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3 주일 1부 말씀
“이 사람은 죽으면 안됩니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놓고 슬퍼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멋있게 살다간 사람이다.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앞에 주어진 오늘의 응답이 될 것이다. 목사의 가슴에 ‘이 사람은 좀 더 살아야 했는데....’ 하고 시체를 놓고 기도 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람이 되도록 문제 앞에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세상과 구별된 성도는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한 자다
목회 여정 속에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유교를 전파하는 도유사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윤리, 도덕적으로 사람들은 잘 가르쳤지만 자신은 암에 걸려 6개월도 못살게 된다는 죽음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를 초청하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정중하게 맞아주고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자신 역시 깨끗이 옷을 입고 우리 내외를 영접했다.
그 때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한구절만 말씀했다. 성경에 어떻게 이런 말씀이 있냐고 했다. 예수 믿고 성도가 되면 죄로 인한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 받게 되며 지옥 권세에서 해방 받고 인생 전체를 실패시키는 사단에게서 완전히 해방 받을 수 있기에 이것을 죽는 날까지 기억하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을 많이 부르라고 했다. 이 분은 굉장히 윤리, 도덕으로 사람들은 잘 가르쳤지만 자신만을 지킬 뿐이었지 삶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몰랐다.
-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누군가하면, 자신은 지금 성공하고 있고 목표를 성취시키고 있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핸들 없는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사람들이다.
세상적인 것으로 목표 달성을 하면 뭐할 것인가? 목표를 달성할수록 심리적으로 위기와 갈등이 찾아오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 진짜 성공한 사람이다. ‘아무리 호화로운 호텔에서 최고의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도 내 인생은 지금 공동묘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구나. 이런 삶의 여정 속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무엇이 나의 영광인가’ 이런 생각이 찾아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없이 무엇인가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교만함 속에 목에 힘만 주고 자신의 것만을 위하여 인생을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떤 분이 크루즈 여행을 3주 동안 갔다 오고 나서 느낀 것이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최고의 음식을 먹어도 죽음의 화살을 피할 길이 없다.’ 고 했다.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시키시고 사단의 세력에서 끄집어내신 예수의 사랑이 우리 영혼에 담겨져 생명 있다면 여제자 다비다와 같이 우리도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성공을 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성공이 아니다.
우리 안에는 욕심쟁이가 장악하고 있기에 ‘성공하면, 목숨만 살아나면 하나님께 내 놓겠다.’ 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없을 때 내놓을 수 있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시작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으로 해방을 받은 자라면 세리장 삭개오가 자신과 환경,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기회를 붙잡았던 것처럼 결단과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예수를 믿고 죄와 저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받은 자를 “거룩한 성도” 라고 한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음에도 왜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 것인지 자신을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사자 굴에 집어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 만들고 믿는 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사회로부터 단절시킬 뿐 아니라 모든 재산을 몰수 하는 등, 여러 가지 환란과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짜 체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생에 문제와 환란, 사건도 없이 성공했다는 것은 굉장히 교만한 것이다. 만약 이런 것이 없이 성공을 했다면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공과 출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서야 한다.
지금 교회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세계 복음화를 한다면 세계 복음화의 편에 서 있어야 하지 않는가. 자신하나 편하고, 근심걱정 없으면 끝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로 구별된 사람은 거룩한 힘을 가진 성도이기에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라는 것 곧 자신과의 영적싸움을 말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아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8:6~7. 자아를 부인하고 세속주의를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애니아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났듯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라면 이제는 과거의 불신자 상태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세상의 영을 받은 자로서의 인생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세계복음화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자들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깨닫게 된다.(고전2:14,16)
죄로 인하여 저주의 늪 속에, 운명에 묶여 있었고 지옥권세로부터 일평생 죽기를 두려워하며 끌려 다녔던 것이 우리의 인생이었다. 늘 두렵고 불안하고 답답하고 조급하며 초조한 여러 가지 삶의 문제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완전히 해방하셨다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요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드러누워 있던 중풍병자에게도 예수님은 똑같이 말씀하셨다. 누워 있던 자리를 걷어버리고 과거로부터 깨끗하게 벗어난 것을 뚜렷하게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과거로 돌아간다. 관세음보살 옷을 입고 있다가 예수의 옷을 입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입혀주신 옷을 벗고 더럽게 돌아다닌다면 이상하게 사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시키는 시작이 일어나야 한다.
*여제자 다비다의 사건을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베드로가 있는 룻다에서 세 시간 떨어진 욥바에 있는 여제자 다비다가 죽었다. 다비다가 죽어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두 사람을 룻다로 보내 베드로를 청하게 된다. 베드로를 찾아가야 할 만큼 그들이 슬퍼했던 이유는 다비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여제자, 너무 귀중한 성도였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변화 받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다비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여제자가 될 만큼 변화의 사람이었다.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고 다비다를 멋있게 묘사했다. 또한 모든 과부들이 그가 지어준 옷들을 흔들면서 슬퍼했다고 했다. 예수를 믿고 자녀들에게 유산을 남긴다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녀에게 물질을 남겨주기 때문에 자녀들이 타락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는 사단의 세력도 꺾으시기에 그리스도 이름을 자녀들에게 심어준다면 자녀들은 절대로 실패하는 인생이 되지 않는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평가를 알 수 있다. 여제자 다비다는 과부들을 위해 수고와 봉사, 선행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죽으면 반드시 평가를 받게 된다. 그 때 ‘주님 잘 데려갔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이 여인이 좀 더 저와 함께 동역했다면 좋았겠지만 이 생명이 떠났다 할지라도 그의 자녀들을 제가 돌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힘을 주옵소서.’ 목회자의 가슴에 이런 것이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비다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찾아와 그에 대해 나누는 평가를 통해 베드로가 처음으로 알게 되고 가슴에 전달된다. 다비다에 대한 평가를 듣고 베드로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되어졌다. 그래서 베드로의 가슴에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싶은 뜨거움이 왔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나사로를 살리시고 죽은 과부의 아들도 살리신 그 예수님의 능력이 내게 있지 않은가, 내가 그 분의 바톤 주자 아니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
- 베드로는 시체를 바라보고 기도 하지 않았다.
