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으로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
행16:19~25
2016.04.03 1부 말씀
사람들이 만든 복음송을 들었을 때, 한마디로 표현하면 ‘신세타령’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환상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기도해도 진정한 기도의 응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상태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온 글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를 놓치면 사람은 비참해진다. 누가 내 사정을 알아주고 신세타령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 복음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다
성경 마지막 장인 계22장,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다 살고 난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져 있다고 말씀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 속에 항상 기쁨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슬픈 사람처럼 하고 있다. 고상 떨지 말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라.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합리주의, 인본주의로 살아가게 만드는 사단의 머리부터 밟아라. 새 하늘과 새 땅, 그 하나님의 비밀을 성경 문자적으로만 믿어도 그 환상 속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진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첫 번째로 주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다 끝난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것이 천명이다. 우리가 이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합리주의, 인본주의, 잔머리로 인생을 살 뿐이다. 이런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며 세상적인 것에서 얼마나 자신을 방어하느냐에 따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된다. 우리는 세상적인 적의 공격을 받고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바울과 실라가 세상적인 적의 공격을 뒤집어써도 고요히 있었을 때, 그 깊은 밤 하나님의 비밀을 체험하게 되었다. 세상은 아무 이유 없이 바울과 실라를 잡아 묻지도 않고 그들을 때리고 옷을 찢어버리고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 대성통곡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발견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김 목사, 내가 김 목사 메시지를 듣고 그리스도를 전달했더니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를 알아듣고 나보고 개척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어떤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말을 해서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문제가 올 때마다 흥분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면 성도는 반드시 목사를 죽이려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얼굴을 보이던지, 어떤 삶을 살던지 간에 그들을 이길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오지 않았다면 절대로 개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육체가 병들고 정신문제가 찾아오고 영적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오래 다니고 늘 죄를 범하면서 죄 속에 빠져서 사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을 이용해서 먹고 살고 중직자는 주도권 싸움으로 온갖 파를 만들어내고 성도들은 육신적 응답 하나를 받으려고 심취해 있다가 뭔가 답답하고 안되면 사람을 죽이던지 씹던지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도 미워할 이유가 없다.
누가 우리를 건드려도 미워하지 말고 원망, 낙심도 말고 씹지도 마라. 우리는 좌절하는 존재가 아니다.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찬송하면 된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모든 문제가 다 끝났고 만왕의 왕, 재림의 주, 영광의 왕이 함께 하시기에 인본주의를 쓸 필요도 없다.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소리를 치고 오두방정을 떠는 것은 심각한 영적문제다. 자신을 방어하는 그 힘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래서 창3:15이 각인되고 뿌리내려지고 체질화되면 역사는 일어난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 인, 성령이 인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경 전체의 흐름이 그 개인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어느 때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자신의 흐름이 되고, 이유 없이 얻어맞은 바울의 역사가 자신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영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배신도 하는 베드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은 성령 충만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창3장으로 시작된 불신앙, 날마다 자신이게 찾아오는 적의 공격은 혼돈과 공허, 흑암 밖에 없다. 그래서 사단에게 각인되었던 것을 얼마나 뽑아버리느냐에 따라 24시와 25시 영원한 것을 향해 가게 되는 것이다. 흑암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탓할 것이 없다. 자신으로 인하여 생긴 문제들 앞에 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 찬송해라.
