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법을 이기는 하나님의 법, 예수는 그리스도
롬7:14~25
2017.09.03. 1부 말씀
우리나라 부자들은 명절 때 가족들과 모여 밥을 해 먹지 않는다. 좋은 휴양지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온다. 하지만 늘 가난한 사람들은 모여서 지지고 볶다가 마지막 날 싸워 원수 되는 일을 반복하는 삶을 산다. 자신의 직감이 주인이 되어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직감을 주는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해봐라.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내 마음을 움직이는 주인이 있다. 우리 마음을 무엇 인가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감지하는 사람이 없다. 직감의 주인이 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다. 우리가 가진 직감으로 살면 반드시 그 사람은 멸망한다. 우리는 말씀 따라 말씀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 직감대로 살게 하는 악령, 죄의 권세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음을 깨닫고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가야 한다
뭔가 둔갑시키기에만 급급한 신앙생활을 하지마라. 마술사가 수건 속에서 비둘기를 쨘~ 하고 내보이는, 하나님은 그런 마술사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뭔가 둔갑하는 식의 변화를 가지려고 하는 믿음을 소유하려고 한다. 베드로가 ‘주여, 내가 지금 당장 죽을지언정 나는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말해놓고 한나절도 못가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우리에게 이렇게 직감을 통해 움직이는 주인이 따로 있다. 이렇게 인생을 살면 어느 날 우리가 예수를 버리고 다른 길로 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직감대로 살면 사건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터뜨린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합리화 하고 변명하게 된다. ‘내가 잠재의식 속에 이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하고 끝마치려고 한다. 사건과 사고가 터지면 잠재의식으로 끝내지 마라. 그러면 죽는 날까지 문제 해결은 없다. 잠재의식으로 끝내려고 하는 이 세상의 지식이 바로 합리화의 옷을 입게 만드는 것이다. 잠재의식 속에 또 하나의 악령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결국은 세상 지식과 학문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다.
우리의 깊은 잠재의식과 무의식 속에 또 하나의 악령, 죄의 권세가 들어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 깊은 내면에 똬리를 튼 악한 영이 지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대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로 뱀의 머리를 박살내라 말씀하신다.
교회에 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뚜렷하게 있다. 창3장15절,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로 반드시 뱀의 머리를 밟아야 우리의 신앙생활은 시작된다. 그런데 성도들은 창3:15을 모른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셨는데 성도들은 마귀의 일을 모른다. 교회 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창3:15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성도들은 상황에 따라 늘 시험 들고 갈등하고 사색하고 이상해진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면 세상이 쉬워지고 재밌고 멋있고 맛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니는 만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간다. 마11:28~29,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면 쉽고 가볍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이것을 배우면 가장 쉽고 행복해진다. 복음의 비밀을 알고 누리면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 전도의 비밀을 알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 가 임하게 된다. 기도의 비밀을 알면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나와 함께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유일하게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세 가지 밖에 없는데 현대교회는 쓸데없는 모든 것을 끌어다가 교회를 종교화 시켜버렸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교회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더니, 영적싸움으로 자신과 세상과 사단을 이기게 되었고 오순절이 임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그 응답의 축복을 우리가 이제 받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통해 구원의 감격,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꽂혀있던 불붙은 화살이 뽑혀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서 감사를 했다가 안했다가 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보고 ‘너희가 종교성이 많도다’ 하셨다. 우리 영혼에 어떤 상황과, 어떤 문제가 엄습한다 할지라도 첫사랑을 잃어버리지 말고 감사를 회복해라. 감사의 고백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해라. 그러면 말씀을 움직이는 자가 되고 그 말씀을 성취시키는 자가 된다. 말씀의 흐름을 타면 기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모두 영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육신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들어와야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진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처녀에게서 생명이 잉태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창3:15의 말씀이 드디어 여자의 배를 빌려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가 나오게 되었다.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인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명령이 영적이라는 말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 마귀를 이기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일 수 있다. 육신적인 생각으로 ‘잘 될거야. 괜찮아 질거야. 하나님이 너를 위로할거야’ 이런 생각은 불교도 한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위로 받는 곳이 아니다.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곳, 지옥권세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얻는 곳, 저주와 재앙을 끊고 막아줄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곳이 교회다. 자꾸 종교성으로 가면 안 된다. 종교성으로 가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놓쳐 죄의 권세가 틈타고 우리 영혼을 파고들어 끌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 영적이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인 눈을 뜨고 너를 바꾸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다. 영적인지 않은 인간을 어떻게 영적으로 바꿀 수 있는가? 요1:12, 계3:20, 영접하는 자 곧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지는 권세를 주셨고, 누구든지 예수 생명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된다. 또한 골1:13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져야만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다고 말씀했고, 요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야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고 하셨다.
