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를 위한
바울의 세계주의적 선교관
행21:17~26
2016.08.07. 1부 말씀
예배와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변화가 없는 사람, 세상에서는 존경을 받아도 교회 안에서 시험이 드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바울은 세계주의적 선교관이 뚜렷했다. 하나님의 본 뜻에서 어긋나 어설픈 민족주의, 한국의 전통, 미신 신앙으로 빠져들어 간 것이 있다면 빠져나와 바울과 같은 뚜렷한 선교관 속에 세계복음화가 각인되어야 할 것이다.
* 그리스도의 능력 없는 신앙생활은 삶의 변화 없이 과거로만 돌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가지고 마가다락방에 들어가 영적싸움을 시작한 것이 초대교회의 역사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환란과 핍박, 두려움 앞에서 ‘내 인생을 일사각오로 가지 못하도록 내 삶을 장악하고 있는 더러운 영은 그리스도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이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그 이름의 증인되기를 원하오니 지금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영혼 속에, 나의 삶 속에 역사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시작했던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이상해진 것이다. 다락방 복음 운동하는 생명들이 이런 매너리즘에 빠지면 큰일 난다. 핍박, 환란, 온갖 무시와 모욕을 당하며 이 복음 운동을 사수했고,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밝히 증거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했던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예언하며 꿈을 꾸고 환상을 봤던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에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체험했던 마가다락방 초대교회 사람들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옛 종교를 또 다시 답습하고 있는 사건이 본문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누가가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했던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사단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딱 한 가지가 있다. 요1:12, 그리스도 예수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이 신분만 빼앗아간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르지 않고 그 이름을 망각하면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처럼 복음운동이 사라져버리고 옛 종교에 더욱 강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린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 각양각색으로 역사하시는 무한한 역사가 있고 규례, 전통, 제도도 있는데 왜 그리스도로만 일관하냐?’ 소위 뭘 좀 안다고 하는 엘리트들의 이런 말이 우리의 영혼을 속인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엘리트라고 하는 자들이다. 신앙생활에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신분을 잃어버리기에 갈릴리 출신으로 계속 가라. 계3:20, 내가 문 밖에 서서 네 영혼을 두드리노니 그리스도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다른 놈이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주기 때문에 우리 삶이 안 되고 변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주인 되지 않고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지 않으면 변할 수 없고 다시 종교로 가게 된다.
이것을 잃어버렸던 고린도교회는 얼마나 타락했는지 어머니와 음행을 저지르고 말할 수 없는 성폭력이 일어났다. 이 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던진 메시지가 고전3:16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성전 삼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이 신분을 망각할 때 옛 사람보다 더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 죄의 권능, 율법에서 벗어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속에 들어가라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유대 종교, 율법으로 전락하게 된다. 죄의 권세가 우리를 쏠 때마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렇게 선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죄의 권세가 쏠 때마다 율법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느끼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영적싸움을 할 수 없다. 요14:16~17, 보혜사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생명에게 역사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충만하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계에만 눈을 뜨고 있으면 어느 날 망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의지할 때 살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를 모르면 반드시 재앙과 저주가 찾아온다.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게 감당하지 못할 죄의 율법을 다 담당하셨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더러운 것을 내어 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게 된다. 살아가는 동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기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그 이름의 증인이 된다. 곧 성령충만 받으면 되어지는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눅10:19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이런 권세를 우리 개인에게 주셨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이름을 잃어버리고 원수를 제어하지 않으면 어느 날 우리는 다시 옛 종교, 한국은 미신, 샤머니즘으로 이어온 민족주의로 가게 된다. 