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상의 틀을 깨뜨려야 진짜 복음을 만난다
행10:17~33
2019. 08.18 1부 말씀
요20:31에 성경을 기록한 목적, 주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신 것을 모든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 이름으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과 능력의 역사, 영원한 영생이라는 구원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숨결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요1: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은 주일 설교가 응답으로 들리는 것이다. 요1:18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다. 요10:30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다 말씀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 해야 한다. 행5:42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모이든지 흩어지든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했다. 고전10:30에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고 말씀했다.
*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죄의 권세, 사망권세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모르면, 선민사상과 율법주의, 박애주의, 인본주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이 비밀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자꾸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고 한다. 그리고 성경 바깥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한다. 아니면 꿈으로 계시를 받고 싶어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그 이름을 힘입어 강한 자를 결박하라” 고 말씀했다. 강한 자가 우리 성질로 살아가게 하는 것도 있지만 굉장한 무기력 속에 다른 사람을 격동케 하는 것도 있다. 우리 몸속에 있는 그 강한 자, 더러운 것은 우리를 아주 배은망덕하게 살게 만들고 또 아주 건방지게 만든다. 이것이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로 제압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그 권세를 그냥 두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천사들은 실업자로 놀게 된다. 원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단 권세 아래 완벽하게 묶이는 것이다.
고넬료가 왜 베드로를 초청했는가? 왜 천사가 베드로에게 고넬료 가정으로 가라고 했는가? 하나님이 왜 김서권 목사님과 동시에 만나게 했는가? 이것을 알면 응답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권세를 망각해버리고 육으로 살기 때문에 어느 날 다가올 저주와 재앙을 막을 길이 없게 된다. 이번 제주도 사명자 대회 때 목사 안수를 받는 4명의 목사에게 장쇼동 장로님이 권면의 메세지를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강단 말씀을 잡으라고 했다. 강단의 메세지를 붙잡지 않고 목회자가 살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단의 메세지를 듣지 않으면 응답이 없다. 중국은 얼마든지 통역 메세지를 통해 제자를 확산시켜 나갈 수 있다. 굳이 돈을 투자해가면서 교회당을 만들 필요가 없다. 자신이 전도 현장 속에서 전도하고 제자를 찾아 세울 시간표다. 하나님께 메세지를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천사에게 메세지를 듣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듣는 그 강단 메세지를 성취시키고 응답으로 붙잡는 중국 제자들이 일어나는 것에 놀라웠다. 사단 권세 아래 묶여있는 것을 먼저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로 풀어내지 않으면 개인과 가정, 산업, 만남이 재앙이 된다. 이 땅에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존재하고 옛 뱀이 하늘에서 내어 쫓긴 자, 온 천하를 꾀는 자가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며 돈이 있든 없든 세상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니며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그의 영을 받음으로 어느 날 시간표에 의해 늙어버리면 아무런 힘도 없이 그냥 슬피 죽어 가는데, 또 그냥 죽는 것도 아니다. 병들어가고, 정신병으로 시달리고,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면서 인생을 마감하며, 죽은 이후에는 더 큰 저주가 기다리고 있다.
성경에만 이러한 인간의 진단서가 기록되어져 있기에, 이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는 자들은 바로 창3:15 비밀을 담은 전도자를 만나야 한다. 우리가 원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사는 날 동안 자범죄 가운데 가문으로 흐르는 이 저주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원죄 문제, 사단의 문제, 가문의 저주를 그리스도의 권세로 깨뜨리지 못하면 살아가는 삶이 매일 인품과 성품 속에 문제가 찾아온다. 그래서 훌륭한 인품과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뭔가 시달린다. 인간의 영적상태는 절대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중국에서 온 한 귀부인도 자신이 가난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부자로 살고 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는데, 목사님의 메세지를 듣다 보니 생활 속에서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것이 자기 마음에 왔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생활 속에 주인이 되면 행복해진다. 주일 한 번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세지를 듣고 그 메세지를 계속, 매일 들으면 행복해진다. 우리의 인품과 성품에 시달리는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살아야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못하면 매일 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어떤 공격을 받는가? 우리의 영적상태가 이상해지면서 정신문제가 온다. 요즘은 아파트 문과 문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엄청난 전쟁이 일어난다. 정신적인 문제로 앞집에 사는 사람이 자기에게 뭔가 해코지 하는 것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남의 집의 사람이 자신을 향해 불화살을 쏘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남의 집에 찾아가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이상한 짓도 한다. 아니면 남이 집 문 앞에 걸어놓은 꽃 같은 것을 사정없이 뜯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그 앞에 오줌을 싸는 사람도 있고, 불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찾아오는 문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매일 누리지 못하고, 그 이름의 권세를 매일 사용하지 못하면 정신적인 문제도 올 뿐 아니라 육체적인 삶의 균형이 깨져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중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주셨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온 천하를 꾀는 자,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라. 그러면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그 이름이 항상 함께 하신다. 그러면 마16:16 언제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운명을 바꾸는 한 번의 기회가 와음에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운명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고백이 되어야 운명을 바꾸는 기회가 온다. 그래야 우리가 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다. 그 때 하나님은 “너는 베드로라, 네 고백 이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 “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하여 속되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이상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게 되면 새로운 하나님이 축복은 시작된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 애를 낳았고, 라합은 술장사로 돈을 번 기생이었으며, 밧세바는 창문을 가리지도 않고 옷을 벗고 목욕을 한 여자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고백한 자들이다. 사도바울도 신학적으로는 최고의 지식을 가졌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지만, 원죄로 묶인, 사단에게 장악된 몸뚱이 하나로 해결할 길이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이라고 고백했다. 우리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내 인생 살거야’ 한다면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살지 못하면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악을 쓰던지, 거품을 물고 머리를 쥐어뜯던지, 탄식하며 울던지, 술을 마시고 이상한 행동을 하던지 하면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몸부림 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백했다.
