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복음으로 통하는 동역자,
바울과 바나바
행9:23~31
2015.08.09주일 1부 말씀
사도행전 9장에 나타난 복음 운동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완전한 복음으로 바울과 통하는 동역자는 아나니아와 바나바 이렇게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람이었다.
*신앙생활은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사상이 아닌 체험적인 것이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닌 진짜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가지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오늘 못 박아야 할 육체의 문제를 못 박아야 한다. 그런데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이상해지고 불신자들로부터 미움을 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면 ‘죽으면 죽겠다’ 는 각오를 하고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때 하나님의 기적은 시작된다.
하나님의 선교 속에 우리에게 주신 응답은 단 하나다. “만남”
그리스도 그 이름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행동, 실천이 없는 사람과는 절대로 만나지 않게 하신다. 그리스도 이름의 비밀을 가지고 재창조를 일으키는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와 만나게 하시고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바울을 만났다. “하나님 그 사람은 우리를 죽이는 사람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은 빨리 도망가라” 하지 않았다. 죽으면 죽겠다는 절대적 각오가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은 역사하신다. 작은 문제 앞에서 오두방정을 떠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이상한 사람, 살인자로 여기며 죽이려는 계략까지 꾸몄다. 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울을 만나 주셨기에 자신이 바울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 속에 그를 만나게 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러 계실 뿐 아니라,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니, 그 문제는 그리스도 앞에 잠잠할 지어다.” 이 힘을 가지고 버티는 거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지식적으로 믿는 모든 사상들을 무너뜨려라. 신앙생활은 반드시 “체험적” 이어야 한다. 창세기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 밟아라.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 뱀의 머리를 박살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좌절하며 주저앉고 있는 저주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이걸 해야지, 왜 안 해요? “저는 아직 덜 된 것 같은데요.” 이런 말을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부르면 반드시 된다. 성경은 절대로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체험적인 것을 원하신다. 이것이 예수사랑교회 핵심, 우리의 색깔이다.
마16:16~19,24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고 천국의 열쇠도 주셨다. 그러면 천국의 열쇠를 사용해야 하지 않은가. 곧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 지고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체험신앙이다.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저분한 생각으로 쟁쟁거리고 쫀쫀한 것이 있다면 박살내야 한다.
-바나바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스도가 바울을 만나게 하셨다는 믿음이 있었다. 부활 신앙은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저 바울이라는 사람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라고 허락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보고 사울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가지고 사람을 봐야 한다. 그러면 겁날 것이 없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담임목사를 바라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내가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받았으니 나 또한 우리 목사님을 사랑할 것이다.’ 사람을 보면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 힘이 와야 한다. 이런 힘이 있는 자를 완전한 복음이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메세지를 던졌다. 그래서 유대교 뿐 아니라 모든 종교도 굴복시켰다. 어떤 종교에도 인간의 구원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임할 때 구원은 임하는 것이다.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행4:12
우리는 미래 속에서 오늘을 보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을 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복음운동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한 바울은 용기 있는 사람, 아무도 그를 당할 자가 없었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을 체험했고 구약성경의 맥을 그리스도로 찾았을 뿐 아니라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박살내면 살게 된다. 강한 자를 결박하면 이 세상 승리할 수 있다” 는 인생 살아가는 방법론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절대적 주권을 믿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통일시킬 뿐 아니라,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 항상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세상 끝나는 날까지 언제든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근본문제, 원죄 덩어리에서 해방 받을 수 있다. 우리의 근본 문제를 그리스도로 해결하지 않으면, 저주와 재앙이 늘 찾아들어온다. 저주와 재앙으로 묶여있다는 말은 근심과 염려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꾸 무엇인가 혈과 육의 시달림으로 찾아오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어둠의 영으로부터 온 것을 알기에 사로잡아 밟는 것이다. 그 때 사단의 대가리가 박살남으로 지옥 배경에서 완전 해방 받게 된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회복되고, 그리스도 이름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도전하게 된다.
