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현장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
(창/创 30:1-24)
나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일 속에 나의 생각을 각인시킨다.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엄청나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의 일속에, 나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래서 야곱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나의 일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고 하니까 개판 5분 전이 되고 시달리는 인생에 되어버렸다. 그래서 야곱의 가정에 사탄이 아예 폭탄을 던져버렸다. 레아, 라헬의 계집종들까지도 발작 증세를 일으켜서 야곱의 가문을 쑥대밭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 속에 하나님은 개입하셨다. 쑥대밭 되고 엉망진창이 된 그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의 기회로 바꾸신 것이다.
*내게 찾아온 이 복음의 기회를 자신의 생각 속에 각인시키면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일이 나의 노래가 되고, 하나님의 일이 나의 기도가 되고, 하나님의 일이 나의 삶이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은 큰 응답을 주실 뿐 아니라 빛의 경제도 주시고 그 가문을 축복하신다. 절대 불가능의 시스템에서 사라에게 이삭이라는 웃음을 낳게 하신 그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를 보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이라는 말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분’ 이라는 뜻이다. 구원을 받아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나의 아빠가’ 가 되어주셨고, 이것을 믿는 자는 이제, ‘나의 하나님, 나의 주, 그리스도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이 한 가지만 가지면 된다. 엉망진창인 것 같고,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것 같고, 자기의 실수와 약점 때문에 괴로워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은 축복을 기회로 바꿔주신다. 야곱은 끝없는 갈등, 끝없는 실패가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도 ‘왜 안 되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이렇게 몸부림친 것이 아니라 여호와 그 이름을 늘 불렀다. 하나님의 일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야곱이 얼마나 여호와의 이름을 많이 부르고 복음을 누렸는지, 레아와 라헬의 종까지도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남자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줄 대상이다. 자기 부인을 껴안고 있으면서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인생 발작 증세를 일으키다가도 이슬을 맞는 날을 맞이하면 사람은 서서히 꺾이게 되어있다. 그래서 더 이상 남편에게 집착하지 말고, 부인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집착하지 말고 서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인생은 사는 만큼 헛되고 헛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사랑교회는 오직 한 가지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제자가 되어 세계복음화, 땅 끝까지 이르러 정복자가 되고, 순례자가 되고, 이 땅에 남은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나는 남은 자, 전도를 위한 순례자,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정복자로 가면 어떤 일을 만나도 문제 될 일이 없이 다 축복의 기회로 하나님이 바꿔주신다. 본문에, 갈등의 현장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은혜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창3:15의 이 여정 속에서 언제나 성령충만 해야 한다. 창3장의 기질은 오직 창3:15, 여호와 이름으로 뱀 머리를 깨뜨릴 때 변화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 라는 당연성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이 당연성을 가지면 어떤 문제도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문제 속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당연성을 느끼지 못하면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바뀐다.
그리스도의 당연성을 찾으면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소통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그리스도를 늘 각인, 일심, 전심, 지속하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당연성과 필연성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것, 흑암의 세력이 영혼에 들어가면서 엉망진창이 된다. 라헬에게 얼마나 이상한 것이 많이 들어갔던지, 자신이 그렇게 집착하는 야곱을 자기 시녀에게 내어준다. 오직 자식 하나라는 것에 집착해서 자기 시녀를 야곱에게 내 줄만큼 정신질환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당연성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재앙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찾아온 이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게 된다. 결국 라헬에게서 나온 고백은, 창30장1절에, 자살하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다. 야곱의 눈만 보면 계속 죽는다고 협박했다. 그런데도 야곱은 라헬을 좋다고 한다. 자신이 가장 갈급할 때, 목마를 때, 괴로울 때, 고향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갈 때 첫 만남 속에 라헬이 자기 속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바가지 긁을 때는 싫은데 얼굴 보면 ‘좋아’, 죽는다고 해도 ‘나는 네가 좋아’ 한다. 결국은 집착과 욕심이 많은 라헬이 합환채로 야곱을 팔아 버렸다. 이런 상황에도 야곱은 여호와의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 이삭이 평생 불렀던 이름,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
*영적인 힘이 없으니까 레아, 라헬, 빌하, 실바와 얽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과 세상, 환경과 사탄과 영적싸움이 안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네 명의 여자들을 모두 마음에 품었다. 그 결과, 상상외로 험악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표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소통이 없는 사람은 절대 어려운 사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 야곱이 일어난 사건 속에 아무도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엄습해서 자살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만큼 고통의 시간표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스도와 소통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라헬은 자신이 너무 사랑하는 야곱마저도 자기 시녀에게 버려야 하는 운명의 시간표를 맞이하게 되었다. 창3:15, 내게 와 있는 응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한다.
