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막/Mark 5:35-43)
창세기 3장 15절, 소망의 근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일어나라’는 음성을 들으면 일어나게 된다. 예수님의 일급제자들과 회당장 야이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녀가 일어나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마귀의 일을 멸하는 만왕의 왕, 인간의 영혼을 춤추게 하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마가복음 5장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창세기 3장 15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하신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 ‘임마누엘’ 함께 함에도 우리는 주저앉아 낙심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이 구주가 시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믿음의 기적이 시작되기를 축복한다.
*양심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게 신앙생활이다
→ 인간의 양심 속에는 죄책감과 두려움뿐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양심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인간 양심 속에는 죄책감과 두려움뿐이다. 양심이 호소하는 죄책감이 인간의 마음에 파고들기에 믿지 못하고 변명하거나 아니면 어떤 편견을 가지거나 사람의 눈치를 본다. 결국 양심에 따라 살려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에 절망에 머무른다.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게 아니라, 불신앙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양심의 호소에 눌리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 구원부터 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의 죽음으로 인해 수많은 오해와 양심 속에 갇혀 절규하고 탄식하며 슬픔 속에 잠겨 있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구원부터 받아야 되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마가복음 5장 22절, 자기의 자존심, 체면, 양심 같은 것은 다 내려놓고 예수 발 앞에 엎드렸다. 목사, 전도사, 사역자, 선교사가 이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 속에 들어간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체면이나 주위의 분위기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늘 우리의 불신앙을 호소하는 양심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믿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언약을 붙잡아야 한다. 이것만이 영원하다.
지구의 역사는 믿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이다. 양심이 호소하는 것으로 살려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기 자신도 이길 수 없다. 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창세기 3장 15절,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살자.
양심이 호소하는 죄책감을 느끼고 살면 하나님의 은혜,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어려움 속에 빠진다. 믿음은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양심은 ‘아직 안 되었다’는 것이다. 원죄의 양심은 슬픔만 만들어낸다. 양심은 누림이 아니라 눌림을 준다. 양심으로 살지 말고 오늘부터 믿음으로 살자.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다 해결하셨으니 나는 믿기만 할 것이다.” 그 길을 선택하기를 축복한다.
→ 간곡한 믿음의 기도는 기적을 일으킨다. 회당장 야이로가 간곡한 기도를 드렸다.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된다는 믿음을 가지는 간곡함이 있었다.
마가복음 5장 23절,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내 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죽은 자가 살아나면 또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구원받으면 살 뿐 아니라 영원히 산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다.’ 예수님 당신을 ‘에고에이미’라고 말씀하셨다.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는 부활이다. 그래서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구원은 믿는 것이다. 믿지 않는 구원은 양심으로만 호소할 뿐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죽는 게 아니라, 잠시 자다가 영원한 나라, 영원한 낙원, 영원한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 영광 속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다. 마가복음 5장 39절,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기독교인들은 죽는 게 아니다. 잠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일등급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잠자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가 손을 만져주시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믿음이 생기면 죽는 게 아니라 잠드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인이다. 일등급 제자인 베드로도 다비다가 죽었을 때 예수님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 예수님이 자는 자의 손을 붙잡고 영원한 낙원으로 데려가신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아버지의 나라에 올 자가 없음이니라. 말씀의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그 말씀대로 성취시키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놓치지 말고 이 구원을 믿는 자가 되길 바란다.
“내가 불속에서 타죽어도 이미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내가 사자 굴에서 찢어 갈김을 당해도 이미 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자 굴에서 건져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구원받았으니 괜찮다!” 형식적 믿음 아닌 진짜 믿음을 갖기를 축복한다. 인간의 양심은 육으로 살도록 호소한다. 그러나 믿음은 영으로 살게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 영의 생각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준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다. ‘쿵!’하고 넘어져도 그분이 내 손을 잡아주신다. 자빠지고 넘어져도 일으켜 세우신다. 죽었어도 나를 잔다고 명령하셨다. 내가 지금 병들어 잠들어도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 일어난다. 먹을 것도 그분이 주라 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양심의 호소대로 살지 말고, 믿기만 하자. 그러면 살아나고 일어난다. 그게 “달리다쿰”이다
하나님은 겟세마네 골고다 언덕에서 독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셨다. ‘겟세마네’란 말은 그곳에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름 짜듯이 예수님의 온 몸을 짜서 모든 물과 피를 이 땅에 쏟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셨다.
