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도 불사하는 종교인의 실체"
(행 21:27-36)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이는 백 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본문은 사도바울이 어떻게 모함을 받고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는지를 보여준다. 아무런 잘못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모순과 부조리 속에 바울은 체포되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한계의 상황은 찾아온다. 극한의 상황이 찾아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창3:15의 하나님을 알았던 바울은 어떠한 한계와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온하고 행복해하며 하나님의 절대 계획을 바라보면서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빌1:12)고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은 창3장 사건을 통해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만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창3:15, 하나님의 절대 방법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 삶에 속수무책으로 일을 당할 때, ‘기회다’ 라고 표현해야 한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기회가 왔고, 새로운 재창조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다.
*오늘날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지 잘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창3:15이 연결되었을 때 변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베드로가 하나님을 어설프게 믿었을 때, 그에게는 끊임없이 극한 상황들이 연출되었고 부끄러울만큼 자기 신앙이 변질 되었다. 그러나 창3:15의 하나님이 자기 몸에 연결된 이후부터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명령했다. ‘내가 만든 하나님’ 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살게 된다. 그것을 위드(with), 임마누엘(Immanuel), 원네스(oneness)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내 몸과 연결되면 그것이 보좌화, 하나님 나라, 성령충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있고, 구원받는 길이 있다고 행4:12을 고백했다. “우리에게 구원 받는 길이 생겼고, 구원을 받으라고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다. 하나님 만나는 이름, 구원받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다.” 요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 교인들이 하나님을 괴팍하고 이상하게 믿기 때문에 돌출 행위가 심하고 업다운이 많아지고 정신분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다. 목사들은 점점 세력이 강해지고 교권이 커지면서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여 어느 날 자신이 교주, 독선자,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인들은 갈등과 시험 속에서 짓눌리고 억눌린 채, 자유와 해방도 없이 종교 생활에 길들여 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변질된 신앙 속에서 빠져나온 해방자로서 행2:36을 선포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이 바로 퀴리오스, 메시아,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 분과 연결되어야 성령충만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이것을 우리 몸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 자신에게 전도하고, 자기 몸에 더러운 것을 내어 쫓는 전도와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은과 금이 없다고 쟁쟁거리지 마라. 내게 있는 것으로 나는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지금까지는 내 영혼이 너에게 끌려갔지만 이제 나는 너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권세로 너를 대적한다!” 그래서 행4:25~26을 선포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우리를 대적하는 이 세상에서 오직, 유일성 속에 있으면 우리는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겁날 것이 없고, 염려할 것이 없으며, 두려워하고 떨 필요가 없는데 우리는 늘 염려와 불신앙 속에 살고 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수록 우리는 행복자가 되어야 한다. 모함과 거짓, 더러운 계략을 짜는 자들 앞에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행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전 국민과 전 세계가 합세하여 하나님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다. 창3;15을 도무지 연결시켜 놓지 않고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 예수 하고 돌아다녀도 귀신들림으로 산다. 발장 증세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를 거스르는 자들이다. 교회를 다니면서 발작증세를 일으키는 것을 무너뜨려야 한다.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는 자들을 거스르는 자라고 했다. 행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거스르는 자가 있기때문에 우리는 모여서 훈련하고 합숙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전사처럼 사는 것이다. 모인 자들을 통해 드디어 행4:29~31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며, 손을 내밀어 병이 낫는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며,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적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행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 가난한 자도 쟁쟁거리지 않았고, 돈이 있는 자도 교만해서 떠들어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고 거짓말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았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아야 살게 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늘 거스르고 사는 자는 아직 하나님과 내 몸에 창3;15이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오는 문제다. 창3:15이 연결되어야 하나님과 원네스가 되고 일인칭이 된다. 그때부터 우리 몸에 정신이 치유된다.
*정신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의지, 감정, 생각에 브레이크를 잡을 수가 없다.
