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는 생명공동체다!” 하고 그리스도만 말하고 나왔다. 그 건물에 우리 장로님도 계셔서 말씀을 드렸더니 나를 안아주시면서 기뻐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장로님이 그 집 벽에 손을 대고 기도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한 번 기도했을 뿐인데, 귀신이 귀신같이 알고 관리사무소에서 그런 종교행위 하시면 안 된다고 전화가 왔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며칠 동안 그 집에 불이 꺼져있어서 가봤더니 집을 뺐다고 했다. 두렵기도 하고 월세도 비싸니까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무 신이 나서 그 앞에서 사진도 찍어두었다. 그런데 어제 늦은 시간까지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집에 들어가는데, 점집이 이동하고 없어진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 여자도 행복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얼마나 몸부림을 치다가 무당이 되었을까 생각하니, 영접을 못 시킨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그 집 앞에서 기도하고, 주일 아침 일찍 나오면서도 들렸다 왔다. ‘그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지. 무당집 떠난 것 같지고, 집 뺀 것 가지고 기뻐하지 말자.’ 하며 생명 살릴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다짐했다.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요1:12을 날마다 고백하는 자가 되길 축복한다. 무당집 한 번만 가도 요1:12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면 되는데 믿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권세를 누릴 수 있는데 그 권세를 모르기 때문에 세상의 모진 풍파에 눌리다가 악신에게 장악된 것이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아무나 부를 수 없는 그리스도 이름을 소유하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를 아무리 부르고 싶어도 마귀가 귀를 막고 혀를 묶어버리면 부를 수 없고, 그리스도를 깨닫고 싶어도 내 마음에 흑암권세는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다. 롬10:10~11,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자가 후회 없이 인생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도바울은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고 했다. 목숨 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은 이렇게 완전히 목숨을 걸었다.
바울이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가? 자격이 안되는 나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혀주셨다는 것이었다. 사랑받지도 못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나를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주셨다는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오셔서 사랑해주셨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자격 없는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으셨다. 구원받지도 못할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온갖 고통과 핍박, 고문을 당하셨다. 굳이 죽지 않으셔도 될 그분이 나 같은 인간 때문에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다. 바울에게 있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영혼에도 있기를 축복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오직 마음과 중심에 담아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설교 준비를 하면서 고전2:1~2의 말씀을 놓고 정말 기도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내가 있는 생명공동체를 자신과 같이 정말 사랑이 되는지 자신을 점검해봐야 한다. 사랑하고 싶은데 안되는 것은 굉장한 곤욕, 고통이다. 많은 권사님들이 하는 말씀이, 남편이 못된 짓을 하고 잘못했을 때 화가 나는 이유는 그 일 때문이 아니라 예전부터 잘못한 것이 모두 생각나서 싫다고,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야 하는데 되지 않는 것이 큰 고통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거부터 잘못한 일들에 대해서 쌓아 놓고 살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사랑이 전혀 안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은 우상이라고 할만큼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은 무척 사랑한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내 것처럼 사랑해라. 사실 엄청 어렵고 눌리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사랑하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우리 몸에 먼저 “예수는 그리스도”를 각인시키면 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자꾸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대학 졸업을 하고 할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백수로 있을 때도 있었고 무당집에서 살아본 적도 있다. 우리 집안과 굉장히 친한 무당 아주머니가 계셔서 집안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 무당집에서 몇 개월을 산 적이 있다. 그래서 무속인 가정의 애환과 삶을 안다. 멀쩡하던 남편이 머리가 깨지고 딸이 마약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아야 한다. 내가 정말 죽고 싶은 시간이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변하지 않을 똑같은 인생인데 그냥 뛰어내려 죽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때 교회에서 들었던 말씀 하나가 생각났다. 그래서 1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마16:16을 수천 번 고백했다. 그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전도자를 만나고 예수사랑교회를 만나고 복음을 만나게 되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각인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이름을 고백하고 부르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난다. 고후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된다는 생각이 난다. 고후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인데, 저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한다. 우리 예수사랑교회는 생명공동체다.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지금은 너무 비참하고 연약해도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은 장래가 어떻게 변화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과 생각에 담고 구원의 확신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하는 마귀의 일과 옛사람을 무너뜨리는 영적싸움에 승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전도와 선교의 가슴과 목표를 소유하지 못하고 육신의 일만 진행하는 내 안의 견고한 진을 내어버려야만 모든 영혼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가 하나님이 주신 절대 강령이다.
내 안에 견고한 진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자가 되었음에도 내 생각과 마음, 몸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 고전3:16,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하시는 성전이 되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십자가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인본주의와 불신앙으로 사는 것이 바로 내 안에 견고한 진이다. 고전5:5 구원을 받아 놓고도 육체는 사단에게 내어주는 자가 되고, 시14:1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지도 않는다. 내 생각과 마음, 몸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다. 그 안에 성전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여 악을 도모하며 사람의 일만 도모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고후10:5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과 모든 생각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켜야 하는가? 창3:15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는 영적싸움을 실천하면 된다.