그래서 양심이 호소하는 말을 하지 말고 영에서 모든 문제, 끝이라고 선포하자. 그러면 모든 질병은 치유 된다.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지어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대로 오시고,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우리 몸에 인 쳐 주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너도 나도 제자 되자!’ 모든 관계를 살리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 믿음의 말을 하면 듣는 사람까지 살아난다. 반면에 양심이 호소하는 대로 살면 의심, 불신앙, 불순종뿐이다. 왜냐면 해결된 미래를 못 보기 때문이다. 지금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고 하시는 음성을 못 듣기 때문이다. 그러니 육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자. 두려움으로, 원죄로, 가문의 저주로 인생을 망각하게 만들어 확신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내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모든 흑암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산산이 무너지고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해라!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는가? 마가복음 5장 35절, 죽었으니 포기하라는 것이다. ‘안 된다. 더 이상 이 사람 저 사람 괴롭히지 말고 예수님도 괴롭히지 마라는 것이다. 이게 양심이다. 굉장히 세련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죽은 사람을 포기하라는 말이 뭐 그리 나쁜 말인가?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잔다고 하니까 ‘미친 놈’이라고 양심에서는 말한다. ‘어떻게 죽은 자를 또 살려? 교만한 놈.
아주 저놈은 사기꾼 중에 사기꾼이니 죽일 놈이구나.’ 이게 우리의 생각이다. 그게 양심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 우리 구원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지 말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다. 마가복음 5장 36절, 나는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체험했다. 내 양심은 병원을 의지하고, 의사를 의지하고, 약을 의지하고 호소한다. 그래서인지 뼈와 신경에 관련된 유튜브에 거의 구독이 되어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못 일어나고 그대로 병원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 주 강단 말씀이 제목이 달리다 쿰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기만 해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것을 고백하는 7초를 통해 기적을 체험했다. 7초 숨을 들이마시며 부르고 선포하기를 2시간 정도를 했더니 일어나게 되었다.
→ 부정적인 말들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직, 유일성으로 그리스도하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스도로 바꾸는 힘이 생겼다. 절대 불가능을 절대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기에 가능하다. 모든 문제 해결자, 두려워하지 말고 너는 믿기만 해라. 그 분은 큰 분이시다.
“나 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 나는 스스로 계신 너의 하나님이라.” 그 분을 믿는 날이 되기를 축복한다.
원죄를 가진 양심의 호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갈등하게 만든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두려움으로 결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의학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양심은 사는 만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종교에 빠뜨려 봉사로 문제를 해결하게 끌고 간다.
근본 문제 해결자,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는 게 죄다.
자연인들의 본성이 양심이다. 양심이 개인 문제, 사회 문제, 가정 문제, 국가 문제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의 대표인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 속에 죄의 DNA가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빙점’(미후라 아야코 지음)에 나오는 주인공은 어느 날 자기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부터 죄책감과 죄의식에 시달린다. 자신은 살인한 적이 없음에도 죄의식과 죄책감이 그 영혼을 덮어버린다.
→ 반복되는 불신앙과 불순종을 이길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사람은 살게 된다. 제발 양심의 말을 사용하지 말고 로마서 1장 16절의 언어를 사용하자. ‘복음은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 해결자로 믿어야 한다. 모든 문제 해결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게 머물러 계신다! 그래서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17절, 오직 믿음으로 사람이 산다. 복음 속에는 믿으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그분의 계획 따라,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시간표에 따라 모든 의가 계속 나타난다. 그래서 25시, 영원 속에 있기에 믿음에, 믿음에,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이 내 몸에 있기에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나는 예수는 그리스도! 이 땅에서 진정한 의인은 양심을 지키는 게 아니라 믿는 자다.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나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시켰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전도는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 되는 말을 하면 전도자가 될 수 없다. 이미 되어져 있는데 안 믿기에 아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회당장 야이로는 믿었기에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행동과 언어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간곡한 믿음이 있기를 축복한다.
→ 사탄의 유혹을 받으면 범죄자가 되어 후회한다. 사람이 유혹받는 순간 ‘이 말 안 할 걸’하고 후회한다. ‘늘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깨어 뱀의 머리를 깨뜨려라! 이 비밀을 가지면 행복해지고 멋스러워지고 어떤 것도 다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머문다.
오늘날 교회들이 사탄의 유혹에 의하여 늘 반복적으로 후회하고 회개한다. 그게 99.9% 바리새인 교회인 것이다.
