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이 증거한 요셉의 시대적 응답
행7:9~16
2015.05.10 주일 1부 말씀
요셉은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다른 나라에 팔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공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본문에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다.
딱 한 가지, 요셉은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한계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힘없고 아무것도 없는 배경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자포자기하며 주저앉아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막연하게 부르고 있지만 어려운 배경 속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만난 요셉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 오늘 요셉의 응답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아무리 배경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요셉은 지구상에서 굉장히 깊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었고 자기와 상관없이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내가 기도했던 그 대상의 하나님이 사실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골방에 들어가서 정시기도나 예배를 통해 이것을 조금만 느낀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의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꾸 잔머리를 쓴다. 시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미리 막 몸부림을 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안 된다.’ ‘나는 지금 형편이 이렇다.’ ‘나는 아직 그런 믿음이 없다.’ 이런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시간이 없다.
이 세상 신은 생각으로 우리를 혼미케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그 생각을 사로잡아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자에게 역사하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내 인생의 문제 앞에 촐랑대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면 된다. 요셉은 언제나 정시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사단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위기와 억울한 일 앞에 소리 질러야 됨에도 불구하고,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망각하게 만들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놓치게 만드는 저주의 세력은 산산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내 삶에서 무너질지어다." 이렇게 어린 양 예수의 피의 능력을 그는 사실적으로 적용했다. 그래서 그는 정시기도를 통하여, 내 영혼이 하나님 왕궁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모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 내가 나아가서 상급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예배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기에 한 번의 예배 속에 시달리는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알고 그 말씀을 믿을 때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성경은 바로 창3:15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요5:39에 기록되었다. 바로 우리 삶에 전쟁을 시작해야 살아계신 그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신, 귀신들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곧 “하나님 떠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떡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부터 해결 받아야 한다. 요14:6,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부터 만나야 한다. 곧 하나님의 자녀부터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망 권세, 지옥권세 잡은 어둠의 세력이 박살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문제에 잡혀서 늘 하나님을 향해 내놓으라고만 하며 하나님을 믿어도 계속 원망과 불평 속에 쟁쟁거리는 삶을 살면서 인간관계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하여 살다가 지옥까지 끌려가는 것이다. 이 구원의 문제부터 해결해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시고 그리스도로 영원한 해답을 주셨다.
성경은 도덕책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시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사실이 성경을 통해 느껴진다면 반드시 삶은 변화된다.
성경을 통하여 ‘나는 구원 받았다’는 고백이 있다면 틀림없이 답을 찾아낸 인생이다. 구원의 능력되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오늘 자녀 된 신분 권세, 그리스도 이름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행17: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보다 더 신사였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언제든지 ‘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고 확인을 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말씀이 머무르는 자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다.
* 스데반이 증거한 요셉의 믿음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요셉은 창3장의 현장을 알고 있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남긴 마지막 유언, ‘내 아들을 대신하여 수양, 하나님이 죽는구나. 그 수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이름의 권세로 이 세상을 대적할 때 나는 취하게 되는 것이다.’ (창22:17)는 것을 통하여 창3:15의 비밀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고생했는지를 요셉에게 분명히 전달했다. 창3:15을 적용하지 않으면 인본주의와 인간의 생각으로 망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요셉에게 가르쳤다. 요셉이 문제 앞에 촐랑대거나 쟁쟁거리지 않고 육신적으로 싸우지 않았던 이유는 창3:15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 영적인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날 동안 비참해지며 꿈을 따라가는 존재가 아닌 현실 속에서 매일 환경을 쳐다보다가 주저앉아버리는 존재가 될 뿐이다. 그러나 창3:15 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면 꿈을 좇는 자가 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민에게 알릴 것이다.” 고 전도와 선교에 꿈을 꾸는 자가 바로 요셉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창3:15로 자신을 늘 바꾸어갔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창3:15을 적용하지 않고 창3장 속에 자신을 바꾸지 않으니까 늘 먹는 것에만 신경 쓰며 시기하고 살인하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상처주고, 상대방에게 어려움을 줄 뿐이었다. 그러니 뭔가에 잡혀서 살인자, 이간하는 자, 공모를 꾸미는 자로 늘 마귀 짓만 한 것이다.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가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집어넣자하고,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그럴게 아니라 팔아서 돈 몇 푼이라도 건지자 하고, 팔았는데 생각해보니까 요셉을 데려가지 않으면 큰 일 난다 싶어 짐승에게 물려죽었다고 하자 해서 짐승 한 마리 잡아 피를 옷에 묻혀 아버지에게 가져가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나를 바꾸지 않으면 결국은 무당처럼, 귀신들린 자로, 정신질환자로 삶 자체를 지저분하게 살다가 어느날 찾아오는 재앙도 알지 못한 채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나를 바꿔야 한다. 요셉은 창3:15, 그리스도로 자신을 바꿨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 다니고 망신당하고 하나님을 망신 주는 사람이 될 뿐이다.
