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 큰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롬5:6~11
2017.07.09 1부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을 1인칭 해봐라. 그러면 우리 자신에게 전도를 하게 된다. 말씀이 자기 영혼에 임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살아 움직여 자신에게 전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한 내용을 갖게 된다. 그 내용을 가지고 기도 속에 들어가야 그것을 ‘응답’ 이라고 한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놓고 오늘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처럼 살게 만드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튼 불신앙이 빠져나가야 한다
우리 안에 불신앙으로 똬리를 튼 사탄, 마귀, 악령, 이간자,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네 수준으로, 그런 상태로 있으면 되겠냐?’ 하고 자꾸 수준 타령을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차라리 뻔뻔하게 낫다. 뻔뻔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 내면이 어떤 수준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수준이라는 것은 사탄에 의해 길들여진 율법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가치를 알면 차라리 뻔뻔하게 훨씬 더 낫다. 뻔뻔하지 못하면 나중에 정신병이 온다. 처음에는 자기 기준에 굳어져 웃지도 않다가 나중에는 억지로 웃는다. 이것이 정신병이다. 정신병자, 노숙자들은 그냥 웃는다. 그러다가 왜 웃냐고 서로 싸운다. 그래서 노숙자들 있는 곳은 늘 싸움이 일어난다. 자기 수준에서 율법적으로 매이게 만드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라.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수준으로 살지 말고, 자기 머리 좋다는 것을 믿지 말고 성경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보다 머리가 좋으면 믿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 보다 머리가 좀 나쁘다고 생각하면 믿어라. 어리석은 수준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믿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 말씀을 주셨다. 말씀으로 확인하고 들었다면 믿어라. 믿고 행동하면 되어 진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라.
이것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날도 새로워진다. 우리 렘넌트들 중에서도 늘 구원의 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자들이 보내준 편지는 반드시 박스에 모아둔다. 만약 나중에 헛소리 하면 지금 네가 교만해진 거라고 그 편지를 다시 보여줄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처음에 발견하면 감격, 감사하면서 “목사님 비행기 사드릴께요, 집 사드릴께요.” 한다. 그런데 말로만 한 사람들은 바람 따라 다 나갔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다가 옥에 넣고 간접살인도 하는 그 상황에 있을 때가 있었다. 혈기가 왕성하고 살인의 영이 자기 영혼을 덮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던 사람이었다.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는 그 현장에서도 제압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제자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바울을 벼락이라도 맞아 죽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울을 사랑했다고 말씀했다. 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서 ‘오늘도 또 창3:15이냐, 또 뻔한 거 아니야...?’ 이렇게 비꼬는 사람이 있어도 괜찮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연약할 때도, 죄인의 길을 걸을 때도, 내가 오만하고 교만하고 거부할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나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최고의 멋있는 때가 되길 축복한다.
사람에게 가장 두렵고 겁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 이다.
‘내가 혹시 죽지는 않을까? 내가 혹시 지옥에 가면 어떻게 하지?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 저주와 재앙이 임하지 않을까?’ 밑져봐야 본전이니 일단 하나님을 그냥 믿으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런 수많은 생각으로 끌려간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문제를 끝내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놓으셨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살게 되어있다. 원수 짓을 하고 있어도 초점을 맞춰라. ‘내가 죄사함을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이런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라. 연약하고 두렵고, 떨림이 있을 때도 십자가 예수에 초점을 맞춰라. 이것만 하고 있으면 어느 날 “때가 됨에...” 되어 진다. 그래서 예수사랑교회에서는 연약한 사람, 죄인, 원수 되는 사람이라도 붙어만 있으면 반드시 되어 진다.
인간은 근본문제로 인해 두려움이 이미 영혼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믿음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데도 안 믿어진다.
그냥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성령이 임했다고 착각하지만 그런 사람은 얼마 못가 진리를 찾아 엉뚱한 곳에 앉아있다. 교회에서는 억지로 믿게 하려고 프로그램을 만들지만 성도들은 이미 이단으로 다 빠져나간 상태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종교인들의 모습이다.
우리 마음에 왜 믿어지지 않고 자꾸 두려움만 찾아오고 교회를 다녀도 죽는 문제 앞에서 왜 두려워하며 지옥 갈 것에 대한 의심이 우리를 지배를 하고 있는가? 딱 하나, 바로 죄 때문이다.