0.1%의 교회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도전이 너에게 시작된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늘 후회와 회개만 일삼는 삶이 반복되면 범죄자가 된 것이다. 로마서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
후회와 회개를 반복하는 인생으로 살지 않도록 예수님이 끝내놓으셨다. 그래서 사탄에게 절대 종노릇하지 말고 왕 노릇 해라! 뱀의 머리를 깨뜨리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노릇 한다.
늘 반복하는 범죄자는 자신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거룩한 가면을 쓰고 연약한 자아를 부추겨, 합리화의 옷을 입을 뿐이다. “너는 연약하고 못난 존재야!”이런 말만 한다. “실패만 반복하여 소망이 없는 존재야.” “너 같은 인간은 하나님이 이제 받아주시지 않아.” 자신이 범죄한 이유를 원망과 불평으로 내뱉는다. 오늘 그런 것이 솟구치거든 고백하자. ‘달리다 쿰!’ 넘어져도 괜찮다, 자빠져도 괜찮다, 죽어도 괜찮다. 그 분이 내 손 잡아주시며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 인간의 희망과 믿음과 구원은, 오직 창세기 3장 15절로 출발할 때 생기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창세기 3장 15절로 지어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로 세워지지 않은 교회들은 예레미야, 율법주의, 박애주의, 신비주의에 빠져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로 세워진 교회들에게 주님이 물으신다. “나를 따라오라는 메시지를 듣고 순복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20절,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다. 창세기 3장 15절, 주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제자로 부르지 않으신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다리는 제자’를 찾으러 가신다. “오시겠다고 하신 메시아, 그리스도가 당신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이름을 명확하게 아신다. “너는 복의 근원이라.” 창세기 3장 15절을 가져야 복의 근원이라는 말씀이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이미 하늘 문을 여시고 창조주 하나님이 너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고백하게 한 것임을 말씀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은, 18절, 내 교회를 세우리니. ‘너는 이제 시몬,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반석이 되었다. 음부의 권세가 너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 시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줄 것이다. 보좌에 흐르는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축복을 줄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알았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할 때마다 풀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묶으면 묶일 것이다.’ 이게 교회다. 교회를 우습게보지 말고 교회에 뿌리내리길 바란다. 다른 교회는 잘 모르지만 예수사랑교회는 복음의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교회다.
→ 우리는 ‘남은 자’, ‘순례자’, ‘정복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직업’을 주셨다.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파수꾼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그리스도의 망대가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진 자니, 인생 살아가는 여정 속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이 삶 속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세계 복음화의 정복자’가 되었기에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서밋’이 되었다. 더 이상 연약하고 못난 존재라며 자신을 짓누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너와 항상 함께 계심을 고백하자.
→ 하나님의 언약은 창세기 3장 15절뿐이다. 그 언약을 잡았느냐 무시했느냐,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내용이 성경전체 기록이다.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을 받은 자는 무한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성취시켜 간다. 응답 속에 있다.
창세기 3장 15절, 알파와 오메가 되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창세기 3장 15절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마가복음 5장 38절,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셨다. 행동하신 것이다. 극 분은 창세기 3장 15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함께 가사,’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어찌하여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잔다.’고. 이렇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우리의 양심은 죽었다고 호소한다.
“아 죽었는데 왜 떠들어? 죽은 사람에게 왜 소망을 두어?’
‘미쳤네. 정신병자네.’
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다. 이렇게 창세기 3장 15절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시다.
그래서 깨우기만 하면 된다. 믿음만 있으면 일어난다! 우리는 오늘 자신을 자꾸 깨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못난 존재라고 자기를 비판하고 원망하지 말고 너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새롭게 도전해라!’
→ 우리의 운명을 잡고 있는 마귀는 혼란스럽게 울게 만든다. 죽은 아이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가!
사탄은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고, 죄책감, 죄의식으로 시달리게 한다.
마가복음 오늘 5장 39절,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혼란스럽게 우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신다. 사람들이 헛소리, 잡소리, 개소리 하면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난을 축복이라고 하고, 죽은 자를 잔다고 하고, 문제는 응답이라고 하는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바꾸는 자, 경쟁자 없는 축복이 있다고 말하면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마가복음 5장 40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있다. 교만한 놈이라고 비웃더라. 죽일 놈, 사이코라고 비웃더라. 모세의 지팡이로 내려치면 반석에서 물이 솟게 될 것이라고 했을 때 광야의 백성들은 미쳤다고 했다. 모세가 뱀에 물린 자들은 놋뱀만 바라보며 살 것이라고 말하자, 믿지 않고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뱀에 물려갖고 죽어 가는데도 장막에서 나와 놋뱀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은 0.1%밖에 안 된다. 강단말씀 제목이라도 기억하자. 받은 말씀을 곱씹어 영향력을 끼치는 메시지를 못 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는 언어를 쓰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양심이 호소하는 말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가면을 쓴 채로 설명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오늘부터 두려워 말고 믿으면 그분의 손이 우리의 손을 잡고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잠만 자고 벌어 놓은 것도 없는데 먹을 것을 주라고까지 하시며 하나님은 사람을 움직이신다. 믿기만 하면 모든 축복이 임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 있을 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달리다 쿰. 예수님이 손을 잡으시는 형통함이 있기를 축복한다.
