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라, 복음의 지경을 넓혀라
행23:1~11
2016.09.11. 1부 말씀
우리의 옛 사람을 생각할 때, 이제 내가 운명에서 해방 받은 자가 되었고 인생에 찾아오는 광풍에도 죽지 않는다는 절대적 진리가 임했음을 믿는다면 어떤 문제 앞에서도 담대해야 할 것이다.
*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광풍 앞에 우리는 반드시 인생의 유일한 답, 창3:15의 배경으로 출발해야 한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반드시 광풍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예측할 수 없는 교통사고, 재난으로 인한 어려움, 갑자기 찾아오는 가정사로 인한 슬픔과 이별, 행복할 것 같고 영원할 것 같았던 결혼 생활 속에 찾아온 갑작스런 고독... 하지만 이런 삶의 여정 속에서의 슬픔과 곤고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이런 인생의 여러 일보다 더 무서운 것, 심지어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것이 하나 있다. 마약을 접하면 치명적인 뇌의 손상으로 인하여 마약보다 더 기가 막힌 맛을 접히기 전까지는 마약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마약보다 더 무서운 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무서운 창3장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분명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수 십 년 다녔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창3장에 걸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공중권세 잡은 자, 세상 풍습을 피할 길이 없어 운명 사주 팔자에 얻어맞고 살아간다. 자신은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싶어 열심을 내기도 하고 하나님께 심취해보려고도 하고 기도도 하지만 잘 안된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누구도 창세기3장15절의 배경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인생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한다.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머무르기 시작한다. 우리가 창3:15의 배경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니고 열심히 봉사를 해도 모든 것이 헛일이다. 수 십 년 교회 다니며 철야기도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는 무당이 굿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무당처럼 빌었을 뿐 하나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비는 것으로 마귀의 머리는 박살나지 않는다.
행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창3:15 메시아, 그리스도 이 엄청난 비밀을 알고 믿고 체험한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서서’ 말씀하시고 고난과 환란, 고통의 시간표 속에서도 바울을 통해 지경을 넓혀 가시겠다고 하셨다.
창3:15 배경으로 출발한 인생은 누구도 해칠 수가 없기에 우리가 창3장 사단의 장난에 속지만 않으면 된다.
이 사단, 마귀는 “너는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하며 우리를 늘 속인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의 사람이 되어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수준과 기준, 자신이 가진 그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수준과 기준을 내려놓고 창3:15로 예수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을 사로잡아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발견되어진다.
빌3:1~8,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했다. 문제 앞에 그리스도의 답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사기꾼이며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답을 얻지 못하면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만 가지 문제 앞에서도 오직 인간의 답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 외에 다른 말은 개소리에 속은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답을 내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즉시 발견된다. 창3:15로 출발할 때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된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회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응답 받을 수가 없다.
마1:21, 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 예수는 모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우리에게 찾아온 재앙과 사망의 문제,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고 벗어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뿐이다. 그래서 인간의 근본문제 요8:44를 해결 받아야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절대적 목적은 요일3:8,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다. 눅10:19,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원수들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다. 마12:28~45,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점점 쪼그라들 수밖에 없으며 악한 귀신 일곱이 우리 가정과 집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옛 사람, 옛 종교, 옛 믿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로 내어 쫓지 않으면 강한 자가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자신을 조종하게 된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셔서 부른 자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는 절대적 진리로 출발한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고 묵상한답시고 침묵하고 있으면 사단이 우리 영혼 속에 시간마다 분, 초마다 얼마나 들어오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끊었던 술을 다시 먹던지 끊었던 도박이 다시 생각이 나는 등 다양한 영적 문제들이 막 밀려오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에 날마다 그리스도로 옛 사람을 쳐서 복종시켜 언제나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지고 자유와 해방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를 사용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이루는 주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 창3:15의 배경으로 출발할 때 악령의 역사, 종교에 심취한 무기력에서 해방 받는다.
