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복음의 스토리를 말하고 있는가?
행21:37~22:11
2016.08.21. 1부 말씀
하버드를 다닌 한 사람이 어느 날 중이 되었다. 그 사람이 현각 스님이다. 하버드를 다닐 때 어느 중이 “너를 모르는데 뭘 하고 있는가?” 하는 한마디에 결국은 스님까지 되었다. 그런데 그가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와는 이제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종교는 이미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고 종교는 미신일 뿐인데 오늘날 교회, 불교, 모든 종교가 여기에 갇혀있다. 이런 종교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어떤 행위도 없이 예수사랑교회 앉게 된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 내면에 이미 와 있는 세상의 더러운 물질 중심주의, 어설프게 신을 알고자 하는 미신사상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져야 한다.
* 인생에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음에도 하나님을 만난 자로 인생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에게 구원의 스토리가 전혀 없다. 자신과 예수사랑교회 담임목사님과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아, 목사님도 나와 똑같구나, 목사님도 저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강단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들으니 나와 다르구나. 그래서 나도 목사님처럼 해보면 되겠구나’ 이 차이 밖에 없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스토리를 전달했다. 자신이 영적싸움을 모르고 예수를 몰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 그런데 더 정확히 말해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죽이는 자였다는 것을 발견한 자신의 스토리를 말한 것이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몰라도 되지만, 자신이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힘, 창조, 능력, 지혜 되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영적싸움을 해야 진짜가 된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를 평생 다니고도 늘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닌다. 자신은 시험 들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있는 자리에서 기이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지고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이다.
나는 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한 증거를 선포했을 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능력,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옛 뱀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라.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게 하는 옛 뱀, 마귀, 온 천하를 꾀는 자,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자,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재앙을 안겨주는 이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지 않으면 이 놈이 우리의 영혼과 집안 구석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어 죄의 권세 잡은 자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와 함께 동행 하게 된다. 창4:7. 그래서 가인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영적싸움 하지 않으면 사람이 우스워지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진다. 창3장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 와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성령으로 오셨다. 그 성령이 ‘그리스도’ 다.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알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내어 쫓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된다. 그 때부터 강단의 말씀이 ‘나의 것’ 으로 부딪쳐진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오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잡고 있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못 만나면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채 예수 믿고 교회당만 다니다가 어느 날 중이 되고 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즉각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 그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는 것이다. 그 사단의 머리가 어디 있는가? 우리 자신의 머리, 바로 생각이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연약한 자기 부인의 말을 듣고 돌아버리고 가정을 깨뜨리고 쑥대밭을 만들어버린다. 무더운 날씨에 자신은 힘들게 돈을 버는데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저녁밥도 차려놓지 않는 것을 보면 저런 여자와 일평생 사는 것이 한탄스럽다 하며 ‘오, 주 아버지여....’ 하지만 살인자적인 욕은 할 수 없어 ‘미치겠다’ 하는 말이다. 예수 믿고 교회당만 다닐 뿐, 내면에는 상대방을 향한 박해의 영이 있어 경건한 모양만 가지고 상대방을 향해 이런 식으로 욕하다가 어느 날 비참한 일을 맞이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살인의 영이 영혼 속에서 꿈틀거릴 때마다 사로잡아 내어 쫓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온다. 평화주의자인척 하는 몸부림, 경건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평안이 온다. 나를 무시한다 할지라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 여자가 있어 좋구나’ 하며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으로 인해 우리 자신 안의 마귀의 영이 드러나고 그리스도로 박살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상대와 다르게 된다. 진짜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만난 자가 되고 하나님을 만난 자는 이렇게 다르게 사는 것이다. 근본문제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깨부수면 우리 삶의 기본이 이렇게 달라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기구한 운명적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강한 군사로 사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룰을 따라가면 악독한 부인도 살릴 수 있을 만큼 달라진다. 우리 인생에 이것을 체험해보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과 다른가? 언제나 있는 자리에서 참 자유를 맛보는 이름, 우리 안에 참된 생명 되신 참 왕, 참 제사장, 참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가 언제나 함께 하신다.
