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행 26:1-12)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예수사랑 모든 성도는 어떤 문제와 실패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2023년을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를 이미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창3:15은 하나님의 절대 목표이기에, 그 속에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보좌의 축복이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역사해가신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영원한 생명이 되었기에 이제는 딱 하나, 용서하면서 2023년을 걸어가면 된다. 사람을 이해하고, 인간관계에 승리하겠다고 결단하면 배은망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살게 된다.
*창3:15, 우리가 가진 이 언약은 알파와 오메가다.
창3:15이 오셨고, 그분이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신 이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예수는 그리스도”다. 모든 교회는 ‘예수’ 만 믿을 뿐이다.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능력과 전도, 기도가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마16:16을 고백했을 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문제를 끝내신 분이 그리스도, 지금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접하는 자 곧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약속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 몸에 충만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약속했다.
본문에 바울은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창3:15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다.”고 메세지 했다. “나같이 극악한 자, 극단주의자, 쓰레기 같은 자가 영광의 하나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래서 이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기에 핍박을 받고 죽음의 문제가 찾아와도 이 복음을 끝까지 전달하겠다”는 자신의 결단을 아그랍바 왕 앞에서 전했다. 바울이 자기 몸에 늘 전도했던 그 메세지가 사람 앞에서 그대로 나온 것이다. “나를 보시오.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유대인과 왕 당신도 알지 않소.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숱한 핍박과 환란, 죽음의 문제 앞에서도 당신들 앞에 담대하게 서 있는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그립바 왕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했다. 2023년, 우리는 정말 부활의 주, 그리스도를 믿고, ‘나는 이제 다르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몸에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주위 사람들의 눈치만 보다가 더 안 믿는 사람이 된다. 영적인 세계인 하나님은 절대 인본주의로 믿어지지 않는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신령과 진리로 믿으라고 하신다. 예배 때 말씀을 정말 믿고 ‘아멘’ 하고 그 말씀이 내 삶에, 내 몸에 성취되기를 진짜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바울과 같이 내 몸에 와야 한다. “당신은 창3:15의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신 것을 믿지 못하는가?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소속된 사람이었지만,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였고, 모독, 핍박했으며, 믿는 사람들의 입을 틀어 헛소리 하게 만들었던 극악무도한 자였다.”
그랬던 자신이 언약의 실체를 보고 신앙생활을 똑바르게 했다는 것을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앞에서 설명해주었다. 혈통이나 인간적 방법으로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닌 인앙(人仰) 이다. 자기 동족, 유대인들은 창3:15, 하나님의 절대목표를 신앙이 아닌 인앙으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언약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게 되었고,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이상한 행동을 저질렀다고 바울은 고백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2년간 어떻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여정에 있었는지 설명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천부장 앞에서 이 복음을 설명했고, 유대인들 앞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는 자신이 창3:15의 실체로 신앙생활로 바꿨다는 것을 고백했고, 이방 사람 벨릭스 총독이나 베스도 총독 앞에 자신이 설 때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해도 창3:15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설명했다고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했다.
부활의 주,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여러 음모와 계략을 가지고 있다는 이 부조리한 현실에 참담함을 느낀다고 바울은 전한다. 사람 몸속에 창3장의 원죄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원죄로 인해 살인의 광기가 온몸을 휘두를 만큼 무시무시한 죄의 권세로 사람들은 장악되어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기 때문에, 그 빛을 받지 않으려고 그리스도를 가진 자를 보면 이상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믿는 척만 할 뿐이지,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는 사람이 없다. 바울은 창3:15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얻게 된 일로 인해 자신이 고소를 당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창3:15 하나님의 절대 목표 속에 있으면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죽이려고 해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절대 보호 속에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도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았다면 바울과 같이 내 몸에 임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멋있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행26:1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바울, 당신이 가진 신앙을 말해보라는 것이다. 바울의 내면이 얼마나 멋있고, 침착하고 온유가 있고 겸손과 인내가 있는지 볼 수 있다. 영적싸움의 비밀은 이렇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다섯 번이나 불려 나가서 똑같은 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바울은 신앙생활이 달랐다. 인앙(人仰)은 결정적 순간에 분노와 혈기, 돌출행위와 발악, 분노,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지만, 신앙은 자기를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왜 그렇게 싸우는가? 왜 그렇게 시험 들고 갈등하고 이간하며 분쟁을 일으키는가? 신앙(信仰)이 아니라, 인앙(人仰)이기 때문이다. 창3:15 여자의 후손 메시아,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았다면 멋있는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우리 몸에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충만” 전도와 선교의 기회를 찾아내야 한다. 행26:7 모든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 창3:15에 소망을 걸고 그 메시아를 기디렸지만, 자신들의 신앙은 탈무드나 교리적 언어로 이 소망에서 너무 멀어져 모세오경이 전통유대 사상으로 전락되는 인앙(人仰)이 되었을 뿐이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인앙(人仰) 생활로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마침내 새로운 변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바울 가슴 속에 있는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의 비밀을 클라이막스처럼 정말 멋있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전도의 기회가 주어진 성령의 역사 앞에 자기에게 와 있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있었다. 요14:26의 하나님이 우리 몸에서 나타나야 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인앙(人仰)이 사라지고 신앙이 오면 우리 몸에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성경 말씀이 우리 삶에 저절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기감정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 이름만 우리 몸에서 나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이뤄지면 요14:27 평안이 우리 몸에 임하게 된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다 이루었다” 우리에게 말씀하셨던 그 평안이 우리에게도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영혼 속에 각인 되어야 한다.
