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 행하사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다 (믿음을 굳게 하여 믿음 안에 붙어 있으라)
행14:19~28
2016.01.17 1부 말씀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데려가기를 원하셔서 그 길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셨기에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환난과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느끼셨던 고난에 동참하고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된다면 은혜 속에 있게 될 것이다.
* 창3:15이 개인의 절대적 목표가 되어 믿음에 굳게 붙어 있으라
바울은 마28:20,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감람산 언약을 붙잡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자 삼는 여정 속에 수많은 일들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인생 끝 날까지 동행할 것이기에 어떤 걱정도 하지 말고 외부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고난, 가난의 문제들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 보좌에도, 우리 안의 보좌에서도 성령은 함께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굳게 하고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 잘 살아보고 싶은 사람, 자녀문제가 심각한 사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성도 안에, 교역자 안에서도 전도제자는 많지 않다. 현장에 전도제자들을 향한 바울의 가슴에서 전달되는 특별한 메시지가 본문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붙어 있으라는 것이다.
현장에서 전도를 하며 만난 타 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들은 뭔가 열심을 내고 전도를 하고 싶어 하는데 가정이 굉장히 어려웠고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가정은 가정대로 이상하고 많은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굉장한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복음편지가 바로 이런 전도제자들을 향한 메시지이다. 충성된 자들에게 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인지, 충성된 자들이 왜 광야에 서서 길을 묻고 있는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서 왜 방황하는지... 복음편지 안에 답이 잘 되어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소외되고 외로움을 느낀 나머지 항상 이 곳 저 곳을 찾아 다니는 영적인 문제가 와 있었다. 시험, 갈등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않을 만큼 깊은 상처로 얼룩져있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수많은 이단 종교에까지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육신적이다. 영적인 눈이 떠진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신적에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 가정문제, 경제문제 속에 소외되고 외로운 영적문제가 이 사람을 장악한 것이다. 그래서 영적 사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육신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채워 준다는 말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전부 약탈당하고 포로로 잡히고 노예근성, 거지근성으로 다 묶여버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한 가지 이다.
창3장 문제로 인하여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에덴동산에서는 마음대로 살았지만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창3:15이 절대적으로 개인의 목표가 되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뱀의 머리를 박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깊은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요8:44, 마귀의 말을 듣고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요8:44는 영적인 세계를 가리고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게 한 채, 죄의 권세로 죄책감과 비교의식, 노예근성 이런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우리를 평생 끌고 간다. 여기에서 참된 해방을 받고 생명의 말씀에 흐름을 탄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적 응답을 허락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언약 속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셨다.
우리가 주위에 있는 강한 사람으로 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 이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목표를 가졌다는 것이다. 창3:15에는 생명의 말씀이 있고 기도의 비밀이 있으며 그 말씀을 가지고 밟는 자는 반드시 증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창3:15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은 사람만이 뱀의 머리를 밟을 수 있다. 상대방이 순간 우리의 목덜미를 물것처럼 두렵게 할지라도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밟으면 증거가 온다.
나는 아무 배경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많았고 지구상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까지 데리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는 권력과 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중요한 목표 속에 들어가면 된다는 것이다. 창3:15이 우리의 사명이 되고 소명이 되면 복음은 회복된다. 반드시 우리 개인에게 복음이 회복되어야 이 세상을 도전할 수 있다.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을 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주신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문제나 사건 앞에서도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지금 어디냐, 그만 자라 이런 말 하지 말고 눈만 부딪치면 “예수는 그리스도” 해줘라.
