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부인하는 인본주의, 물신주의를 경계하라"
(행 17:16-21)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나의 영혼이 살기를 원하오니 내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옵소서.’ 이런 고백만 해도 모든 것이 살아난다. 우리의 생각과 사상, 의식... 이런 것이 살아나야 말씀도 받고 그 말씀 속에 복음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내 것이 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이 모세의 것, 예레미야의 것이 된다면 성경을 보아도 내 영은 살아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내 영혼을 살려야 한다.
말씀과 복음이 내 것이 되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면 세상일만 하다가 이상한 상태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시 만난 ‘갈릴리 바닷가’ 는 인생이 참 안되고 서글픈 운명, 답답하고 답도 없이 질문만 했던 시간들을 말한다. 자기 몸 하나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욕설을 온몸으로 받고 사는 그 한스러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모세는 아무리 왕궁에서 위대한 학문을 배워도 인생의 답도 없고 자신의 정체성도 알지 못한 채 생각과 사상, 의식이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자기 동족을 한 번 살려보려고 육신의 생각대로 움직였다가 살인자로 내몰리고 도망자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사무엘은 엄마 젖을 떼기도 전에 어머니의 품속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인생의 답도 없는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져 신앙생활을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윗은 진실하고 성실하다는 이유로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고, 목동의 운명으로 무시를 당하는 인생이었다.
삶이 다 무너진 갈릴리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만 가슴에 새겨놓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그래서 ‘지난날의 모든 과거는 먼 훗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목사님, 저에게는 전도하지 마세요.” 했다. 자기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실수, 실패를 다 겪어본 사람이라며 죽는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뜻이 있어서 창세 전에 예정하사 택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은 다음 복음을 받으라고 저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인생을 진단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진단서가 당신의 운명과 틀린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지 마시고, 그냥 죽음으로 마감하시면 됩니다.” 하면서 창세기 3장, 공허 혼돈 공허가 바로 운명이라고 설명해줬다.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살다가 비참해지는 것이 창3장이다. 모든 사람이 창3장에 걸려들어 죄의 권세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다 허물이다. 눈으로 본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마음을 격동케 하는 아주 더러운 것뿐이다. 그 결과 인생 여정은 수많은 변론밖에 없다. 합리화의 옷을 입고, 못난 놈한테는 잘난 척하고, 잘난 놈 앞에는 손으로 비비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인생을 진실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거짓말쟁이로, 욕심을 깊은 곳에 숨겨놓고 욕심이 없는 척 인생을 사는 것이다. 당신은 가난한 가문에서 자라나 예측불허의 정신문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만 설명했는데도, 그분이 “맞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물었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찾아주었다. 그랬더니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길래, “하나님은 당신에게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르는 언약이 시작된다” 하고 영접했다.
본문에 나온 지역은 그리스도 아테네, 올림픽을 탄생시킨 나라, 온갖 예술과 지식, 철학과 세상의 언어를 퍼뜨린 곳이다.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여기서 나왔다. 모든 예술과 문화, 정치가 여기서 출발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하고 관광객으로 겨우 먹고 살 만큼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수많은 전쟁과 민족의 살육, 유럽과 아시아로 끌려다니는 비참한 노예 생활도 했다. 세상의 것을 위대하게 탄생시키고 전 세계 퍼뜨린 나라가 왜 그렇게 무너졌는가?
창3:15이 빠진 성경은 답이 없다. 사람이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라는 이 비밀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한 나라를 탄생하고 문화, 예술을 만들어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막3:14~15을 말씀하셨다. 창3:15의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하고, 그 속에 전도도가 일어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사용해야 한다.
창3:15 없이 문화, 정치, 예술, 철학, 인문학 속에 빠져드는 것은 사실 귀신 장난에 놀아나는 것이다. 내가 창3:15을 발견하기 전에는 ‘귀신, 악령, 사단’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복음의 시인처럼 살았고 내 성품대로 성경을 전했을 뿐, 말씀에 답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사실적으로 시달려보고 겪어보고 귀신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창3:15을 사실적으로 체험하고 증거로, 언약으로 잡은 것이다.