그래서 복음을 한 번도 전해보지 못하고 민족주의에 빠져 헤매게 된다.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세계 복음화 때문이다. 쓸데없는 보수집단, 민족주의에 빠지지 마라. 누군가 우리를 키워준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앞에만 서라. 권력 가진 자가 땅을 준다고 해도 가지 마라. 하나님의 역사 속에 사단과 영적전쟁하면 하나님은 세계의 문을 열어주신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권세만 사용하면 된다.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처음부터 살인자, 욕심쟁이 이 놈을 박살내라. 있는 자리에서 요8:44 이 흑암을 꺾고 현장마다 이 놈을 짓눌러라. 마가다락방의 초대교회가 이 신분과 권세를 잃어버렸을 때 결국 비참해졌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목사가 요8:44을 밟지 않으면 성도들의 성노리개가 되고 성도들을 이용해서 인생을 살 뿐이며, 성도들에게 사기 치는 자만 될 뿐이다. 예수사랑 가족들은 왕 같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과 권세를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로 요8:44을 밟는 권세를 회복해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가 온다. 너희 아비로부터 3,4대까지 끊임없는 저주의 세력이 인간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권세를 모르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우상숭배며 그리스도를 모르고 기도하는 자는 사망권세 잡은 자에게 당하게 된다.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를 느끼지 못하고 목사하면 사단의 밥이 될 뿐이다. 귀신들린 자가 목사를 꼬시고 귀신들린 목사가 성도를 꼬시면 서로 노예가 되고 재앙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강대국이었던 애굽이 멸망을 받았고, 그 강대국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했다. 성경은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말씀했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사단에게 잡히면 재앙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권세를 갖지 못하면 노예가 된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 이름은 정신병도 이길 수 있는 권세가 있다. 막5장, 군대귀신 들린 더러운 귀신도 그리스도 앞에서 항복했다. 어떠한 불치병, 시달리는 문제가 있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사랑교회 성도라면 정말 자긍심을 가져라. 아무리 삶의 균형이 무너졌어도 그리스도를 일심으로 하면 붙었던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병자도 일어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일심하지 않으면 삶도, 정신도, 영혼도 무너지고 어느 날 요8:44의 신분으로 사단의 말을 듣고 살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오고 죽어서 좋은 곳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한 사람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과 자녀, 가문까지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음에도 그 이름은 잃어버리고 세련된 단어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기도보다, 예배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놓으셨다.” 이것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하는 생명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함께 하신다. 그 이름의 신분과 권세를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 할 때마다 모든 저주와 재앙이 그리스도로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오심을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내 영혼 속에 영접하여 참된 누림 속에 살기를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로 나를 충만케 하옵소서.’ 이 세 가지만 간청한다면 자녀 된 신분권세가 저절로 온다.
창41:38, 요셉은 다른 사람이 먼저 그를 인정했지 스스로 자신을 간증하지 않았다. 강대국 애굽의 노예 출신, 감옥에서 나온 전과자 출신, 신분도 불투명한 사람이었던 요셉을 향해 ‘하나님의 신에 이렇게 충만한 자를 본 적이 없다’ 하며 민족과 국가, 국가의 모든 재산을 요셉에게 맡겼다. 우리 교회도 이런 날이 와 있음을 믿는다. 그리스도만 가진 매력적인 제자, 그리스도인이 우리교회에도 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회사를 맡길 정상적인 사람을 찾지 못해 사람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자식에게 맡기자니 회사가 날아갈 것 같고 국가에 맡기자니 도둑놈 같다는 생각에 사람을 찾기 시작하면 불신자 눈에도 딱 한 사람이 보이게 된다. 그리스도인. 회사와 국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권력 앞에 아부하지 않아도, 사람들 앞에 비위 맞추지 않아도 그리스도를 일인칭 하면 하나님이 그를 높이신다. 이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창3장의 근본문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시복음을 내팽개치지 말고 영원히 각인시켜라. ‘내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며 옛 사람으로 살게 만들고 옛 믿음, 옛 이념, 옛 사상으로 끌고 가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서 순식간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게 하는 저주의 질병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깨질지어다!’ 이것을 가지고 실천할 때 우리가 살게 된다. 사망권세 잡은 자가 쏘는 것은 죄뿐이다. 그 놈의 생각이 들어오면 죄를 범하게 된다. 그 놈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박살내면 우리가 살게 된다.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능력이 되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이다.
