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만날 때 오는 개인의 변화
행22:11~21
2016.08.28. 1부 말씀
현장을 다니며 한국교회를 보면 ‘큰일났다’ 는 것을 느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 그 그리스도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한국교회 성도들을 보면 구원을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마다 울고 짜고 아니면 싸우는 일 뿐이다. 아무런 사명도 없이 교회당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 예수사랑교회만이라도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도 다문화 가족들을 비롯한 예수사랑교회 성도들과 함께 제자 훈련을 갖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가장 먼저 우리의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후5:17고후5:17, 보라 이전 것이 지나가야 새 것이 오고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야 하는데 과거에 묶여있는 수준으로 살고 있다. 왜? 창3:15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이제는 사단의 머리를 밟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현장 속에 세상 임금 마귀(요16:11)가 우리를 끊임없이 혼미케 하여 하나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살게 만든다. 그래서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그 영이(엡2:2~3)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하나님을 믿어도 믿는 모습만 갖출 뿐이지 진노의 자녀로 살아간다. 그가 욥이었고, 과거의 베드로였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따라다녔어도 하나님을 끊임없이 떠나게 된다. 그래서 죄의 권세로 인하여 재앙과 저주를 당하게 된다. 지옥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 담겨지지 않고 사단의 심부름만 하며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 없이 막연히 눈치 보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의 수준으로 이 세상을 살면 망하는데도 우리는 자꾸 우리의 수준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육신되신 하나님이 이제는 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야 한다. 이 세상의 윤리, 도덕으로 몸부림치며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름으로 죄의 권세를 박살내야 한다. 그 때 우리의 수준이 무너지는 것이고 그것이 곧 마귀의 수준이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의 수준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밟히지 않으면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죄의 권세 잡은 사단이 쏘는 대로 당하는 인생을 산다. 그러면 ‘오늘’의 삶이 늘 염려로 잡힌다. 염려를 매일 하면 그 염려가 체질이 되어 불신앙을 한다. 그 불신앙의 결과로 늘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 비밀을 몰라 사고만 터지면 하나님이 자신을 때렸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정신문제가 온다. 지옥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 땅에서 준비해야 하는데 곧 무너지고 종말을 맞이할 세상에서 왜 안주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하나님은 성공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 되기를 원하신다. 이 땅의 성공은 세상의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창3:15, 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주셨다. 이것을 믿고 세상과 맞짱 뜨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맞짱을 떠야지, 사랑할 곳이 아니다. 세상과 맞짱을 뜨면 영적인 문제가 치유된다. 세상에서 무능했던 자신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게 되고 육신문제로 늘 쟁쟁거리고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했던 것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라진다. 그러면서 어느날 육신 치유도 일어난다.
그 때부터 우리의 기준이 달라진다.
우리가 가진 기준은 늘 남을 죽이는 것뿐이다. 누가 조금만 실수해도 “당신 이러면 안되, 이런 수준으로 인생 살지마!” 하며 즉각 쏘아붙이거나 요즘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글을 SNS로 바로 띄워버린다. 우리가 가진 기준과 수준은 늘 정죄, 심판, 판단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미움, 갈등, 시기, 질투, 욕심쟁이, 살인의 영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준에서 내가 돈 좀 오면 복음을 말하겠다 하는 식으로 자신이 성공할 때까지 교회도 좀 기다리라고 한다. 이것이 자신의 기준이다. 우리는 뭔가를 갖춰놓고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 모세가 애굽 왕궁에 들어갈 수 없는 여러 핑계를 하나님 앞에 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의 형 아론까지 그에게 붙이셔서 왕궁에 들어가게 하셨다.(출4:1~16) 우리는 늘 우리의 기준과 수준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원하셔서 부르셨음에도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이유는 “예수가 그리스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과 자신, 환경과 맞짱 떠야 한다. 이것이 선택적 증거다.
목사인 나도 어떤 능력이 있어서 여기에 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선택한 것 밖에 없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체험하게 된다.
*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이 하나 뿐이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은 자꾸 울기만 한다. 같이 울어주면 부흥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목사가 다른 영을 받은 것, 무당처럼 씻음굿을 하는 대가(大家)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예수는 그리스도를 아무리 외쳐도 눈물이 난다. 우리의 과거는 축복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발판과 미래의 보장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가 와도 괜찮다. 성경의 기록 목적,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그 이름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을 때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유일성 속에 천국 복음이 우리의 영혼 속에 충만해지고 이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야 끝이 온다고 하셨다.(마24:14) 우리의 영혼을 끝에 두었기에 어떤 문제가 와도 괜찮다.
