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권력과 위선적
종교 앞에서도 당당한 바울
행24:10~23
2016.10.16 1부 말씀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 나름의 종교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도 다르고, 목표와 방법도 다르다. 제 각각 서로 다른 방법, 목적, 방식으로 믿기 때문에 성도들은 많은 혼란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대한 절대 확신이 없다. 예수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끝내셨다는 '절대성' 이 없다. 그래서 각종 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적문제로 영적인 병을 앓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 오늘날 성도들이 확신 없는 신앙생활 속에 영적인 문제와 질병에 시달리는 이유는 창3:15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3:15로 시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인간의 근본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창3:15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 중심의 옛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귀신들린 종교사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것을 네피림이라고 한다. 그 네피림 시스템 속에 큰 용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 용사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육체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형식주의가 되어 외식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평상시에는 부모님에게 싹수없이 행동하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식사하셨어요? 어머니, 용돈 드려야죠" 하고 부부간에도 교회 와서는 손잡고 "여보~" 하고 직장 가서도 다정다감한 것처럼 자랑도하지만 집에 가서는 완전 다르게 행동하는 외식주의적 신앙 속에 가정 따로 교회 따로 직장 따로의 삼중생활을 하고 있다. 자기 인격이 따로따로다.
그 뿐 아니라 기본적 자기 생각에 꽉 잡혀서 고집만 세다. '나' 라고 하는 자기중심을 가지고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3장 사건이다. 자신이 신이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하며 자신이 하나님 보다 더 위에 있다. 방식도 다르고 섬기는 목적, 방법도 다른데 이것을 어떻게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창3장에 갇혀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법이 오로지 성공에만 묶여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고 하지 않고 뭔가 목적을 이루고 성공을 위해서만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 중심적으로 살게 만드는 창세기 3장의 옛 사람과 옛 종교, 옛 믿음을 산산이 무너뜨려야 한다.
창3장 신앙생활은 몸부림치는 종교 사상이다.
자신도 모르는 개인의 문제가 찾아들어와 마음과 생각 자체에 정신병이 오고 있음에도 밥 먹는 문제 해결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왜 오는지도 모르고 살아간다. 문제는 창3장 때문에 오는 것이다. 창3:15로 창3장을 깨부수면 문제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왜 찾아오는지도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갈등하며 시험 들어 있다. 목사에게 안수라도 받으면 인생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다가 결국은 문제 해결을 위해 신학까지 한다. 결국은 사명도 없이 목사 안수는 받지만 그냥 놀고 있는 목사들이 태반이다. 우리 삶에 문제가 왜 왔는지 알았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다.
목사로서 자기 아내 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지 못한다면 목사 자격이 없다. 창3:15 그리스도로 옛 사람을 밟으면 섬김의 자세로 바뀐다. 군림과 명령, 다스림에서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서게 된다. 창3장 인간의 근본문제,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낼 때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세상에 교회의 목사 사모는 정말 존경을 받아야 함에도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 몸속에 창3장의 근본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사모님에 대해 흉을 보면 굉장히 좋아하고 그런 말을 조금 듣고서는 엄청 부풀려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런 자들이 사단의 회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흥분하지 않고 흑암을 꺾어 주는 것이 예수 생명을 가진 진정한 공동체 이다.
* 성경의 절대적 당위성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오직 이 한 가지를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이 끝났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율법을 저절로 지킬 수 있다. 창3:15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뱀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이 없이는 율법을 지키라고 해도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할 때 저절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되기에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그만하고 강한 자를 결박해라.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이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상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 선지자들이 기록한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로만 가면 된다. 구약과 선지자의 말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선지자가 한 말이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 임마누엘이라 하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이제 우리 안에 함께 하신다. 이것이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접할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이다.
그리스도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며, 인간의 기구한 운명, 죄의 권세, 사망 권세, 사단의 지옥권세를 십자가에서 다 끝내시고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열어주셨다. 성삼위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몸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길을 여셨다. 그 능력을 가지고 사단을 결박하고 악령을 떨쳐버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싸우지 않고 방어하는 능력을 가지면 말씀을 이루는 주의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 들게 된다. 그 때 우리에게는 세계복음화라는 절대적 기도 제목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오직 성령충만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면 권능을 받아 우리 앞에 흑암이 무너지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사실을 누림으로 즐기고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오순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단의 근본을 뽑아내야 한다. 시기, 질투를 한다고 해서 법정에 서거나 감옥을 가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싹트기 시작하면 정신착란이 일어난다. 마음과 생각이 파괴되고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게 흥분 되어 자신이 컨트롤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창3:15을 가지고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정신병 속에 살인극이 시작된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나사렛당' 이 되어야 한다.
