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만 열리는 우리 인생의 옥문
행12:1~11
2015.010.25 주일 1부 말씀
우리가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만으로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누린다면 우리 인생의 닫혔던 모든 옥문은 열리게 될 것이다.
행7장 스데반의 죽음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영적 세계의 눈을 열어주었듯이, 본문의 야고보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히브리 유대인들에게 영적세계를 깨우쳐주셨다.
* 신앙생활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 빨리 죽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에 눈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 이 땅에 살아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영적인 눈을 뜨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절대적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신 주인공, 예수님께서 사단을 향해 ‘사람은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육신의 떡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몸부림에서 정말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다면 우리를 장악한 죄의 권세 속에 그대로 묶여 사는 것과 같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죽이고자 했던 사도바울, 유대인 중 유대인 이었던 그가 스데반의 일로 영적인 눈을 뜨고 난 후, 행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고 고백했다.
육신적인 신앙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자꾸 문제만 찾아올 뿐이다. 그래서 늘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비참한 모습으로 쟁쟁거리며 산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뜬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해답을 얻고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세계를 알고 영적 전쟁을 시작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분별하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 한 존재임에도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한 생각들이 찾아올까? 이 생각들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별력이 없으면 생각대로 움직이게 되고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않고 육신세계의 눈만 뜨고 있으면 영적 싸움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육신의 이익만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리스도 그 능력을 허락해주신 것 자체에 감격하고 기뻐하게 된다.
가룟유다는 요13:2, 마귀가 생각을 집어넣어 예수를 팔아넘겼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을 분별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생각대로 행동하다가 비참해 지는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도덕과 윤리적 기준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하나님 자녀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는 것이다(고후10:5).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8:7),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기에(롬8:13)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로 살 때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까지도 살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마음에 틈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역사를 찾아내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27),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잠4:23)말씀하셨다.
틈타고 들어오는 흑암의 세력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차단하고 생각으로부터 오는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면 잠도 편안하게 잘 수 있다. 잠을 잘 못자는 사람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도 잘 쓰지 못하고 남에게 주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내 것을 내 것이라 말하지 않고 나눌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그릇이 된다.
* 영적인 세계를 아는 자가 시대를 이끌어 간다
-안디옥 교회, 기독교의 탄생
처음 초대교회는 유대교 중 하나로 취급했었다.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서 많은 핍박들이 일어나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들이 안디옥까지 가게 되었다. 그 때 흩어진 그들의 체험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력” 이었다.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인생의 능력과 지혜, 보화가 되시며 구원과 새 생명을 주시는 이름’ 이라는 것을 체험하면서 재창조의 능력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챤이 되어졌고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예수당” 이라는 말이 시작되었다. ‘예수 밖에 모르는 사람들,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 그리스도만 고백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라는 것이 나타나면서 안디옥교회에서 “기독교” 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이들에게서 나타났으며 이를 보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다.
-본문에 나타난 전통 유대인들
사도바울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다메섹까지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하는 예수쟁이를 쫓아가 감옥에 넣고 죽이려 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대적이었지만 창3:15, 오시겠다고 하신 메시아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어설프게 들리는 소문만을 듣고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초대교회 성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넣고 전 재산을 몰수 하며 사회로부터 단절시키는 이 일들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전통 유대교에서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하는 자들이 핍박으로 인해 흩어져 도망간다는 소리가 그에게 들렸고 이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 도상까지 따라가게 된다. 그 때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둘러 비추는 큰 빛을 만났고 ‘네가 잡으러 가는 저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고 나를 죽이는 것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의 빛,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려는 헤롯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대제사장
생명 없는 종교, 인간이 만든 종교 인본주의는 항상 정치와 야합을 한다.
야고보는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고 변화산에 함께 올라갔던 특별한 제자였고 사도 요한의 형이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야고보가 칼로 목베임을 당했는데 그를 죽인 사람이 유대인 헤롯이다. 헤롯의 가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인 가문이다. 가문의 영적 상태가 이렇게 무시무시하다. 이 가문은 ‘예수’만 나오면 악마의 존재가 꿈틀거렸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박해를 가했고, 초대교회 전체에 대한 말살 정책도 이 가문에서 시작된 일이다. 같은 유대인임에도 자신의 민족을 핍박하는 현장이 나타난다. 이들의 초대교회 말살정책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 때문이다. 그 이름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서도 다른 쪽으로 핑계를 대고 있다. 우리 집안에서도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면서도 다른 것으로 핑계대고 변명을 하는 것이 분명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세계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 때문에 그들을 죽여 놓고 정치적인 죄목을 씌워 죽였다.