마28:18~20,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다. 그 이름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말씀 하나를 실천했을 때 나와 우리 성도가 모였고 전 세계를 향해 세계복음화를 하게 되었다. 너무도 연약했던 내가 이 말씀 하나 붙잡았는데 미국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만나고 설교도 하게 되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밖에 없다. 과학보다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도 변화될 수 있기에 지구에 어떤 사람도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롬1:16~17, 복음의 흐름을 타는 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인으로 살게 된다고 하셨다. 철학과 율법, 종교가 난무한 이 시대, 신비주의, 박애주의, 온갖 잡스러운 프로그램이 교회당에 가득한 이 시대에 복음의 흐름을 타고 세계복음화 해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질병의 저주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재창조의 능력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시작 될지어다!’ 이것을 실천할 때 안 될 일이 없다.
구원의 길속에 복음의 흐름을 타는 자는 세 가지만 하면 된다.
1)마귀의 일을 무너뜨려라
끊임없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염려와 불신앙으로 찾아오는 놈이 있다. 세상 임금, 혼미케 하는 세상 신,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 장악한 이 세상의 시스템이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롤 노래할 때 이 놈이 떨어져 나간다. 자녀들 방에 들어가서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만 그리스도를 노래해줘도 방이 깨끗해지고 귀신이 그 방에서 떠나간다. 화장실에 앉아서 온갖 염려, 불신앙, 헛소리, 남 욕하고 있지 말고 그리스도 불러주면 모든 육신이 회복된다. 그리스도는 만병통치 그 이상, 창조주,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채시다. 마귀를 밟을 때 그 분이 인정된다.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셨고, 눅10:19,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사로잡아 복종시키는 능력이 그리스도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했다. 자녀가 말을 듣지 않아서 미치겠다고 하지 말고 아이와 함께 손을 잡고 그리스도를 불러봐라. 그러면 그 아이는 가장 멋있는 아이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착한 자녀라도 어느 날 귀신이 붙어서 알 수 없는 정신 문제 속에 정신병동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온다.
2)그리스도를 불러야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 증거가 그리스도다. 모든 저주를 막아주는 이름이 그리스도다. 이것을 체험하는 것이 선택적 증거, 개인의 변화다.
신앙생활은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렵다고 착각한다. 예배는 힘든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주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엄청난 것을 드리는 것처럼 ‘내 예배 받으세요’ 하지만 이것은 굉장한 교만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한 주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잊지 않게 하신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 삶의 만족이 되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한 주간을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말씀을 주신다. 그래서 말씀을 받는 이 교회가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3) 원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문제가 다 끝났다. 십자가 죽음의 비밀 속에 담겨있는 우리의 축복이다.
저주와 재앙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절대적 믿음 속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녀 된 신분권세를 마음껏 누려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인생을 쓰레기같이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공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자를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자는 육신의 생각 곧 사단의 머리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밟고 복종시키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종말론적 상황에 있음을 잊지 말고 언제나 담대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바울은 선택적 신앙의 증거를 고백적 설교를 통해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이 만난 사건들 속에 사실적인 증거가 있기에 자신의 체중을 실어 선포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체험했다면 체중과 인격이 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 같은 운명론자를, 사리판단도 없이 인생을 너무 이상하게 살았던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개인의 변화를 체험했다면 자신의 체중과 인격을 실어 말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것이 안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자신의 수준과 기준을 무너뜨리지 않는 불신앙의 결과이다. ‘내 생명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저주야, 창세기 3장15절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는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시면서 까지 그리스도를 주셨다면 그 이름 부르는 것에 내 체중을 실어라. 그러면 우리에게 붙은 지저분하고 시커먼 것들이 다 나간다.
* 하나님의 선택적 증거를 가진 자는 개인의 변화 속에 분명한 사명이 있다
행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오늘의 우리 자신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진리다.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인간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우리가 있고, 오늘이 있기에 우리는 내일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는 그리스도 하나를 발견한 선택적 증거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이다.
