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흐름을 타면 영원한 응답이 시작된다
롬 16:25~27
2016.10.02 1부 말씀
복음의 흐름을 타면 영원한 응답이 시작된다.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나의 복음’ 이라고 했다. 자신이 가진 이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이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받았던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받고 신앙과 삶이 견고해졌을 뿐 아니라 세세무궁토록 영원한 기념비적인 상급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해 이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바울이 이 복음에 분명한 확신과 증거가 있었듯이 우리도 내 자신이 가진 복음이 ‘나의 복음’ 이라는 고백 속에 영세 전부터 영원까지 주신 이 복음이 확인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창세기3장의 근본문제, 운명적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복음을 주셨다
현장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신앙생활 속에 갈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 사랑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목사도 은혜 받은 것이 있었기에 주의 길을 가겠다고 한 것이지 처음부터 사기 치려고 그 길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을 때 그들이 응답 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질문을 하게 된다.
목사가 성전을 다 지어놓고 비리가 폭로되어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고, 과거 우리 집안도 투철한 헌금관과 교회에 대한 충성으로 육신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질병과 가족 간의 원수가 되는 것을 보며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에 가면 과거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체험하고 죽을 고비도 넘기며 많은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현재는 결코 부러워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하고 쪼그라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의 말년이 이상해졌다는 것은 결국 운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보면 다양한 인생의 스토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흙수저로 태어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흙수저로 살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노예처럼 일해서 1년에 1억씩 벌며 자수성가해서 인생이 풀리는 사람이 있고, 노예처럼 일하고 살다가 질병이 찾아와 다시 무너지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잘 나가다가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문제 속에 반복적으로 시달리다가 살아간다. 이렇게 다양한 인생의 유형 속에 나름대로의 희노애락과 감격, 감사도 하며 살아가지만 문제는 결국은 모두가 무너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은 운명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이 운명을 이길 수 없다면 인생의 진짜 응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어떤 부류는 지금 너무 행복해서 아무 걱정이 없다고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 망해서나 교회를 찾게 된다. 병원에서 다리를 다친 한 할머니를 만났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을 왔더니 다리 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할머니의 소원은 죽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눈뜨면 낙원 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사람은 아무리 행복하게 살아도 죽는 날까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는 날까지 인생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잘 나가고 걱정이 없다고 해도 이런 얘기를 들으면 겁을 먹고 미래를 걱정하고 보험을 들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죽음 직전까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운명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좋은 공기를 마시며 밭일을 하는 분도 희귀암에 걸려 인생 말년이 비참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미리 깨닫는 비밀을 성경은 말씀한다.
롬3:23 하나님을 떠나 원죄를 갖고 있는 자는 어느 날 이유 없이 문제가 찾아온다. 롬3:10, 이 땅에 원죄 없는 사람,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아무리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예측불허의 인생 속에 죽는 순간까지 미래를 두려워한다. 모든 사람이 걸려있는 이 문제를 운명이라고 하고, 성경은 원죄, 곧 하나님을 떠난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운명에 묶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오셨다.