사역을 하던 사람들이 사역을 지속하지 못하고 그만 두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30년 동안 전도 운동하다가 그만뒀는데, 많은 목사님들이 나에게 전화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창3:15의 당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창3:15, 지금 와 계시는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다. 내 몸에 와 있는 언약과 관계가 1인칭 되면, 그분과 소통이 가능하다.
그분이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임마누엘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런 소통이 일심 전심 지속이 안 되고 말씀의 언약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성경 전체의 내용은 알지만, 창3:15 흐름의 시작을 놓치고 틀린 것으로 시작하면 사역은 지속 할 수 없다. 꿈을 꿨는데 예수님을 향해서 막 울었다. 복음도 모르는 사이비 같은 종교 목사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한다고 예수님께 말하며 울고 있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나는 내 가족들, 마리아가 낳은 내 동생들도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그리고 창3;15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나를 바알,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들린 상태로 사역을 한다고 모욕했다. 심지어 온 인류에 구원의 하나님으로 죄의 권세, 사망권세, 사탄의 권세를 멸하기 위해 인간에게 구원 받는 하나님의 힘의 능력을 공급하기 위해 왔는데,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역사 앞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해서 저들과 함께 함에도 부활의 주, 나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깨고 나서 꿈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의 본질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하나님 앞에 ‘내게 와 있는 응답’ 이라는 노래 가사를 쓰게 된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들이 입술로 고백을 좀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나와 함께 30년 세계복음화, 이 복음 운동을 하자고 했던 수많은 목사님들이 왜 지속이 안 되고 그만두게 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만 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창3:15의 흐름 속에 부활의 주, 그리스도, 이 하나로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복음운동을 하지 못하는가? 다른 것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일을 하는 자가 된다. 결국 복음 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목사님들이 삶이 엉망진창이 되어 공황장애가 찾아오고 아파서 병원에 실려 가고, 식음을 전폐하는 등... 여러 문제를 맞딱 들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창3:15, 퀴리오스를 누구라 하느냐?” 하나님은 베드로의 입술을 움직여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하게 하셨다. 이 ‘오직’ 속에 들어갔을 때, 벧전2:9 베드로는 자신이 왕은 아니지만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힘을 갖게 되었고, 제사장은 아니지만 이제는 저주와 재앙을 멸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힘을 갖게 되었으며,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소개해주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주는 대사가 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일심, 전심, 지속하지 않으면 떠나고 무너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 미친 자로 취급을 당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끌려가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를 향해 헛소리 개소리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내 가슴에 새겨놓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이 주신 창3:15의 당연성, 필연성, 절대성을 계속 각인, 뿌리, 체질시켰더니, 어떤 누구도 실천하지 않는 일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한 사람이면 된다. 인간이 창3장으로 인해 갈등과 낙심 속에 있을 때, 창3:15 여호와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을 느끼면 하나님이 축복으로 이끌어 가신다.
