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0 예수사랑교회 산업선교 말씀
이 제목을 다른 제목으로 말한다면 산업과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역을 하시거나 산업을 하시는 분들에게 중요한 게 삶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야 현장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제 과거의 신앙생활을 보거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시와 장소에 따라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직장에서는 좋은 사람인데 가정에서는 나쁜 가족이 될 수도 있는데 어느 게 진짜일까? 일치가 안 되면 좋은 인격의 소유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
* 성경적인 가정회복 시23:3
삶이 잘 나타나는 곳이 가정이다. 성경적인 가정 회복이 무엇인가? 시편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기록돼있다. 한 마디로 영혼이 소생되어야 바른 길로 인도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가정 회복은 곧 개인의 회복을 말한다. 개인이 이상하면 가정 회복은커녕 가족 관계가 안 좋다. 한 대형 교회 목사님이 ‘가정을 향한 사단의 전략인가’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다. 돌아가신 유명한 목사님이셨는데 일반적으로 마귀를 잘 이야기 안 하는데 하시기에 들어봤다. 마귀의 첫 번째 전략이 가정 파괴인데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장들이 집안을 소중히 여겨야 하기에 한 달에 한 번씩 외식을 하라는 설교를 하셨다. 이렇듯 교회는 합리적인 말을 하는 곳으로 전락되었다. 맞는 말 같지만 일단 관계가 깨지면 밥을 같이 안 먹고 심지어 외식은 더더욱 안한다.
결국 또 하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성도들에게 지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혼이 소생되어야 인생이 풀리게 된다고. 이게 안 되면 사역도 안 되고 모든 게 안 되게 돼 있다. 성공 자체가 행복하지 않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열심히 사는 것보다 개인이 현장에서 누릴 수 있는 훈련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돈은 벌었을지 몰라도 개인의 삶이 무너져서 행복하지 않다. 나름대로 전문직에 종사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왜 예수사랑교회에 와야 하는가?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갉아먹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부질없는 공허한 짓이 되는 것이다. 전도자인 저 또한 현장에서 전도가 되어도 삶이 누려지지 않으면 공허하다. 먼저 삶을 잘 점검하고 누리길 바란다.
개인이 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개인의 삶에 드러나는 체질, 습관, 인격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행복한 성공자가 없기에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사회가 혼란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해서 불행해 한다. 98% 이상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결국 죽는 그 날까지 육신 문제 때문에 시달리다 죽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성공한 사람도 어느 날 떨어져 죽기도 하고 우울증에 빠진다. 이 말은 결국 성공과 관계없이 개인의 삶이 파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우리 조상들 말했던가. 창세기 3장을 정확히 안 듯 하다. 인격이 변화되는 것은 더 불가능하다. 왜냐면 운명에게 잡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열심히 살라고 하지만 개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느 새 신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학교에서는 ‘열심히 연습하라고만 말하지 무대에서 어떻게 누리는가에 대해서는 안 가르쳐주지’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 새 신자가 누린다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 누림이라는 단어를 세상 사람들은 거의 안 쓰고 산다.
세상에서는 열심, 성실, 정직이라는 말만 듣고 산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의 누림과는 관계가 없다. 행복해지는 게 예수사랑교회 훈련인데, 뭔가를 열심히 하려고 한다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리라고 하는데 왜 열심히 하는가? 개인의 동기, 욕심쟁이라 야망이 있어서, 그리고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벗어나 영적 자유인으로 살길 바란다.
[본문]
1. 모든 신앙인의 기본
누림은 복음의 기초와 관련이 있다. 사도바울도 위대한 전도자였지만 아덴(아테네)에서 실패를 경험했고 다시 고린도에서 회복했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진 실력이 뛰어난 사도였다. 아테네에서도 그 위대한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을 굴복시킬 만큼 달변가였다. 덕분에 말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눌려서 아테네를 떠났다.
