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22 예수사랑교회 1부예배 말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그것을 전해야 되는 사람인데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 점검하는 날이 되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나에게 집중되어져서 그렇다. 내 중심에 집중되어지면 절대 그리스도를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 입장에서, 나의 감정에서, 나의 현실에서 늘 잡혀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나 자신’과의 영적 싸움을 하게 되면 복음을 말할 수 있고, 내가 늘 체질적으로 ‘환경’ 앞에 영적 싸움하게 되면 누구를 만나도 복음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내 목덜미를 잡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결박해버리면 그리스도 그 이름이 선포될 것이다.
* 내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 버려라
→ 자신과 환경, 사탄과의 영적싸움 속에서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자
거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져 있다. 그래서 늘 ‘자신’과 ‘환경’과 ‘사탄’과의 영적싸움을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용납을 한다. 늘 합리화의 옷을 입고, 뭔가 위로 받을 말씀을 찾아다니며 뭔가 그 말씀 속에서 읊조리고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삶 자체에 응답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냥 밥 먹고 사는 수준이다. 밥 먹다가 싸우거나 밥 먹는 문제 앞에 쟁쟁거리고 쫀쫀하고 지저분해진다. 인생 살아가는 여정 속에 내 삶이 뭔가 지저분해진다고 생각하면, 빨리 오늘 자신과 영적 싸움 시작하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가 죽고 부활이후에 너희들 곁을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니라. 앞으로 나를 보려고 하지 마라.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영, 성령의 영 ‘그리스도’가 네 안에 항상 거하시게 될 것이다.”
예수사랑교회는 굉장히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교회다. 그러므로 갱신할 것은 갱신하고, 변화할 것은 변화한다면 틀림없이 될 텐데, 안 하는 것은 자신과의 영적 싸움이 안돼서 그렇다. 우리 방안의 환경은 ‘가지마!’ 라는 환경이다. ‘좀 더 자자, 좀 더 눕자, 좀 더 게으르자.’ 그리고 사탄은 끊임없이 생각을 타고 들어와서 그냥 머무르게 만들 것이다. 여기에 영적 싸움이 진짜 되어지면 내 안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가 나와 영원히 항상 함께 계시므로 마12:28-29,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네 속에 있는 더러운 옛 사람의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하나님 나라에 지배를 받게 되니까, 강한 자를 보게 되고, 강한 자를 결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요, 성령을 훼방하지 아니하므로, 오는 세대와 가는 세대에 영영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신앙’을 체험하자
행4:10,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기적을 가져다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눈에서 찾고, 귀에서 찾고, 머리에서 찾고. 목에서 찾고 온 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내 육체에 부어주셨다’라는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원동력이 일어나기를 축복한다. 이제부터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내 육체가운데 부은바 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다면 내 자신이 회개할 일이 너무 많다. 죄 사함을 받아야겠다는 절대적 믿음이 회복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담대함이 없고, 뭔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 앞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 다 사탄에게 장악된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불신앙이 계속 흘러나온다. 오늘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지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지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왕의 왕이 되시고, 인생의 구주가 되시기를 축복한다.
*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라
오늘 본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라는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있고 천사도 있고 영들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고,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아예 믿음 자체가 없다. 결국 강력한 어둠의 실체로부터 장악되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을 죽이고자 마음이 하나가 되어 당을 결성한다. 행26:6-11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협하여 죽이자고 결의한다. 그뿐 아니라 유대교 사상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정죄하고 몰아버렸다. 예수님도 이단이라고 공격당했고, 사도 바울도 이단의 괴수라고 공격당했고, 전 세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선포하지 못하도록 지금 교회들로부터 오히려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지금도 저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저들을 막을 것인가? 교역자들이 여기에 대해서 대처할 능력도 없고 무감각하다면 교회는 심각해지는 거다. 전 세계에 어둠으로 잡힌 모든 종교와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만 못하게 한다. 그래서 여기에 교역자들이 눈을 떴다면 굉장히 담대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되고 찬양한다. 그런데 이것을 안 해서 국제적 감각이 떨어지고 외부에 무슨 공격이 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 적의 공격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져야 한다. 성령이 없는 자에게는 ‘인본주의’가 나오지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인본주의 사상’을 꺾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없으니까 육신의 생각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인생을 산다.