창3:15을 적용하여 영적인 전쟁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요셉과 같이 꿈꾸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사랑교회에서 쏟아지는 강단의 말씀으로 꿈꾸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배경이 없어도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응답의 주인공, 세계복음화의 주역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있는 자는 고요함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릴 수 있다.
삶 속에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영적인 싸움을 시작했던 요셉은 무엇을 체험했는가?
요셉은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온 천하를 꾀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인생을 살게 만들며, 배경이 없다고 그냥 주저앉게 만드는 이 세상 신을 결박했다. 하나님은 이것을 체험했던 요셉과 “말씀으로” 항상 함께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비밀 창고와 같다.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말씀 속에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은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말씀을 붙잡은 요셉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해 나갔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다면 우리가 이 시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내가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온갖 종교들로부터 내가 공격을 당하고 교회도 안 다니게 된다. 우리를 혼미케 하며 예배와 정시기도 속에 목숨 걸지 못하는 불신앙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밟아버려라.
요셉은 불신 세계가 성공하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여 지는 것에 의해 불신세계가 마치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힘이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요셉은 그들에게 곧 멸망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다. 마귀는 불신자들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 잘되기도 한다는 것을 요셉은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지 못하고 불신자에게 빌붙으려 한다면 이미 틀린 것이다. 요셉은 힘이 있는 형들에게 빌지 않는다. 오히려 요셉의 형들이 ‘저 교만한 놈, 꿈꾸는 놈, 헛소리 하는 놈, 허풍 때리는 놈’ 이라고 할 만큼 당당했다. 불신 세계를 들여다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창세기3장으로 인하여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는 사단에게 속아 사람이 몸부림을 치며 뭔가 힘이 있는 것처럼 자랑하지만, 창3:15을 알고 있는 자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며, 배경이 없어도 창3:15을 가지고 있는 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요셉은 보았다. 우리에게 이런 힘이 있어야 한다.
요셉은 창3장으로 인하여 창6장,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불신자하고 혼합하고 연합하여 네피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용사’ 라고 하는 이 네피림을 꺾는 것은 육신의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배경으로 꺾을 때 무릎 꿇는다는 것을 알았다.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깨달았듯이 사람들이 사망 권세, 음부의 권세로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여 하나님을 어설프게 알면 멸망한다는 것을 말씀 속에서 깨닫는다면 우리에게 행1:8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창11장, 결국 사람들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아보겠다는 몸부림으로 이 땅에 무엇인가 쌓아놓으려 하는 바벨탑의 저주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어설프게 믿는 사람들이 너무 무능하고 불신세계에 묶인 자들에게 노예가 되는 현장을 보았다. 또한 왜 신자가 무능하고 왜 그들이 힘이 없고 응답이 없는지 알았을 뿐 아니라 신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힘을 얻어 이 세상을 정복해 갈 것인가도 분명히 알았다.
창3:15은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이며, 십자가에서 모든 문제를 이루시고 부활하셔서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이 비밀을 알아야 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개인에게 공급되고, 하나님의 절대적 시간표가 찾아올 뿐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새 은혜를 입게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창3:15로 움직일 때, 히4:16 날마다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된다.
*요셉은 그 어떤 현장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화” 해야 한다.
우리도 요셉과 같이 반드시 답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답이 없으면 사람이 조급하고 답답하고, 평안이 없이 굉장한 스트레스 속에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작은 말 앞에도 갈등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다. 작은 일로 갈등하고 시달리면 딱 두 가지가 온다. 육신적으로는 암, 정신적으로는 정신병이 온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갈등은 마귀가 주는 것이기에 내어 쫓고 밟고 묶고 결박하지 않으면 마귀는 캄캄한 밤을 하얀 날로 지새우게 만든다. 분위기 자체가 사망이다. 그것을 “마귀가 신방 왔다” 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나는 아무런 배경이 없고, 불쌍한 놈이구나. 겨우 내가 이렇게 살란 말이냐.’ 이런 말들로 자신을 무너지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화”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실천하게 된다면, 사실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진실을 들여다보게 된다. 문제의 사실 속에 그 진실이 무엇인지 보는 힘이 있어야 평상시 기도가 되어 진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 속에 진실을 보는 힘이 없다. 요셉은 현실 속에서나 환경 속에서, 극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속지 않았다.
창39:1-6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시고 형통케 하셨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사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는 성경을 통해 구원 받은 자이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실 뿐 아니라 하늘의 군대까지도 움직이신다는 이 진실을 가진 자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것이 우리의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진실을 노래하는 것이다.