캠프 때 두 시간가량 복음을 전하고 왔는데 눌릴 때가 있다. 누굴 전도했느냐 안 했느냐와 관계없이 눌려서 올 때가 있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가 있다. 사도바울은 아덴 현장에서 영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 지역에서는 영적으로 승리했다. 똑같이 복음을 말해도 현장에서 누렸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1) 그리스도와 성령충만 행1:1-11
성령 충만은 응답 중 응답이다. 예수사랑교회는 복음의 기초를 잘 정리해 주고 있다. 오랫동안 뛰어난 목사님들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신 분을 만났는데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 마치 마라톤 노조협상 하는 것처럼 길었다. 왜 그런가? 개념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기초가 정리 안 되면 질문, 의문투성이다. 예수사랑교회에서 예배만 성공하고 있으면 어느 날 삶이 다 풀리게 돼 있다. 기독교인이 받을 진짜 응답은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되어진다.
그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육신적으로 풀리는 게 응답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받는 게 응답이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문제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게 성령 충만이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누리는 게 영적인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다. 환경이나 사람이나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지키는 것이다. 걱정, 염려, 두려움, 상처, 분노, 미움, 이런 것들이 내 몸의 성전을 더럽히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죠. 그것이 예수님이 말한 응답 중에 응답이고 제일 먼저 받아야 될 응답이다.
성령 충만이 왜 응답인가? 네 개인이 어딜 가든지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킬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 당한다. 베드로가 순간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로 지키지 못하자, 조금 전까지는 성령 충만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너져버렸다. “내가 주님을 지키겠나이다!”라고 성령 충만했다가 조금 지나서 예수님을 모르다고 부인했다. 바라보는 순간, 말을 듣는 순간 무너진다. 그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 그 때부터 삶이 꼬이기 시작하고 이상한 길로 간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직 안 되는 것을 아셨고 실수를 해도 기다려주신 것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풀리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안 되기에 행복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응답 중 응답이 성령 충만인데, 처음부터 예수사랑교회에서 성령 충만을 배웠다면 헷갈리지 않는데 처음부터 성령 충만을 이상하게 배워서 혼미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어렵게 느낀다.
성령 충만의 시작은? 우리 자신의 영이 살리는 영으로 바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마귀가 떠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다. 영적인 변화는 순간 하나님의 영으로 성취된다. 개인의 영적 상태를 바꿔주는 게 성령 충만의 시작이다. 그걸 못하기에 현장에서 불행하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게으르면 안 된다. 일찍 일어나고, 신문 보고, 운동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개인 트레이너인 한 제자와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불신자들이 아무리 운동해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운동을 하면 근육도 생기고 좋아지는 부분도 있는데 마귀한테 눌려있는 부분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육체적인 체질, 기질, 습관을 바꾸려고 아무리 오랜 시간 노력을 해도 근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어떤 목사님은 사역을 잘 하시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졌는데 기억만 담당하는 뇌가 손상이 되어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려 설교를 못한다는 얘기를 그 분의 아들로부터 들었다. 마귀가 공격하면 공부할 수 있는 머리를 빼앗아 가기에, 아무리 공부를 잘 하는 체질이라 할지라도 소용없게 된다.
그렇다면 제일 중요한 훈련이 무엇인가? 체질, 기질, 습관을 변화시키기 이전에 영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훈련을 받아야 모든 응답과 개인의 행복은 시작된다. 현장을 영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왜 영적인 지식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훌륭한 습관 체질로 살아도 행복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돈을 들여가며 개인 트레이닝을 받아도 아픈 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빠져나오는 능력, 그리스도가 없으면 불신자 상태의 몸과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누리지 않은 현장에서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알고 있어도 실패했고, 누리는 현장에서는 성공했다. 시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영혼을 지킬 수 있어야 행복의 기본이 세워진다.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가정생활이 어두우면 행복하지 않다. 따라서 영적인 힘이 없으면 안 되기에 제일 먼저 받아야 될 응답은 성령 충만이다. 영적인 자유인이 되면 인생을 누리게 된다.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일심, 전심, 지속으로 기도에 힘쓰는 것이다. 그게 바로 영적인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깨지고, 고린도지역에서 승리했다. 왜 그런가? 복음을 복잡하게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선언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사도바울을 지배한 신앙 사상이 ‘그리스도는 능력이다’이다. 어떻게 원색적인 복음을 밝히 알고 증거 하게 되었는가? 아덴에서의 실패로 인해 사도바울은 원색 복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능력이요 권세다. 그리스도의 개념이 정리된 사람은 선포할 수 있고 그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리스도 너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여기서 행복시작이다. 문제 속에 있는 내 영적인 상태, 갈등 속에 있는 내 영의 상태를 누림으로 바꾸는 성령 충만이 응답 중 응답이다. 이건희 삼성회장 앞에서 로또 당첨됐다고 해봐야 응답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도지 전해주면 된다. ‘나는 네가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있다.’는 타이틀의 내용으로. 사람들이 시달리는 것이 해결 받아야 응답 중 응답이다. 있는 사람은 있어서 시달린다.