본문처럼, 창3:15이 없는 국가는 결국 신전이 가득히 세워질 뿐이다. 온 동네마다 사당이 세워지고, 곳곳에 신당, 제단들이 세워지게 된다. 창3:15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대 언약 하나가 빠지면 나라와 민족, 지역이 개판된다. 그래서 아덴은 사람보다 우상이 더 많았다. 예술의 나라, 철학과 인문학, 정치사상이 넘쳐나도 이 도시는 결국 무너졌고 알렉산더 대왕도 무너졌다. 얼마 전 우리나라 유명한 배우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54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강남에 건물을 세 채나 가지고 있었지만 혈관 하나가 터져서 죽었다고 한다. 성경은 이런 것이 귀신 장난에 당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창3:15이 없으면 귀신의 활동을 자기 몸에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이 살아나면 귀신의 활동을 보게 된다. 세상의 영을 받지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야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고 미치게 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나 역시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일을 당했다. 그래서 나는 차 한 대를 계약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한테는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계약만 하고 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복음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면 영이 살지 못하고 세상 운명에 영이 잡혀서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가 된다. 그러나 나와 함께 하는 창3:15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에게 ‘전도도’ 가 일어나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
*자신과 영적싸움을 하지 않은 채 교회를 다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잔인한 종교주의자가 될 뿐이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즉시, 전쟁 중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이 중립지대에 있다. 그래서 분별력과 판단력, 결단력 없이 이 세상 신으로부터 온갖 공격을 당하며 다른 사람까지 미치게 만드는, 이상한 귀신들린 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깨끗하지 못하다.
그리스 아덴은 온갖 종교주의가 난무한 곳이다. 그들이 만든 문화, 예술, 정치, 경제를 통해 나타난 종교주의는 전부 거짓말, 사기치는 것뿐이다. 눅9:23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말씀하셨다.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나와 항상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이름 하나 때문에 목숨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현실 앞에 다 무너진다. 물질 앞에서, 사람 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이익에 조금만 흠이 나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움직이는 귀신의 활동을 꺾지 않으면 다 무너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예수사랑교회는 어떤 상황에도, 내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보게 된다. 오직 예수만 보여야 현실 앞에, 세상 앞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불신앙 하지 않는다.
“꼬부라진 그 손을 내게 내밀라” 는 예수님의 명령 앞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힘이 와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영적인 힘이 있기를 축복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 창3:15의 하나님이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분이 나와 함께해야 귀신의 활동 앞에 명령할 수 있다. ‘사람 관계 앞에 나의 유익하나 때문에 복음을 방해하는더러운 귀신아, 세상 풍습을 좇아 신전을 세워놓고 장사하려고 하는 더러운 귀신아, 짧게 사는 인생 앞에 영원한 아버지 나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문화의 신이 되려고 하는 더러운 귀신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나가라!’ ‘나를 만드시고 나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의 능력을 거부하는 흑암 권세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이런 기도를 해야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귀신을 내어 쫓는 힘이 없으면,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을 절대 나의 것으로 가질 수 없다. 세상은 요일2:16로 매일 찾아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우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매일 찾아온다. 그래서 교회 올 때 옷을 다섯 번도 더 바꿔입고 오는 사람도 있다. 귀걸이를 하다가 엉뚱한 곳에 찔러서 교회 오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평상시에 잘 바르던 립스틱도 교회 사람들한테 보여줄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삐뚤어지는 등,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렇게 세상 나라로부터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공격을 받는다. 또 사단의 나라에서 오는 공격은 어떠한가? 요10:10 먼저 온 놈이 내 것을 빼앗고 도둑질하고 죽인다고 했다. 계12:7~9 옛 뱀 곧 마귀라고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가 강한 자로 우리 집안에 돈이 얼마 있는 것까지 알고 다 빼앗아 간다. 이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요8:44로 무장한다. 여러 사람에게 털리고 당하면서 무장된 체질이 요8:44다. 그래서 이제는 그놈에게 아예 심부름꾼이 되고 종노릇 하는 인생, 노예로 전락해버린다. 그리고는 엡2:2로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세상의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스스로 자기 몸에 낙인을 찍게 만든다. ‘얼이 썩은 자야,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 운명이었어’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슬픈 고독 속에 몸부림을 치며 사는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봐도 허무하고, 꽃을 보면서도 ‘꽃은 아름다운데 내 속은 더럽구나’ 하면서 온갖 이상한 생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다. 세상 나라, 사단의 나라로부터 온갖 공격을 당하여 갈릴리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눈이 멀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까지 기다렸고, 다윗은 목동으로 기다렸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내가 응답하면 시작된다. 우리는 속상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슬픈 운명, 과거는 축복의 발판, 전도의 발판이 되고 인생 작품을 남기는 스토리가 된다. 그래서 패잔병에게는 소망이 있지만, 착한 수녀에게는 희망이 없고, 타락한 창녀에게는 희망이 있어도, 진실하고 깨끗한 수녀에게는 소망이 없다.