*우리에게 오직 다른 것이 있다면 ‘영적싸움을 통한 복음의 스토리’를 가졌냐는 것이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자신의 인격, 지식, 수준 높은 철학으로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살인의 영이 가득했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복종시켜 예수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을 때, 이제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어 운명이 달라졌고, 그 운명이 달라지면서 세계관도 달라지고 사람도 달라졌으며 성품, 성향, 기질, 체질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골2:2~3,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사랑할 수 없던 영혼에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연합할 수 없는 이기주의자가 연합을 하게 되고 마음에 참된 위안을 얻게 되며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던 더러운 성질을 가진 자가 사람을 이해하며, 늘 쟁쟁거림과 쫀쫀함으로 살던 자가 풍성한 축복을 날마다 받게 된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반드시 이렇게 달라진다. 목사인 나 역시 그리스도 능력 하나로 모든 것을 바꿨다. 오늘도 나를 바꿔야 나는 살 수 있다. 그러면 원수 같은 사람이 우리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 사람을 살리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하셨고 그 사람의 면류관이 나의 살아가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유일한 이유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참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어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를 통해 하나님은 시작하신다. 오늘의 영적싸움을 통한 복음의 스토리가 우리 영혼 속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영적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색이 흑암으로 변한다. 그런데 거울을 보고 자신과 영적인 싸움을 하면 흑암에서 빛으로, 짓눌림에서 환희와 풍성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물질주의와 미신으로 시달렸던 인생에서 무한히 밀려오는 하나님의 풍성함과 지혜를 맛보게 되고, 영적싸움의 선을 행하는 자가 되면 머리를 들고 일어나 빛을 발하는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나’ 라는 존재는 몰라도 된다. 알고 싶다면 나 자신이 창세기 3장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기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로 영적싸움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천사를 통해 역사하신다.
지금도 사단은 늘 죄의 생각으로 우리를 향해 쏘고 있다.
상대방이 나보다 돈을 조금만 더 받아도 안색이 변해서 심령이 쪼그라드는 죄의 권세가 찾아온다. 그 때 ‘작은 돈 때문에 내 심령을 파괴시키는 저주의 질병아, 욕심쟁이, 요8:44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 하도록 내 영혼을 짓누르며 살인자로 몰아가는 더러운 저주의 영은 권세 있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하고 편안하게 내 자신을 결박하면 된다. 그러면 더 많이 가져간 상대방이 미안해하면서 더 좋은 것으로 가져오는 것, 이것이 영적싸움의 맛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사용하면 늘 풍성함이 온다. 마귀가 쏘는 미움과 갈등, 이간 속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영적싸움하지 않으면 공중권세 잡은 자가 순식간에 불화살을 쏘아 우리 자신이 당하게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는다면 버릴 것은 버려야 살게 된다.
본문에 유대인들이 사도바울을 죽이려 하는 이유는 근본문제로 인한 시기, 질투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전도단체에 교회 목사들이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진짜 이단종교에는 아무 말 못하고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 라고만 써 붙여 놓았다. 신천지도 다 들어와서 영접하고 예수 믿게 해야 하는데 근본문제로 인해 영혼 속에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어 관심이 다른 곳에만 있다. 우리는 근본문제를 가진 똑같은 존재이며 이 근본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할 때 서로가 행복해진다. 그런데 자신은 다른 척 경건한 모양만 가지고 있으면 결정적 순간에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근본문제로 인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알 수 없는 시달림 속에 그를 박해하지만 바울 자신도 과거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며, 박해했었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따라 올 자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 앞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바울은 예수 믿는 스데반을 간접적으로 허락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 영적싸움의 힘은 이렇게 현장에서 나타난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 자신의 근본문제와 영적싸움을 하면 안색이 달라지지 않고 참 평안이 온다. 이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 현장에서도 눅23:34,“...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말씀했다. 강단말씀을 천만번 들어도 영적싸움의 비밀을 모르면 사단의 공격 받은 대로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공격받기 전에 싸워야 한다.
바울은 ‘나는 유대 사람이다’ 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온유하고 밝고 여유 있는 얼굴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당당하게 들여다보았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발견한 바울은 확신과 사명감이 흘러 넘쳤다. 자신이 죽인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변한 것을 목격했고 그의 설교를 간접적으로 들었던 그 사건이 자신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나 역시도 예수를 믿고 처음 간 현장이 군부대였다. 군 생활에 예수 믿는 병사들 핍박했다는 스토리에 잠을 자던 군인들이 고개를 들게 되고 예수를 믿는 자가 많게 되었다.
우리가 다 똑같지만 다른 것이 있다면 ‘영적싸움’ 뿐이다.
바울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고 전도도 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 라는 엄청난 비밀을 알면 언제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된다.
바울의 전도와 선교는 자신이 겪은 사건을 사실적으로 말한 것이다.