(2) 불가능 속의 제자(행11:19~30)
성도가 사는 길은 게으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길밖에 없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사용하라. 입으로만 하지 말고 영혼을 바꾸는 고백을 하라. 그것을 위력 있게 만들어주는 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이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자꾸 확인해야 위력적인 고백이 된다.
그리스도는, 창3:15 사단의 머리를 밟았고 출3:18, 저주와 재앙이 넘어가는 능력이고 430년 동안의 노예에서 벗어난 사건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건이다. 이제까지 묶였던 질병이 있다면 그리스도 바르는 순간 해방 받는다. 사7:14,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는 임마누엘을 느낄 수 있다. 창6:14, 그리스도를 부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미래가 준비된다. 마16:16, 그리스도를 사용하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요 더 이상 시몬(갈대)이 아니라 베드로(반석)라. 한 마디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재창조 된다.
이게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고 고백하면 저주가 떠나가고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영적인 자유인으로서 미래를 준비한다. 무능한 사람이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을 알고 고백할 때 영의 상태가 변한다. 이것을 지속하면 성령 충만을 받는다.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일컫는다.
(3) 그리스도와 가정(행16:15)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면 개인의 삶 속에 오늘의 말씀, 기도, 전도를 체험한다.
(4) 그리스도와 전문성(행18:1~4)
뭔가에 집중해서 얻는 것을 전문성이라 생각했는데, 복음 안에서 전문성 있는 일을 하려면 팀 구성을 해야 된다. 왜냐하면 마귀와 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팀구성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격 받아서 죽으면 누가 깨워줄 사람도 없다. 따라서 성도는 개인의 누림 속에서 인간관계를 성공하고 육신의 동기를 없애야 팀구성이 된다.
(5) 그리스도와 우상문화(행13:1~12, 행16:16~18)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우상문화는 전 지역을 덮고 있다. 그래서 지역마다 누리는 사람이 깔려야 현장이 정복된다. 현장 정복은 결국 개인의 누림에서 시작된다.
2. 기본 신앙을 가진 산업인
모든 신앙이나 산업의 기본은 개인의 누림을 회복하는 다락방, 팀사역, 전문교회 지교회다.
(1) 행2:9~11 개인의 다락방
(2) 행9:1~43 사람을 살리는 팀사역
(3) 행16:15 가정의 미션홈
(4) 행17:6 지역을 살리는 지교회
(5) 행18:6 산업인과 전도자의 만남 속에 전문 교회 탄생.
3. 미션홈의 비밀
가정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비밀이 시작되는가? 또한 현장이 정복되는 가장 위대한 역사가 무엇인가? 여러 지역을 가보면, 이단 사이비가 판을 치고 있다. 전도한다고 현장을 뛰는 사람들은 이단 사이비에서 나온 사람들이 거의 다로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니 현장에 퍼져 나갈 수밖에 없다. 오직 기독교만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문 걸어 잠그고 이단들을 경계하고 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은 거의 다 사이비에 모여 있다. 지역에 교회는 많은데 그곳의 사람들은 불신자 상태고 이미 이단, 사이비, 무속이 무속인이 많다.
현장을 정복하는 것은 말씀 운동이다. 성공적인 현장의 정복은 개인 현장에서 말씀 운동이 일어나야 그 현장을 정복한다. 개인의 삶에 말씀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미션홈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개인, 가정에서 예배가 일어나는 것이다. 삶의 누림에서부터 가정, 지역 현장이 정복된다.