→ 비 진리로 살았던 옛 사람의 체질과 모습을 벗어 버리자
참이라는 진리를 만나면 이전에 거짓된 것들을 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비 진리였던 옛 사람의 그 체질과 성향과 성품을 벗어버려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이나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나 거의 다를 바 없다. 참 진리가 내 앞에 와 있으면 이전에 잘못된 거짓된 비 진리는 버려야 되는데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집중되어졌던 옛 사람의 모습들이 산산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지기를 축복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말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이처럼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말하지 말며 가르치지도 말라는 거다. 지금 새로운 구원의 축복의 역사가 시작됐는데도 거부한다. 이 안에서도 오히려 거부하는 사람이 교역자일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말하는데 어색하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가지고 사탄의 세력을 짓밟고 공격하고 싸우는데 그 말이 기분 나쁘다? 그리스도 그 이름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무엇인가 쫀다? 그렇다면 오늘 완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축복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들은 것을 증거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본문을 통해서 보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악한 영’과의 관계를 맺지 말고, 영적싸움 속에 내 자신을 일 으켜 세워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자
나는 정말 ‘성령의 사람’인지 아니면 ‘악한 영’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오늘 나는 점검하라. ‘성령’의 특징은 세상을 향한 담대함이 있다. 그래서 어제는 내가 부인하고 예수를 저주했다 할지라도 정말 내가 성령을 받았다면 이제부터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령하는 것이다. 진짜 일어나야 한다. 오늘 나사렛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음이라.”(요16:33) ‘성령의 사람’은 담대해야 한다. 또한, ‘성령의 사람’은 내 영혼을 점검하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자신과 환경 앞에 영적 싸움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막16:15, 믿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표적이 따른다는 말씀대로, 13절에도 보면 도망자, 배반자였으며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던 사람들인데 조금도 과거에 대한 거리낌없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담대함이 그들 영혼 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가진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말하는데 부끄러워한다. 악한 영과의 관계있는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이름을 선포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인간의 ‘근본 문제’, 사탄에게 장악되어져서 지옥 권세까지 내가 묶인 상태로 끌려 다니는 이 저주의 세력을 멸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병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마귀의 일을 멸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대한 댓가는 내가 지불받아야 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지금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금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 요14:6, “너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처소가 예비되어져 있다. 내가 네 인생에 길이 되고 진리되고 생명만 되어진다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 것이다.”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내면 속에 인격으로 모셔드렸다면 그럼 얼굴이 펴진다. 게으르지 않는다. 소통한다. 어둠에 묶이지 않는다. 자존심으로 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내 자존심조차도 그냥 오늘 당장에 바숴버려라. 그것으로 인해 내게 집중되어지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다. 막10:45, 대속주로 오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라. 그래서 만왕의 왕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참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참 제사장되신 그리스도를 내가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께로부터 붙들림을 받게 된다. 벧전2:9, “너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요, 그의 나라를 담대하게 외치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올바른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으로서 담대하자. 또한 왕 같은 제사장이므로 풀어내자.
‘창3장의 근본문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 해결되었는지를 점검하라. 저같은 경우에는 ‘창3장’이 밀려오면 즉각즉각 밟아준다. 두려움, 수치심, 부끄러움, 핑계, 책임전가 등 이런 게 전부 다 하나님 떠나서 형성 되어졌던 ‘옛 사람의 체질’이다. 심지어 제 몸에 뭔가 통증을 느껴도 혹시나 마귀가 들을까봐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바로 꺾어버린다. 이런 훈련이 자꾸 되어지면, 담대함이 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 떠나시고 사십일 동안 하나님 메시지를 들었고, 10일 동안 마가다락방에 들어가 영적싸움 했더니 담대함이 왔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항상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게으른 저주야, 낙심하게 하는 어둠의 세력은 산산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무너질지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 권세에 잡혀 있었던 옛 사람의 것을 오늘 그리스도 이름으로 박살내자. 내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그 기분 이것이 무너져야 다른 사람을 인정해줄 수 있다. 틀린 자아를 가지고, 자꾸 신앙 생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을 가져야 될 하나님의 자녀가 뭔가 세상에서 ‘틀린 힘’을 가지고 싸우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세상 것을 가지고 인생을 살면 자꾸 싸우려고 든다. 그래서 누가 말만 하면 말꼬리를 잡고 또 싸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을 가지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가 되어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내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누려라.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진짜 오직 성령 충만 받기를 축복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체험되어지면 담대해진다. 그럼 ‘담대하다’라는 말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보좌에 담대히 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음이니라.
→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인본주의가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서 예 배 때 받은 말씀을 기도로 연결하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생각하고, 찬양하라. 하나님 앞에서 한 번만 전도한다고 생각해봐라. 그럼 얼마나 힘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나오는지 내가 놀란다. 그런데 사람 앞에서 식사기도든 뭐든 하려니까 사람이 의식된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벌써 기도가 달라진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좀 돈이 있다면 아부성 기도가 나온다. 혹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정죄하는 기도가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 예배로 만족했던 언어가 나온다. 이렇게 다르다. 그래서 내가 예배 하나로 만족하면 사실은 다 끝나는 거다. 우리는 이 비밀을 못 갖고 있다.