우리 자신에게 정신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익을 추구하며 살고 싶어하지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소리는 외치지만 자신의 정신은 심각하게 병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정신치유는 우리 몸에 더러운 귀신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행16:18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구원은 받지 않고 창3:15 그리스도 이름을 내 몸에 연결하지 않아서 정신문제가 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 자체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통제가 안되고 입에서 계속 나오는 대로 떠들고만 있다. 자기와 함께 이익을 나눌 자와 힘을 합쳐서 육신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래서 심히 괴로움을 당했던 사도바울이 돌이켜서 그 여자를 향해 “그 귀신에게 이르되...” 라고 표현했다. 자기 스스로도 괴로움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괴로움을 주는 것은 심각한 정신 문제가 온 것이기 때문에 빨리 정신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거울을 보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도대체 너는 누구나?!’ 여러 번 하면 이 놈이 나간다. 이렇게 명령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권능과 권세와 능력이 거울을 통해 부딪치면서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들어가는 것이다. 바울이 귀신을 향해 예수그리스도로 명령했을 때, 귀신이 “즉시” 나왔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보존 받고,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서 복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몸에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을 때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행4:12 그리스도 그 이름에 일치시키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그래서 세계를 보는 산업인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눈이 열렸다면 교회에 오는 다문화를 그냥 두지 않는다. 따뜻하게 눈을 마주치며 서로 인사하는 자체가 응답으로 연결되고, 그 나라와 연결되고 또 우리의 모든 삶이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라클 오케이 어학당을 하나님이 시작하셨다. 중국에 있는 제자는 온라인 방송으로 광고만 듣고도 헌금을 보내왔다. 작은 생명의 겨자씨 하나를 옥토에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정말 알아야 한다. 예수사랑교회에 진행되는 이 일은 정말 하나님께서 큰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놓고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심어야 한다. 어떤 교회는 다민족 한 사람을 소개해서 보냈더니 목사님이 왜 그런 사람을 데려왔냐고, 우리 교회는 조용히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데 외부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했다. 세계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복음화를 보는 눈이 있으면 다민족과의 만남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는 그 사람 집과 이름, 그 지역, 나라의 이름을 명시했다. 행18:1~2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행8:26~27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골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반드시 그 지역의 집과 사람의 이들이 나왔다. 그래서 제자는 복음운동을 하지, 밥 먹고 살기 위해 신앙생활 하지 않는다.
정신치유가 일어나고 진짜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기를 원하면 시작을 바르게 해야 한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깨뜨릴 만왕의 왕,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마4:19 “나를 따라오너라” 메시아, 그리스도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했다. 쓸모 있는 고기를 알아 차리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내가 쉼을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막3:13~15 하나님이 원하셔서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따라붙게 하신 것이다. 이제는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를 주셨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능력을 진짜 가슴에 새겨놓고 무작정 현장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눅9:1~2, 무작정 현장에 들어갔던 70인 제자들에게는 이런 능력이 나타났다.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우리를 현장에 보내셨다. 그래서 현장을 정복하고 회복시키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증거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10:1 약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고, 눅10:19 옛 뱀 곧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없게 하셨다. 그래서 내 몸에 끊임없이 원죄로 발작증세가 일어나는 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는 정신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말하고 싶고 변질시키고 싶고 변태로 살고 있은 이런 것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정말 깨뜨려야 한다. 순간, 순간 열등감, 시기, 질투 이런 것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아 올 때 틈을 주지 말고 밀어내는 것이다. 시작이 온전해야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오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자마자 먼저 할 메세지를 주셨다. 마5:24, 한계와 극한의 상황이 찾아오고 모순과 부조리가 영혼을 찔러도 뛰어넘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배력하고 용서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마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주인공이 된다. 작은 것 하나, 내게 일어나는 사건 하나도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지 못하고, 문제를 응답으로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그래서 마7:1~5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들보를 먼저 뽑어내는 것이다.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거나 책임전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들보만 뽑아내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자괴감 같은 것을 사로잡아 내어버린다.
*본문은, 창3;15 비밀이 없는 자들 곧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과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유대인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이라고 외치지만, 창3:15이 자기 몸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니까 마귀 짓을 하고 있다. 뱀 대가리를 깨뜨려야 하는데 사람을 때린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실체, 귀신들린 자의 모습이다. 정신치유를 받아야 하는 자들이 교회 지도자로 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 목회자들이 가진 영적문제다.
행21:28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도우라고 한다. 자기 백성과 자기들이 믿는 율법의 하나님을 바울이 비방하였다고 오해를 일으켰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음에도 이방인들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사람들에게 말을 부풀리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의 규례와 전통에서 벗어났다고 덮어씌우는 것이다.