죄의 창설자가 사탄이다. 하나님은 죄를 만드신 적이 없다. 사탄이 만들어낸 죄의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매일 시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탄에 묶여 있는 것,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 사탄의 틀에 있는 것이 죄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죄의 개념은 전부 “밥 먹었어요?” 물어보면 안 먹었는데도 먹었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고추밭에서 고추 하나 따 먹으면 속에서 ‘더러운 도둑놈...’ 스스로 이런 것이 올라온다. 그 때 내 속에 도둑놈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자를 보고 ‘안 본 걸로 하옵소서. 마음으로 짓는 것도 간음이라고 했는데...’ 하면 간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점점 음란의 병은 높아지고 커진다. 전부 생각으로 이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요13:2 마귀가 가룟유다 속에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사탄에 묶인 상태에 생각이 자꾸 들어간다. 그래서 내 영혼을 뭔가 해결해 주는 곳을 찾아 이상한 이단 종교로 돌아다닌다. 성철같이 착한 사람도 처자식 다 버리고 깊은 산에 들어가 살았다. 16년을 나오지도 않고 계속 앉아만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 인생은 동전과 같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돈에 끌려간다는 것을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이 만 갈래나 된다고 했다. 법정도 무소유를 주장했지만 재산을 챙기고, 석가도 죄의 문제 하나 해결 못해서 집나가 돌아다니다가 설사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목사도 사명감을 가지고 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죄의 문제, 지옥 문제를 해결하려고 진리를 찾고 신학도 공부하고 다양한 책을 읽다가 목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다.
곧 자격이 없는 자가 구원을 받았다. 인간은 원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죄의 삯으로 인한 사망상태였다. 죄의 삯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이 기구한 저주에 묶여있는 자격 없는 나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것이 진리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3장 원죄로 인해 우리는 종교라는 틀에 박혀 버려 육체로 전락되었다. 그래서 심판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심판을 모면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집 짓고 땅 사고 시집가가고 장가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람의 딸을 취하는 육체로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세상 지도자들이 거짓된 성공을 말하며 자꾸 돈만 벌라고 한다. 전 세계 돈이 60억조달러 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10%밖에 돌지 않는다. 만약 90%를 나눠줘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탐욕을 가지고 자꾸 쌓아놓는 것이다. 누구의 힘으로 이렇게 하는가? 이제는 운전기사도 쓰고 싶지 않아서 로봇인간을 만들고 심지어 로봇으로 부인까지 얻는다고 하는 시대가 왔다. 탐욕과 탐욕이 쌓여 인공지능까지 가게 된 것이다. 모기가 콧구멍만 살짝 건드려도 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인데 오직 탐욕에 잡혀있다. 코끼리가 코를 돌려 얻어맞아 죽는 사람이 150명이라고 하고, 입 벌리는 하마를 들여다보다가 잡아먹히는 사람이 100명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요8:44로 장악되어 자격이 없는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구나’ 이것을 성경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언제 주셨는가? 내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고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하면서 마음을 확 열어라.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느껴야 한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의 예수, 날 위해 오신 예수,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두 세 번씩 고백해봐라. 그러면 딱딱하고 굳어져버린 사탄의 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그 이름은 행동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름을 찾고 불러야 한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이었고, 원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부르지 않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으로만 열매 맺게 하셨다. 그래서 내가 연약할 때도, 죄인으로 있을 때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져 있다할지라도 부르고 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덮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와 그 부활로 확증시켜놓으셨다. 우리가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다 덮으셨다.
강한 사탄의 폭탄이 날라 올 때 그 분이 나를 껴안으시고 자신은 폭탄의 파편에 의해 다 터지고 옆구리까지 파편이 들어와 창자까지 다 도려낼 만큼 강력하게 나를 덮으셨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얼마나 감격이 있는가. 매일, 때마다 갖게 된다면 치유가 되고 모든 것이 다 살아난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행동하고 효과적인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면 역사가 시작된다. 이런 사람은 행1:8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떡만 먹으려고 하고, 집을 먼저 지으려고 하고,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자꾸 옷을 해 입는다. 발가벗긴 채라 할지라도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불러라. 내가 무화과 나뭇잎을 만들어 입어봐야 말려 올라가고, 박 넝쿨 그늘에 있어봤자 벌레가 와서 뜯어먹으면 머리가 벗겨 질만큼 뜨거워 살 수가 없게 된다. 일본뇌염이 눈 옆에만 살짝 물고 가도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두덩이 붓는다.
예수그리스도를 부르면 어느 날 보호함을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아 증인이 된다. 그런데 늘 자기 수준을 가지고 ‘지금은 못 부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신 것을 다음에 부르죠. 우리 구원자로 오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당장 부를 수는 없어요. 당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는 않아요. 때가 되면 부를께요.’ 이렇게 말하는 자를 멸망상태라고 한다. 하나님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 그 이상은 없다.