역사 속에 정신병자로 남겨진 네로황제가 있다. 그는 어느날 성 위에서 지저분한 로마를 보고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도시에 불을 질렀다. 황제가 미쳤다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자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방화를 뒤집어 씌웠다. 이것이 역사의 사실이다. 인간의 세계 속에 그리스도 그 이름을 너무도 싫어하는 영적이 세계가 있다. 역사는 미치광이에 의해서 붉게 물어진다는 말이 있다. 도미치아누스, 히틀러, 스탈린... 등 전쟁만 일삼는 미치광이들이 역사를 지금까지 더럽혀왔다. 그런데 사실 그들 내면에는 딱 하나가 있다.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도 못하게 하며 그것을 떠들고 다니는 자들을 다른 것으로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하는 원수덩어리가 있다. 이런 것이 있음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꾸만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핍박이 강해진다,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이런 소리는 하면서 자기 자신은 영적인 세계로 무장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헤롯이 사람을 죽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사람을 죽인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로마에 자신의 정치적 충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나타낸다. 로마 의회에서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히브리인으로 인해 시끄럽다는 말들이 나오니까 해결방법으로 시끄럽게 하는 몇 사람을 옥에 넣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롯이 사람을 죽이려는 계략을 짜고 유대인,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대제사장들과 야합을 한다. 그리고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이니까 그 사건 속에 그들은 기쁨을 느꼈다. 사람을 살리고 존중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사람의 죽음을 기뻐했고 그 사건을 보고 굉장히 만족했다. 기독교가 살아 역사한다면 자신들의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되며 자신들은 무능한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는 사건 속에 그들은 기뻐하고 만족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지금 이런 상황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고 하면 여기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고 온갖 짓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사람을 죽이고 베드로까지 죽이려는 상황에 유월절이 껴있었다. 유월절은 죽은 사람도 살려줘야 하는 날이기에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 것이다.
야고보와 베드로-하나님은 왜 야고보는 죽이고 베드로는 살리셨는가?
-야고보
마20:17~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자 야고보의 어머니가 이 말씀을 육신적으로 깨닫고 요한은 주의 우편에 야고보는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고 말한다. 이것이 야고보에게 들어간 뿌리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먼저 영적인 세계를 체험해야 한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열렸는가,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저주와 지옥권세, 사망의 권세가 해결되었는가, 나는 참으로 영적인 세계를 알고 내 자신의 생각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사단의 일을 멸하고 있는가?’ 이것을 모른다면 야고보처럼 순교는 했으나 죽임을 당하는 인생이 된다. 영적인 세계를 모르면 하나님께서는 살려둘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깨달은 사람만이 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다. 하나님은 야고보가 죽을 때 내버려두셨지만 베드로는 죽기 직전 천사를 동원해서 그를 석방시키셨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영적인 세계로 갈 것인가, 육의 세계로 갈 것인가? 롬7:21~25, 사도바울도 자신 안에 육신으로는 이 세상의 법을 따라가고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지만 롬8:1~2, 그는 자신 안에 예수그리스도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실천되어야 살아가야 할 의미가 있는 것이며 영적싸움이 안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안 된다.
-베드로
요21장,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 하셨더니 베드로가 즉각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 요한, 예수님을 배신한 적도 없고 끝까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던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무슨 상관이냐” 말씀하셨다. 곧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주 되시며 모든 섭리, 일 계획 속에 이 세상에 주도권을 잡고 행진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직접 베드로 자신에게 말 한 것이니 다른 누구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자꾸 누군가를 바라보지 마라. ‘하나님 나는 이렇고 저 사람은 왜 이렇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그 이름의 능력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 체험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체험도 없이 교회만 다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베드로도 감옥에서 나왔지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게 된다.
* 인생에 찾아온 고난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살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것이라고 소리쳐도 예수님은 내려오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이다.