행21: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오해 착각 거짓말로 생각함이러라” 그래서 결국 행21:36 “바울을 죽여라” 외치며 선동했다. 복음은 살리는 것이고 종교는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창3:15이 없으면 사람은 이렇게 살인의 광기를 갖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을 모든 자들에게 주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
그래서 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율법적 종교적 배경에서 탈출하고 해방을 받을 수 있다. 율법적, 종교적 배경에 있으면 늘 좌절과 원망, 불평만 일삼는다. 그래서 문제 속에 반복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종교에서 해방을 받아야 한다. 기득권 속에 있는 창3장, 요8:44의 사람들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충성과 타협, 양보를 해줘도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시복음, 창3:15을 우리에게 주셨다. 이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연결시키면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 총회장이 바울을 데려다가 설득을 시키고 양보하고 타협하게 만들어 7일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금식하며 제사를 지내고 회개시키고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바울을 죽이려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의 살인의 광기를 조금 잠재워주기 위해 바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라고 지시했고, 바울은 총회장의 말을 듣고 교회를 위해서라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순종한 것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 몸속에 있는 종교, 창3장의 원죄는 진짜 무섭게 더 발악을 했다. 누명을 쓰고 억울함을 당해도 살인의 광기로 덤벼드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창3장에 예루살렘 성전의 현장을 보면서 문제는 복음이 진보되는 과정이라는 명확한 답을 찾아냈다. 종교인들의 알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알아버렸고, 납득이 가지 않는 현장을 보면서 바울은 명확한 답을 찾아냈다. ‘복음이 진보되는 과정이구나’ 답을 찾아내면 끝나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보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분이 다 끝냈다. 이 속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나를 진보시키고 나를 더 큰 그릇으로 갱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체포되어야 할 까닭이 없음에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그 현장 속에 바울은 오히려 답을 찾아냈다.
왜 그들은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하는가? 바울이 죽어야 유대종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없어야 평안할 수 있다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죽어야 거짓말하는 교회들이 편안하게 살아남을 수 있고 종교 지도자들이 가만히 앉아서 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충만을 받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하는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가만히 앉아 자기 배만 불리며 제사장복으로 자기 몸을 감추고만 있다.
마5:10,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현실 앞에는 반드시 죽음이 도사리고 핍박과 오해를 만들어 거짓증거 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딤후3:5 “내 아들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너는 속히 돌아서라” 이런 자들은 빌3:18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자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창3:15 밟는 그 믿음에서 떠나면 귀신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점점 그것이 자라나면서 양심에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 자체가 마귀가 되어 영적싸움이 안 된다.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영혼이 마비되고 둔감해져 더 이상 소망 없는 자로 전락한다. 창3:15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이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 바울이 체포된 사건이다.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생, 신학자, 성전의 주인공이 되는 바울이 성전에서 쫓겨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 마지막 출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행21: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바울 생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고, 결국 그 성전은 돌 하나 남지않고 다 무너져 버렸다. 예수님의 가장 멋진 종인 바울이 성전에서 쫓겨났다. 성전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했는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죽여야 한다는 재판을 했다.
이렇게 성경은 창3장의 현실을 곳곳마다 보여주고 있다. 세상사는 창3장의 음모, 계략이다. 그리고 거기에 동참한 여론은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할 뿐이다. 아무리 총회장 야고보가 손을 쓰고 인본주의를 써도 창3장의 현장은 그런 것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묶어버리는 것이다. 머리를 깎고 금식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회개를 해도 그들의 이미 창3장으로 화인 맞은 자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롬16:20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단을 우리 발아래 상하게 하는 것만이 방법이지, 인본주의를 쓰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싸움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사는 음모뿐이고, 창3장 사단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 식구를 원수로 만들어버리는 현장을 빨리 눈치채고 “예수는 그리스도” 이 복음에 들어가야 한다.
바울이 성전에서 체포된 것은, 그의 먼 미래, 바로 로마까지 가는 시작이 되었다.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돌에 맞고 배신을 당하는 비참함을 당했지만, 자신을 체포했던 천부장을 로마에서 다시 만나 구원받게 하고 로마 복음화의 주도권을 잡고 행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문제는 복음의 진보가 된다. 바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 천부장이 움직였다.