갈2:20, 자기 육체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이제는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청년 예수 하나님이 계셔서 그 예수님이 내 아내를 바라본다면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는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내 자녀를 대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답이 나올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로잡아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현재를 보고, 오늘의 이 현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 핍박 받는 현장에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바울의 신앙
- 예수를 믿는 자들의 핍박
불신 당하는 바울이 무엇을 보았는가? 바울이 예수님도 믿고, 예수도 증거 하는 예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의 생각이 과거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만난 것이라면 끝난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고 바울을 보면 끝나는데 바울만 보니까 믿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증거하고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무서운 불신앙이 우리 영혼을 장악하고 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헬라 철학과 히브리 종교, 규례와 전통, 율법적 지식, 경건한 행위의 사람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일 뿐 아니라 예수의 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엄청난 핍박을 가한 사람이다. 그런 바울이 자기 내면에 악한 열심, 살인자의 영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단번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그는 증거 하게 되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180도 완전이 달라지고 확 뒤집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안 뒤집어지는가? 뒤집는 건 쉽다. 자신을 죽이고 뒤집으면 염려, 근심, 걱정할 것도 없고 그러면 정신문제, 불치병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영은 다른 곳에 가 있고, 예배 시간에 엉뚱한 것이 생각나는 것, 이것이 영적문제다. 우리 내면에 하나님을 떠나 형성되어 각인된 것들을 사로잡아 꺾어야 하는데 오히려 통로가 되도록 내버려 둔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도 엉뚱한 생각에 잡혀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며 자신 안에 두 법이 싸운다고 했다. 이것을 날마다 그리스도로 쳐서 얼마나 복종 시키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래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지만 육을 가지고 있기에 육으로 강력하게 끌려가는 육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킬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다.
-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핍박
바울은 180도 바뀌었지만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을 향해 배신자라고 하며 그와 적이 되어 죽이려고 했다.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바울을 향해 의심하고 경계하며 그를 피했다.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하지만 바울은 문제 속에 그리스도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다. 유대인들과 예수 믿는 자들이 양쪽에서 공격하며 사방으로 우겨 싸움을 당하는 죽음의 위기에서 바울은 더 큰 은혜 속에 들어간다. 사람 속에 마귀, 사단, 귀신이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내면에 있던 이상한 것들이 나오게 되어있다. 우리 안에 진짜 똬리를 틀고 있는 사단의 성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박살나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원죄 덩어리로 인하여 감정 속에 솟아나는 모든 것이 분노, 살인, 미움이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상태 속에서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방관자가 되고 말로만 하는 지저분한 인생이 된다.
- 바울은 이런 현장 속에서 오히려 자기 체험과 성경을 통하여 창3장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방법론을 찾아 낸 것이다.
창3:15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 대가리를 밟으면 끝난다. 출3:18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바르면, 저주가 넘어간다. 지식이 아닌,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했다. 말로만 그리스도를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리스도가 보이면 진짜 마귀의 일을 멸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도 ‘아이고, 어떻게 하지, 병원 보내야지, 안되나봐.’ 하고 늘 불가능 하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 능력이 시작되었기에 우리 집안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 한 사람만 바꾸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상한 사람을 향해 바꾸라고 한다. 가뜩이나 자신의 인생 문제 하나 해결 못해서 이상해진 사람을 향해서 “쟤 때문에 못살아.” 하며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이고 그것이 마귀다. 그 마귀를 봐야 한다. 이상한 사람은 이미 마귀로 이상해 진 것이다. 그래서 진짜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더 센 영이다. 이상한 사람은 마음이 연약해서 이미 얻어맞아 이상해지고 힘이 없이 무기력에 빠져 있는데 그런 이상한 사람을 향해 “똑바로 해!” 하고 말하니까 그 말을 듣고 더 주저앉는 것이다. “너로 인해 내가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의 은혜가 임했다. 너에게 재창조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신거야. 너 때문에 내가 행복해.” 기뻐하고 감격하는 것이 나은가 “너 같은 쓰레기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하는 것이 나은가. 어떤 것이 마귀 짓 같아 보이는가. 바울의 현장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진짜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막10:45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대속물로 오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마27장, 눅23장)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짊어지심으로 우리 가정, 삶,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이뤄주신 것이다. 이 십자가가 우리 삶에 보여야 한다.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 속에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는 재창조의 능력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 생명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고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시기에 지옥배경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하다면 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힘을 얻지 못한 것이다.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뭔가의 사상에 묶여있다는 것이다. 사상으로 젖게 만든 뱀의 머리통을 깨부숴야 한다. 그 때 원죄 덩어리, 사단에 묶였던 저주의 세력이 떠나간다.
유대인들은 이제 바울을 죽이려 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역시도 얼마나 사람을 죽이는가? 주일 아침에도 사람을 죽이고 온다. “너 교회 안 가면 죽는다.” 이렇게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은 교회에 와 앉아 있는다. ‘오늘따라 목사님이 왜 이렇게 영적인 메시지를 하시지? 그 자식이 들어야 하는데’, ‘아이고, 우리 시어머니가 와야 하는데 오늘따라 왜 빠진거야’ 하며 사람을 얼마나 죽이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면 된다.