바울은 전도를 누구에게 했는가? 자신에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인앙(人仰)생활을 하면서 또 전도는 남에게만 한다. 그러면서도 남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을 존중하면서 전도는 자신에게 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심령에 메세지가 들어갔다. 아그립바가 돕지 않으면 로마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바울 당신이 항소를 했으니 가이사 황제 앞에 가서 당신이 말하는 유대왕, 만왕의 왕, 창조주 하나님을 가서 한번 말 해보라고 다리를 놓는 역할을 아그립바 왕이 해 준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와 연결된 것이 전도다. 전도는 반드시 울림이 나타난다. 마약을 먹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먹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런 울림이 없는 이유는 인앙(人仰)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 이렇게 생각만 바꿔도 믿어지는 축복이 시작된다. ‘내가’ 교회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니까 믿지 않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교회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만 해도 예배와 기도가 달라진다. 어떤 분이 “목사님, 저는 정말 기도를 못하겠어요” 하길래,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길을 잃어버린 자였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그리스도, 나와 늘 함께하시는 그분 앞에서 기도하면 된다. 그것을 코람데오라고 한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함께한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 내 몸속에 수많은 세상의 풍습, 문화가 너무 들어와 있다.
행26:2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억울하다거나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어오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상한 아그립바 왕인데도 그를 칭찬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당신 앞에도 말하게 되었다고 했다. 행26:6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자신은 말하고 있지만, 행26:9 자신은 원래 나사렛 예수 이름을 대적하는 극악무도한 자, 극단주의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인앙(人仰)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극단주의, 사악한 자, 배은망덕한 자가 되고 변화가 없고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몸에 무시무시한 사악한 영이 있으면 결국 우리 자신을 마25:41, 영영한 불로 끌고간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믿을 때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뀌는데 120년 걸렸고, 모세도 80세에 겨우 신앙생활을 했지만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자기감정이 사라져야 신앙생활이 된다. 자기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다스려야 한다. 그러면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바울 자신도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유대인과 동질성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고 말살하는데 가장 앞장 선 자, 다메섹까지 쫓아 다닐만큼 열정적인 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 ‘나는 이제 다르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아그립바 당신에게도 똑같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 동족이 믿은 그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고 그 부활의 신앙을 분명 가지고 있음에도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실제로 우리에게 보이셨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신앙적인 문제가 찾아오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행26:8 죽음의 문제가 부활의 주 그리스도로 해결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성을 갖게 되었다.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는 다 끝났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살아나신 그 일을 믿으면 우리도 이 속에 동참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고 내 몸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행26:29 “당신도 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말했다.
이방 사람들은 창3:15을 모르고 산 자들이었지만,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창3:15을 소망으로 가진 자였음에도, 정작 이 땅에 오신 창3:15, 메시아, 예수그리스도 그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창17:2~4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렇게 언약을 세워주신 그 하나님이 대대로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창3:15 메시아에 소망을 두고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메시아, 소망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도, 그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하나님을 바울이 드디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게 되었다고 아그립바 왕 앞에 고백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말했던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바울은 확인하게 되었다. 선지자들이 여러 예언으로 기록한 메시아, 부활하신 그 메시아를 자신이 보게 된 것이다. 창3:15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 뱀의 머리를 깨뜨릴 만왕의 왕, 그분이 오실 것을 소망하고 있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자신들의 소망을 십자가에 달려 죽였지만,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면 아그립바 왕 당신도 나와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창3:15이 바로 예수의 사역, 창3:15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 창3:15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부활의 하나님,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자기 감정을 버리지 못하면 신앙이 아니라 인앙(人仰)이다.
자기 감정을 가진 신앙생활은 불신앙 뿐이다. 우리의 감정은 자꾸 버려야 한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를 절대 옳은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을 떠나 형성된 원죄와 가문의 저주, 자범죄는 절대 우리를 길과 진리,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 인앙(人仰)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게 하며, 우리의 심령을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길은 창3:15 하나님의 절대 목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바라던 그 소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성취된 것을 ‘그리스도’ 라고 한다.