* 창3장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정확히 말하면 감옥에 갇힌 상태다
우리가 지금 살아서 삶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갇힌 상태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고독하고 슬프고 허망하고, 알 수 없는 짜증과 원망들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갇혀있기 때문에 무속인을 따라다니고 굿도 하고 점쟁이도 찾아가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불편한 것이 있기에 길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다. 또한 ‘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새들이 뽑아다 준 종이 하나를 의지해서 점을 쳐 그것을 읽고 가슴에 저장하고 지갑에 깊이 꽂아놓는다. 성경 한 구절을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뭔가에 잡혀있다. 나름대로 결심도 하고 행동도 다르게 해보지만 삶 자체가 불신자 상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 거짓말쟁이, 살인자, 욕심쟁이, 갈등을 일으키는 자, 참소자, 이간자, 비진리를 더욱 좋아하는 자.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끌려 다니고 있다.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 나머지 사람을 계속 배신하고 교만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자긍하며 온갖 자만심으로 자기 영혼을 덮어버린다. 딤후3:1~4. 그래서 교회를 다니고 율법을 알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나를 사로잡아 가는데도 이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그냥 회개만 늘어놓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었다. 자신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고통이 있었다고 자신의 깊은 고민을 고백했다.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죄만 짓는 존재. 죄의 권세,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행하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다. 흑암권세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데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몸에서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나를 지배하고 끌고 간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것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우리에게 입력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게 죄만 짓고 산다. 왜? 모르기 때문에. 왜? 시험 들어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알고 영적인 눈을 떴다고 고백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육체를 사단에게 내어준다. 자신을 날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거짓말쟁이로 살고, 이 세상신이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어둠으로 살고, 해가 졌으나 그 분노와 분열이 내면에 자리 잡은 채로 날을 지새운다.
우리 자신을 땅에 닿게 해라. 세상 사람들은 거의 붕 떠서 살아간다. 우리 자신을 땅에 탁 세워놓으면 힘이 생기고 달라진다. 물 속 에서도 땅에 닿고 있으면 힘이 생기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허우적대다 죽는다. 사도바울은 땅에 두고 자신을 관찰하고 사실을 보았다. 오늘날 사람들은 붕 뜬 채로 마술봉을 휘둘러서 비둘기가 나오고 장미가 나오는 것처럼 허우적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녀들이 자신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 속에 진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사실적으로 점검하고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즐겁고 재밌고 진실해진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받으면 하나님의 순결적 사랑과는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을 받아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3:15여자의 후손되신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 사단의 유혹을 밟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 했으면 그리스도의 그 순결 속에 있어야 한다. 순결한 자는 싸우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순결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만큼 영적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속의 사랑을 저버리지 말고 다시 한 번 회복하는 날이 되라. 사단에게 유혹을 받고, 그리스도 사랑의 순결을 점점 잃어 가면 자꾸 다른 예수를 찾게 된다. 곧 다른 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메시지를 따라가려고 한다. 이런 것을 자꾸 용납하고 또 용납하기 때문에 점점 진노의 자녀로 전락하는 것이다.
롬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행하는 바가 다르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고백했다. 내가 소원하는 것과 실제로 사는 삶이 너무 다르게 간다는 것이다. 소원은 세계복음화, 성령충만 인데 이것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원하는 대로 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 안에 원죄라는 DNA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으로 충만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 육신의 영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한다. 영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못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 점점 끌려가게 된다. 아픈 환자가 죄와 사망의 법에 걸려 점점 육신적으로만 생각하고 결국은 육신적인 정보만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그 앞에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평생 ‘나’ 로 살다가 죽은 것이다.