초대교회 첫 총회장 감독관이었던 야고보가 회개한 사건이 본문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야고보서를 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약4:6~7에 기록했다. 그리고 야고보는 총회장 감독직을 버리고 전도자의 길에 서게 된다. 지옥은 분명 있기 때문에 마귀와 놀면 지옥을 간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도 분명히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믿으면 천국을 간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 모든 문제 해결자시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셔도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으시고 근본문제로, 기구한 운명으로 장악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셨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두고도 우리의 영혼은 늘 엉뚱한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도 지킬 수 없으면서 왜 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목매게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지키지는 않고 상대방에게만 짊어지라고 하며 정죄하고 판단만 한다. 1초전도 과거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간 문제 앞에 시달리지 말고 그리스도 이름을 불러라. 하나님의 언약되신 그리스도만 우리 몸에 짊어지자. 우리 몸에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는 것 하나만 두어야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만 우리에게 각인되어야 한다.
율법은 우리를 딱딱하게 굳게 한다. 눈이 이상해지고 몸뚱이는 요8:44로 인해 속아서 짓눌리고, 몸 전체가 원망, 불평, 불안 뿐이다. 우리 몸에 율법이 쌓이면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율법이 쌓여 튀어나오면 살인, 범죄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불신자들에게 ‘하나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라는 말이나 듣게 되고 그들이 교회를 없애라고 욕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끊임없이 범죄하게 만든다. 사망이 쏘는 것이 죄고 죄가 쌓이면 율법의 권능이 된다.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부터 날마다 회심시켜라. 우리가 살아가는 날 동안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전도하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신사입니까?” 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멋스럽지 않다면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며 교회 욕을 먹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구원 받은 내용도 없는 사람이다. 살아있을 때만 전도하며 교회를 섬기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잃어버린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과 세계주의적 선교관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한 사도바울의 자세
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0년 만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게 된 사건이다.
그런데 늘 축제와 같았던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지고 환희, 기쁨, 소망도 사라져 정치마당으로 전락해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엄청난 능력은 사라지고 사람과 돈을 의지하는 현장이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예수를 믿어도 율법이 강한 유대인들에게 잡혀 불투명한 미래 속에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한국교회가 전혀 두렵지 않다.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 권세를 가진 우리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위치, 어떤 모양새에 있더라도 그리스도 하나만 붙잡으면 된다. 예수 믿는 수 만명의 사람이 있어도 율법에 강한 자로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교묘하고 아주 나쁜 사단의 조직이다.
행21:20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야고보와 장로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 보고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음에도 자신들의 조직, 시스템을 구축해서 자신들이 가진 유대 사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겠다는 생각들로 가득한 자들이었다. 창3:15이 우리 영혼에 부딪치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예수 믿고도 이렇게 망가지는 인생이 된다. 날마다 찾아오는 창3장의 유혹, 세상이 좋다고 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하여 수 십 만 명의 성도가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사단에게 속지 않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속에 날마다 재창조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 믿는 유대인이 수 만 명 모여 있었지만 율법에 열심 있는 자들의 중심으로 모든 영혼이 끌려가는 사단의 전략에 잡혀있었다. 이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마16:16을 고백해야 한다. 이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은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하며, 천국 열쇠를 주셨기에 사람과 땅의 습관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하는 자에게는 하늘 문을 여시고 교회를 세워 갈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을 때 율법을 행위로 믿는 자들이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어기라고 했다고 하는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며 바울에 대해 나쁜 감정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파괴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율법을 완성케 하셨으며 믿는 자에게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싸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가슴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에 대해 해명하거나 오해를 풀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나쁜 감정만 있을 뿐 오해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에게 메시지도 시키지 않았다. 옛 초대교회는 전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한다고 해도 그리스도 이름 하나 때문에 모였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언제나 성령충만 했었다. 그런데 바울이 다시 방문했을 때 완전한 좌절감과 두려움 속에 교리와 율법으로 강해져 있었다.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할 때 문제가 없는 것도, 해결되어진 것도 아니었다. 엄청난 환란과 핍박을 당하고 제명을 당하는 많은 일이 있었고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리스도 유일성에 흔들리지 않고 일사각오 했을 때 세계로 흩어 질만큼 경제를 비롯해 모든 응답과 축복을 받았다. 우리가 오직 유일성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곳곳에 응답이 와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교회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 이 하나를 잃었다. 하나님의 성령이 친히 역사하심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현장을 좇다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응답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행21: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사도행전에 사도바울이 다니는 현장에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는 두 부류의 사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자인 그리스도인과 형제들. 디모데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한 것은 제자라는 뜻이다. 예수를 닮길 원하는 내 아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어느 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쓰이는 ‘형제’로 전락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형제’는 같은 동질성만 가질 뿐 깊은 생명의 능력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멋진 마음을 서로 가진 형제였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참된 제자는 아니었다.