행21: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바울을 죽이려고 계속 따라다니는 깡패집단이 있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만 다니면서 충동질해서 복음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창3:15을 믿지 말라고 한다. 사람이 왜 망하고 비참해지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어도 그 분은 침묵하시고 방관자로 계신다. 오히려 사단에게 심부름을 시킬 뿐이다. 신앙의 비밀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설프게 교회를 다니고 어설프게 신학하고 이상한 목사를 따라다니다가 이상하게 길들여진 자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왜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가? 창3장의 원죄가 사람 몸속에 시기, 질투, 경쟁심으로 각인되고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는 시기, 질투심에 사로잡혀 산다. 나도 이 복음을 듣고 맞다고는 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시기, 질투, 열등감, 비교의식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래서 사모와 함께 부산을 내려가는 길에 싸운 적이 많다. 사모는 점점 이 복음 속에 들어가는데 나는 오히려 시기, 질투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면을 숨겨놓고는 이 복음을 따라가지 않고 멈춰주기를 원했지만 사모는 끝까지 복음을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한 번은 고속도로에 내려놨는데 걸어서라도 부산을 가겠다는 모습을 보면서 그 때 정말 회개했다. 그러면서 이 복음을 앞서 가신 목사님의 발자취를 조사하며, 그 분에게서 이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진짜 회개는 멋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시기, 질투심 뿐이었다. 그런데 창3:15 그 속에 들어가 내 몸에 연결시켰더니 뱀의 대가리를 밟는 축복이 내게 왔다. 나는 어떤 상황에도 그 분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경외 할만큼 내 마음속에 있다. 나의 신앙이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내 몸에서 시기, 질투심이 사라졌을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 소중하고 귀하고 멋있게 보였다.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 는 경쟁심, 무시무시한 살인의 광기가 내 몸에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의 자아를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 내게는 정말 약이다. 나는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날마다 내가 죽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랬더니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그 진리 속에 날마다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맛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그놈은 절대 스스로 항복하지 않는다. 아무리 그놈을 내버리고 싶어도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마귀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던 사람이, 자기보다 실력도 없는 사람이 엄청난 성전을 지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기가 확 꺾여버렸다. 이것이 바로 시기, 질투다. 우리 몸에서 가장 없어지지 않는 것이 시기, 질투, 경쟁심이다. 이 앞에는 약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져야 올바른 시작이 일어난다. 시기, 질투, 경쟁심으로 우리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다. 안색이 변하기 전에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 안색이 변한 이후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였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질투심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만 따라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기, 질투, 경쟁에서 해방 받아야 한다. 누가 어떻게 따라가든 말든 개입할 필요가 없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여야 할 역사적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사도바울은 디아스포라 미션을 보았기 때문에 마귀가 너무 싫어했다. 예수사랑교회를 마귀가 왜 그렇게 싫어하는가? 디아스포라 237 미션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 속에는 복음의 진보가 있기 때문에 질투심을 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창조적 하나님의 기회가 시작되었다. 바울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시작된 가이사랴 지역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그 지역, 유대인들을 속국으로 장악하고 있는 로마의 수도였다. 바울을 체포하고 포승줄로 묶어야 유대인들의 감정이 식어지고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바울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천부장이 바울을 끌어다가 가이사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한 것이다. 그 감옥에서 2년 동안 천부장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 빌1;12 “내가 당한 일이 수많은 당한 어려운 일들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창조적 하나님의 기회가 우리 예수사랑교회에 찾아왔음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신앙고백 속에 날마다 종교인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날 이 땅은 모순과 부조리 투성으로 창세기 3장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려주셨는데 오늘 바울 사건을 통하여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창세기 3장의 현실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창3:15로 내 몸에 연결시켜놓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수 있는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이제는 체포가 되든지 매를 맞든지 감옥에 갇히든지 죽든지 살든지 더이상 원망 불평하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창3:15로 연결되어져있는 하나님의 우리 자녀들에게는 믿고 기다려야할 시간이 있다라는 것을 알았사오니,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들이 복음의 진보가 되어지는 줄 확신하오니 이제는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빠로 사실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과 지혜를 우리는 믿고 싶사오니 성령 충만을 더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옵소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싸우시는가를 보라고 말씀해 주셨사오니, 내가 행동할 것이 아니라 이젠 조용히 기다리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창조주 하나님의 기회가 왔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자 되게 하옵소서. 거짓말도 불사하는 종교인의 실체를 알았사오니, 영적 싸움의 선구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창세기 3장 15절만 거부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오해를 일으키고 거짓말도 불사하며 살인의 광기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종교가 가득한 이 시대에, “예수는 그리스도”만 선포하는 예수사랑교회를 만나 창조주 하나님이 아빠로 믿어지는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 지혜를 믿어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자로, 영적싸움의 선구자로 나를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문제와 사건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고, 내 안에 조절 능력 없이 육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시기 질투, 경쟁심으로 안색이 변하게 하는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는 영적싸움과 회개로 올바르게 시작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정신이 치유되고 창세기3장15절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기회가 나에게 시작되었음을 믿어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며 오직 전도와 선교를 위해 나를 바꾸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