나사렛 이단 괴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안 되면 구원이 아니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죽는 날까지 성령체험을 받지 못하고 늘 시달리며 살 뿐이다. 예수 믿고 시달리고 예수 믿고 실패하고 두려워 떨고, 예수 믿고 이상하게 쪼그라들어 고개도 못 들고 다니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나사렛당 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신 유일한 이름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마귀에 묶인 것을 풀어내고, 사단의 올무에 묶여있는 인간의 운명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타파하라는 것이다. 자동차는 우리의 골방 중 골방이다. 자동차 안에서 달리면서 사실적인 영적싸움을 시작하면 엄청난 힘이 생긴다.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 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가 너를 꾸짖는다. 내 영혼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을 추방시킨다!’ 큰 소리로 100번만 외치면 처음에는 목이 콱 잠길 것이다. 그런데 꾸준히 하면 뱃속에서부터 힘이 온다. 목사가 이것을 체험하지 않으면 강단에서 조금만 소리 질러도 창자가 꼬여서 메세지가 안 나온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자기의 것을 뽑아내지 않고 터져 나오지 않아서 거의 폐암으로 죽는 것이다. 목사가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면 가장 악랄한 위선자가 된다. 이것을 내가 체험했기 때문에 창3;15만이 답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가족, 성도, 교회 다 죽이는 것이다.
베드로가 행10:38, 나사렛당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절대적 메세지를 했을 때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기 시작했다. 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갈릴리에 다시 고기 잡으러 갔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붙잡아 조반을 먹이신 후 마가다락방 속에 집어넣으셨다. 그리고 마가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자신과 영적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에게서 선포된 말씀이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2-3장, 이것이 부활의 예수님을 사십일 동안 만나서 받은 메세지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넬료 가정에 보내신 것이다.
아나니아가 이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청년 사울을 꺾어 아나니아 집에서 팀사역을 받게 하셨다. 행9장. 오직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만 바람과 같고 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다.
* 바울은 세상의 권력과 위선적 종교 앞에서도 당당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확신과 내용이 있었다
벨릭스 총독 앞에 선 바울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을 때 그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듯이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 섰다는 것은 죽음 앞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의 속국에 잡혔던 유대인들은 사형 재판권이 없었다. 벨릭스는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아주 악랄하고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앞에 서서 생사가 달린 이 재판 앞에 바울은 너무나 당당했다.
문제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는 사람은 당당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어디서 오는가? 요8:44 때문에 오는 개인의 문제이다.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그 놈에게 속아 문제를 받은 것이다. 마귀에게 속지 않으면 바울과 같이 당당할 수 있기에 문제 앞에 인본주의 하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사도 바울 마음 깊은 곳에는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결단할 수 있었다.
“너는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했던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거하게 되리라" "너는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믿음 속에서 던진 모든 언어 속에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었다. 세계복음화에 눈을 뜬 자가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하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가이사 황제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게 되리라” 이렇게 바울과 같이 ‘말씀’ 에 사로잡힌 자 되라.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육신의 생각’ 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순절 날 새 술에 취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취해 우리 인생의 문제가 끝났음을 실감해야 한다. 우리를 담당하신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에 취하게 만들고 말씀에 사로잡히게 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볼지어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져야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증인되리라” 말씀하셨기에 말씀 속에 힘을 얻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방어하면 세상 풍습 속에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끌려가지 않고 사람의 말에 요동치지 않는다. 그러면 주의 천사가 드디어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변명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육신의 생각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가?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 사람의 말을 전하는가 아니면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먹고 사는 말을 하는가 아니면 창세기 3장에 놓여있는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려는 전도의 메세지를 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왜 이런 핍박을 받아야 하고 문제 속에 시달려야 하는가?
바울이 믿는 것은 벨릭스나 제사장이 가진 것과 달랐다.
그들이 전하는 말과 바울이 전하는 말이 달랐다.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자기의 인생에 핍박이 왔고 재판을 받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해결할 문제이기에 거리낌없이 하나님 앞에만 서면되는 것이라는 확신 속에 벨릭스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하는 의지가 온 것이다.