*갈등의 현장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예수는 그리스도”를 항상 고백하는 기도 속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수많은 약점과 실패, 낙심이 우리를 끌고 왔다 할지라도, 괴로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고독해하거나 우울해 하지 말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해야 한다. 그 이름만 불러주면 하나님이 드디어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지난날의 모든 과거를 축복의 발판이 되게 하셔서 우리를 전도제자로 사용하신다. 본문을 통해,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의 갈등과 불화, 수많은 집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부르는 야곱을 통해 축복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현장을 볼 수 있다.
내가 과거에 흥얼거렸던 노래 중에 ‘울려고 내가 왔던가...’ 하는 노래가 있었다. 삶이 늘 아픔과 상처를 받다 보니 노래를 불러도 ‘내 작은 가슴에 슬픔을 주지 말아요’ 이런 노래를 부르며 소주 먹고 울었다. ‘난 아직도 어린데 왜 내 인생, 작은 가슴에 상처만 쌓일까’ 생각하며 울면서 진리를 찾아 다녔다. 어느 날은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데 대상이 없어 이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창3:15이라는 것을 알고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부른다.
레아, 라헬, 야곱, 실바, 빌하 모두 사랑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갈망과 갈증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였더니 모든 시스템이 멸망, 배신이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를 갖지 못한 그 고통의 시달림은 여자로서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레아는 자신이 야곱의 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으면서 알 수 없는 공허함과 괴로움이 늘 찾아들어올 때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계속 고백했다. 그런데 라헬은 절대 그 고백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매일 시기 질투 비교의식 열등감 쟁쟁 속에 가면만 쓰고 살았다. 네 명의 여자에게 유일한 관심은 야곱이었다. 레아 집에 가면 레아의 몸종까지 나와서 야곱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이런 것이 우리 몸속에 있다.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몸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람으로부터 간심을 끌기 위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미움과 분노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창30:1, 원망, 불평, 분노, 분열 속에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소리친다. 라헬이 인간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할 일들을 몸에서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내게 자식을 주지 않으면 죽겠다는 것이다. 집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죽겠다고 한다. 죽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헬의 절망의 절규, 몸부림의 절규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그 가정에 한 사람만 있어도 문제 될 일이 없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더 큰 분노와 슬픔 속에 결국 라헬이 한 일이 무속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샤머니즘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합환채도 샀다. 창3장 사탄에 사로잡혀 라헬은 드디어 정신문제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고 자기 몸종 빌하도 남편에게 줬다.
그런데 그 빌하가 낳은 후예가 단지파, 바로 몽골인, 한국사람이다. 빌하는 무속, 샤머니즘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늘 형님, 형님 하면서 라헬을 격동시켰다. 어찌되었든 그로 인해서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샤머니즘이 강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낳은 자식이 납달리다. 오늘날 인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납달리의 후손이다. 레아는 자식을 낳을 때마다 야곱이 자기에게 오겠다는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더욱 갱신과 변화 속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창3:15,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욕망, 슬픔, 분노, 이런 질투의 상황을 축복의 기회로 바꿔 가시는 현장을 들여다보고 이제부터 내게 와 있는 응답,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성령충만하기를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레아에게 하나님은 여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 라헬은 두 명의 아들, 두 하녀들에게 두 명씩 그래서 열두지파를 탄생하게 되었다. 그 지파가 탄생되고 그들의 나름대로 여호와, 메시아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한국에까지 이 복음이 오게 되었다. 하나님이 유대인, 이스라엘을 지구 중심에 불러 세계 복음화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끄시는 것이 잘 나타난다. 우리가 실수로 애를 낳았어도 그 아이가 복음의 역사를 이뤄갈 언약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더러운 흔적, 상처의 감정을 버리고 여호와 그 이름을 부르며 와 있는 응답 속에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완전한 누림이 있기를 축복한다. 열두 지파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갈등과 고통의 현장 속에서 창3:15, 하나님의 계획을 이뤄 가신다. 창3:15의 하나님은 롬8:28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엉망진창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리스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래서 실바, 빌하, 라헬, 레아는 동격이 되어버렸다.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창3:15의 성취를 오해하고 착각해서 이상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미움 받는 민족이 되어버렸다. 나라마다 유대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이 돕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기술 때문이다. 미국의 특허시스템들이 전부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은 과학을 중시하기 때문에 미국의 과학이 유대인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미국이 유대인을 돕는 것이다. 