본문 말씀의 내용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모함을 당하는 시간표 속에서 쓴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바울의 대적자, 교회의 대적자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 바울은 육체대로 싸우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가 있어도 육체대로 싸우지 말고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의 반응에 따라 산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육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많이 이끌린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담지 않으면 그 생명 안에 그리스도가 뿌리 내리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뿌리가 없으면 사람의 말에 길들여지는 마귀의 전략에 노출된다. 왜 사람에게 염려와 근심, 낙심과 환란이 왜 오는가? 사람의 말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군중심리와 사람의 말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복음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군중심리와 사람의 말에 길들여지고 따라가면 세상의 이론과 사상을 따라가다가 결국 큰 문제를 당하게 된다. 인간의 생각과 군중심리, 세상의 방법은 결단코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없고, 율법으로는 마귀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무한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원래 인간은 그리스도의 영과 말씀으로 충만해서 재창조의 역사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존재다. 그런데 우리 안에 견고한 진, 또 다른 나, 육체대로 살려고 나를 끌어당기는 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따라가지 않고 세상 노예 신분으로 살라고 속삭이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노예로 살지 않으면 내가 바보인 것 같고, 예수그리스도만 따라가면 실패하는 삶이라고 마귀가 또 다른 나로 가장하여 자꾸 속인다. 그 말을 듣고 세상으로 나가면 그것을 ‘운명’ 이라고 하고, ‘후회하는 삶’이라고 한다.
*창3:15이 각인된 바울은 언제든지 자신 안에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영적싸움 속에 있었다.
고후10:3~4, 바울은 육체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전에 아덴에서 선교를 했을 때 그가 가진 지식과 철학으로 육신적 반응을 했다가 굉장히 회개를 하고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다. 수많은 환란과 갱신, 개혁 속에 세운 교회에 바울이 얼마나 애정을 쏟았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1년 반 동안 창3;15만 주고 에베소로 넘어갔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고린도 교회는 분쟁과 비난, 나쁜 시각과 체질로 장악되어버렸다. 싸우는 무기, 싸우는 병기, 그리스도, 창3:15을 잃어버리고 육체의 반응에 따라 살았다. 그래서 육체의 반응에 따라 움직이니까 전도자 바울의 사도권까지 대적하고 도전하는 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복음을 위해 밤낮 수고하며 자비량으로 선교한, 아무 동기가 없었던 바울에게 자신들의 헌금을 강요한다고 수군거렸다. 바울이 가진 제자 시스템을 가지고 충분히 이런 사람들의 소리를 차단시킬 수 있었고, 자기 안에 울화통을 소화할 수 있었음에도 바울은 분노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 몸속에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창3;15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고후10:3~4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육신의 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과 영적싸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자신과 영적싸움하는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우상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타파하는 사람이 바로 마음과 뜻,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후10:6~7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싸움과 순종, 복종을 온전하게 하면 반드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승리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다. 내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봐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다문화 한 사람이 한 나라 인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교회 제자가 나에게 와서 자신의 나라의 심각한 상황을 동영상으로 보여줬다. 보다가 도저히 못 보겠다고 끄라고 했다. 힘없는 노인을 묶어놓고 젊은 사람이 발로 그의 머리를 치고, 어린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피난을 가고 있었다. 정말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나에게도 왔다. 우리 교회 제자가 자기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 된 상태가 되었다고 나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기도 요청을 해서 내가 가족의 명단을 달라고 했는데 늦은 시간에 나에게 다시 온 문자에, 그냥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만 기도해주면 될 것 같다고 했다. 자기 나라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기 가족만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 예배에 앉아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한 나라, 한 지역이다. 한 지역에 있는 교역자와 중직자가 연합하면 현장이 장악되는 것이다.
고후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자랑이라고 바울이 고백했다. 고전15:31 자신이 죽는 것이 자랑이라는 것이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은 심지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다. 나를 죽이는 것, 무너뜨리는 것, 양보하고 포기하고 수용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무시당하는 것 같고,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세상 권세를 가지고 도도하게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면 섬김을 받는 것 같고 나 같이 미천한 사람은 고생만 하다가 가나보다 하는 생각들을 참 많이 했다. ‘내가 만약 재벌 집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안 살았을텐데’ 하는 배은망덕한 생각도 한 적 있다. 그런데 그런 자존심까지 다 무너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했다.
내 안에 견고한 진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 영적싸움을 자신과 사실적으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신다. 현장에서 내 자존심이 다 무너지고 무시를 당해도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쳐서 복종시키면 상대방이 언젠가 양심의 법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 인생 여정에 당장은 무시를 당할 수 있고 속상할 수도 있고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시간표, 나를 향한 계획이라는 것을 믿기를 축복한다. 천해 보이는 체면도 인신공격을 당하는 것 같아도 괜찮다. 있는 현장에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도바울의 메세지를 정말 실천하면 나와 같은 제자를 현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권세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키는 길만이 승리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결박되어야 한다. 내 자신과 세상, 사탄과 영적싸움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날마다 나를 변화시키고 진보시키는 길을 선택하고, 내 이웃과 모든 생명을 전도와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눈을 열고 영혼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내 안에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는 그리스도를 소유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먼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복종케 하는 것이 승리하는 길임을 깨달았사오니, 나를 다스리는 창3: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다른 나로 장악하고 있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이 시작되게 하옵시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게 하옵시고,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절대 강령을 성취하게 하옵소서. 단순 명쾌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깨달은 자로 나를 부르셨사오니, 빛이 있으라 하신 응답의 원리를 현장 속에서 한 주간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자로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현장 속에서 율법을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주간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참된 인생의 가치와 행복, 자유가 무엇인지 몰라 육신의 생각에 중독되어 욕심과 동기로 살면서 내 몸 하나도 움직일 수 없어 종교의 마약에 빠지고, 영적대물림을 남기는 후회뿐인 인생에서 빠져나오도록, 전도자를 만나 원색적인 복음을 만나고 예수사랑교회 생명공동체를 만나 성경적 축복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나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나를 쳐서 복종시키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다는 확신 속에 한 주간 내 안의 견고한 진, 군중심리와 사람의 말에 길들여져 복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세상의 사상을 따라 복음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며, 세상 노예 신분으로 끌고 가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의 사실적인 영적싸움 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세계복음화 디아스포라 미션을 성취시키는 전도제자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