그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를 알고 믿어야 한다. 인간이 창3장, 하나님의 떠나 죽는 그 순간까지 사단에 묶여 운명에 시달리기에 이 현장을 보신 예수님은 마4:19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곧 이 운명적 저주의 흐름을 바꿔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신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이 땅의 저주 속에서 헤매는 근본의 문제에서 해결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기독교의 응답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과거에는 응답을 받고도 현재는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의 문제의 실체는 운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기에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따라오면 인생 흐름이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 하나의 미래를 두고 두려움 속에 벌벌 떠는 인생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만큼 인생이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어부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 전도제자의 삶으로 사는 자, 진리를 위해 싸우는 자로 인생이 점점 되어 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시급하게 주신 말씀은 나를 따라와서 운명의 흐름을 끊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을 계속 따라가는 것 자체가 가장 근본적인 응답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복음을 조금 따라가다가 육신적인 응답을 받고 세상으로 가는 것은 근본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본적인 응답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는 것이다. 곧 운명적 저주의 흐름을 끊고 나오려면 ‘그리스도의 증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전도제자의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응답이다. 그러면 인생이 쪼그라들지도 않고 영원한 나라까지 하나님 나라의 상급에 변화가 없게 된다. 영원한 응답은 변하지 않는 응답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사랑의 시작이 저주가 될만큼으로 전락되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축복은 복음의 흐름, 전도제자의 흐름을 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평생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간다고 했는데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한다면, 평생 주님을 위해 목회했다고 생각했는데 교회에서 쫓겨나는 인생의 말로를 갖는다면 이것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이 영원한 축복을 받으려면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받은 이 복음이 영세 전부터 주신 그 계시의 복음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 체결의 계약서지 교훈서가 아니다
창1: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1:2 혼돈과 공허, 흑암에서,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임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사역이 빛으로 어둠을 밀어낸 사역이다. 이 어둠이 사람 속에 들어간 사건이 창3장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3장의 저주에서 빠져나오도록 즉각 창3:15을 주셨다. 사람 속에 들어간 사단의 머리를 밟아야만 운명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예수그리스도가 사단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 는 창3:15을 유일한 언약으로 주셨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수많은 사람이 번성한 창6장 네피림 시대가 왔다. 곧 그 땅에 저주를 끊어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재앙의 시대 속에 하나님은 방주 속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또 다시 번성해 바벨탑을 짓는다. 몸부림치며 노력하고 살아도 무너지는 삶이 오늘날의 현장이다.
-그 우상의 문화 속에서 몸부림치며 사는 아브라함에게 창12장 가나안을 향해 가라고 말씀하신다. 드디어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나야 저주의 땅, 저주의 삶에서 빠져나온다는 약속을 하셨다. 모든 저주가 끊어지는 언약을 가지고 시작한 첫 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수많은 인생의 여정을 겪은 후 창22장에 “대적의 문을 취하리라” 는 말씀을 받았다. 곧 우리 인생관이 ‘영적대결’ 이라는 것이 확립될 때 인생의 누림은 시작된다. 우리는 이유 없는 신앙생활, 전도,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대결상태에서 하는 것이다.
-이 대결을 본 사람이 이삭이다. 이삭은 자기 대신 번제, 어린양이 죽는 것을 본다. 인간은 반드시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소유하여 운명적 저주가 떠나가고 샘의 근원의 축복, 백배의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 속에 야곱이 태어났다. 하지만 야곱은 평생 인본주의 속에 사기꾼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재산이 많으니까 잔머리만 굴리며 살다가 자기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 속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절대적 이유를 깨닫고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 아버지, 할아버지가 믿었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회복해야만 운명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언약의 사건을 목격한 자가 요셉이다. 요셉은 어려서부터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가는 인생의 여러 여정이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그리스도가 있어야 세상을 정복한다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찾아온 수많은 문제는 생명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목동으로, 왕따로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적군을 이길 수 있다는 것 하나로 승리했다.
-엘리야는 온갖 신비로운 능력을 다 체험했지만 로뎀 나무 밑에서 죽음을 간구할 만큼 인생이 망해갈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언약은 마귀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을 찾아내 사단과 싸울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언약의 흐름은 항상 영적인 어둠을 보고 마귀와 싸울 자를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포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바벨론 압제에서 해방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6:13, 그루터기를 찾아 세워야 한다는 것, 곧 우상과 싸울 제자를 만들지 않으면 이 저주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을 채우고 있는 선지서의 역사, 언약의 흐름이다.
-마1장 예수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와 연약한 자를 고치시며 가난한 자를 먹이셨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의 결론은 자신이 죄와 저주를 끊을 수 있는 그리스도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 육신적 증거를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본론은 3년 반 동안 귀신과 싸우고 꺾는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이 마10:1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눅10:19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며, 막3:13~15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함께 있게 하시며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시며, 마12:28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 쫓을 때 개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20:31,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야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거다.
-이 증거를 가진 제자들의 행적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 있던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을 말하기와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다.
그 이후 서신서 또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며(요일3: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대결상태로 살아야 인생이 풀리는 것(엡6:10~20), 너희 대적 마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말씀한다. 이것이 성경에 흐르는 주제다.
-오늘날 교회사의 시작이 된 초대교회는 무엇으로 시작했는가? “예수는 그리스도, 너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행1:1로 시작했다. 그 초대교회 이후 안디옥 교회는 행11:26 비로소 그리스도만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안디옥교회를 통해 로마를 정복한 롬16장의 로마교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곧 사도바울이 영세 전에 받은 이 복음은 ‘사단을 발아래 밟는 것’ 이었다. 그 때 자신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을 체험했다.