우리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 기도 응답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행2:41~42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 말씀을 가지고 포럼하고 기도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 속에 있었더니 하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복을 주셨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목사의 설교를 통해 기도 응답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 이 장애물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에 대해 왜 오해와 편견, 알 수 없는 육신적 감각을 장애물로 가지고 있는가? 이것에 대해 말씀한 것이 사도행전 10장이다.
구원 받은 자의 올바른 자세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그리스도 이름으로 와서 마시는 사람만이 그 사람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했다. 고넬료가 목마른 인생 인생이 되자 하나님 앞에서 기도 속에 있었다. 베드로도 구원을 받고 엄청난 사도의 직책을 받았지만 자신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목마름 속에 정시기도 속에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를 사용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만남의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기도 응답인데, 그 기도 응답이 참된 만남이다. 우리가 동시대에 복음을 가진 전도자, 목사를 만났다는 것은 은혜 중 은혜다. 나는 이 복음을 갖기 전까지 엄청난 인생을 살았다. 이 복음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 영혼 전체가 갈기
갈기 찢어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원죄적 고독이 내 영혼을 끊임없이 사로잡아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육신적으로는 율법주의 박애주의 인본주의 신비주의 선지자 노릇까지 다 해봤지만 되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교회 생활을 해도 버려진 자라고 생각했고, 선택받지 못한 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갔다. 그런 중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 창3:15이다. ‘나로 살게 만들었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구나.’
누구나 그리스도의 왕권을 사용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저주와 재앙을 없앨 수는 있으나, 딱 한 가지 없었던 것이 선지자 권이었다. 말씀을 듣는 선지자권을 사용하지 않아 성령의 역사가 몸에서 일어나지 않음으로 망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창3:15의 말씀을 듣는 선지자권이 없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 없이 내 자신의 영적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적 으로는 예수의 동생이라고 인정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지구상에 가장 갈급한 자였다.
그런데 창3:15을 받는 순간부터 나에게는 응답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강단의 말씀을 듣는다. 한 번도 다른 길로 간 적이 없다. 내 몸과 영혼을 무엇이 사로잡고 있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의 길, 진리, 생명이시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알았으니 하나님도 알게 되었고, 너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예비할 것이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에 길이 되라는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하나로 성령의 역사 속에 가는 것이다.
복음을 가진 자와의 만남을 통해 영원한 축복은 일어난다. 그래서 바울이 자주장사하는 루디아 산업인을 만남으로 세계를 복음화 하셨고, 가이오 장로가 복음가진 바울을 만남으로 온 교회 식주인이 되었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산업인이 바울을 만나 하나님은 로마를 복음화 하셨다.
중국 삼자교회를 다니고 있는 평신도 중직자들이 이번 사명자 대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복음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나는 중국의 밑바닥에서 상류층까지를 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행복이 없다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중국에 반드시 복음 운동이 시작될 것을 믿고 중국 제자들과 지금까지 복음사역을 한 것이다.
*말씀을 이해하려고만 하지 말고 순종부터 시작하자.