십자가로 모든 문제를 다 끝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십자가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느끼고 싶다면 그 이름을 자꾸 불러라.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할 고문, 수치심, 부끄러움, 침 뱉음을 다 당하셨다. 사탄이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아시고 그분이 친히 다 담당하셨다.
그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부부간에 교회를 못 올만큼 싸우게 되고, 사탄이 공격해오면 질병으로 일어날 수가 없게 된다. 예수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았음을 믿는다! 내가 연약할 때, 죄인이었을 때, 원수가 되었을 때 나를 구원하셨다는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느끼면 구천지인지 개천지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돌아다니는 것이다.
인간이 뉘우치고 뉘우쳐봐야 죄인이다. 아무리 선행을 하고 선행을 해도 다 뜯길 뿐이다. 일생동안 노력하고 살아도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은 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로만 해결된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호적이 올려서 그 나라 신분을 가진 자로 기록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시민권자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것을 자신이 믿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편안하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십자가 죽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음껏 즐기길 축복한다.
*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 더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구원의 감격과 감사 속에 즐거워하는 자가 되라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해라.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가 우리에게 충만해진다.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의를 그분이 확증시키셨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하나님 앞에서 공포하노라!’ 하고 하나님이 딱 찍으신 것을 인침이라고 한다. 이것을 믿으면 내가 연약할 때, 죄인 되고 원수 되었을 때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자랑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없이 의인이 되면 교만해질 뿐이다.
하나님이 그의 의로 확증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시는 능력과 지혜를 십자가로 확증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대하시는 폼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자녀 된 신분으로 나를 대하실 뿐 아니라 능력과 지혜로 대하신다. 부활의 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굉장히 신학적이면서 신앙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오는 고난은 죄인의 고난이 아니라 의인이 고난이다.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이 들여다보신다. 그 의인의 고난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청하고 두드리면 하나님의 보좌의 축복은 집중되어 간다. 이제 불의한 자의 고난이 아닌 하나님 자녀로서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구속의 사랑으로 내 생애 모든 의미를 바꾸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문제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것이다. ‘사망아 질병아 가난아 무능아, 모든 저주는 그리스도 예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사람의 지혜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로, 그리스도로 도전해 갈 지어다. 원래 나는 무능하고 하나님을 떠나 원수 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십자가 구속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내 안에 머물러 계시니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대하신다. 자녀 된 신분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더러운 저주의 영을 내어 쫓는다. 우리 가정을 끊임없이 어둡게 만들고 기쁨을 사라지게 만들며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저주의 영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빛의 영광이 머무를 지어다!’ 이렇게 십자가 예수의 죽음의 가치를 복음으로 승화 시키는 것을 전도, 기도라고 한다.
십자가 예수의 죽음은 곧 죄와 사망과 사탄, 율법과 진노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졌음을 믿는다면 사망과 지옥권세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받아라. 사탄의 권세로 벗어나는 것은 율법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율법에 매이지 않는 자는 이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내 인생 살아가는 여정 속에 그리스도 그 이름을 적용시키기 위해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이름을 가지고 행동적 믿음을 가지라고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상황으로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와 있었다. 죄의 권세로 장악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와 있었고, 내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이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못 알아들었을 때도 하나님은 나에게 빠져 나오도록 하늘 군대로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도 이미 하나님이 나를 예수사랑에 앉도록 계획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왔다는 뜻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연약한 죄인, 원수 되어졌던 나를 부르시려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감격 속에서 감사만 회복하면 끝난다.
인간적 관계에서도 감사만 하면 다 끝난다.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 나를 왜 6살 때 백정 집에 잠시 팔았습니까? 그 때 참 깊은 상처가 나서 살아가는 날이 깊은 눈물이었습니다.” 했더니 우리 어머니가 “네가 내 뱃속에 있을 때, 내가 젖을 빨았을 때, 네가 걸을 때까지는 나의 도움을 받으면서 컸던 것은 기억하지 않니?” 라고 하셨다. 그랬구나, 내가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으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감사가 시작되었다. 뱃속에서부터 다섯 살 때 까지는 기억에 없고 여섯 살 기억으로 사탄이 나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다. 구원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다. 이 축복이 예수사랑 모든 가족들과 전 세계 흩어진 하나님의 제자들에게 임하길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내가 연약할 때 창세전부터 이미 택하시고, 사탄으로 인해 죄인 되었을 때도 나를 건져내기 위해 창세기 3장 15절을 주셨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그리스도로 구원 받은 나를 하나님이 이제는 자녀 된 신분권세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하시기에, 내게 찾아오는 모든 문제는 행동적 믿음을 가지라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훈련인 것을 알고, 날마다 그리스도로 간청하고 두드려 내 생애 모든 의미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정복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와 있음에 감격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신분권세로 즐거워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