우리 감정은 늘 세 가지가 작동될 뿐이다, 마귀의 일, 죄와 사망의 법, 하나님을 만나보려고 육신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다. 요일3:8 마귀의 일이 작동될 때마다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한다. 히2:14~15 우리 몸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해서 우리를 늘 두려움 가운데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혈과 육에 속한 자로 살면 안 된다. 완전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롬8:15 다시는 무서워하는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외치면 된다. 우리 몸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보려고 몸부림치고, 보고 싶어 하는 이상한 신비주의, 샤머니즘적 발작증세를 무너뜨려야 한다. 환상을 보고싶고, 구름 타고 둥둥 떠다니는 예수님을 보고싶어 하는 그런 미신신앙이 작동될 때마다 요14:6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길, 진리, 생명 되신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만난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 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하나님과 동일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과 호흡하고 대화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3 저주가 사라지고, 3 중직이 우리 몸에서 능력으로 계속 유지된다.
그러면 막10:45이 드디어 우리 몸에서 성취된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바로 대속주가 되셨음이니라” 사람을 보면 먼저 섬기려는 종의 모습을 갖게 된다. 바울도 아그립바 왕 앞에까지 다섯 번을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전도 행위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에게 복음을 설명하다가 못 알아들으면 ‘벌써 세 번째다’, ‘이제는 안 간다!’ 하며 온갖 이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교역자에게 끊임없이 오는 시험이 일심 전심 지속으로 다락방하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설명하기를 싫어한다. 배워서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환영해주지 않아도 내 몸에 있는 그리스도를 저 사람에게 전달해서 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면 내가 대속물이 되어도 괜찮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 와 있는 237 디아스포라 그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237디아스포라 미션에 꿈을 꾸고 예언하고 환상을 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육신의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1:8, 내 안에 성령이 임하는 것이다. 행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부활하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만나니까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감정이 나타났다. 이렇게 육신의 생각은 쉽게 벗어지지 않는다. 부활의 주를 만나도 육신적 수준이다. 행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헛소리 잡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언제 변할까, 저 사람을 변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것으로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기준은 전부 틀린 것이다. ‘하나님, 제 남편이 빨리 주께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면 된다. 간단한 문제인데도 자신은 죽지 않고 남에게 핑계를 댄다.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는 방법은 행1:8밖에 없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진짜 권능을 받아버리면 자신의 감정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무익한 것임을 알고 인앙(人仰)이 신앙으로 바뀐다. 진정한 신앙이 될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내 몸에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 부활의 사건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하셨다는 그 성취감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 소망이 성취되었다’ 자신의 간증이 몸에 있어야 한다.
바울과 같이 우리 몸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237 디아스포라, 5천 미종족을 살리는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내 몸에 올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젠 우리 자신의 육신적 감정은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사 참으로 전도와 선교적 기회를 갖고 만나는 모든 생명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불어 넣어주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로 축복해주옵소서. 흑암 속에서도 신앙은 빛으로 역사한다는 그 하나님의 비밀을 오늘 주의 모든 백성들이 받았사오니, 이 흑암 땅에 빛으로 역사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선전하고 비추어주는 그래서 개인과 민족과 국가를 살리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오늘 받은 귀한 백성들에게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다는 믿음으로 언제나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며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충만해지는 역사가 시작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내 내면에 똬리를 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악한 극단주의적인 사고방식들이 우리 몸에서 무너지게 하옵시고, 어떤 오해가 있고 음모가 있고 죽음의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게 하옵소서. 2023년도 절대 하나님의 목표 속에 우리들에게 있으라고 말씀해 주셨사오니, 오직 예수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죽음과 부활과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는 권세를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다는 절대적 믿음 속에 현장에서 우리들이 머무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보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특히 2023년도 우리 산업인들을 마음껏 저들 머리 위에 기름 부어주옵시고, 우리 중직자들이 70인 제자로 지역을 살리고 후대를 살리는 역사가 있게 하옵시며, 우리 목회자들이 지역 사령관들과 함께 그 지역에 만민을 위하여 깃발을 꼽는 안테나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그 지역의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지역의 사령관들을 축복해주옵소서. 또한 2023년도 예비 대학생들을 축복해주옵시고 그들이 지성의 현장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성령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간 기도문
살아계신 하나님, 창세기 3장의 원죄로 인해 교회를 다녀도 예수만 알고, 믿는 척만 하며, 사람을 괴롭히는 사악한 영이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신앙생활을 했던 삶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실체되신 “예수는 그리스도”로 바른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강단 말씀을 통해 아직 가보지 않은 2023년을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알게 하셨기에, 3저주로 작동되는 내 감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제든지 나를 다스려, 임마누엘 축복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도를 호흡처럼 누리는 진정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창세기 3장 15절 하나님의 절대 목표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절대 보호가 있기에, 무모하고 부조리한 현실과 핍박 속에서도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내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부르셨다는 확신 속에 237 디아스포라 미션의 꿈을 꾸고 환상을 보며, 예배와 복음 훈련 속에서 절대 배은망덕하지 않고 용서하는 2023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