-예수사랑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흐름만을 선포하는 교회이다. 제자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영세 전에 감추어놓은 이 복음이 지금 그대로 예수사랑 강단에서 조금의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되고 있다. 곧 복음의 흐름, 창3:15의 흐름을 타는 교회이다.
온갖 사이비가 자신들이 다 복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려낼 분명한 기준, 성경을 주셨다. 이단, 사이비는 성경을 이상하게 비틀어버리지만 성경을 정확하게 놓고 말하면 다 도망가게 되어있다. 성경의 창3:15 이 복음이 요한계시록까지, 우리의 삶의 현장까지 그대로 흘러야 한다. 예수사랑교회가 그 흐름 속에 있는 교회이다. 우리가 왜 매주 신앙생활을 하는가? 취직되고 병 나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성경의 주제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데 성도와 목사들이 왜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 것인가?
현장에서 어느 여목사를 만난 적이 있다. 이상한 남편을 만나서 고통의 삶을 살다가 이 고통을 이기려고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라는 생각에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고 간증을 한 후 나는 그리스도를 부르다가 자연스럽게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간증을 하며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다. 그런데 아직은 내가 젊고 경험도 부족해서 굉장히 복음이 역동적이고 지나치게 한 가지에 치우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동적인 것이고 성경은 지극히 한 가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라는 것에 치우쳐 진 것이 맞다고 했다. 더 이상 내 말을 막을 수 없자 갑자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치 그 모습이 과거에 무당이 내 앞에서 복음을 거부하려고 휘파람을 부는 모습과 같았다.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을 가지고 있다.
이 현장을 사실적으로 본 사람이 바울이다. 바울이 전도팀을 만들어 금식하면서까지 인도를 받고자 결단했을 때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고 교회사에 전환점이 될 행13장의 응답을 주셨다. 그 때 하나님은 현장에서 박수무당과의 만남을 통해 마귀의 실체는 사람 속에 있다는 것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행16장, 19장을 통해 마귀가 어떻게 사람 속에 들어가 교묘하게 활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이것을 바울이 봤고 나 역시 현장에서 똑같이 확인했다. 그리스도를 말하면 무당은 “나가, 이 새끼야!” 하며 내쫓지만 목사가 그렇게 하면 진짜 사이비가 되니까 온갖 논리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을 보았다. 사도바울이 현장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 속에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과 영적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자신 안에 기독교인의 모습, 목사의 모습이 아닌 박수무당, 점하는 자가 된 현장을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해 “너희 아비 마귀, 독사의 새끼” 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했기에 당당하게 나의 복음을 말할 수 있었다.
* 복음의 흐름을 타고 가는지를 확인하며 싸우고 있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응답, 변하지 않는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을 낚는 어부,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면 증인될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을 것이다, 반드시 가는 곳마다 표적이 따를 것이다, 이 땅의 사단과 싸우는 후대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곧 복음의 흐름을 타는 자가 가는 종착점이 바로 세계복음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제자’ 라고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 충성한다고 하는 제자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시험 들었다가 순종했다가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우리는 이런 자가 아닌 ‘전도제자’ 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원수, 박수무당과 같은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로 확인 될 만큼 전도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계복음화는 개인의 변화 곧 내 안의 영의 변화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다. 영의 변화는 내 속에 숨어있는 다른 영이 나가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들여 오직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의 의미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닮아가려고 몸부림치며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는 착각 속에 신앙생활을 하지만 영적인 흐름, 복음의 흐름을 타면 영원한 응답, 세계복음화의 제자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과연 복음의 흐름을 타고 있는가?’ 예수사랑교회에 함께 앉아 있어도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사도행전 강해를 통해 복음의 길을 확실히 가고 있는 바울을 확인할 수 있다. 무명의 바울이 오늘날 대 목사와 같은 대제사장에게 네 입을 하나님이 치실 것이라고 말할 만큼 엄청난 싸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네가 오늘 말할 것처럼 로마에서도 계속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주셨다. 복음을 막는 자들이 유대인인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밝히셨다.