배경도 없고, 어려운 환경이고,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이 우리의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의 나라” 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눅17:21)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진실이 있음에도 광풍만 만나면 온 동네 돌아다니면서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하는 더러운 저주의 영아 너는 내 속에서 이제 결박 받고 떠나갈 찌어다!”
이것이 진실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이상해지고 생명건 만남도 없고 작은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또 수치심과 부끄러움 속에 두려움을 느끼며 숨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가 하는 짓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부끄러움도 끝났기에 수치심과 두려움도 사로잡아 무너뜨리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사건 속에 내 진실은 사랑하는 것이었다.’ 고백하면 힘이 오게 된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체질화 되고, 진실이 자꾸 쌓이면 가는 곳마다 응답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응답, 감옥 안에서의 만남도 응답, 요셉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응답이었다. 모든 것을 응답으로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이 비밀을 누렸던 요셉 인생의 결과는 어떤 고백이었는가?
“지난날의 내 인생에 모든 과정은 하나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절대적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근심하지 마시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지난날의 과거는 축복의 발판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힘이며 지금도 역사를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창45:5)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멋진 인생으로 답을 얻고 살아가라.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적인 힘이 있다면 우리 예수사랑 모든 가족들이 세계적인 승리자가 될 것이다.
* 시기와 완악함이 가득한 유대인을 향한 스데반의 설교
요셉의 형들은 시기와 완악성이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시기심으로 인하여 그의 동생 요셉을 애굽 땅에 팔아버렸지만, 요셉의 결과는 치리자, 국무총리였고, 요셉의 형들은 기근과 환난으로 진저리쳐지는 생을 살았다. 행7장,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요셉의 형들, 너희 조상들이 완악함과 시기심으로 인하여 결국은 사백년 동안 나라도 잃어버리고 기근과 환란을 당하며 하나님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양식을 구했듯이 당신들도 완악함과 시기심으로 와 있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조상들이 악한 자들이라면, 후손들도 지금 악한 자들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완악한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인신매매, 살인적인 광기로 불의를 저질렀던 그 현장이 오늘 지금 여러분들에게 나타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던 그 메시아 그리스도를 당신들이 쳐 죽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체질이지 않았는가?,그렇게 엄청난 어려움,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살리기 위해 요셉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바로 창3:15 메시아 그리스도를 항상 메시아를 내 영혼 속에 담아야, 그 능력을 사용해야 당신들처럼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악하고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내겠습니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던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절대적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신은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할 뿐 아니라 오래된 저주의 세력이 이제는 우리 몸속에 들어와 스스로 파괴시키는 이 현실 속에 그리스도가 아니면 결단코 인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기에, 먼저 앞서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요셉에게 주셨고 모세에게 주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인 저 예수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의 이 완악함, 하나님 없이도 살아보겠다는 이 시기심, 기득권 모든 욕심쟁이, 살인적인 만행들을 내려놓고 메시아 그리스도 그 하나님을 내 영혼 속에 둡시다.”
이것이 행7장, 스데반의 설교였다. 이것을 현장에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치리자로 삼았을 뿐 아니라, 애굽 땅에 있는 국가가 민족성이 다르고 모든 문화가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하나님이 높이셨다.
요셉의 시대적인 응답이 무엇이었는가? 세상을 살리고 나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를 가지고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밟는 자가 되라. 배경이 없다고 주저앉고 나는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요14:6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열렸기에 오늘부터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면 된다. 세상적인 유행을 따라 그냥 헛소리로 고함을 지르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 이렇게 고함을 질러라.
그리스도 인하여 우리가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완악함과 시기심, 살인의 영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모든 저주를 산산이 무너뜨려라. 그래서 나 자신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안에 반드시 성령, 진리의 영, 그리스도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그 힘의 능력으로 모든 세상 신 저주의 세력들, 악한 영들이 산산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맡기는 것이다. 그 때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영원히 항상 함께 계신다.
근본 문제, 원죄로 말미암아 잉태되어진 나의 성격, 체질, 성향, 모든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길들여졌던 저주가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꺾여 지고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찾는 최고의 날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현실의 문제 앞에 자포자기 하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한 채 역사의 하나님을 어설프게 부르며 힘없이 살 수밖에 없던 인생 속에 성경을 통해 구원받음을 느끼며 하나님의 자녀로 충만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내 인생에 찾아오는 절망과 고통이 있다할지라도 정시기도와 예배를 통해 창세기 3장15절을 사실적으로 적용하는 영적전쟁의 결단 속에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심을 말씀으로 누리고 그 말씀 속에 꿈을 꾸는 자 되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시키는 인생이 시작되어 스데반이 증거한 요셉의 시대적인 응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