그래서 전부 다 기도도 내 중심, 나에게 집중되어졌던 것만 나온다. 내가 안됐지, 왜 남한테도 안 되었던 것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여러가지 분위기는 부족하지만 헌신할 수 있도록 제게 역사해주옵소서.” 헌신할 게 너무 많은데도 자꾸 내놓으면 하겠다는 이런 수많은 욕심쟁이가 나를 기도로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되면, 예배를 통해서 받은 말씀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예배에서 나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바로 무지, 무능, 가난, 질병의 저주가 산산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짓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만 내 인격적으로 믿지 않아서다. 그래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안 살고 사람을 많이 의식하며 친구 눈치를 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돈 앞에서는 신앙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19절,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과연 내가 어느 쪽으로 선택할 것인지 한 번 나 자신에게 물어봐라. 어차피 어렵고, 안 풀리고, 내가 힘이 든다면, 빨리 ‘하나님의 눈치’를 보자. 그런데 어려운 사람일수록 사람의 눈치를 본다. 그건 신앙생활이 잘못된 거다. 내가 어렵고 힘들고 메마른 것처럼 보이고 답답히 묶여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명령하게 될 것이다. 사람 눈치를 절대 안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눈치’는 바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이니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내 이름으로 구하는 자는 내가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리라. 너는 담대하라. 너는 나의 이름을 높였으니 내가 너를 채워주리라.” 명절에 어려움이 와있고 무시당했다 할지라도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돈이 생기면 얼굴이 환해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얼굴이 환해지자.
*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증인의 삶
→ 하나님 나라에 목표를 둔 뚜렷한 기도제목을 갖고 사명감을 이루기 위한 부름 받은 자의 삶을 시작하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라. 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하니” 곧, 부름 받아 사는 삶으로 결단했다는 말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은, 바로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목표를 두기 때문에 소명감과 사명감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항상 쫓기는 삶을 산다. 늘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바쁘고 항상 만족이 없고 수동적으로 마귀의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늘 일이 많고, 돈 앞에, 환경 앞에 시간을 늘 엉뚱한 곳에 소비한다.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교제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질문해보기를 바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고 사는 삶인가? 그러면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는 절대적 믿음 속에서 나는 구원을 얻은 말씀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 내 인생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놓고 기도제목이 뚜렷한가? 이런 것들이 내 삶에서 늘 담대하게 나와야 된다.
롬16:25-27, “네가 그리스도를 일인칭하고, 그리스도 그 이름에 절대적이고 유일성이 되어진다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인생을 남겨두신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늘 예수 이름을 말하라고 지금 생명을 주셨다.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선포하고 전도하라고 남겨두셨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라고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붙잡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 자신을 분별해야 된다. 곧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별해야 한다. 진짜 해야 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될 일은 오늘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라. 나 자신과의 영적 싸움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옛 사람 마귀의 체질 속에 그냥 젖어있게 된다. 그러면 이 흑암의 나라에 묶여서 일어날 수 없다. 더구나 사탄에게 묶인 상태로 질질 끌려간다고 조금만 생각을 한 번 해봐라. 그렇다면 내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싸워야 할 것이다. 내 중심에 집중되어져 있었던 창3장의 옛 사람,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화합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오늘 과감하게 그리스도 이름으로 박살내자.
이미 새 포도주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와있는데 내 몸이 갈라지고 깨져있다면 여기에다가 부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새 부대에다 새 포도주를 부어야 보존되듯이, 깨진 상태에서 내놓으라고 하면 하나님은 안 주실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낡고 썩은데다 그 예수의 옷을 잘라 갖다 기우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라는 절대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내게 그리스도를 주었는데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지 않고, 게다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데도 그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담대해지기는커녕 그냥 거짓된 일반 종교, 비 진리 속에 지금 잡혀있는 것이다. “위로의 말씀만 들으려고 떠돌아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될 것이다” 하고 담대히 일어나는 멋진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축복한다.
* 언약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던 그 부활신앙의 기적이 내게 있게 하셔서 보고 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기에 비진리로 살았던 과거의 체질과 내 자신에게 집중되었던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자신과 환경과 사탄과의 영적싸움 속에서 내 자신을 일으켜 세워 그리스도를 담대히 선포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 앞에 사는 인본주의가 무너지고 성령과의 교제 속에 예배 하나로 만족하여 예배의 말씀을 기도로 연결하며 하나님 나라에 목표를 두고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부름 받은 자의 삶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