문제 앞에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살고 있는지가 우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연약하고 배경이 없는 자 중에는 있는 자들의 눈치를 보며 도와주세요하고 굽신거리는 사람이 있고 있는 자 앞에 투쟁하고 맞서 싸우는 자가 있다. 문제 앞에 각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 이유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영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복음, 강단의 말씀을 따라오면서 내 안에 많은 갈등도 있었다. 갱신하고 바꾸라는 말씀 앞에 내 자신이 들통 난 것 같은 부끄러움이 올 때도 있고 ‘하나님 살아계시면 알아서 하시겠지’ 하거나 ‘난 원래 그런 놈이니까 이렇게 살다가 가겠다’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강단을 꺾거나 강단에 시비를 걸며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 더 완악해지는 사람이 있고 자신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영이든 강화시켜야 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받지 않으면 다른 영을 강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이다. 복음을 따르는 자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복음을 거부하는 부류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무리 속에 왔다 갔다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옛 사람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 두 가지가 나온다. 유대인이 가진 영과 사도바울이 가진 영. 곧 그리스도의 영과 다른 온갖 마귀, 잡신과의 대결이다.
문제 앞에 유대인들의 대처 방법은 작당하고 음모를 꾸미며 주님의 뜻이 아닌데 주님의 뜻이라고 우기다가 실패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이름을 지키며 가만히 누렸더니 모든 것이 되어지는 축복을 누렸다. 자신을 바꾸지 않고 유대인처럼 살면 계속 시달리면서 살게 되고 사도바울처럼 살면 문제 앞에서도 빌1:12,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진보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복음을 거부하고 강단의 은혜를 거부하면서 세상의 영을 강화시키면서 완악해지면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해야 세상을 이기게 되기에 우리가 있는 현장에서 자신의 직책과 직업에 맞는 영권이 있는지 질문해보면 답은 금방 나올 것이다.
우리가 있는 현장에서 문제가 계속 되면 한계가 온다. 한계는 지속적인 시달림 속에서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는 흐름이 복음의 흐름이 아니라 마귀의 올무에 묶여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제가 믿음의 진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한계 속에 영혼은 정지상태가 되어 아무 힘도 없고, 누구 한 사람 도와줄 수 없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생각한다면 진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무에 묶인 상태이다.
그래서 반드시 창3:15을 소유한 자신이 창3장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창3:15은 즉각 빠져나와 사단의 머리를 밟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이 고백이 있고, 창3:15이 있으면서도 고민하고, 미치겠다 하고 있다. 창3:15을 소유했으면서도 창3장으로 사는 사람을 박수무당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가지고도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것, 이름은 바예수이면서 예수를 대적하는 자다. 창3장의 같은 영으로 묶여 있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지역에 캠프를 아무리 해도 같은 영으로 돌아다녀봐야 욕심쟁이 영을 가지고 돌아다니면 영접한 사람도 욕심쟁이 영으로 만나서 결국은 원수 맺고 헤어진다. 아무리 맞는 상황이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해도 상대방이 마귀짓을 하는 것 같아도 내가 시달리는 영으로 있으면 서로 원수만 될 뿐이다. 이것이 창3장이다. 마귀의 정체를 분명히 보았다면 꺾으면 되는데 상대방 때문에 시달리며 미치겠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 다 박수이고, 자신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흑암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곧 창3장에 있는 사람은 문제 앞에서 시달리며 결국은 진보가 없는 사람이 되지만, 창3:15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은 문제 앞에서 ‘기도하면 된다’ 는 것이 나온다.
나 역시 반복적으로 시달리는 문제 앞에 한계를 많이 느꼈고 강단의 복음과 내 자신이 많이 싸웠다.
강단은 늘 ‘모든 문제 끝’ 이라고 하지만 내 자신의 실제 삶은 시달리는 문제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면 창3장의 흐름에서 못 빠져 나온 것이다. ‘창3:15로 밟으면 된다’ 는 생각보다는 ‘큰일났다,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진짜 기도의 흐름 속에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3:15흐름 속에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기도 속에 들어갔다는 것, 곧 행1:14을 말씀한다. 그래서 창3:15 영적싸움이 곧 기도다.
영적싸움은 나를 지배했던 영을 내어 쫓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하는 것, 곧 영을 바꿔주는 것이다.
