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옥문을 여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계신다
행16:26~40
2016.04.10 1부 말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조건 없이 구원을 받아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롬1:17).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오직 이 한길을 선택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통하여 시작된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의 고백이다.
*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해방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르는 영적 자유인이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도 이상한 사이비 종교로 빠져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난하고 고난 받아야 하는 종교라고 착각한다. 우리에게 가난과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 것이지 뭔가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온 것이 아니다. 또한 부자가 되고 고난이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과 계획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철학자와 글을 쓰는 인문학자들이 기독교를 굉장히 가난한 자들로 묘사해버렸다. 그리고 고난을 받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다 막아버렸다. 하지만 기독교는 절대 가난과 고난의 종교가 아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넘치는 생명이다.
가난한 자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 들어가 세계 복음화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면 하나님은 재물 얻을 능을 주셨고 고난 받는 자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이면계약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온 몸이 성하게 되는 증거를 주셨다. 요19:30,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고통과 가난을 친히 담당하셨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도 없는 말구유에 태어나신 이유는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려고 우리의 가난을 몸소 담당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도 않아 망했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보고 가난을 합리화하고 교회를 이상하게 보면 안 된다.
성경은 너무나 수많은 사람들이 부자로 살았다는 증거가 명백히 나타난다. 지금 자신이 가난하다면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난 것을 가지고 위로 받지 말고 이것을 이루신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나길 축복한다. 우리가 가난하던 고통을 받던 부자이던 몸이 아프지 않던 어떤 문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인 참된 자유인이 되었다면 참 해방을 받은 자로서 어느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고 이제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 무엇이든 응답 받는 자가 되었다면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면 계약을 맺어라. ‘나는 세계복음화 하는 그 날까지 모든 사람들의 보호자, 전도자와 함께하는 동역자, 온교회의 식주인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증인들의 고백이었다. 그들은 재무 담당을 둘 만큼 부자가 되었고 로마의 권력을 무릎 꿇게 할 만큼 경제력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헌신했다.
그런데 우리가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몸부림치는 노가다 스타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참 자유와 해방감도 없이 인생 살아가는 날 동안 짜증과 신경질만 늘어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자유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하나님과 이면계약을 맺을 때,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생명 속에 임하게 된다. 배경이 없을수록 좋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배경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이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시기에 힘이 없어도 이기게 된다. 우리가 요8:44에서 빠져나왔다면 거짓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해야 한다.
* 사도행전 16장의 만남을 통해 나타난 진정한 하나님 계획과 참된 기적의 의미
사도바울은 빌립보 지역에서 세 번의 중요한 만남 속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첫 번째로 만난 루디아는 성령의 이끌림 속에서 하나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놓으신 자와의 만남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마음을 여신자로서 예수사랑교회에 앉게 되었다면 오늘부터 보호자, 동역자, 식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 와서 흠이나 잡으려고 하고 원망, 불평, 쟁쟁거림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사람은 너무 안타까운 사람이다. 사람들의 소리에 바람을 맞으면 우리 영혼에서는 폭풍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의 소리를 듣고 고멜을 이해하지 못한 호세아로 인하여 고멜은 집을 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돌아온다. 사람의 소리를 듣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우리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 힘이 들고, 어느 날 육체의 질병 속에 정신적 문제까지 찾아온다. 그러면 영적인 자유인이 될 수 없다. 교회는 이상한 사람이 바르게 되고 불신자가 구원을 받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람의 말을 들으면 결국은 교회 다니고 더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두 번째 만난 사람은 귀신들려 남의 집 노예로 있던 여자다.
귀신 들려 남의 집에 노예로 있던 여자가 구원을 받은 이 사건을 통해 빌립보 지역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발악을 하기 시작하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까지 와서 방해했다. 귀신 들린 여자를 고용해서 돈 버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바울이 귀신을 내어 쫓게 되자 자신의 유익이 끊어지고 자기 기준에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바울과 실라를 이유 없이 끌어다가 두들겨 팼다. 영적인 자유인은 이익이 나던 손해가 나던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인 자유인으로 살지 못하면 순간 이상한 요8:44로 돌변한다. 그래서 영적싸움의 비밀을 갖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사람이 쫀쫀해진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이 생명을 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아 그 속에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가라!” 이렇게 하는 교회가 진짜 교회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못하게 교회를 방해한 사건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나타난 것이다.
세 번째 만남이 본문에 나타난 간수와의 만남이다.