예수그리스도 이름,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아듣고 시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는 오지 않는 오늘을 위하여 반드시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을 외쳐라. 외치는 만큼 우리의 영이 살아난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너는 세계복음화를 위해 성령충만 받으라!’ 자신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에게는 내 몸에 원죄로부터 이미 와 있는 3 저주를 풀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몸에 임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나를 일으켜 세울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갈릴리 출신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성삼위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너는 일어나 걸어라!” 선포했다. 남의 말 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PR할 필요도 없고, 쟁쟁거리거나 찌질하게 따질 필요도 없다.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너는 답답해하지 말고 손을 내게 내밀라!”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될 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도 내 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어색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느낄 때, 복음을 붙잡은 렘넌트, 영적서밋이 되어 영적 세계 속에 하나님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승리하게 된다. 렘넌트들이 공부를 좀 못해도 괜찮다. 빌3: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세상 지식을 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발견된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다. 그래서 아이에게 “너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고 암기 능력이 뛰어나지 못하니 답답해하지 말고 암기 능력이 있는 아이에게 인생에 답을 줘라. 그러면 어느 날 결정적인 인생의 문제 앞에 그 성공자들이 너를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이 바로 요셉이다. 꿈꾸는 자 요셉은 국가의 위기와 재앙을 막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축복을 가진 자들이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윽박지르고 머리를 들지 못하도록 짓눌리지 말고 언제나 해방과 자유를 주고 하나님의 시간표 속에서 하나님이 어느 날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인본주의와 물신주의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일평생 자신을 미혹하는 사단의 전략을 알지 못한 채, 마귀의 종노릇 하는 것밖에 안된다. 그런 자들을 본받으라고 자녀들을 독촉하면 안된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보고 자녀를 향해 격분하고, 또 자녀를 공부시키기 위해 달래고 변론한다면 결국은 자녀를 이상한 정신병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아무리 외쳐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다. 행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그리스도 이름이 아니면 사람이 영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행4:10은 베드로가 선포한 메세지다.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아덴에서 이렇게 전하지 않았다. 2차 전도여행 때 이런 메세지를 깜박 잃어버린 것이다. 바울이 전한 메세지는 격분하는 메세지, 변론하는 메세지 뿐이었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사람이 강건케 되는 그리스도 이름부터 선포했다. 운명에 묶인 앉은뱅이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는 그 이름을 선포했다. 격분하고 변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라고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다. 그래서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를 끊고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불러봐라”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부요케 하시는 증거가 일어난다.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자, 학문을 사모했던 옛 체질이 솟아났다. 바울의 옛 체질이 무엇인가? 보는 것, 자기 기준에 틀리면 격분하는 것, 자기의 지식을 더욱 세련되게 말하려는 변론… 이런 것 때문에 아덴 전도에 실패했다. 행13: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 사도바울은 이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행26: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오순절의 역사와 빌립보 지방에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가? 행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진리는 하나지 두 개가 아니다. 그리스도로만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자가 영적 세계에 서밋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실패 속에 갈릴리 사람이 되면 그리스도 하나만 찾게 된다. 그리스도 외에는 답이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확신과 능력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우리를 쥐고 있는 강한자를 결박시키는 영적싸움을 쉬지 않고 진행해야 한다.