누구만이 자신과의 영적싸움을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선택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가치와 전도제자의 삶의 가치가 확인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싸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영적싸움을 하면 육신적 응답만 받고 사라지는 것이다.
왜 예수사랑교회 김서권 목사님은 그렇게 영적싸움을 강조하냐고 묻는 말에 목사님께서 “나는 동기가 없기 때문에 영적싸움을 강조한다” 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른 동기가 있으면 절대 자신을 꺾는 영적싸움은 할 수 없다. ‘내 속에 숨어있는 욕심쟁이, 거짓말쟁이, 살인자, 십자가의 원수야,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속에서 떠나갈지어다!’ 이런 기도를 누구만이 할 수 있는가? ‘욕심쟁이가 떠나가면 내 돈도 떠나가겠네’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기도할 수 없다. 자존심이 센 사람이 ‘내 자존심이 나가면 저 사람과 원수맺는 것이 끊어지고 내가 양보해야 되네. 안되, 저 놈은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 용서 안되’ 이렇게 한다면 자신의 자존심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 안에는 정말 꺾으면 떠나갈까봐 갈등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먼저 그리스도의 가치를 발견하고 전도제자로 가야 행복이 보장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때 진정한 영적싸움은 시작된다. 내면에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박수와 같이 강한 자를 꺾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왜 신앙생활을 수 십 년 하고도 무속인 같은 길, 고난의 길을 가는가? 자신 안에 있는 나를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강하는 박수, 마귀의 권세를 진짜 꺾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섬기는 신은 사실 귀신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따지고, 예배 시간에 조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영을 보호하기 위해서 쇼하는 것이지 잠을 못자서가 아니다.
자신과 영적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흐름 속에 들어가는 자가 복음의 흐름을 타는 진짜 제자다.
중국의 제자들 중에 의지할 사람도 없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오해를 받고 전도의 기쁨을 포럼 할 동료도 없는데도 현장을 가는 제자들이 있다. 복음의 흐름을 타는 자는 반드시 자신과의 외롭고 고독한 영적싸움을 하는 쪽으로 하나님이 몰아가시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적싸움을 하는 제자는 그렇게 2,3년 열병처럼 앓다가 강한 잡초처럼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바울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가? 바울의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고전9:23 복음에 참예하기 위해, 빌3장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가치를 뚜렷이 발견한 사람만이 영적싸움을 할 자격이 있고 진정한 영적싸움을 하게 된다. 당장은 육신적으로 사는 것이 너무 즐겁고 좋지만 그 결과는 유대인과 같이 되기에 내 육신이 마귀에게 길들여진 생각, 인격, 체질을 버리는 영적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기도제목은 뚜렷했다.
복음의 참예함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흐름을 타는 사람은 기도의 집중력이 있어야 한다. 뚜렷한 내용이 있다면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5분을 해도 뚜렷한 내용이 있으면 집중력이 생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임마누엘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있음에도 믿지 않고 세계복음화 하나님의 일 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박수무당, 십자가의 원수야, 날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리스도로 도전하기 보다는 주저앉기를 원하는 내 안에 십자가의 원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놈, 교회에 걸림돌이 되게 하는 내 안의 마귀, 끊임없이 당 짓고 이간질 하는 내 안에 이간의 영, 권세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깨어지고 저주받고 떠나갈지어다!’ 이것이 창3:15흐름을 타는 사람이 가진 뚜렷한 내용이다.
뚜렷한 내용으로 사단을 향해 정확하게 쏘는 저격수가 되는 비밀이 예배와 기도다. 이 과정 속에 자신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저격수와 같이 영적싸움을 할 때 영원한 축복이 임할 줄 믿는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죽는 날까지 두려움 속에 사탄의 권세 아래 운명에 묶여 이 땅의 저주 속에 헤맬 수밖에 없는 근본의 문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장받은 인생으로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문제 속에 반복적으로 시달리게 만들어 한계에 묶이게 하는 다른 영이 있음을 깨닫고 창세기3장의 올무에서 벗어나 내가 있는 현장에서 영권을 회복하는 개인의 변화가 시작되게 하옵소서. 한 주간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달은 행복한 전도제자로서의 삶을 발견하여 뚜렷한 기도의 내용과 영적싸움의 집중력 속에 복음의 흐름을 타는 영원한 응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