하지만 그 ‘나’ 가 진짜 나 자신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의 권세, 사망 권세 잡은 자가 자신을 끌고 들어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구속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셨다!’ 하면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지 않고, ‘아멘’ 하고는 인터넷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거짓말쟁이들의 수많은 정보를 듣고 따라가다가 죽는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창조하실 때 우리 몸 안에서 모든 것을 자생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 모든 음식을 주셨다. 그래서 입맛만 잃지 않으면 다 회복된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듣는데 기분이 나쁘다면 병든 것이다. 병이 들면 입맛도 없고 매일 먹는 밥이 지겹고 먹기 싫어져 결국 큰 문제가 온다. 그런데 매일 먹는 밥을 지겨워하지 않으면 건강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날마다 그리스도만 들어야 힘이 난다면 그 사람에게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영적싸움 할 때 자유와 해방이 시작된다. 그런데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끌고 가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삼위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말씀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끝내시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성삼위 하나님의 힘을 갖지 못하면 그 순간, 즉시 죄와 사망에 끌려 다니게 된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인생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하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에게 잡히는 것이다.
영적싸움이 없으면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면서 선을 생각한다.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인 줄 알면서도 선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눌린다. 곧 율법이 자신을 누르는 것이다. 또한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도 진리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함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늘 힘이 없이 ‘아우, 난 왜 이렇게 안 되는지 몰라. 하나님이 나는 안 불렀나봐’ 하고만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너는 일어나라!’ 이렇게 선포하면 되는데 ‘진리를 길을 가지 못하면서도 진리를 생각해야 되는 나의 이 고민...’ 이렇게 생각에만 갇혀있다. ‘나의 이 고민...’ 이라고 말하게 하는 놈이 바로 사단이다. ‘너는 하나님 자녀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힘이 없니?’ ‘너는 입심도 좋은데 무슨 일로 이렇게 침묵을 해? 소리 질러, 너의 주특기는 욕이잖아.’ ‘너는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욕을 먹고도 한마디 안하니? 아휴, 찌질한 놈. 뱉어버려. 네 성격에 불을 확 질러버려. 너는 그것이 매력이잖아. 목소리도 크기 때문에 소리 지르고 눈 한번 뒤집어버리면 다 도망갈 거야. 한 번 엎어버려!’ 이렇게 말하는 놈이 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내가 죽음을 당할지라도 나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고 도망쳐 불을 쬐고 있는데 직감이 온 것이다. 자기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직감. 그 때 한 여자가 나타나 “당신도 예수의 제자 아닌가?” 하는 말에 “나는 아니다” 하고 순식간에 뱉어버린다. 사단은 24시간 잠도 안자고 우리를 따라다니고, 우리를 잘 길들여놓고 움직인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는 그리스도” 선포해라. 죄의 권세를 가진 사단에게 당하면 양심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사단이 양심으로 계속 말을 하면서 나를 괴롭힌다. 그래서 ‘너는 양심도 없냐? 그리스도만 하면 되 다 된다고 생각하냐? 가서 사과해. 용서해.’ 온갖 것으로 괴롭혀 결국은 용서하러 갔다가 변명하다가 뺨맞는 꼴이 된다.
롬7:18 “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사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자체가 가식이다. 무엇인가를 행하려고는 하지만 오히려 문제투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생각 하는 만큼 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나약성으로 인해 고민에만 빠질 뿐이다. 자신이 행하는 것을 자신이 모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모순 덩어리로 있는 자신이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합리성을 가지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아놓고 생각하고 사고치고 그 때 생각한다. 사고 터뜨리고 ‘미치겠네... 왜가 왜 했지? 안해야 하는데...’ 이런 스타일을 가지고 산다. 늘 이렇게 불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인생을 살고 있다. 되는대로 행하고 회개와 반성, 후회뿐이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려 시내산에 올라가 40일 낮과 밤을 금식하며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고 그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해서 십계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는데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순식간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십계명을 깨버린다. 그래서 모세는 영원히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했다.