행8:4~8 그리스도를 일심으로 불렀을 때 붙었던 더러운 귀신이 소리를 지르고 나가고 또 수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집안에 “예수는 그리스도” 찬양만 틀어놔도 강한 자가 사라진다. 자녀에게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끊고 자녀를 쥐고 있는 강한 놈만 결박해도 확 꺾인다. 내 몸을 쥐고 있는 강한 자를 결박하는 힘을 가지면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사람과 사람을 이간하고 편견 속에 남의 말을 일삼는 인생으로 살던 나를 도대체 누가 쥐고 있는지 알면 그놈을 없애야 하지 않은가? 내 몸을 쥐고 있는 그놈과 정말 대결해야 한다. 나는 한 번도 내 몸을 휴전 상태로 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전쟁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은혜와 증거를 주셨다. 그리스도의 유일성 속에 오순절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리스도 그 이름을 일심 전심 지속하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내 몸을 쥐고 있는 강한 자를 결박시키면 만남의 축복이 일어나 안디옥 교회가 탄생된다.
어떤 목사님이 나에게 중요한 고백을 했다. 자기가 성실하고 진실하게 목회를 했지만 실패했다고 했다. 우리 교회 메세지를 듣고 자신이 전쟁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멈추면 불화살이 내 심장에 날아온다. 불신자 상태로 살면 세상 나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만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사단의 나라에서 공격이 시작된다. 그 목사님이 우리 교회 메세지를 듣고 엄청나게 영적으로 살아나고,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세계복음화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처음에는 지구에 모든 고민과 염려를 짊어진 것처럼 우리 교회를 왔었는데 이제는 웃는 사진을 보내주었다. 이 복음을 만나서 자신이 너무 행복하다고 고백했다.
우리 인생의 문을 막고 우리를 꽉 쥐고 있는 강한 놈이 있다. 이놈의 손아귀에서 풀어 나는 힘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의 그 부활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전해야 한다. 어설픈 미신, 샤머니즘, 이상한 몸짓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속이면 안 된다. 행11:21~22 내 몸을 꽉 쥐고 있는 강한 놈을 결박하고 내어쫓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면 만남의 축복 속에 동역자, 식주인이 된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의 만남을 통해 안디옥 교회가 탄생 되었다.
*바울이 사람 속에 강한 자를 보지 못하고 우상신전을 바라 보았기 때문에 아덴 사역을 실패했다.
하나님은 소아시아 전도를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보내셔서 그리스도 아덴에 머물게 하시고 아덴을 넘어 고린도 지역을 거쳐 이태리 로마로 가게 하셨다. 그런데 세상 지식이 발전된 그리스도 아덴에 들어갔을 때 바울의 눈에 보인 것이 우상 신전이었다. 사람 속에 강한 자가 쥐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우상 신전을 본 것이다. 강한 자가 사람을 쥐고 있기때문에 사람들이 신전을 만든 것인데,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육의 세계로 보았기 때문에 바울이 격동한 것이다. 예수사랑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은 행복자라는 것을 잊지 말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 렘넌트들이 갈릴리 출신이면 나는 정말 기쁘다. 자녀들을 잘 키우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면 돈도 안 든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훈련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무속촌에 가서 점도 보고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공자들이 왜 점쟁이를 찾아가는지, 왜 대학가에 점집이 그렇게 많은지, 연애하고 결혼하면 되지 왜 점집에 가서 궁합을 보는지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한자가 사람을 쥐고 있어서 그놈에게 끌려다니는 것이다. 얼마나 강한 자가 사람 속에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문화, 예술,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이 우상 신전이나 만들어놓고 미신, 샤머니즘에 걸려 무속과 점술, 타락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현장이다. 예술과 문화, 철학이 있지만 그 도시는 흑암이 장악한 곳이었다. 아덴 사람보다 우상신전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도 기초과학과 문명이 발달했고, 일본인들은 굉장히 친절하고 성실하지만, 어느 날 사무라이가 되고 극우세력이 된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전 세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장악하는 잔인성도 있다.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했음에도 그들은 800만 우상을 섬긴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우상과 미신을 섬기고 있다. 최고의 지성은 결국 귀신과 통하는 것이다. 그것을 미신, 샤머니즘이라고 한다. 그래서 글 쓰는 문학가들은 귀신의 소리를 듣고 글을 쓴다. 토지를 쓴 박경리씨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늘 꿈에 나오는 대로 글을 썼는데, 어느 날 자신이 간 중국의 한 도시가 자신의 글과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세상은 미신이라고 하지만 귀신 세력으로 사람들은 작동된다. 