악령의 역사는 무기력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에 완전 장악되어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 공황장애, 분노조절장애가 찾아들어온다. 그 무기력에 걸려들면 자기 몸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무기력으로 인한 응답이 종교에 심취되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루에 정시기도를 다섯 번 하고 불교는 하루에 세 번씩 108배를 한다. 이것이 무기력이다. 기독교는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되신 그리스도로 종교에 심취하게 만드는 사단의 장난을 꺾는 것이다. 복음이 아닌 다른 교리 사상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기력이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찾아들어와 불신앙 가운데 수많은 생각들이 타고 들어오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사람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고 움직인다. 그래서 어느 날 정신병으로 시달리기 시작하고 잘못된 것으로 중독되어 엉뚱한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음에도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일만 하는 무서운 무기력에 장악되어져 있다.
그리스도에는 집착하지 않고 TV드라마는 지나간 시간까지 다운 받아 볼만큼 집착하는 것, 그리스도는 생각하지 않고 늘 돈에 생각이 가 있는 것, 이렇게 그리스도에 반대되는 일들이 우리 삶에 너무도 만연해있다. 늘 돈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피조물들이 우리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목사님은 직업이 목사니까 그리스도에 집중하지, 우리는 그렇게 살면 굶어죽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악령에 잡힌 자다.
본문에 사도바울은 성령의 역사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악령의 역사에 집착하고 생을 걸고 살아간다.
악령의 역사는 무기력 속에서 육신적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창3:15, 그리스도가 배경이 되어 사단을 밟는 것이다. 그래서 창3:15로 배경삼고 출발하는 바울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담대하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강단에서 목사가 하는 말로 듣지 말고 주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창3:15이 배경이 되고 출발되면 악령의 역사, 무기력에서 해방 받는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곧 창3:15이 배경이 되어 출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계시의 말씀을 느끼며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악령의 역사는 시달리는 생각이고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느끼면서 평안함 속에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죽을 각오를 하고 변명을 한다.
행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창3:15의 배경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신은 창3:15에서 빗나가지 않았고 언제나 갈2:20로 시작했다. 절대 그리스도에서 빗나가지 않았으며 철학적, 사상적, 미신적인 것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창3:15을 가지고 믿어지지 않게 만드는 창3장의 저주를 그리스도로 박살내라. 사도바울이 말한 양심은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시달리면서 회개하는 양심이 아니라 언제나 창3:15이 배경이 되어 출발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격 속에 있는 기쁨의 양심이었다. 이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
빌2:5,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지만 스데반을 간접적으로 죽이는 살인의 영을 가졌던 바울 자신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영광의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구원 받은 자가 되었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았던 옛 사람을 꺾었더니 믿어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영혼 속에 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로 시작했을 때 양심의 자유를 따라 언제나 영적싸움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부르셨다는 절대적 믿음 속에 있게 되었으며 그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시인하도록 나에게 계시해주셨다는 것을 말씀했다.
행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바울의 고백을 들은 대제사장은 분노하여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말하면 거품을 흘리며 발악하고 돌아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제사장들이 한 번 돌면 조절이 안 되고 발악을 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한다. 사도바울이 이것을 발견한 것이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노출되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3;15이 배경이 되어 출발하면 기쁨의 양심을 느끼지만 옛 뱀, 마귀, 온 천하를 꾀는 자, 이간자,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 마음의 찔림을 받기 때문에 문제 앞에 더 돌아버린다. “너희만 예수는 그리스도냐?!” 하며 분을 낸다. 그러면 자신도 같이 하면 될텐데 자신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출되어 분을 낸다. 이렇게 종교에 심취한 무기력 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를 죄인으로 결정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바울이 변명한다.
사도바울 자신은 살아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로 그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는 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며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오직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선포한다.