전도자 바울의 자세가 이렇게 달라졌다. 분명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표정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악한 벨렉스 총독을 바라보는 눈빛의 표정이 달랐다. 하나같이 벨릭스를 향해 아부를 했지만 바울은 벨릭스를 향해 ‘너도 구원 받아라’ 한 것이다. 사마리아 성에서, 예루살렘, 가이사랴에서 총독을 지냈던 벨릭스는 바울의 표정을 보고 바울에게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행24:10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벨릭스가 포악한 살인자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믿는 신,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표정이 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고 사람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밥 먹는 문제를 말하고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바울은 고난을 피하고자 하는 구차한 자세를 갖지 않았다. 이 사건을 모면해야겠다는 비겁한 모습이 아니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 바울의 강하고 담대하고 선명함과 진실 된 그 용기 있는 모습이 나타나자 벨릭스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당신으로 인하여 우리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찬미하는 소리만 듣다가 다른 말, 다른 믿음을 듣게 된 것이다. 예수가 누구이며, 부활과 생명이 무엇이며,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정도로 강한 감동을 받았다. 바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간단하게 전파했다. 나는 고난을 당하고 사형을 당해도, 어떠한 결정이 내려져도 상관이 없다는 강한 용기가 바울의 영혼에서부터 흘러나왔다. 그래서 오직 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한 가지 연유로 인하여 고소를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방에서 전도를 하다가 예루살렘에 온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음에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신을 핍박했기에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전도자 바울이 죽음 앞에서도 절대적으로 표정관리를 했듯이 우리도 전도자로서의 표정을 갖춰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래서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세상에서 환란을 당해도 담대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었음이라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자신을 이기는 능력과 담대함, 방어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충만한 은혜 가운데 표정 관리만 했다.
행24:23 "백부장을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나 수종하는 것을 금치 말라 하니라" 이런 바울을 벨릭스는 비서까지 붙이고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게까지 했다.
'바울아, 너는 누구냐? 바울아, 너는 무슨 일을 하느냐?' 바울이 자신을 향해 메세지를 던졌듯이 우리 자신에게 한 번만 질문해봐라. 본문을 통해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모습을 얼마만큼 만들어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수고하는가?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는가? 무엇 때문에 힘쓰고 사는가?’ 바울은 이런 질문들을 늘 자신에게 영적싸움 속에 던졌기 때문에 표정이 달랐다.
먹고 사는 문제에 걸려 나 중심으로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라. 하나님 섬기는 일 때문에 힘쓰며 양심에 거리낌 없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나는 영적싸움을 했노라. 밥 먹는 문제 앞에 절박하지 않기 위해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싸움을 했노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가 사시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영을 가지고 나는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은 자신이 핍박을 받고 문제가 온 것이 섬기는 길이 다르고 말씀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저들이 말하는 이단이라고 하는 도를 좇기 때문에 자신이 문제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단이라고 하는 이 도가 무엇인가? 그 도가 바로 '기독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답에 대해 절대성을 가지면 로마까지 가게 된다는 결론을 바울은 알게 되었다.
행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바울은 자신을 핍박한 자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을 다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도를 통해 선지자가 기록한 모든 것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누리면서 지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이 복음을 모르면 죽는 날까지 종교 속에서 예수만 믿다가 이상해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가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 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도 다 끝났다는 확신을 가지면 어떤 사람 앞에 서도 막을 자가 없다. 벨릭스 같은 악한 총독도 움직여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셨다. 배를 만들지 않아도 벨릭스 총독이 배를 태워 로마까지 가게 했다. 예수의 도,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 엄청난 축복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장 가야바도 하나님을 섬겼다. 그런데 왜 이 둘이 충돌하고 원수가 되었는가?
예수님을 대적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살인과 광기뿐이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사람에게 살인의 광기를 주신 적이 없다. 결국은 섬기는 것이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섬기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주셨기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다”(요14:9) 고 말씀하셨다. 이 축복을 가지고 한 주간 승리하기를 축복한다.
* 언약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권력과 위선적 종교 앞에서 인본주의와 나 중심의 목적과 방법 속에 나만을 위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 시대에 오직 창세기3장 15절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성이 믿어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이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듯이 인생의 어떤 문제 앞에서도 나 중심으로 살았던 요8:44 옛 사람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는 믿음 속에 말씀을 따라가며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가진 자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있기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정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