바울은 얻어맞아 감옥에 갇혀 차꼬에 채워져 있다가 간수를 만나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실라의 마음의 열어 간수를 구원하게 하셨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의 상황에서도, 이유 없는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 구원을 받고 영적싸움을 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기중 중 기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다.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리고 오직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에 집중하는 찬양이 있을 때 채워졌던 차꼬가 풀렸듯 사단이 묶어놓은 차꼬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몸에 묶였던 것이 풀어지면서 감옥문이 열렸듯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흑암이 무너지고 떠나가야 막힌 환경의 문들이 열리게 된다.
그 옥문이 열리면서 또 하나, ‘사람의 문’ 곧 간수의 마음이 열렸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얻어맞은 그 현장을 보았던 간수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할 만큼 마음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크게 열리면서 자신의 가정에 초대해서 세례까지 받는 축복을 받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본문의 핵심 내용은 루디아도, 귀신들려 점치는 자도 아니고 매 맞는 사건이나 간수가 회개하고 돌아온 사건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는 것이다.
바울이 얼마나 교회를 사랑했던지 이유 없이 얻어맞을 때는 아무 말도 없다가 문제가 다 해결 된 이후에 “나는 로마 사람이라” 말했다. 교회를 너무도 사랑하고 교회만 생각했던 바울은 기도와 찬송 속에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야 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했던 것이다.
감옥 문이 열리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다면 누구도 눈에 보이지도 않고 흥분하며 도망을 가야 할텐데 바울과 실라는 문이 열려도 도망가지 않았다. 성경에 섰다 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말씀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밥 먹는 수준만 넘어가도 교만해진다. 그런데 바울은 옥문이 열리는 사건 앞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교만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겸손한 모습 속에 교회가 세워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간다.
감옥의 땅이 흔들리고 진동이 일어났음에도 무너지지 않고 쇠창살과 차꼬만 끊어지는 그 현상을 보고 겁을 먹어 자결하려는 간수장에게 바울은 오히려 걱정마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말한다. 창조주 우리 아빠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믿어주기만 하고 그 분을 향해 찬송만 하고 있으면 살아서 역사하신다. 이것은 2천 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증거 문서로 전해져오면서 오늘날 우리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사건이며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감옥의 바닥이 흔들리고 철통같이 닫혔던 문들이 풀려지고 매였던 것에서 풀려난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바울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예비 된 영혼을 찾는 것을 기적으로 보았다. 천하보다 귀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증거 있는 증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핏 값으로 산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이름으로 집중해 줄 제자를 보는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완악한 간수의 마음이 녹아 예수에게 세례를 받는 그 현장이 진짜 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기적은 우리 생활이 변화가 와야 한다.
예수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 생활과 성품에 변화가 와야 한다. 바울과 실라는 이런 사람을 찾아서 교회 안에 세워놓았다.
깊은 밤 우리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인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변화시킨 그리스도의 능력은 지금도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킨 잠깐의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시간이 된다. 이 변화의 역사, 나의 인격, 성품, 성향, 생활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만 하게 된다.
우리가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원죄덩어리를 안고 태어난 우리에게 창3장의 사건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험 들고 갈등하고 원망, 불평 속에 ‘나 중심’ 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창3장 사건은 지금 자신과 관계가 있고, 원죄도 자신과 관계가 있기에 그리스도를 놓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는 순간에 사단이 침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절대적 유일성이 되지 않는다.
창3장, 원죄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적 혼란이 온다. 이 세상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하여 하나님의 형상되신 그리스도의 빛을 잃어버리게 해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알기는 알아도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은 사라지고 몸뚱아리와 정신의 세계만 가지고 살면서 ‘영원’ 이 없는 네피림의 사람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주관적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쟁쟁거리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더 이상 집안에서 쟁쟁거리고 쫀쫀하지 마라.
“창세기3장15절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며 우리를 무능케 만드는 저주의 질병은 우리 가정에서 떠나갈찌어다!” 그리고 쫀쫀하고 쟁쟁거릴 때, 언제나 두 사람이 얼굴을 바라보고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이 자녀, 모든 문제 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교회도 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진짜 아시구는구나, 나는 그리스도만이 필요한 존재이구나’ 이것을 깨달으면서 해결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필요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잡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도 성공할 수 있고 개인과 가정, 산업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 인’ 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거나 고통을 받아도 이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나’라는 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넘어서는 기적도 없으면 늘 불평 원망 하는 사람이 된다. 광야에서 불평 원망 하며 거지근성, 노예근성으로 쟁쟁거리다가 죽는 것이다. 우리는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 여호수아 갈렙이 가나안을 들어갔듯이 요단도 건너고 아이성도 무너뜨리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그리스도로 꺾어버리자. 이것이 세계복음화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탄생했다면 이렇게 걸어가야 한다.