골2:8 미신은 결국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결국 멸망 받고 영원을 상실하게 된다. 인생에 사망의 고통이 찾아오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것을 모면하려고 우상 신전을 세워놓고 신을 받들어 모시다가 결국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미신을 믿고, 샤머니즘 사고와 사상을 갖게 되면 이상한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범죄와 도덕적 타락, 물질 숭배 사상들이 일어난다. 그래서 뉴에이지 사상이 일어난다. 뉴에이지 운동에서 록 음악이 나왔고 명상 음악도 만들어 냈다. 결국 그들의 목표는 사단 숭배다. 지옥권세 잡은 자가 사단을 숭배하면 시달렸던 문제에서 잠시나마 알 수 없는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평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강 하나를 불신자에게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 나의 언약이 되어 영이 살아나게 된다.
바울은 핍박을 피해 베뢰아를 나와서 아덴에 와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중에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우상을 보고 육신적 생각과 판단이 왔고, 거기에 대해 격동해서 아덴 사람들과 변명과 논쟁이 일어났다.
전 세계 나라들은 사실 우상을 세워놓은 것이 아니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미신과 연관을 가지고 있어서 우상의 나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0:1, 현장을 가면 반드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눅10:19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셨다. 답을 가진 전도자는 심한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 듣든지 못 듣든지 변론할 생각도 없다. 그들의 우상 신전을 보고 악한 자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영적 세계로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바울의 옛사람이 튀어나오니까 심한 분노와 노여움의 체질로 사람을 대했다. 전쟁을 쉬면 바울도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노여움 속에 변론하고, 분통 터뜨리며 쟁론을 일으켰다. 그가 한 것은 말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바울이 아예 말쟁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이다. 사람을 쥐고 있는 악한 놈을 결박시키는 이름, 세상의 인문학과 지식을 가지고 미신과 통하게 하는 귀신을 세력을 꺾는 이름이다. 말쟁이는 분노, 변론, 쟁론만 할 뿐이다. 말쟁이라는 말은 원어로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 (σπερμολόγος, ον) 라는 의미로, 바울을 이런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다. 바울이 이런 서러움을 당한 것이다. 자신이 존경했던 그리스 아테네에서 존경이 아니라 폭삭 망해버렸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담고 있냐가 중요하다. 창3:15 언약을 담고 뱀의 머리를 밟을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인격이 격하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1:12 속에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운명을 바꾸는 그리스도, 신분을 바꾸는 그리스도, 세상 나라와 사단의 나라를 이기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이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고전3:16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항상 함께 하시며, 요14:27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이 내 안에 임하기 때문에 마음에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하거나 격동할 이유도 없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갖게 된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를 위해 살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 운명을 바꾸는 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 세상 나라를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으면, 신분을 바꾸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면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해 갈2:20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이시라” 이렇게만 하고 있으면 된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것에 바울이 격노하고 격동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단군신전을 망치로 박살을 내서 구속된 사람이 있었다.
육신적으로 반응할 필요 없다. 인생에 답을 주면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이름으로 자신의 운명과 신분부터 바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케하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사오니, 갈릴리 출신보다 못한 나, 쓰레기보다 못한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하셔서 나에게 구원의 축복을 허락해 주셨사오니, 이 현장을 살릴 수 있는 제자를 보게 하옵소서.’ 이렇게 했다면 아덴에 제자가 세워졌을 것이다.