중국의 목사님들이 나를 이해하고 온 것이 아니라 순종부터 하고 따라왔다. 행10:17 베드로가 속으로는 깊이 의심했지만 사람을 만나 순종했다. 사람을 만나 순종을 시작하면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서 순종하기 보다는 의심을 하고 이상한 오해를 하고 또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악령이다.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흑암, 악령을 뽑아내자. 헛소리 잡소리 하지 말고 행10:20, “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의심하지 말고 일어나라 가라” 하나님의 성령은 이렇게 만남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악령은 오해와 편견, 장애물로 만남을 거부하게 한다. 중국에서 사역을 하는 많은 목사들이 정부를 두려워하고 근심, 염려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는가? 잡히면 가면 되고 총살시키면 죽으면 되고, 순교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주춤거린다. 중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내면 깊은 곳에 공산당 종교사상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무너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석적 이해가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먹으면 응답은 시작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역사하심,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자꾸 뭔가 분석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편다. 우리의 언어가 의심이면 의심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언어 속에 편견이 있다면 우리 몸이 의심으로 장악된 것이다.
그래서 고후10:4~5 이런 더러운 것을 사로잡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복종시키라고 했다. 세상 신, 마귀는 우리를 혼미케 하여 끝없는 의심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래서 확신 없이 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준비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면 베드로, 고넬료 처럼 기도 속에 있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남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의심을 몰아내버렸다. 의심이 찾아올 때마다 ‘권세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천명으로 일하고 있는 내 삶에 의심으로 찾아온 더러운 질병의 저주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선포해라. 공산당 보다 더 힘이 세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 그리스도시기에 중국에 제자들은 공산당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으로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단을 내렸다면 의심을 몰아내고 의심을 사로잡아 결박시켜라. 그러면 신앙적 의지가 생긴다. 그리스도 이름으로 영적싸움을 하면 신앙적 의지가 자녀 된 신분권세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 내면에 길들여진 사단의 전략은 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인생을 살게 한다. 그래서 내 몸뚱이가 기준이 되고 썩어져 없어질 안개와 같은 몸뚱이 하나에 집착하게 한다. 이것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한다. 전도자는 어떤 상황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의심, 오해, 편견도 갖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 되라.
내가 중국 경찰에 잡혀가서 캄캄한 조사실에 갇힌 적이 있었다. 차가운 철제 의자에 앉아있는데 내 위에 불 하나만 켜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30분 정도 지나자 담배연기가 내 앞에 지나가는 것만 느껴졌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두려움도 없고 평안함이 밀려왔다. 집회할 때 경찰관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도 왜 오는지 몰랐다. 그래서 더 강력하게 메세지를 했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내가 두려워 떨었다면 오늘날 중국의 멋진 중직자들은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돈 하나 주지 않아도 자비량으로 함께 사역을 다니고 자신의 집까지 내놓는 제자들이 일어났다. 우리 예수사랑교회 가족들이 응답을 많이 받아서 좋은 중직자들이 복음운동을 할 때 후원하고 돕는 생명이 되기를 축복한다. 자기를 집착하지 않고 자기 기준을 그리스도로 쳐서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프리카에 엄청난 내전으로 위험에 처해있다고 해도 자비량으로 선교를 간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자는 마귀를 대적하는 자가 된다. 약4:7을 우리 눈안에 집어 넣어라. 사람을 보고 오해와 의심, 편견이 생길 때마다 ‘만남 속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더러운 저주의 영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이렇게 마귀를 대적하면 의심의 대가리를 들지 않는다. 의심의 대가리를 들면 사람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보고, 만남을 무가치하게 여긴다. 그래서 영적싸움을 하지 않으면 불쌍한 자가 된다. 사건 속에 직통계시를 보겠다고 하면 심각해진다. 어떤 분이 자신이 57세라고 했다. 그래서 젊어 보이신다고 했더니, 결혼을 안했으니까 젊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왜 결혼을 안했냐고 했더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이가 이렇게 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7세까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했다면 58세부터는 그런 생각들을 아예 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선을 봤다고 했다. 생각 없이 사니까 좋다고 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늘 묶여있다면 결단해라. 이것은 굉장히 나쁜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앞에 무엇이든지 복종시키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만 하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고 늙다가 죽는 것이다.
본문의 핵심은, 사람의 만남에 의심하지 말고 가라는 것이다. 창3:15, 마16:16, 마28:20 가지고 있다면 의심하지 말고 가라. “너는 베드로라, 음부의 권세가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천국의 열쇠를 너에게 주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순종과 명령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떠나면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먼저 강한 자, 생명을 강탈하는 자를 결박시켜라!” 생명을 강탈하는 자는 강한 자라고 했다. 이 강한 자가 내 몸에도 있고 상대방에게도 있다. 기도를 통해 영적싸움하지 않으면 만남은 개판이 된다. 우리의 만남은 기독교를 만들어내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남을 통해 장사를 하고, 결혼을 한다고만 한다면 틀린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사는 자다. 우리가 영적싸움이 없으면 강도에게 잡힌 자가 된다. 우리 자신이 강도에 잡히면 자꾸 자신을 집착하게 된다. 우리의 기준과 틀 속에 잡혀 그리스도를 자꾸만 반대하는 자가 된다.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된다고 마12:28~32에 말씀했다.