요10:10 우리 안에 먼저 들어온 도둑놈이 있다.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고 황폐시키며 끌고 가는 도둑놈. 어떻게 끌고가는가? 거짓말, 살인의 영, 비 진리로 끌고 간다. 그래서 자꾸 우리 입에서 살인의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죽어서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만 오면 자살하려고 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을 죽이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기억해라.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는 죽지도 않고 먼저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끝까지 죽일 꺼다” 사람이 이렇게 무섭다. 절대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냐 천국이냐 이 둘 뿐이다. 죽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은 하늘에서 내어 쫓긴 악한 영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귀신으로 보일 뿐이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간의 영혼 속에 나오는 격한 감정들은 살인의 영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지면 “저 인간이 나를 죽이기로 작정했나봐!” “나는 너 때문에 못 살겠어! 콱 내가 죽어버리던지!”
이런 것이 다 누구의 짓인가? 마귀. 이것만 보이면 된다.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마귀, 우리 안에 있는 마귀가 나가면 인생의 진정한 쉼이 시작된다.
유대교의 사람들이 살인의 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배신했으니 죽여야 한다’ 배신을 죽음의 대상이라고 한다. 자신의 살 길이 무너지고 기득권이 무너질까봐 의리를 가장한 거짓말일 할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오늘의 삶’ 을 다 알고 계시는데 오늘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 속에 나오는 격한 감정들이 있다면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뜨려라. 사람들은 배신을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그 배신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게도 한다. 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굉장한 배신자 아닌가? 하나님을 떠난 배신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3:15을 주셨다. 그렇다면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길, 해방 받는 길, 자유 하는 길 우리가 받은 이 방법을 제시해줘야 한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 이 회복된 사람이다. 많은 교권주의자들도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유일성을 주장하면 굉장히 핍박을 한다. 만약 내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우리도 핍박 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다리 걸치지 말고 쪼개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짐승을 쪼개놓은 그 사이를 갈라 지나가셨듯이 죽으면 죽으리라, 나는 절대로 양다리 걸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내 영혼을 쪼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내 영혼을 태우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두고 우리를 부르셨다
예수사랑교회 모든 제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울을 광주리에 내려달아 살렸다. 바울이 여기서부터 3년 동안 사역을 멈추고 아라비아 사막으로 간다. 갈1:18. 그 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만이 진정한 자유임을 발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끝난다. 참 자유와 안위, 행복과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자녀 된 신분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을 정복하게 되는 것이다. 자녀 된 신분 권세, 그리스도 안에 없으면 자꾸 과거에서 현재를 보기 때문에 불신앙이 파고든다. 과거에서 현재를 보면 안 된다. 미래에서 현재를 보며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를 봐야 한다. 보좌에서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면 천군천사들이 나를 돕는다. 바울이 이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 찾아오는 응답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가이사 황제 앞에 서야 하리라” 곧 열방의 재물들이 세계복음화 하는 예수사랑교회로 들어오며 영생주기로 작정된 열방의 아들들, 남은자, 그루터기들이 예수사랑교회로 모여들게 될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은 고레스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쇠빗장을 꺾어 은밀한 곳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경제를 복음을 위하여 쓰게 하실 것이다.
이 비밀을 소유했다면 이제부터 잡음 내지 말아야 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쟁쟁거리고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살인자가 되는 불신의 벽을 넘는 방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싸움 하는 것뿐이다.
스데반은 영적싸움을 통하여 자신을 무장했더니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의 영혼을 당신의 나라에 의탁하나이다.” 기도로 풀어버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더니 하나님이 사울을 무릎꿇게 하시고 안수하며 메시지를 듣고 세례를 받아 육신적 비늘이 벗겨지게 하는 역사 속에 있었다. 살인자의 영을 가진 사울도 형제로 영접했다.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 첫 번째 사역자로 소개를 했다.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계획을 가진 자는 미래 속에서 오늘을 보는 자다. 재창조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 완전한 복음을 가지고 한 번의 만남을 동역자로 승화시키길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오늘 속에 미래를 보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발견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나를 재창조 하는 완전한 복음을 가지고 만남 속에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동역자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의 사상이 무너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리스도 이름의 절대적 힘을 얻어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리스도 이름의 실천으로 모든 문제와 상황 앞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현장을 바꾸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