- 우리에게 찾아오는 핍박과 고난을 신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 환난, 핍박, 문제, 이런 모든 것들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왜 이런 일들이 찾아오는 것일까?’ 문제 앞에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한 번만 생각하고 느껴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핍박, 환난, 어려움의 문제 앞에 베드로와 같이 평안한가? 하나님을 체험한 베드로는 양쪽에 쇠고랑을 차고 묶여있음에도 그는 자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런 상황이 온다면 밤새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시며 옆구리가 찔려 물까지 쏟으신 이유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다. 그 예수님이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첫 번째 부활하신 그 몸으로 “평안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를 받으라.” 말씀하셨다. 이것을 믿고 받는 것을 영접이라고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그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받은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재창조의 능력을 받아놓고도 우리에게는 왜 평안이 없는가? 그 이름이 얼마나 우리를 위대하게 살려내는지 체험하라는 것이다.
요14:15~17,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이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성령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그 영이 지금도 우리 안에 탄식하며 근심하고 우리를 향해 안타까워하신다. 롬8:26 그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슬픔과 좌절, 낙심, 절망으로 빠져들어 불안하게 하는 저주의 영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이렇게 선포해라.
본문은 행1:8의 말씀이 드디어 베드로에게 성취된 사건이다.
육신적인 응답 이전에 내 안에 평안이 임해야 한다. 우리는 작은 문제 앞에서도 평안이 없어진다. 사단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가? 사람의 말로 유혹을 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다. 사단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의 말이 들리는 것이다. 사단이 사람의 말을 통해 베드로에게 죽는다고 하는데도,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두 군사 사이에서 편안히 잠을 잤다.
- 베드로가 평안히 잠을 자고 있었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는 제자들이 있었다.
야고보가 끌려갔을 때 교회가 기도했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지만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기도했다. 베드로는 제자를 세울 때 제자와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답이다. 교회가 있는 목사, 교회를 세워가는 제자, 이 제자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드디어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더니 베드로는 평안히 잠을 자고도 옥에서 나왔다. 내가 섬기는 교회 안에 뿌리를 못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가 기도 해줄 수 있도록 교회에 몸을 담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기도했더니 베드로는 코를 골만큼 잠을 자고 천군천사가 파송되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사람을 이용해서 먹고 살지 않았던 야고보, 베드로와 같은 교회 정신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인생에 찾아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고통과 번민을 겪게 된다. 교회라는 이 엄청난 축복을 피하려고 하지 마라. 교회는 바로 십자가 위에 세워놓은 하나님의 터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기 원하며 교회를 살리겠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담겨지게 된다면 참된 평안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시작될 것이다.
- 선을 행하는 고난 앞에 우리의 자세
벧전2:19~21 고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억울하고 애매한 고난이 왔을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고,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겨우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을 행하여 고난이 찾아왔다면 진정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베드로가 깨달은 진리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확실한 믿음 밖에 드릴 것이 없기에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 이름으로 순교적 결단만이 필요할 뿐이다.
본문에 나타난 사건에 하나님은 인간적인 말씀을 하나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육신적인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생각했다. 나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채찍을 맞으시고 손발에 못이 박히신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선택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어떻게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가는 십자가 보혈의 능력만이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새롭게 치유시킨다는 것을 믿었다.
자신의 생각을 분별할 줄 아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라.
내게 주신 그리스도 인하여 참 평안을 얻고 그 이름 하나로 기도 속에 내 삶이 시작된다면 나를 묶고 있는 옥문들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열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영적인 세계 속에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제부터 내 마음과 생각에 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소리들, 사람의 말들을 사로잡아 복종시켜라. 과학적, 철학적, 세상적 이론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 불신앙, 그리스도 보다 높아진 모든 생각들을 사로잡아 복종시킨다면 베드로와 같은 참된 평안이 우리 영혼 속에 시작될 것이며 교회는 이런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예수사랑교회는 언제나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의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기에 아무 걱정 말고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시작되길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영적인 세계를 몰라 분별력도 없이 생각대로 살며 육신적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울부짖었던 신앙생활 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세상의 환란과 핍박, 어려움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약속하신 성령,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안함을 얻도록 성령 충만을 주셔서 인생의 옥문이 기도로만 열려짐을 체험하게 하시고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기도했듯이 한 시대 교회에서 흐르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뚜렷한 교회관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