부활을 부인하는 세상의 인본주의, 물신주의를 기대하지 말고 먼저 구원의 감격을 갖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원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정확한 답을 가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사실 99% 전도 대상이다. 어떤 분은 가수가 찬양부르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고 교회 간다고 했다. 그런 노래를 듣고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노래 듣고 은혜는 받는데 집에 가면 부인한테 폭언을 하고 서로 독사가 되어 물어뜯는다고 했다. 예수님은 교회를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 말씀했다. 나를 쥐고 있는 강한 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독사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뱀의 머리를 밟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된다. 철학과 지식은 아주 헛되고 헛된 것이다. 철학과 지식을 설파했던 한 교수의 장례식을 갔더니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에 가족들은 전무 다 망해서 정신병자 수준이었다. 소크라테스처럼 마누라에게 늘 맞고 사는 문제에 걸려있기 때문에 철학과 지식에 집중하고 산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창3:15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언약이 없으면 영적 세계를 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육신적 운명에 묶여 마귀의 종노릇하고 귀신들린 채 비참하게 죽는다. 바울은 복음의 세계를 깨달은 이후, 아덴에서 자기 인생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했다. 딤전6: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그 하나만 지키라는 것이다. 딤후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나는 알았다.” 나를 쥐고 있는 강한 자를 무너뜨리지 않고 옛 체질이 순식간에 솟아나는 현장을 보고 남이 세운 우상 앞에 이상한 것이 나온다.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똑똑하고 거듭난 사람인 것처럼, 내가 뭔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딛3:9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바울이 아덴에서 당한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나는 작정하고 또 작정했다. 그리고 고전2:3~5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자신에게 그리스도 이름 하나만 부르면 대성공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부르기 시작하면 반드시 육신의 질병에서 해방되고 몸이 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좋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부르지 않는다. 골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런 말을 똑똑한 자들이 알아듣지 못한다. 자녀가 멍청해도 “예수는 그리스도” 한다면 그 아이는 천재다. 자녀들이 똑똑하지 않고 암기를 못 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서 잘났다고 하는 자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 고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내세와 상관없이 사는 자들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향락주의가 나왔다. 행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 행복적 근원은 감각적 향락에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육신적 감각으로 사는 이런 것은 전부 미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에 길들어지면 사람이 맛을 잃어버린다. 이런 생각이 올 때, ‘아, 강한 자가 나를 또 쥐러 왔구나.’ 깨닫고 전쟁을 쉬지 않고 휴전상태에서 깨어서 사단을 밟고 무너뜨리고 내어쫓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영과 몸이 살아난다.
바울은 이후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그리스도 이에는 전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세상의 지혜로 살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운명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를 통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복음이다. 무신론적 사상과 쾌락주의 사상, 향락주의, 현실주의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영이 살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을 부인하는 인본주의 물신주의를 경계할 수 있도록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으로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을 위하여 이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절대 답을 내는 자가 되게 하시고, 성경의 결을 따라 우리에게 확인시켜준 그 복음의 능력이 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죄의 권세, 사망 권세, 지옥 권세, 사단의 권세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껶여지게 하옵시고, 어설픈 종교와 철학과 인문학들이 그 휴머니즘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내 영혼 속에 받아들여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열려지는 축복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모든 향락주의와 모든 철학의 학파와 모든 현실주의적인 흑암의 권세가 완전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로 자신과 세상과 사단을 이기는 한주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원죄로 인해 실패 속에 소망도 없이 살아야 할 내가, 성경을 통해 이미 진단해주신 말씀이 내 것이 되어 내 영혼이 살아나고 영적인 세계를 깨닫는 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최고의 문화, 예술, 철학을 가졌지만,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해 우상 신전을 만들고, 미신과 샤머니즘, 무속과 점술로 마귀의 종노릇하다 타락하는 인본주의와 물신주의, 무신론적 사상 속에 미혹 당하는 현실을 육신의 눈으로만 판단하여 격분하며 변론하게 하는 마귀 나라의 일을 끊고, 사람을 강한 자가 쥐고 있다는 것에 눈을 뜨고, 오직 창세기 3장 15절로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비밀을 가지고 날마다 귀신을 내어 쫓는 전쟁을 쉬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을 살리는 이름, 사람을 쥐고 있는 악한 영을 결박하는 이름, 예수그리스도를 날마다 내 자신에게 부르고 적용하여 영혼을 살리고 만남의 축복을 누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