늘 내 속에서 나오는 것, 이것이 내 것이 아니라 마귀 것이다. 그 놈을 깨부숴야 하는데 우리는 되는대로 행동한다. 마귀의 것이 나올 때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늘 사건을 저지르고 ‘주여, 아니되옵니다.’ 하다가 ‘나는 하나님이 안 불렀어... 주여, 나는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늘 반복한다. ‘인생이 왜 이렇게 안될까, 길이 없을까, 진리는 분명 살아 역사한다고 했는데, 그 진리가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 했는데, 과연 그 진리는 어디 있단 말인가...’ 성경의 장장마다 있는 이 진리를 보지 못하면 늘 이렇게 반복되는 인생을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케 하는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다. 그 그리스도를 우리 영혼에 영접하고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마귀의 일을 멸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게 된다. 그 때부터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전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세울 수 있는 내용이 영혼 속에 말씀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너는 담대하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음이라. 흔들리지 말고, 놀라지 말라.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와 항상 함께 계신다.” 이런 말씀이 삶을 움직이면 평안과 누림 속에 여유로워진다. 이제 내 맘대로 살아놓고 회개, 반성만 했던 반복적인 삶을 끝내고 그리스도 그 말씀 따라 성령 인도 받는 삶이 되라.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모세, 베드로, 다윗, 솔로몬도 모두 범죄자였다. 그 죄의 권세가 여전히 우리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만 인생의 해답을 얻게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악령이 죄의 권세로 살아나 순간마다 우리 안에서 무언가로 튀어나온다. 그래서 자꾸 그놈에 의해 말하는 것이다. 말은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 밥 먹고 힘을 얻어 그리스도를 부르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알고 있어야 그리스도 그 이름을 지속적으로 부를 수 있다. 포기하지 말고 ‘어휴, 이 놈의 주둥아리’ 하지 말고 이제 나를 죽이고, 사는 길을 잡아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이 하나의 법을 깨달았는데, 자신을 생포해서 어디론가 끌고 가는 사단의 세력을 보았다. 우리 자신 안에 또 다른 누가 있는가? 나 자신의 형상을 한 마귀. 우리는 원죄로 인하여 병들었기 때문에 병에 포로 되어졌다. 또 하나의 다른 내가 나 자신을 생포하여 끌고 다닌다. 그래서 죄에 사로잡혀 아무리 결단을 내리고 각오를 많이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결단을 해서 ‘주여, 내가 진짜 한 번 새롭게 해보겠습니다. 아멘!’ 각오를 해도 안 된다. 우리는 구제불능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 라고 표현했다. 우리 자신을 빨리 인정해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해야 하는데 ‘나는 할 수 있다!’ 하니까 망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무너뜨려야 한다.
* 기독교 윤리의 상징은 딱 하나다. ‘나는 살아있는 산 제물이다.’
죽은 제물이 살아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땅 끝까지. 우리가 너무 율법으로, 신학, 온갖 이상한 공부로 찌들려 이 말을 못 알아들을 수 있다. 우리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바울같이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외쳐라. ‘내가 불쌍한 사람이구나. 원하는 것은 행치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만 행하는 자, 아무리 보아도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완전 땅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라.
무엇이 보여야 하는가?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보아야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친히 담당하신 저 예수를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저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자다. 보라!
우리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그래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분을 느끼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부르고 영접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을 수 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이기 때문에 절대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외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케 하였다” 고 선포하는 최고의 날이 되길 축복한다. 죄의 권세의 법을 이기는 하나님의 법, “예수가 그리스도” 임을 소리 높여 외쳐라. 그러면 영혼 속에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승리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를 다니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예수가 그리스도' 신앙고백임을 모른 채, 사탄에게 육체를 내어주어 직감대로 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어둠으로 살았던 인생에서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싸움 속에 자유와 해방이 시작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죄의 권세가 나를 지배하여 회개하고 반성ㅎ만했던 반복적인 삶을 이제는 끝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여 말씀오로 명령하고 선포하는 실천 속에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로 나를 세워가게 하시고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보며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리스도를 누려 날마다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따라 땅 끝까지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