창3:15, 마16:16, 행1:8의 이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마가다락방에 모여 그들은 오로지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과 사단과 자신과 영적싸움을 통하여 세계를 복음화 시켰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이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를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 이름이 우리 안에 있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작품으로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죽는 순간 성화되어 하나님 예수님의 손을 잡고 가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되기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붙어있으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가는 천국 백성들의 믿음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해야 한다. 문제가 있어도, 기적이 일어나도 괜찮고 섬김을 받다가 다시 모함을 당해도 괜찮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게 했더니 걷게 한 여자가 뒤통수를 쳐도 괜찮고 전도를 받았는데 전도한 사람이 돈을 내놓으라고 해도 괜찮다. 사람, 환경, 사단의 문제를 알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날까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자녀 된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지렁이 보다 못한 우리를 부르시고 핏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이제 우리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늘 뿐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몸부림치며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머무르는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어둠의 세력이 온갖 미신과 점술, 무속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모든 것을 가졌으나 가문의 저주를 막을 길 없어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며 온갖 종교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는 생명들이 우리가 사는 지역에 가득함에도 그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자기 손가락에 티 하나 박혀 몸부림 치고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 가는 날까지 전도제자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지혜와 은혜가 오기 시작한다.
*근본문제 회복 없이 영적문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본문에,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었던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온 성에 소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여기며 그들을 데려다가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개인의 유익만 있다면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세상적, 육신적인 이방인들의 세계관과 종교관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장이며 주위의 문제들이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기 위해 안디옥에서부터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따라온 자들이 있었다.
인간 내면을 장악한 살인의 영, 악한 것. 이것이 인간의 심리다. 사단은 이렇게 우리를 다양한 체질로 길들여놓았다.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죽이는데 각 지역에서 눈이 맞아 왔다. 그리고 마을로 찾아와서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간했다. 요8:44의 영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 분명한 증거를 보고 제사까지 하려던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돌변한다. 증거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근본문제가 해결되어야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주기 때문에 짧은 증거들을 가지고 교회 붙어있게 했다가 교회가 어수선해지고 기복주의로 흘러가게 만들고 좀 더 수준을 높여보려다가 로고스만 실컷 말해서 성도들의 귀만 커지게 만들어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만들었다.
근본문제 회복 없이 영적 상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창3장의 원죄, 창6장의 네피림, 창11장의 세상 바벨탑. 사람들은 이것으로 박수가 되고 점술인이 되고 미신과 우상에 묶인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요8:44의 불신자 상태로 다 충만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적, 세상적인 것 앞에서 사람들은 순식간에 돌아버린다. 분별력과 판단력이 없이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 예수님 때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 달려있다가 진짜 내려오면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과 같이, 바울과 바나바가 신이라면 자신들이 돌로 쳐 죽여도 그 돌이 다시 날아와 우리가 맞을 거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끊임없는 잔머리가 돌아간다. 우리를 멸망시키는 육신의 생각,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가 끊임없이 입과 생각을 통해 온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칭하는 유대인을 향해 예수님은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살인자, 그 악마가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사망의 몸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요셉도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에 소망을 두고 영적싸움을 통하여 승리한 것이지 다른 구제와 선행으로 열심을 내어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창3:15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충만해야 살 수 있다.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우리 깊은 내면에 원죄라는 놈은 체질과 육신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날마다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면 옛사람은 지나가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고 지옥배경으로 지옥까지 끌려갈 수밖에 없던 나를 십자가 수고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로 의로운 백성으로 만드시고 영적싸움을 통해 날마다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날마다 사고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헛소리만 하고 돌아다니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본문에 나타난 유대인이다.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왔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돌로 쳐 죽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합리화 시키는 것이다.
신앙인의 모순에 대해 약1:15 말씀했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두 법이 싸운다. 그래서 창3:15이 우리 개인에게 절대적 목표가 되지 않고 영적싸움을 하지 않아 결국 기독교인들이 이 신앙적 모순에 다 걸려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듯이 한 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커지고 마귀로 틈을 주면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즉시로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결박해라. 육신의 생각이 점점 잘 결국은 예수를 팔았다. 창3:15 마16:16 행1:8 성령충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끊임없는 육신의 생각으로 세상 풍속을 좇아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니게 하는 사단의 음성을 사로잡아 박살 낼 때 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악한 자로 변질된다. 과거의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고도 또 다메섹까지 갔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근본문제 회복 없이는 절대 안 된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일 때 ‘이 더러운 놈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돌에 맞을 때 그 고통 속에 스데반을 죽인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했던 일을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언약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구나.’ 이것을 생각하며 그 고통 속에서 환희, 은혜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창3:15의 멍에, 생명의 언약, 절대적 목표 이것을 매고 따라가면 겁날 것이 없다.