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오, 주여~’ 하며 살았던 사람들 앞에서 사도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 바울의 말을 듣고 돌아버린 것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도 창3장에 잡힌 자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모든 문제가 끝났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말씀이 우리 삶의 배경이 되어 출발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정말 붙잡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주의 천사가 말씀을 이뤄 가신다.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겉모습은 대제사장이지만 속에는 악이 가득한 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죄를 범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자, 이런 자는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창3:15이 배경이 되어 그리스도로 출발한다면 우리를 건드릴 자 없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의 백성, 영원한 그의 나라를 선전할 하나님의 대사가 되었다. 벧전2:9.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자신은 양심의 죄를 지으면서 그리스도도 알지 못한 채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만 하고 그리스도의 영광도 없이 그 곳에 앉아서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사람한테만 강조하는 대제사장을 향해 바울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행23:4~5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알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이런 제사장들에게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을까? 어설프게 돌아다니지 말고 악령이냐, 성령이냐를 분명히 선택한 목회자가 되라는 것이다. 악의 근본을 알고 대제사장이 창3:15을 말하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지만 창3장에 짓눌려 광명한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여 인생을 살면 제사장 자신이 악의 근본이 된다. 성도들에게 혼란만 주는 자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창3:15을 배경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제사장은 하나님이 죽인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의 결과가 이상해지는 것이다. 잠17: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악의 근본을 가지고 악에 받쳐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부리는 악한 사자를 보내신다고 말씀했다.
* 성령의 역사,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며 계시의 말씀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알고 발견하고 믿고 체험한 바울은 시대와 사람,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한쪽은 사두개인, 다른 한 쪽은 바리새인들이 있는 현장을 발견한 것이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굉장한 원수였다.
바리새인은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사두개인은 모세오경 외에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두 파가 하나로 일치가 잘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식이다. 장로회 교단이 합동측과 통합측이 자신들이 장자라고 늘 싸우면서도 복음 운동을 하는 단체는 서로 힘을 합쳐 죽이려고 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전도운동하는 단체를 거부한다. 창3:15을 배경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 기득권을 장악한 제사장들이 악의 근본이 된다. 이런 자들을 통해 종교에 심취되면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고 있고 온갖 이단 사이비 종교들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창3:15로 이런 대제사장을 꺾어버려야 한다. ‘복음을 거부하며 복음 운동을 약화시키는 모든 흑암 조직들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행23:8~9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크게 훤화가 일어날쌔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천사나 악마를 믿지 않는다.
악의 근본은 이렇게 천사나 악마, 영적인 세계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사단결박, 천사 동원을 말하면 돌아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운동하는 단체들에게 천사들이 움직이면 자신들은 뭐냐?! 하는 식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접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천사가 항상 함께 한다고 명백히 말씀했다. 히1:14.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바리새 편에선 몇 서기관들이 일어나 부활을 말함으로 핍박을 당하는 바울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 바울은 악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천사가 바울에게 말한 것이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냐 하며 서로 싸우는 것이다.
바울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두 파에게 싸움을 붙였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두개인들은 더 악해져서 발악을 했다.
창3:15이 우리 삶에 배경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로 모든 원수를 제어할 힘이 없게 되고 결국 악의 근본으로 남게 된다.
마귀는 악령의 역사로 교회당을 세워 놓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인생에 답을 주지 못하고 종교에 심취해가도록 사상을 주며 성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교회당만 왔다 갔다 할 것이 아니라 이 시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참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인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하고 멋진 구원의 길을 선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 받고 그리스도로 출발하는 바울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너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될 것이다” 는 용기 있는 말씀을 하신다. “너는 담대하라,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것처럼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거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가 곁에 서서 함께 하기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외로워말고, 쓸쓸해하지 마라. 너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을 당해도 네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하는 것이다. 두려워 말고 담대해라. 세상의 악의 근본을 그리스도가 이겼다.”
우리 삶이 이렇게 출발되기를 축복한다.
그래서 성경 원어에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원어로 365개가 기록되어 있다. 매일 그리스도가 배경되어 출발하면 언제나 담대하게 되고 지경을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3장의 저주로 인하여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치명적인 고통과 무기력 속에 종교에 심취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 창세기3장15절의 배경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창세기3장15절의 배경에서 출발한자는 누구도 해칠 수 없고 그리스도가 악의 근본을 이기셨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가 내 곁에, 내 안에 계심을 믿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모든 영혼을 살리는 전도제자로 지경을 넓히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