시체를 살리려는 동기로 어설프게 기도를 해본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힘이 생겨났다. 시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면서도 뭔가 남아있는 신비주의를 가지고 “살아날찌어다~” 한 번 해보는 식이다. 사실적이지도 않고 어설프게 살아가면서 사실은 기도도 하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영혼 속에 사람을 괴롭히게 만들며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저주의 영아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이런 기도도 한 번 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되겠는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기도 한 번도 없고 환경 앞에서 마귀 짓만 하며 사단의 영향권 속에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나오겠는가. 그런데 베드로는 진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기도했다. 베드로가 오늘날 우리에게 모델이 되었다. 육신적 동기를 가지고 시체를 살려 자신이 인기를 얻으려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시체에 등을 돌리고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영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영적인 힘 속에서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강력한 응답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 사람을 운명에서 변화 받은 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인 힘도 모르면서 장례식장에 가서 관 뚜껑을 열어놓고 “일어날지어다.” 했다가 안되니까 “안되는구만...” 하는 식으로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다. 하나님을 너무도 이상하게 믿는다.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영원함까지 책임져 주시는 만왕의 왕,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같이 우리도 기도하는 마음을 상대방에게 일으킬 수 있는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사의 마음에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제자 아닌가. “베드로님, 이 사람은 너무 빨리 죽은 것입니다. 선행과 구제, 봉사가 너무나 지극했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참된 제자였습니다.” 이런 소리가 교역자의 가슴에 들린 것이다. 그래서 “다비다” 라는 이름이 기억되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 성도를 도와야 한다는 간절한 기도의 마음을 집어넣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비다를 일으킬 때 행동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시체를 돌이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시 돌이켜 시체를 향해 “일어나라” 했다.
순서가 달랐다. 시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육신적인 것, 세속적인 것을 중요시한다. 썩어지고 문드러지고 흙으로 사라질 먼지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까지 주신 하나님, 나를 영원한 지옥 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나를 위해 친히 고난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다. 여제자 다비다도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남김없이 헌신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5~26.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베드로는 알았기에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의 생명이 있다면 이 여인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회복되어 우리의 삶에 매 순간마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끝났으니 나는 하나님의 소원, 세계복음화를 함께 동참할 것이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하지만 영적으로 나에게 명한다. 너는 운명의 변화를 받았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할지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시체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너무 중요하기에 시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몸을 향하는 것이다. 시체를 등진 채 무릎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힘 속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셨다. 성령의 역사로 힘을 얻은 다음 시체를 향하여 돌아서서 죽은 자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다.
-기도를 통하여 응답의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소리내는 것이다.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옵소서.” 그리고 내 자신과 영적싸움 속에 환경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내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단의 세력까지도 완전히 꺾으셨다. 이 확신 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응답의 소리가 우리에게도 들려지게 된다. 그 소리를 내는 것이 삶이며 믿음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어젯밤에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셨다.” 한다.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슨 약속을 하시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하다가 내일도 안되면 수치심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는 식이다.
본문에 나타난 다비다와 같이 교역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생길만큼 우리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하나님의 성도는 거룩하게 구별된 선행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에 단 하루라도 선행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제가 과거 어려운 시절에 최일도 목사와 청량리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라면을 끓여줄 때가 있었다. 그 때 밥 한 끼 못 먹는 사람들에게 밥 퍼주는 운동도 일어나야 한다며 교회마다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그런 것은 나라가 할 일이지 왜 교회가 하냐며 보건복지부에 가서 부탁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사셨기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것 아니냐. 그러면 내게 있는 것을 그냥 주면 될 것 아니냐.’ 그렇게 내게 있는 것을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인데, 하나님 앞에 아주 작은 것 하나를 심었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예수사랑 성도들과 만나게 하셨다.
이 사회에 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이 많은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상급을 주시기 위해 지금 우리를 테스트 하시는 것이다.
필리핀에 갔더니 조금만 걸어도 아이들이 달려든다. 돈 몇 푼을 주는데 인색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것은 우리에게 찾아온 기회다. 세계복음화를 향해 달려가는 예수사랑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 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회며 응답의 시간표다. 침묵하다가 죽으면 자신만 손해다.
-다비다와 같이 행동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운명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도운 여제자 다비다,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를 듣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한 베드로, 그래서 온 욥바 사람들이 이 엄청난 사건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었던 사도행전의 비밀과 같이 성도들은 목사의 가슴 속에 뜨겁고 감동이 될 만큼 기도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사람이 되라.
행동하지 않으면 목자가 우리를 알 수 없고 선행과 구제하지 않으면 목자가 기억할 수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나 예수사랑교회의 공동체를 이루고 세계복음화를 이루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에게 행동이 나올 때 목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되어 기도하고 싶은 생각으로 기억에 남는 자가 될 것이다. 이런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오직 성공만을 위해 살아가다 위기와 답답한 상황 속에 무너질 수 밖에 없던 인생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와 저주,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일으키기 전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듯이 이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로 구별된 성도로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자신과 환경, 사단과의 영적싸움 속에 하나님의 응답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전도자의 가슴에 감동이 된 다비다와 같이 세속주의에 젖어있던 과거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선행과 구제, 하나님의 일 앞에 행동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