→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은 살아서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죽은 신을 깨우지 말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길 바란다. 그러면 그 분이 우리의 손을 붙잡을 때 그분의 능력이 시작된다.
얼마 전에 두 손가락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여러 병원을 다녀보고 거머리를 손가락에 얹어 피를 빨게 하면 낫는다고 해서 해 보기도 했다. 붓기는 빠졌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다. 순간, ‘예수님 제 손 한 번만 주물러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한번 주물러 주세요!’라고 믿음으로 기도했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주가 내 손을 잡아주세요.’
그 후에 손가락 통증 때문에 붙였던 테이프를 나도 모르게 안 붙일 만큼 감쪽같이 나았다. 그 분이 내 손을 잡아주셨다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있었는데, 언제 낳았는지도 모르게 나은 것이다.
→ 창세기 3장 15절, 그리스도 없이 인생을 살면 어느 날 흑암 세력에게 덮여 인생이 캄캄해져 비아냥거리고 비웃는 인생이 되고 만다. 울고 떠드는 형편없는 사람들로 전락하여 죽은 시체 앞에 수다꾼들로 변해 있다.
우리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이 눈을 뜨고 있으나 눈이 먼 자들이다. 너희들이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 귀머거리다.’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양심이 호소하는 것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종시키고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면 눈이 거듭나 그분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눈 먼 자가 아니라 그분을 보는 자가 된 것이다.
지금 내 손을 잡아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귀머거리가 아니라 그분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믿기만 하고 일어나 걸어라!
→ 지금 나의 손을 잡고 일어나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 41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니라. 사탄의 함정 속에, 사탄의 올무 속에, 사탄의 틀 속에, 죽음의 세력이 우리의 영혼을 잡았으나, 창세기 3장 15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살아서 행동하시는 분이기에, 언제나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41절을 명확하게 나의 것으로 붙잡고 오늘부터 생명의 주관자, 죽음과 생명을 다스리는 자가 일어나라 하신다!
내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그 분이 지금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
→ 창세기 3장 15절, 우리의 구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절대자, 그리스도는 ‘믿음의 중요성’을 원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강건할지어다.” 이렇게 멋진 나의 구원자, 나의 하나님, 나의 영원한 생명의 주가 계심에도 믿지 못하면 다시 한 번 뱀 대가리를 깨뜨리는 왕 노릇을 하길 축복한다.
창세기 3장 15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귓가에 말씀하신다. 소망을 잃어버리지 마라. 언제나 내가 너를 불렀고, 내가 너를 위하여 갈보리 산에서 피 값을 지불하여 내가 너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너는 소망을 잃어버리지 마라.
사망과 절망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선포하면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다.
창세기 3장 사탄에 의하여 원죄에 빠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고 평화를 원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의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는,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시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 하나님은 연민과 사랑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그 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마침기도
달리다 쿰!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한 주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 후에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탄에 사로잡혀 일평생 죄책감과 죄의식에 양심적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우리를 끊임없이 속이는 사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창세기 3장 15절의 능력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날을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삼위 그리스도의 능력을 언제든지 믿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 이름을 훼방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 몸에 받아들여서,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 이름을 사용하게 하옵소서.
언제나 어떤 자리에 서든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권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언제나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능동,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서 영적 싸움의 전사가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내 손을 잡아주시고 달리다 쿰, 나에게 말씀을 주시고, 나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게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흑암 권세가 오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박되어지고 믿는 믿음의 날이 되게 하옵소서. 나에게 달리다 쿰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약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양심의 호소에 따라 하나님을 의심하여 두려움 속에서 불신앙과 원망의 말만 하며 나 하나도 이기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눌림의 삶에서 빠져나오도록, 예배를 통해 다 이루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회복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내 손을 잡고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음성을 들었다면, 한 주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믿음의 언어로 나를 깨우는 간곡한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계복음화 하는 정복자, 시대를 바꾸는 서밋으로의 새로운 시작과 도전이 일어나고, 내 삶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확신 있게 말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