22:7,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한 것도 선택적 증거임을 고백한다. 바울이 몸부림치며 무엇을 해도 안 된 것도 그리스도를 체험하라는 선택적 증거였다. 예수를 핍박했던 바울이 장님이 된 것도 선택적 증거다. 우리가 예수 믿다가 암에 걸리고 부도가 나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선택적 증거가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은 알겠는데 뭔가 잘 못 잡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사랑교회에 오게 하셨다. 이것이 선택적 증거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에게도 다메섹에 가게 하셨다. 다메섹에 아나니아 교회가 있었다. 거기에 가면 바울에게 행할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곧 예수사랑교회 강단 말씀에서 알려주는 대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완벽한 응답을 받는다. 이것이 선택적 증거이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성경 전체를 통틀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이라는 유일한 구절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적, 절대적 증거를 가졌다는 것을 믿는다면 창3:15 속으로만 들어가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은 사단의 머리를 밟는 자라는 것이다. 저주와 지옥배경 속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무기를 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가 선택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자는 ‘선택’ 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 피의 속량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이제 하나님의 경륜과 예정, 하나님의 선택 속에 땅 끝까지 이르러 그의 증인 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이리 저리 치였지만 하나님이 예수사랑교회까지 들어오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발버둥치지 말고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옛 사람을 버려라. 일하기 싫어하고 마누라가 돈 벌어오는 것 좋아하고, 박수무당 끼를 가지고 있으면서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퇴근한 부인에게 밥하라고 시키고... 이런 자신을 숨기고 광명한 천사로 살면서 더럽고 추하게 사는 옛 사람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날마다 버리지 않으면 이상한 종교로 가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만나면 반드시 개인의 변화는 오게 된다.
행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바울을 개인적으로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의인, 예수가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어 이제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름을 사람들에게 듣게 하셨다.
우리의 생각 자체는 욕심쟁이, 살인자, 거짓말쟁이, 더러운 자로 가득하다. 이것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로잡아 내어 던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되면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 할 만큼 복음의 경제를 허락해주신다. 막3:13~14, 우리를 원하셔서 부르시고 함께 하시며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우리에게 맡기셨기에 우리의 인격과 체중, 운명을 실어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을 산산이 박살내라.
본문에 바울은 딱 한 번 선택적 도리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 마귀와 한 번 맞짱 뜨라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운명, 사주, 팔자에 갇혀 미신론 자로 얼마나 많이 속아왔는가. 그 과거를 기억하며 사단과 운명, 환경과 맞짱 떠라. 그러면 하나님은 세계복음화가 삶의 구석구석마다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벧전1:9, 진정한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개인의 변화 없이는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사람만 될 뿐이다. 개인의 변화, 믿음 속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오늘의 선택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의 문제임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분명히 쓰셨다. 그는 성경의 흐름, 복음과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노예가 되고 속국, 포로가 되었는지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던 사람이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상실하면 비참한 꼴이 됨을 알았기에 메시아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율법적으로 흠 없이 살아야겠다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해 하나님이 이리 저리 현장을 데리고 다니시다가 결국 그리스도를 가진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은 ‘사명’ 이다. 메시아, 여자의 후손 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같이 어설픈 자에게까지 보여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절대적 사명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결단코 잊지 마라.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우리가 있다. 내가 있고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뜻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제 옛 사람으로 살던 자신을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 만왕의 왕, 참 제사장, 참 선지자 되심이 우리 영혼에 충만해야 한다. 그러면 개인의 변화 속에 ‘충성’ 과 ‘진실’ 이 온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부르시고 훈련을 시키셨듯이 우리가 예수사랑교회 온 것은 하나님의 훈련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 변화되면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내신다. 훈련의 시간표 속에 그 분의 능력으로 갖춰지면 자격이 생긴다. 하나님이 나를 정말 축복하시고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이 정말 체험되면 걱정도 생기지 않고 불신앙 하지도 않아도 응답을 맛보게 된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처음에는 형들과 다투는 수준으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다툴 것이 아니라 말씀을 담고 훈련 속에 있어야겠다고 결단을 했을 때 아버지가 인정하는 자가 되었지만 형들은 여전히 요셉을 시기, 질투하는 자로 남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면 주위에서 시기, 질투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더욱 해야 한다. 개인의 변화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주위 환경이나 사람의 말에 걸리면 영적싸움을 지속하지 않는다.
행22: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자격과 능력이 갖춰지면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온다. 예수사랑교회 이런 흐름을 타고 움직이면 우리 개인이 멋있어진다. 선택적 증거, 사명이 뚜렷해야 한다.
이런 것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수준과 기준이 강한 사람이다. 행1:8, 개인의 변화를 가진 선택적 증거는 오직 성령충만을 가지고 영적싸움 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이 저주를 받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은 형제, 골육, 친척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행22:14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선택받은 자의 증거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아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는 것을 바울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기에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만 가르쳤고 자신에게 들린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를 증인으로서 증거 했다. 선택적 증거가 바울의 몸속에 임했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만남으로 개인의 변화가 시작되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사탄에게 묶인 옛사람,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사탄의 머리를 밟고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한 선택적 증거를 가진 사명자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을 사는 시간표 속에서 염려가 체질화되어 불신앙으로 사고 터지게 만드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나의 수준과 기준을 무너뜨리므로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고 진실한 자로 설 수 있도록 체중과 인격과 운명을 실어 세상과 맞장 떠 영적싸움에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