*올바른 신앙의 기본자세를 갖출 때 하나님은 제자를 붙이신다
마8장, 예수님이 백부장을 만났을 때 백부장의 자세가 무엇이었는가? “무슨 말씀을 하든지 나는 순종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고 말씀 속에서 응답을 받아 버렸다. 고넬료는 순종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서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를 통해 모든 응답을 다 주셨다. 고넬료가 무슨 체험을 했는가? 자기 기준과 집착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갈보리 십자가 그 죽음의 현장을 목격했던 고넬료 백부장,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창이 찔리고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면서 까지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들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이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다 이루었다!” 이 한 마디가 자기 영혼에 부딪친 것이다. 그 현장을 목격한 백부장은 구제와 경건, 경외, 기도 속에 있었더니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셨다.
그리스도를 주로 체험해라. 고넬료는 하나님이 사람, 하나님의 제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육안으로, 육신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베드로를 들여다보았다. 백부장이 베드로를 ‘갈릴리 촌놈,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자’ 라고 생각하며 무시할 수 도 있었다. 그런데 백부장 고넬료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싶었기에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었다. ‘감람산에서 사십 일 동안 500여명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그 부활이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말씀하셨을까? 하나님 내게 은혜를 주옵소서.’ 기도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면 복음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고넬료는 베드로를 믿음으로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으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책처럼 귀한 소유가 없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경만이 보물 중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은 우리를 고치는 언약이 들어있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 수 있는 말씀이 들어있다. 우리가 무엇 때문이 신앙생활이 되는지 자신을 반문해봐야 한다. 목사의 설교를 기도응답으로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굉장히 구체화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왔다면 교회에 흐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순종의 마음이 있다면 틀림없이 응답을 받게 된다. 고넬료 가슴에 무엇이 있었는가?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그는 감람산에서 부활의 주를 본 자요, 그리스도로 인생을 다시 새롭게 도전한 하나님의 제자다” 또한 베드로는 무엇을 보았는가?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독교를 만들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고넬료를 통해 로마를 복음화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두 사람의 고백한 것이, 행10:26, ‘우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너와 나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다’ 였다. 자신의 페이스를 상실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경배를 받으면서도 스스로의 존재 위치를 잊지 않고 자신이 사람인 것을 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한 생명 한 생명을 사랑하면서 이 땅에서 종으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귀한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위치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교만하고 배은망덕하고 싸기지 없이 구는 사람이 많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자신의 위치에서 이탈되지 않고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 사람이었다. 목사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 기도의 사람, 평신도를 붙이신다. 그래서 마10:40~42,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접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은 결단코 그 상을 잊지 않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
사무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도 사무엘이 누구의 말씀을 들었는가? 타락한 엘리제사장의 말을 들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직통계시를 줄 수 있는데, 어설프고 이상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제사장으로부터 메세지를 들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한 것이다. 우리가 목사의 설교를 기도응답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 성공자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필이면 늙은 모세냐, 마른 막대기 하나 밖에 없는 늙은 모세의 말을 우리가 왜 들어야 하냐? 하면서 자기들끼리 지교회 한다고 모여서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춤추다가 다 죽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페이스를 상실하지 않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에 들리지 못하도록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완악함의 성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깨뜨려라. ‘사망아, 가난아, 질병아, 무능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영혼에 담지 못하도록 말씀만 거부하게 만드는 악의 세력,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펴질지어다! 원죄적 고독으로 내 영혼을 갉아먹는 슬픔의 저주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깨질지어다! 사람과 만남 속에 의심과 오해, 편견과 수많은 장애물로 내 영혼을 괴롭히는 어둠의 세력은 산산이 무너질지어다!” 영적싸움의 기도가 있을 때 만남은 아름다워진다. 하나님의 축복이 한 주간 함께 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인품과 성품으로 해결될 수 없는 정신과 육신의 문제가 원죄와 자범죄, 가문의 저주를 타고 내려온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강단이 사라지고, 창세기3장 15절,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은 전도자가 없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 사상의 틀을 깨뜨리는 복음을 만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는 강단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자의 설교를 통해 기도 응답을 받기에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면 주일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날마다 들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보호를 믿는 자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만 하고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 의심, 육신적 감각으로 내 몸을 장악하여 생명을 강탈하려는 강한자를 꺾고, 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생명을 담보로 복음 운동 속에 복음과 교회를 사랑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