바울이 자신을 괴롭히는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그 생명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귀신아 떠나갈지어다!” 한 번 소리쳤는데, 복음의 능력을 한 번 전달했을 뿐인데 잡혀서 얻어 맞게 되었다. 그 때 바울은 스데반을 생각했을 것이다. 함부로 소리 지르면 얻어맞아 죽을 수도 있으며, 귀신들린 사람들처럼 믿고 떠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적의 공격이 밀려와도 자신을 방어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라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다락방을 어설프게 깨닫게 돌아다니면 더 맞아 죽는 것이다. 먼저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마24:14, 새 하늘과 새 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이 천국 복음은 반드시 모든 민족에게 전달되어져야 끝이 온다고 말씀하셨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하나에 답을 내지도 않고 자신의 강퍅하고 얄팍한 육신적 동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 하나로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것을 꺾지도 않고 돌아다닌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늘 범죄 속에 있으면서 이상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갑니다. 주여~’ 하는 수준으로 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복음은 바로 ‘창3:15로 시작하면 반드시 열린다’ 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 속에 창3장으로 각인된 요8:44를 꺾으면 살게 된다고 말씀했다. 복음을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안 되면 우리 안의 창3장의 저주, 원죄의 벽에서 탈출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씨로 잉태되어 아무리 구원을 받아도 원죄는 그래도 남아있다. 그래서 자꾸 자범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3:15을 주셨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인 모든 어둠의 세력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버려라. 누가 우리를 괴롭히고 모함하고 죽인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지키는 방어 능력을 가지면 하나님의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래서 이 복음이 위대한 것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천명으로 가진 자는 그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 능력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고전1:21, 전도에 미련한 곳에 하나님의 지혜를 숨겨놓으셨고 고전1:24, 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바로 그리스도 라고 말씀하셨다. 눈만 뜨면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늘 범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이 육체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 이름으로 인해 이제 원죄와 자범죄, 조상죄까지 다 끝났기에 우리는 이제 롬8:1~2, 그리스도 그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죄와 사망의 법과 싸우면 된다. 자신 안에서 끊임없이 쟁쟁거리고 솟아나는 것을 이렇게 밟는 사람에게는 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 숨고 싶고 신경질이 난다. 특히 교역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래서 목사들이 고민이 많은 것처럼 늘 인상을 쓰니까 중직자들도 같은 영이라 인상을 쓰고 또 해결해주지도 못하면서 ‘목사님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온갖 정보는 다 알게 되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이 이 비밀을 실감하고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 사람들에게 반드시 넣어줘야 한다는 것,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믿음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복음은 바로 ‘창3:15로 시작하면 반드시 열린다’ 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지 않았던 아담 하와 가정은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 예수사랑교회 안에도 이 언약을 붙잡고 실천하는 사람이 있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 결과는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롬1:16~27, 창3:15, 마16:16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에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기에 오직 의인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 대결을 해야 살아난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 영적싸움을 매일 해야 되나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죽으면 안 해도 되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반드시 해야 한다. 자신과 영적싸움을 한 노아 부인은 기록에도 없다. 창3:15을 제대로 적용하면 기록에 남을 필요가 없다. 출3:18, 문설주와 인방에 예수피를 발라라. 그래야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다. 그 이름, 사7:14, 창조주 하나님, 아빠를 불러라. 그리스도 그 이름은 임마누엘,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16:16, 하나님을 기쁘게 했던 그 고백,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고백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가진 사람들을 감람산에 부르신다. 오늘날 감람산이 어디인가? 바로 예수사랑교회 강단이다. 감람산의 언약,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렇게 해야 우리가 덫에 걸리지 않는다. 여기에서 마가다락방의 교회가 탄생했다. 감람산의 언약을 받은 자들은 마가다락방에서 오로지 영적싸움을 했다. 그 때부터 오순절 날이 임한 것이다.
인생의 깊은 밤이 찾아왔다면 찬송이 나와야 한다.
적으로부터의 공격에 싸우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창3:15로 숨을 쉬면 성령의 바람, 예수님의 숨결을 느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잉태된다. 이것을 사명, 소명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삶에서 당연한 응답과 역사가 나타난다. 그래서 나의 괴로움의 숨결이 바로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불러주는 찬송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도록 그 이름을 주셨다. 그래서 진리 되신 그리스도로 얼마나 영적전쟁을 잘 하느냐에 따라 반드시 결과는 나타난다.