정복하는 길은 그리스도 운동 일으키는 것이다. 교회들의 실패는 지역 현장에서 그리스도 운동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그리스도 전해보면 마음에서부터 더욱더 제자가 될 줄 믿는다. ‘내가 게으름 피우고 무기력하고 자빠져 잘 때 이단들은 현장을 돌고 있구나.’ 이런 현장 보면 정신 차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단들이 면·읍까지 파고들었다. 성도들이 왜 현장을 못 가는가? 가정에서 눌려있고 개인 삶에 말씀 운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메시지 페이퍼 줄 치면서 읽어라. 기도문 가지고 기도하라.
*개인의 묵상(시11:1~6, 시23:1~6, 시119:11)
*정시기도의 비밀(행3:1, 단10:10~20, 행10:1~6, 행16:19~31, 단6:10)
개인이 누리는 시간에서부터 세계 정복의 시간표는 임한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보라. 말씀 없이 명상하면 귀신이 들어간다. 묵상과 명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명상 깊이 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 성공한다. 고수들은 명상 시간을 다 갖고 있다. 현장을 분석하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런데 명상은 개인이 육신 생각 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마귀다.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을 깊이해서 정리하는 것은 귀신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묵상과 정시기도는 갱신하는 시간이다. 강단 말씀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볼 때 생각이 많이 바뀐다. 그래서 포럼을 해야 한다. 듣고만 가지 말고 말씀을 으로 자신을 조용히 생각해봐라.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신앙생활을 너무 이상하게 했구나. 뭔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욕망의 노예로 살았고 영적인 자유인으로 산 게 아니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99%의 사람들이 욕망의 노예라고 생각한다. 주님 돌아가지 않으셨는데 시험 들고 기분 나빠한다. 자존심 상해서 말하진 않지만 깊이 들어가면 인간관계 문제 말고는 없다. 교회는 무엇인가?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런데 사람만 오는 게 아니다. 각 사람마다 집에서 귀신 한 움큼씩 짊어지고 나타난다. 그래서 교회 오면 귀신 판 된다. 그래서 교회 오면 시달린다. 귀신은 사람을 통해서 이동하기 때문이다. 마귀에게 시달리는 문제는 인간관계다. 하나님 때문에 문제가 온 게 아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귀신에게 시달리는 거다. 왜 그런가? 복음 속에서 누리지 않고 늘 욕망의 노예가 돼 있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진리를 말씀하셨다. 모든 문제 끝이라고 했는데 왜 안 끝났는가?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존심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정받지 않으면 불행해 한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다 끝내셨는데. 강단 말씀으로 나를 들여다보면 하나님 앞에 정직해진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말씀을 가지고 묵상과 정시기도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면, 믿음 있다고 하는 그 신앙이 뿌리 채 뽑힐 것이다. 믿음도 아닌 욕망이다. 마귀 새끼다. 이런 것 다 뽑아버려야 된다. ‘그동안 난 욕망의 노예로 브레이크 없이 달려갔구나. 그래서 모든 문제 끝냈다고 하는데 늘 시달리면서 신앙생활을 반복적으로 했구나.’ 이런 것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개인의 다락방이다. 말씀 포럼이다. 말씀을 가지고 나를 잘 보길 바란다. 그럼 내가 믿음인지 욕망인지 자유인인지 관리인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말씀을 통해 잘못된 어둠이 내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그 때 한 번 날려주는 거다. “권세 있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내 인생에 운명을 잡고 있는 마귀야 너는 저주 받고 떠나갈지어다.”
* 언약기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개인의 삶을 누리고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미션홈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개인이 시달리는 문제부터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개인의 말씀 운동이 시작되도록 역사해 주옵시고, 말씀으로 나를 진단하고 말씀에서 답을 찾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현장에서 누리는 영적인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이 밤에 함께 하는 모든 성도들 개인과 가정, 삶, 산업과 직장 현장 속에 세계 복음화 할 수 있는 경제와 만남의 축복 전도의 문을 열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