감옥에서 일어난 기적은 물리적인 기적뿐이 아니었다. 진짜 고요하고 조용한 기적은 영적권세가 나타나는 기적, 나를 지키는 믿음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도 자신들이 감옥에 들어간 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교회를 씹지 않았다. 정말 믿음으로 심었다면 불평하지 말고 붙어 있어라. 세계복음화를 하는데 있어 단 1원도 심지 않고 인생을 산다면 슬픈 일이다.
* 우리에게 영적 해방이 임했다면 과거의 미움을 벗어버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속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누리자
어떤 상황에서도, 깊은 감옥에서도 찬송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캄캄한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의 마음은 무한한 자유와 해방이었다. 얻어맞고 죽음에 직면한 상태에서도 미워하는 마음까지 사라졌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 그 이름에 집중하면 1초 전의 것도 정말 망각하게 된다. 과거를 집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에 집중해봐라.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과거를 가지고 오늘을 산다. 사도바울은 개소리 헛소리 잡소리는 뒤로하고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위해 좇아간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 과거의 상처도 망각하고 성공한 것도 뒤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분을 향해 달려가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빌3:13~14. 사도바울은 자신이 사는 날 동안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축복을 많이 체험하기만을 기대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기에 미움을 끊어버리자. 사도바울은 억울한 매를 맞고도 앙심을 품지 않았다. 우리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싸움하는 믿음이 있어야 기적도 일어난다. 그래서 문제 앞에 당황하지도 않고 기적 앞에 호들갑떨지도 않고 늘 찬송하는 마음, 고요한 상태로 있었다. 그리스도를 반복적으로 노래하면 흑암도 뚫리고 무너진다.
절망적인 고난을 겪으면서도 후회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바울과 실라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우리 영혼 속에도 고요하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탄식과 증오, 고통을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자.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라는 천국 열쇠를 허락해주셨다. 그래서 이 땅에 매이지 말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푸는 반석과 같은 믿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영적싸움의 군사,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부인이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워 내게 상담을 청했다.
전도신학원에서 메시지를 듣더니 나에게 지옥이 있냐고, 어떤 곳이냐고 물어, 원한을 품고 이를 가는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했더니 “어머, 제가 지옥이었네요.” 했다. 남편이 들어오지 않을 때마다 나가서 그냥 죽어버리라고 이를 갈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인사는 멋있게 하고 일기장을 만들어 남편을 위해 글을 쓰고 기도문을 써서 금고에 넣어두고 열쇠로 잠궈두면 언젠가 남편이 반드시 그것을 열어볼 것이라고 알려줬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이 금고가 너무 궁금해 부인이 없을 때 몰래 열어봤다가 이 일기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다가 강력한 성령의 역사 속에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다. 그리고 지금 장로님이 되셨다.
또 어떤 부인은 늘 바람피고 집 나가 돌아다니는 남편을 미워하며 나가 죽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는데 어느 날 정말 남편이 쓰려졌다고 연락이 왔다. 간암 말기였다. 그래서 이 여자가 깊은 회개를 하고 남자도 미안하다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했다. 부인의 간절한 회개와 남편의 회개 속에서 간암도 나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회개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래서 그 부인에게 남편을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남편이 한 달에 한 번 들어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이를 갈 필요도 없고 원한을 맺을 필요도 없이 그 문제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기도하면 된다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바울은 세속적인 신앙을 기회로 삼지 않았다.
문이 열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고 간수하게 말한다. 엄청난 권세를 사용할 시간표가 왔음에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탄생한 빌립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디아를 찾아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를 탄생시키셨으니, 귀신들려 노예로 인생을 허비했던 여자와 회개하며 예수를 믿게 된 간수와 그의 가정, 또한 하나님이 보낸 생명들을 잘 양육하고 그리스도로 다스리라고 부탁한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남기고 빌립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교회는 목사의 것도, 장로의 것도, 성도들의 것도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殿)이다.
교회 안에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는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어떤 상황에서도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찬미할 때 하나님은 모든 문을 열어주신다. 이 축복을 전 세계 모든 예수사랑 가족들이 성취시키는 최고의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가난과 고난, 모든 고통을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심으로 예수그리스도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 영적 자유인이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능력이 나의 배경이 되어 어떤 약한 것도 이기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주셨기에 하나님과의 이면계약으로 세계복음화하는 그날까지 모든 사람의 보호자, 동역자, 식주인이 되게 하옵소서. 바울이 옥문이 열리는 기적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자신을 넘어서고 지키는 믿음 속에 교회를 살릴 제자에 집중하였듯이 바울의 옥문을 여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게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영적싸움 속에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실천하는 영적싸움의 군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