유대인은 창3:15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민사상, 유일신, 그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다른 민족을 전부 짐승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복음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안디옥교회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탄생한 것이다. 예수사랑교회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남은 자, 순례자, 정복자가 되었다. 내게 찾아온 복음의 기회를 정말 누려야 한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등과 고통을 회피하거나 이것 때문에 숨지 말고, 이것을 깨뜨리는 자유와 해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창3:1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요9:1~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맹인이 “예수는 그리스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비밀을 알게 되었다. 이 비밀을 알면 눈을 뜬 것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래서 크로스비는 소녀 때 이 비밀을 깨닫고 자기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을 받아 지구상에 가장 위대한 찬송을 만들어냈다. 눈을 열지 못한 영혼이 그런 가사를 써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람을 생각하면서 감정을 넣고 부르니까 그 찬양이 가슴 속에, 연약함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약점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는 그리스도시오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이름을 많이 부르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임마누엘,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엄청난 하나님의 힘을 공급해주시고, 그 힘으로 전문성을 찾아내고, 그 전문성 속에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는 아픔이나 상처는 영원한 축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내 부인하고는 도저히 내가 못 살겠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그리스도 그 이름을 많이 부르라고 선물을 주셨구나’ 하고 감사하면 된다. ‘도박 중독자로 길을 잃고 24시간 집도 안 들어오는 인간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구나.’ 하고 ‘오, 달링~’ 하면 된다. 우리의 아픔과 약점, 수많은 고통의 문제 속에도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를 때 축복의 기회가 된다.
더 이상 갈등, 문제, 수많은 상처, 약점으로 괴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수많은 문제를 통해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신가를 드디어 배우고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당연성과 필연성, 절대성을 느끼고 드디어 변화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우리를 연약한 상태 속에서 부르셔서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갈등의 현장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작품을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예배의 말씀을 허락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에게 찾아온 수많은 갈등, 낙심, 절망, 분노, 갈망, 관심, 멸망의 시스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그 비밀을 찾아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이제는 나의 생각 속에 스스로의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언약의 말씀을 이제는 내 마음에 새겨놓고 하나님의 일 속에 내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노래할 수 있고 그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되어지는 응답의 사람으로 축복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 살아오는 지금까지의 삶은 엉망진창이고, 정신질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운명의 시간표 속에서도 이미 우리 몸에 와있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인시켜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아무리 무너지고 연약하고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의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라는 그 확신 속에, 절대 불가능을 절대 가능케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오늘 고백하고 노래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의 일이요 하나님의 큰 비밀인 나의 영혼을 치유시키고 나를 열방의 열국의 선지자로 부르셨음을 인정하는 내 영혼 속에 고백이 있게 하옵소서. 기도 없는 신앙은 끝없는 불신앙이요 방황이요 갈등이라고 말씀해주셨사오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일이 나의 생각으로 나의 기도로 노래가 되게 하옵소서. 내 몸에 알 수 없는 모든 무능의 질병들까지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 부를 때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간 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내 일과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사람에게 집착하여 엉망진창의 삶이 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나에게 찾아오시고 내 삶에 개입하셔서 그리스도가 내 삶에 당연성과 필연성이 되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실패와 약점이 나를 끌고 가도 갈등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 나의 주 그리스도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깨달아, 언제나 내게 와 있는 응답, 창3:15 예수그리스도를 부르며 하나님을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 갈등의 현장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하옵소서.
나의 생각 속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를 각인시켜 하나님의 일이 나의 노래, 나의 기도가 되게 하시고, 언제나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오직 그리스도만 하는 전도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절대 목표를 붙잡고 세계복음화 하는 정복자, 순례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