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바울을 성 밖에 내버리는 죄를 거듭 짓고 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렸는데 살아난 것이다. 우리가 모든 문제 끝났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짝 죽은 것처럼 해놓으시지만 다시 살게 하신다. 그래서 부부싸움하면 영적싸움 하면서 사흘만 죽어 있으면 다 회복된다. 자녀들의 문제도 사흘만 죽어있으면 해결된다. 돈이 없다고 쟁쟁거리지 말고 사흘만 금식해봐라.
*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비밀을 누려 날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자
하나님은 왜 바울의 고통을 내버려 두셨는가?
이제는 우리의 고난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직접 동참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그 은혜의 모습을 보시고 싶은 것이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잘 살기 위해, 평안해지기 위해,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
나 역시도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구했는지 모른다.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능력과 은사를 구했다. 데니스 굿델 목사님을 모시면서 예언기도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런데 그런 기도를 받으면 소망이 생기고 은혜가 와야 하는데 나는 왜 저런 능력이 없는 것일까 하며 시기와 비교의식 뿐이었다. 바울처럼 고통 받는 것이 싫어 ‘예수 이름으로 고통당하지 말지어다. 고통이 오면 죽어 버릴거야.’ 하는 식이었고 오직 예수를 믿으면 소원성취, 만사형통 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제되어있다.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믿음을 굳게 하고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행14:23, 그리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 창3:15, 마16:16, 행1:8을 고백하고 세상과 사단과 싸우는 영적싸움 하는 그들을 바울이 주께 의탁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힘과 능력, 위로와 축복을 주시며 강력한 성령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영적싸움 하는 그들을 주께 의탁했다.
행14:26~27, 그 은혜의 사역 속에서 안디옥 교회를 부탁했더니 이미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와 응답이 쏟아져 있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도 겪어야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그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 문제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이뤄져야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마12:28~32,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우리 속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든 저주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어 쫓아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된다고 말씀했고, 요3:5,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인 것을 아시고 우리를 그 나라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비밀을 날마다 알게 하시고 잊지 않게 하시려고 고난 중에 하나님과 함께 동참하는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나도 과거에 먹을 것이 없을 만큼 너무도 큰 경제적인 고통을 당한 적이 있었다. 외부로부터 고통이 오니까 정신적 고통 속에 수많은 갈등, 시험, 소외됨이 있었고 그 가운데 견딜 수 없는 몸부림으로 육체적 고통도 같이 왔었다. 나는 이런 환난을 그리스도 예수로 통과했다. 모든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하나씩 넘기 시작했더니 근심, 불안, 절망, 거짓말, 사기성, 비열한 것, 이간질과 헛소리 속에 사람과의 관계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 이런 내 안의 수많은 문제들이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영적싸움의 비밀이다. 이것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작품이 된다.
행14:23과 같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부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언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탁하고 위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누림도 평안도 안식도 없다.
행14:26, 하나님의 은혜로 부탁한 곳이 그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되고 수많은 응답을 받아 성도들과 함께 더불어 먹으며 평안히 안식했다고 기록했다. 딤후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여러 가지 핍박도 받게 된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영적싸움 속에 진실하게 산다면 어느 날 핍박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영혼 속에 넘치게 될 것이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3장으로 인해 마귀에게 이끌려 육신의 생각대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던 인생에서 창세기3장 15절이 목표가 되어 인생 해방 받는 생명의 말씀에 흐름을 탄 절대적 응답자로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언약을 잡은 자에게 찾아오는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비밀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믿음을 굳게 하여 믿음 안에 붙어있어 영적전쟁의 비밀 속에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내 인생 모든 것을 하나님께 위탁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