바울과 실라는 깊은 밤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로 영적싸움, 찬송을 했다. 그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단번에 재물로 드려지심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천명이 들리며 영적싸움을 한 것이다. 인생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면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노래해라. 그 노래 속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괜찮다.’ 이렇게 자신을 구원하는 믿음이 잉태되어야 한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에 대한 것이 숨결로 잉태되어야 한다.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저주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어떤 위험과 적신과 칼과 환란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것이다!’ 이 힘이 날마다 우리에게 잉태되어야 한다. 그래서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숨을 쉬어라. 밟아라. 그러면 언제나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를 받으라.”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성전 삼으셨기에 그 이름을 소유한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라. 낙심과 환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의 영혼을 격동케 하는 저주의 영은 산산이 무너지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종교는 신비한 곳으로 돌아다니려고 하고 자신 하나 인정 해달라고, 알아달라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맛 본 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한 만큼 알아주지 않아도 30, 60, 100배의 축복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자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를 만큼 해도 시험 들지도 않고 ‘목사님은 왜 나하고 밥 한 번도 안 먹어줄까?’ 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도 이런 사람이 있다. 교회는 요8:44의 집합 장소이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훈련을 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구나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존재, 언제 흑암으로 덮일지 모르는 존재이다. 이것을 무너뜨리는 이름, 우리가 하나로 통일되는 유일한 이름이 “그리스도” 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 삶에 적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적용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가 은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엇을 지적당해도 하나도 어색해 하지 않는 것, 시험 들지 않는 것, 그것을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만남은 영원한 것이다. 딤전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며 진리를 알고 있는 자로서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해야 한다. 그래야 낭만적인 사람이 된다.
*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 앞에서 바울과 실라는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했다
본문은 바울과 실라가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며 고통을 받게 된 사건이다.
빌립보 교회가 탄생되고 세워지면서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듯, 예수사랑교회도 그냥 세워진 교회가 아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란, 낙심할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사랑 교회당을 허락해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부당한 일을 당하고 불합리적인 사건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누가 우리의 옷을 찢고 매로 치며 옥에 가두고 차꼬에 차서 고통을 준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 그 이름 속에 찬미하는 자가 되라.
바울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자,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떠들기만 하는 여자에게 귀신을 내어 쫓아 준 것 밖에 없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돌아버린 사건이다.
이상한 여자가 온전해졌다면 박수를 칠 일인데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예수사랑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처음에 올 때는 온전한 것을 본 적이 없이 하나같이 귀신들린 상태로 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온전해져서 기도도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 메시지도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어진다.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이 대우도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이다. 교회를 오면 누구나 온전해 지지만 그 이후 개인에게 그리스도를 적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결과가 반드시 역사로 남는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빌3:18 “십자가의 원수” 딤전4:2 “양심이 화인 맞은 자” 가 되어 세상으로 돌아갔으며, 교회를 왔다가 열매 없는 가을 나무, 거친 거품만 내는 파도와 같은 짓만 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말씀한다. 이 말씀에 찔림이 온다면 회개하고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사람 하나가 미치든, 죽든 상관하지 않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오직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과 이익만을 추구하며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사람이 물질과 이기심에 취하면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로지 돈만 보이고 자기 기준에 따라 기분만 나쁘고 혼란스러워진다. 오로지 돈만 보이고 돈만 생각하다가 어느 날 완악해지고 강퍅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발광한다. 적의 공격을 받아서 발광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이 멀고 생각이 멀어진다. 바울과 실라 때문에 자신들의 수익을 잃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슬퍼한다.
행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는 자기 나라를 빼앗긴 지역이다. 식민지로 있는 이런 처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로마인이라고 우쭐거리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문화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거짓말을 한다. 교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꾸 이렇게 핑계만 댄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행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군중 심리를 발동시켜 합리화의 옷을 입고 우리를 속이는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꾼, 이간하고 헐뜯고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 교회 탄생의 과정이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죽여야 한다고 끌어다가 옷을 벗기고 옥에 갖다 쳐 넣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건에도 변명하지 마라. 바울과 실리가 이런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이 로마 시민권자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었음에도 수많은 매를 맞고 그 고통 속에서도 깊은 밤에 깨어나 그리스도를 노래했다. 감옥 안에서 깊은 밤 찬양을 했을 때, 은혜와 성령이 그 감옥 안에 충만해졌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원죄에 묶여 합리주의, 인본주의적 생각 속에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으로 살아가며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이제 구원을 받아 육신의 생각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인생에 찾아온 어둠과 핍박 앞에서도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구원의 감격과 감사로 바꿨던 바울과 실라와 같이 어떠한 적의 공격과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도 내 안의 불신앙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를 고요히 부르는 가운데 자신을 지키는 믿음을 회복하여 그리스도 그 이름을 찬미하며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