‘이방 선교를 한다더니 역사가 얼마나 일어났냐?’ 하는 식의 민족주의적 감정만 가지고 바울의 보고를 그냥 보고로만 알아들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현장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그 하나만 외치며 그 한 분만 섬겼을 뿐인데 역사가 일어났고,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성령 하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을 전달하는 심부름 하나 했을 뿐인데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정을 곳곳에 확산시켜주시고 역사해주셨다는 것을 낱낱이 고백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도 그들 내면에 편견이 생겼다. ‘그럼 우리는 뭐냐?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우리 민족은 뭐냐?’ 하며 시기질투를 했다. ‘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잃어버렸구나, 그리스도를 하지 않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받지 않으신 것이구나’ 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도 빠른 갱신과 회심이 일어나야 하는데 바울의 보고를 달갑지 않게 여기며 오히려 기분상해 했다. 그 감정에서 나타난 것이 ‘우리도 예수를 엄청나게 열심히 믿고 있으며 여기에 전통을 따르는 예수 믿는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있으니 오해 받지 않고 맞아죽지 않으려면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라!’ 하며 수많은 군중 앞에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웠다. 이들은 창3장, 근본문제로 인하여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할례를 받아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율법에 집착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 앞에 오해를 풀어주기 보다는 다른 것을 제시하고 타협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 율법으로는 최고의 학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아나니아를 통한 팀 사역 속에 부활의 메시지를 붙잡고 3년 동안 구약 성경의 모든 비밀이 그리스도 하나로 풀리는 비밀을 붙잡은 사람이다. 이런 바울에게 메시지를 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세워줘야 하는데 오히려 오해를 풀어주기 보다는 타협을 하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서원한 나실인 4명이 유대인의 방법대로 결례를 행하고 비용도 직접 부담해서 머리를 깎아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행동하고 7일 동안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다. 이것을 예루살렘 교회 야고보와 그의 장로들이 제시했다.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한 영혼도 얼마나 귀중히 여기냐면 하나님 앞에 서원한 4명의 사람을 보고 자신을 내세우며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7일 동안 규례를 행하면서 그 4명에게 복음을 집어넣고 구원을 받게 하겠다고 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이 화를 받을 뿐 아니라 그 핏 값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절대적 유일성을 가진 바울의 가슴이었다. 아무리 율법으로 의롭고 흠이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수 만 명 앞에서 설교를 하지만 그 말이 헛소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한 영혼이라도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가슴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가슴, 전도자의 가슴,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 구원 받는 비밀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이 없다. 신분권세를 회복하면 사단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고전9:22~23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한 사람이라도 참여시키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울의 가슴이다. 우리 예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이 되셨고 채찍을 맞으시고 못 박힘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위하여 인생을 살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일만을 위하여 살아가며 전도자까지도 이용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망이 쏘는 죄의 법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요8:44가 우리 영혼을 장악하고 생각을 집어넣을 때마다 그 생각으로, 자신의 중심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꺾어라. 그래서 자신의 시간표에 찾아오는 헌신이 있을 때 욕심쟁이로 가지 말고 돈을 쓸 기회가 오면 쓰는 사람이 되라. 돈을 쓰는 사람이 재벌이지 가진 사람이 재벌이 아니다. 예수사랑 가족들을 통해 세계적으로 복음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을 철저히 죽이고 서원한 4명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함께 들어간 바울과 같은 축복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 모든 예수사랑 가족들에 임하기를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에도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를 잃어버려 자녀 된 신분권세를 망각하고 죄의 권세에 따라 율법으로 길들여져 종교의 열심 속에 민족주의로 전락한 이 시대에 세계복음화에 눈을 뜬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에 감사드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 할 때마다 있는 자리에서 사탄이 무너짐을 믿고 문제 앞에 내 자신을 죽이고 율법의 권능을 무너뜨려 오직 그리스도 하나만 각인되어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세계주의적 선교관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