자신도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과 똑같은 히브리인으로 생각과 경험, 마음의 규례와 율법, 전통을 똑같이 가졌던 사람, 예수 믿기 전에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당을 다니나 똑같이 근본문제로 모두 잡혀있었다는 것이다. 행26:18~20에 명백히 말씀한다. 하나님을 믿었으나 어둠에 잡혀 있었고 사단의 권세아래, 죄의 권세에 짓눌려 무한한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한 채,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 있었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려 방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달라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영적싸움을 하는 자가 하나님 만난 자, 성령인도를 받는 자, 그런 자는 주의 천군천사가 보호하며 부활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되셔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바울이 유대인 앞에서 선포했다. 곧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은 예수를 만난 사건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같을 수 있으나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똑같은 상황에서 영적싸움을 통해 여유로움과 평안함, 기쁨으로 문제를 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얼마나 포악한 자였고 흥분을 잘하는 자였는지는 제사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며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경륜 속에 다메섹으로 가는 현장에 예수께서 자신을 사로잡아 예수의 포로가 되었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그리스도 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빌3:12, 그리스도 예수에게 붙잡힌바 되어 영적싸움의 포로가 되었고 이제는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 연합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나의 일이 되고 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면 교회 안에서 저절로 연합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자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엄청난 소리를 듣고 우리 영혼과 모든 것이 치유되며 그 하나님의 역사 속에 진행하게 되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자신을 곤고한 사람, 사망의 몸에서 시달렸고 하나님을 믿었으나 우리 영혼에 솟구치는 죄업으로 시달려 자유도 없고 허무주의 속에 있었지만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저주와 재앙과 질병, 가난과 무능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떠한 실패 속에서도 절대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면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권적으로 붙드시는 비밀이 바로 영적싸움이다. 창3:15을 적용한 사람들을 강권적으로 붙으신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뿌리는 자들에게는 죽음과 재앙이 넘어간 그 주인공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 되신다. 그리스도를 영혼에 담아 임마누엘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을 확신과 사명으로 붙잡고 죄로 쏘는 사단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박살내라. 이것을 실천할 때 어떤 자리에서도 기죽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 앞에 변명하고 자랑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미소만 짓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시고 하나님이 나를 홍보하신다. 그래서 요셉은 어느 날 총리가 되었다. 이것이 영적싸움의 비밀이다. “목사님, 저는 7년째 하고 있어요.” 하지만 정말 영적싸움을 하고 체험적 증거를 가진 자는 이런 말도 하지 않고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붙으신 자들이 바로 렘넌트 7명이었다. 다윗은 아무 잘못 없이 십 여 년 넘게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사울에게 시달렸지만 영적싸움을 하는 그를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붙드셨다.
* 바울은 예수의 포로가 되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음성, 복음의 스토리를 전했다.
부활하신 분이 그리스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그 빛을 사람들이 보았지만 그 그리스도의 소리는 바울만 들었다. 이 그리스도를 아무에게나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하늘에서 들은 음성은 딱 하나, 그리스도였다. 사단을 무너뜨리시고 죄에서 해방하셨으며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신 참 왕, 참 제사장, 참 선지자 되신 그리스도. 창3:15, 출3:18, 사7:14 그 분이 예수로 죽고 다 끝내셔서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제 그 이름을 우리 자신이 사용하면 된다.
바울이 이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야고보가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고 해도 천부장을 통해 로마 군대가 에워싸고 보호받는 가운데 메시지를 하게 되었다. 영적싸움하는 자를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붙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해 분명히 말했다.
캄캄한 밤, 잠잘 때 비몽사몽에 받은 계시가 아니라 밝은 대낮에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이 보고 확인했다.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을 믿어도 살인자에 불과하며 하나님을 핍박하며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하는 더러운 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과 같이 제 2의 인생이 시작된다. 죽은 예수가 부활하시고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약속대로 인카네에션(incarnation)-성육신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행9:4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우리가 예수를 핍박하지 않았지만 영적인 싸움으로 교회를 섬기지 않아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연합하지 않는 것이 핍박이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유대인과 한 팀이 되어 유대 사상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결국 서로 살인자가 되고 결정적 순간에 서로 이간하고 욕하는 자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이 우리 안에 찾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전락한다. 마10: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바울의 생각을 묻지 않고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고 하셨다.
거기에 가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똑같지만 나는 너와 다르다” 는 영적싸움의 비밀을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면 우리 자신의 자유는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영적싸움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자유를 찾고 싶어 몸부림을 친다. 나 같은 살인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자가 되었음에도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살인의 영을 가지고 자유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겠는가. 이제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 안에 내 멋대로 살인하려는 자유를 타파해라.
하나님은 바울에게 네가 할 일을 아나니아가 알려줄 것이라고 말씀했듯이 우리가 할 일을 그리스도를 체험한 담임 목사를 통해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며 예수사랑 강단 말씀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다 똑같을 수 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영적싸움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 시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예수사랑교회로 불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고, 근본문제에 묶인 것은 똑같지만 복음의 스토리를 가지고 다르게 사는 바울처럼, 영적싸움이라는 비밀을 가지고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나를 붙드시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는 복음의 스토리를 가진 제2의 인생이 시작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